3장 주석

 

제3 장 1절-4장 13절: 이집트 탈출.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


3장.


1. 1절-6절: 그리스도와 모세의 비교: 그리스도는 아들, 모세는 가복.


1절: 필자는 독자들을 ꡐ거룩한 형제들ꡑ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세례 때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 것 같다. ꡒ거룩하게 하다, 거룩해지다, 거룩해진 이들, 거룩한 이들ꡓ 등 일련의 낱말들이 신약성에서 어떻게 사용되고 있는가를 확인해 보면 이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ꡒ그러므로ꡓ – 이제까지는 그리스도가 천사들에 비해 우월하고 탁월하다는 것을 입증하려 했다. 이 사실을 근거로(ꡒ그러므로ꡓ) 이제 일차적인 결론을 내리자!: 우리가 고백하는 예수는 사도요 대사제임을 잘 깨닫도록 하라. 이분이 천사들보다 위대하고 탁월한 예수이다. 그분을 사도요 대사제라는 다른 이름으로 고백한다고 해서 그렇게 고백되는 분이 천사들보다 신분이 낮은 분이 아니시다. 바로 이 분이 천사들보다 위대하고 탁월하신 분이다. 일단 예수의 탁월한 지위를 확보했으니 우리는 안심하고 그가 사도요 대사제로서 어떻게 그 구실을 다 했는지를 고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선 예수를 모세와 비교하는 것도 얼마든지 그 타당성을 갖는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왜 ꡒ예수ꡓ인가? 그리스도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그 이유는 히브리서 저자의 대사제관(大司祭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종래의 유다교에서도 사제직을 둘러싼 상상(想像)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사제직은 대부분 하늘에서 수행되는 것으로 생각한 사제직이었다. 우리의 저자는 예수의 대사제직은 바로 이 지상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독특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상상의 사제직을 역사화해서 알아들었다는 말도 된다. 지상 생애 때부터의 대사제이신 분의 이름은 예수 이외의 다른 이름일 수 없다. 이런 의미로 예수를 사도요 대사제로 고백하는 것이 독자들이 속해있던 교회 공동체의 신앙이라는 말도 된다. 여기의 고백은 일종의 명사(動名詞=nomen actionis)이다. 사도라는 예수의 칭호는 신약성서에서 여기밖에 사용되지 않았다. 매우 대담하고도 드문 칭호이다. 대사제 칭호는 이미 위에서 우리가 만난 적이 있다(2, 17). 이 두 칭호가 공동체의 신앙 고백에 포함되어 있었을 가능성을 시인해야 할 것이다.


2절: 우리 필자에 따르면 이 지상 생애의 예수의 기본 자세는 ꡒ충성ꡓ 또는 ꡒ신의ꡓ였다고 한다. 사도 예수가 하느님의 뜻을 밝히는 말씀의 선포자였다면 그의 사도직은 말씀의 심부름으로서 하느님이 맡겨주신 말씀을 충실하게 그리고 에누리없이 선포하는 일이었다. 말씀의 선포는 그러기에 순종과 진실, 신의와 충실의 행동이었다고 한다면 그의 십자가에 이르는 순종은 또한 일종의 행동화한 말씀의 선포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말씀의 선포와 이 말씀의 선포 활동에서 보여준 진실하고 충성스런 자세는 모세와 예수에게 둘 다 공통하는 자세다. 모세의 경우 이 말씀의 선포는 하느님이 모세를 시켜 하신 말씀을 증거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5절). 예수의 말씀의 선포도 여기서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적어도 증언은 예수의 말씀 선포의 중요한 몫을 차지한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모세의 성실한 자세는 어디까지나 증인역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ꡐ시종ꡑ(侍從)으로서의 근무 자세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의 성실한 종사(從事)는 아들로서의 종사라는 것을 곧 이어서 밝혀준다(6절). 종과 아들의 신분상의 차별화를 통해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돋보이려 한다.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집으로 표현하고 모세를 이 집의 종(qeravpwn) 즉 가복(家僕)으로 간주하고 있는 사실에 유의할 것이다: 모세는 집에서 일하고 예수는 집 위에 계시다.  어쩌면 독자들의 공동체도 이런 ꡐ가족 교회ꡑ 또는 일반 가정집에 모이던 ꡐ살림집 교회ꡑ였을 지도 모를 일이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을 하느님의 집이라고 표현한 사례를 찾아보는 것이 이 표현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모세의 가복으로서의 종사는 일종의 봉사 행위였다. 신약의 가족 교회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이른바 지도자들은 집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6절)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종이요 그 가족인 공동체에 대해서는 봉사자에 지나지 않는다.


