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 윤리

라. 윤리
히브리서의 윤리관은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의 뒤를 따라 천상 본향을 찾아 길을 걷고 있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그 신원에 그 바탕을 두고, 이 하느님 백성의 많은 구성원들이 지쳐있고 주저앉고 싶은 유혹을 받고있다는 현실을 어떻게든지 극복하려는 노력에서 그 윤곽을 그리고있다고 하겠다. 그의 이런 윤리관은 주로 10장 – 13장에 집중되어있다. 독자 공동체에 요구되는 일차적인 자세가 신앙이라는 사실은 다소 뜻밖이다. 11장에서 신앙의 대선배인 구약의 여려 어른들을 나열하고있는 것도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일종의 시범 사례라고 하겠다. 이들의 신앙이 그리스도적 신앙이냐 하는 질문은 2차적이다. 신앙의 구조가 그제나 이제나 똑같다는 사실을 보여주는데 더 관심을 갖는다. 이 구조의 요소들은 11, 1의 신앙의 정의에 나와있는 대로 ‘히포스타시스'(hypostasis)와 `엘렝코스'(elenchos)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고 보이지 않는 사물의 근거라는 것이다.” 여기 `실상’과 `근거’가 각각 엘렝코스와 히포스타시스를 번역한 말이다. 이 정의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잠시 그 의미를 살펴보기로 한다.
이 정의에 의하면 신앙은 보이지 않는 것과 관련된다: 현재 바라는 것들도 아직은 보이지 않는 것들이다.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객관적 해석이다: 믿음이란 희망하는 것들의 근거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 따라서 인간은 이 근거와 증거에 입각해서 비로소 믿고 희망한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이 경우 믿음의 대상이 이 근거 안에 이미 포함되어 있다고 하겠다. 다른 하나는, 주관적 해석이다: 믿음이란 희망하는 것들을 견지하는 자세 곧 그 희망하는 것들이 꼭 실현되리라는 굳은 믿음이라고 할 것이다(히포스타시스); 믿음은 동시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실재한다는 확신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이 두 가지 해석 중에 어느 것이 필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맞추었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대답하기 매우 어렵다. 둘 중의 하나만을 배타적으로 택일할 수도 있겠고 이 두 가지 해석을 한데 아울러서 타협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후자의 경우, 히포스타시스는 -객관적 의미로 해석하여- `바라는 것들이 실현되리라고 꼭 믿게 해주는 근거’이다; 반면에 엘렝코스는 주관적 의미로 해석하여 ‘보이지는 않지만 반드시 실재하리라는 확신`이라고 알아들을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11, 6은 이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경우라고 하겠다: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당신을 찾는 이들에게 갚아주신다는 것은 믿음의 대상인 동시에 이 믿음의 근거이며(객관적 의미) 이 믿음의 대상이 확실히 그렇다라는 확신 자체이기도 하다. 따라서 11, 1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현(을 믿게 하는) 근거이고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확신입니다.” 이렇게 믿음에는 희망의 요소가 불가결하다는 것이 필자의 확신이다. 그러기에 그는 또한 구약의 여러 선배 어른들을 신앙의 시범 사례로 반복해서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하는 선배들은 하느님의 언약을 신빙성 있다고 받아들임으로써 자신들이 아직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 미래를 향해 방주를 만들고 고향을 떠났으며 에집트를 탈출했던 것이다(11, 7. 8. 27). 이렇게 믿음과 희망은 철저하게 하느님의 말씀에 그 기초를 둔다.
히브리서의 필자는 믿음과 관련하여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지향한다고 강조한다.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보겠다. 하나는, 본디 구원이란 구조상 언약을 믿고 따름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것이기에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을 지향할 수밖에 없다. 언약은 그 내용도 터무니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선험적인 요청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언약을 주시는 분을 신뢰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믿음은 인격적일 수밖에 없고 인격적인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둘은, 아마 이 편지의 독자 공둥체 구성원들 중에는 하느님의 말씀만으로는 더 이상 만족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겠다. 여기에도 물론 원인이 되는 배경이 있었으리라. 그리스인들은 직관과 관조를 듣는 것보다 더 중요시했다고 하겠다. 그런데 우리 필자는 철저하게 하느님의 말씀의 신학자이고 따라서 들음의 중요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고 자기 독자들에게 역설하고 강조해 온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말씀을 듣는 이 (청자[聽者])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말이란 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귀로 듣는 것이다.
말씀을 눈으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이 특별히 시련이 되는 때는 어느 때인가? 아마도 박해 때가 아닌가 싶다. 이런 때일수록 말씀이 현실로 검증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없고 따라서 말씀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필자가 신앙의 증인들 가운데서 특별히 시련을 극복한 수많은 사례들을 다양하게 열거하고 있는 것도 여기에서 해명된다고 하겠다. 아들을 희생으로 바쳐야 했던 아브라함이 그렇고(11, 17) 에집트를 떠나야 했던 모세도 그렇다(11, 26). 그 밖의 익명의 증인들도 마찬가지다(11, 33-38). 어떻게 보면 이 신앙의 증인들이야말로 말씀을 눈에 보이게 실증해주는 분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불 가시(不可視)한 말씀이 이렇게 가시화(可視化하)하는 것이다. 특히 모세의 경우는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훌륭한 모범이 아닐 수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었던 것 같다. 파라오 딸의 아들로서 장래가 약속되어 있던 그가 자기 백성과의 연대성 때문에 이 장래를 포기하고 에집트가 약속하는 일체의 쾌락과 재산도 마다하고 고난과 치욕의 길을 선택한 것은 왜였을까? 믿음 때문이었고 아직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보상 때문이었으며 결국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듯이 인내하였기 때문이었다(11, 23-27). 여기서 모세가 겪은 치욕을 그리스도의 치욕과 동일시한 사실에 유의할 것이다(11, 26). 모세는 그리스도의 고난과 치욕의 예형으로 제시되었고 그런 의미에서만 공동체 구성원들의 시범 사례로 제시된다는 것이다. 해방자와 구원자는 모름지기 자기 백성의 운명에 동참해야 하는 것이다. 박해와 고난을, 가난과 굴욕을 민족과 함께 나누지 않은 지도자는 해방자도 될 수 없고 구원자도 될 수 없다. 같은 맥락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치욕을 함께 나누려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을 것이다.
12장(7.8.9.11)의 소위 `파이데이아'(παιδεια) 개념도 필자의 헬라식 사고방식을 드러낸다. 그는 이 개념으로 하느님의 이를테면 교육이념을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의 파이데이아는 처벌이나 위협이 아니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하나의 이상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스도야말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이상이시다. 고난과 시련은 이 이상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다. 그러나 이 과정은 반드시 거쳐야 한다. 고난이나 불의를 현실적으로 정당화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과 불의를 고난과 시련으로 파악하여 이를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것이다.
제2의 회개는 불가능한가? 6, 4-6을 보면 한 번 신앙을 받아들였다가 떨어져나간 사람들은 다시는 회개하여 신앙인으로서의 옛 지위를 회복할 수 없다는 인상을 받기 쉽다. 이른바 제2의 참회 기회는 두 번 다시없다는 듯이 말이다. 10, 26-31과 12, 12-17도 같은 맥락에 속한다고 하겠다. 우선 지적해야 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탈락’은 결코 도덕적 의미의 `탈선’이 아니라는 것이다. 필자가 말하는 이탈, 탈락, 이반(離叛=παραπεσοντας)이란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이 믿음을 저버린다는 것을 뜻한다. 빛을 거부하고 다시 어둠