2a: 필자는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대담하게도 만드는 이와 만들어진 이라는 관계로 파악한다. 언뜻 아들은 아버지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게 하는 시각이요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부자 관계는 이 편지의 전체적인 맥락 안에서 다시 균형을 잡아주어야 제대로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방법론상 아버지 하느님과 아들의 관계를 히브리서 필자는 어떻게 이해하였는가를 하나의 독립된 문제로 검토해 봐야 할 것이다. 과연 그는 성부와 성자의 관계를 후대의 신학 용어를 빌어 말한다면 일종의 입양설적 관계로 파악했는가? 그러나 히브리서의 필자라고 해서 남달리 입양설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대부분의 신약성서의 저자들은 표현 상 입양설주의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3절: 예수와 모세의 둘째 차별화에 기용된 비교는 건물과 그 건물을 지은 건축가의 비교이다. 집과 집을 지은 사람과를 비교할 때 집을 지은 사람이 그 집보다 우월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4절: 건축가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건축가는 여느 집이 아닌, 만물의 건축가이다. 이 가장 탁월한 건축가는 누구인가? 하느님이라고 한다. 최고의 건축가인 하느님의 아들은 그러기에 당연히 그 집 위에, 말하자면, 군림하신다. 그러기에 당연하게도 그는 모세와 같은 종이 아니다.


5절: 모세가 성실한 일꾼이라는 것에 관해서는 이미 위에서 잠시 언급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가 ꡐ온 집안에서ꡑ 성실했다는 표현이다. 필자는 왜 ꡐ온 집안ꡑ이라고 강조하는 것일까?  민수 12, 7(칠십인 역)의 암묵적인 인용에서 그 이유를 찾아낼 수 있다고 하겠다. 민수기의 이 대목에서 말하는 ꡐ온 집안ꡑ은 물론 시나이 광야에 야영하던 이스라엘의 온 부족을 안중에 두고 있는 표현이다. 여기서 ꡐ온 집안ꡑ을 강조한 이유는 아마 모세에게 반기를 들고 그 권위에 도전하던 아아론과 미리암에게 경고하면서 모세의 권위는 이스라엘 부족 일부에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체에게 미치므로 하느님의 집안 이스라엘을 분할하여 소수 부족 분리 주의는 용납되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분리주의에 대한 경고의 일환으로 이 표현을 알아들어야 할 것이다. 또 한가지 유의할 것은, 이스라엘의 온 집안에서 모세 만한 인물이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이라는 것이다. 두 경우 다 모세의 권위와 성실성을 하느님이 보장해주는 대목이기에 모세의 탁월성, 그 무비성(無比性)을 강조하는 대목이다. 그런데 우리 필자는 바로 이런 대목을 그리스도와 비교하는데 암묵적으로 인용함으로써 그리스도의 무비성, 그분의 탁원성은 모세의 그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힘있게 말해주려 한다고 할 것이다. 그의 매우 독창적인 구약성서 이용 방법의 한 구체적인 사례를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6절: 필자는 신자 공동체를 바로 하느님의 새 집안이라고 단정한다. 새로운 이스라엘을 전제하는 표상이다. 그리스도가 이 집 위에 군림하는, 이 새로운 이스라엘의 주님이라는 것은 이미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히브리서의 필자답게 이 하느님 집안이라는 직설법에 조건문을 단다: 이 직설법이 직설법일 수 있으려면 대담하고 자부심을 갖고 희망을 견지해야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의 새 집안, 새로운 이스라엘이 될 수 있다고 못박는다. 




2.  7절-19절. 매우 긴 단락이다. 이 단락은 다시 7-11. 12-14. 15-19로 세분할 수 있다. 첫 단락에서는 시편 94를 인용한다. 둘째 단락에서는 인용된 이 성서 구절을 근거로 훈계 또는 권고의 말을 독자에게 전한다: 한마디로 신앙을 저버려 배교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는 경고요 훈계요 권고 또는 격려의 말이라고 할 것이다. 셋째 단락은 시편 97을 다시 한번 인용하면서 이 경고의 근거를 제시한다.


7-11절: 칠십인 역에 의한 시편 94, 7-11까지의 인용이다. 본문은 한두 군데를 제외하면 칠십인 역을 거의 그대로 따른다.


(1)12-15절: 본격적인 경고 부분이다. 형제들: ꡒ거룩한 형제들ꡓ이라는 호칭이 단순하게 바뀌었다. 여러분 중에 아무도: 공동체의 일부 구성원들에게는 이 경고가 해당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배교는 살아 계신 하느님을 저버리는 짓이다. 신앙을 포기하거나 거부하는 이런 불신의 태도는 악한 마음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고 한다.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마음의 문제이다. ꡒ악한 마음ꡓ이라는 표현은 신약에서 이 대목에만 나온다. 그 반대어 ꡒ선한 마음ꡓ은 루가 8, 15에 나온다. 13절: ꡒ오늘ꡓ이라는 그때까지 날마다 서로 격려하라. 달리 말해 ꡒ오늘ꡓ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때 또는 시간이 계속하는 동안에는 서로 격려하고 서로 경고를 주고받으면서 여러분 중에 아무도 죄의 유혹에 빠져 (마음이) 완고하게 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ꡒ오늘이라고 부를 수 있는 그 시간이 계속하는 동안에는ꡓ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또 반드시 들어야만 각자의 마음을 완고하게 먹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ꡒ오늘ꡓ은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마음가짐을 다듬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라고 할 것이다.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ꡒ오늘ꡓ은 우리가 완성에 도달할 때까지는 언제나 제공되어 있다는 것을 이 아래서 알 수 있을 것이다. 일종의 종말론적 유보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일상의 오늘이 이 특수한 의미의 ꡒ오늘ꡓ이라는 현실과 ꡒ오늘ꡓ이어야 하는 당위는 언제나 절실하게 유효하다. 14절: 따라서 이 ꡐ오늘ꡑ을 진지하게 대할 때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의 동반자라는 기정 사실이 입증된다. 이 결론 역시 사실상 그리스도의 동반자가 되어있다는 현실의 직설법에서 당연히 그리스도의 동반자가 되어야 한다는 당위의 명령법이 연역된다는 논리에 근거한다고 할 것이다. 15절: ꡐ오늘ꡑ이라는 현실과 그 당위를 강조하기 위해서 필자는 다시 한번 시편 94, 7을 인용한다.  반복되는 이 시편 인용은 이어오는 16-19절의 논증에 성서적 기반을 제공하여 그 논증의 타당성을 역설하려 한다.


(2)16-19절: 우리 필자는 이제 방금 인용한 시편 구절을 독자들에 대한 하나의 경고로 적용하기 위해 이 경고의 타당성을 ꡐ오늘ꡑ 이라는 상황에 드리워져 있는 매우 심각한 위기와 관련 지어 정당화한다: 시나이 시대에도 주 하느님을 광야에서 시험하여 그 역정을 도발한 것은 몇몇 사람들의 오만과 객기에 국한하는 것이 아니었다: 에집트에서 나온 사람 모두가 모세에게 반기를 들면서 주 하느님께 대들었다는 것이다.  17절: 그러기에 하느님의 역정과 분노도 40년 동안 몇몇 사람들에게만 국한한 것이 아니었다. 광야에 그 시체가 나뒹굴어 널려진 사람들은 누구나 하느님의 분노를 산 죄인들이었다. 18절: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주님이 맹세한 사람들은 몇몇으로 국한하지 않았다: 순종치 않은 사람들에게는 누구에게나 그런 맹세를 통해 안식을 거부하셨다. 한마디로 광야 세대의 대다수가 ꡐ오늘ꡑ의 심각성을 깨닫지 못하고 주님의 벌을 받아 광야 유랑의 최종 목표인, 가나안 복지에서 누릴 안식을 거절당했던 것이다. 이렇게 ꡐ오늘ꡑ 들려오는 하느님의 말씀 소리를 흘려듣고 벌을 받은 사람들이 몇몇 예외적인 소수에 지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절대 다수가 그랬다는 것은 확실히 ꡐ오늘ꡑ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 하나의  커다란 경고가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대들도 그럴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것이다. 19절: 그러기에 우리도 불신 때문에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라는 이 단락의 결론적인 경고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절실하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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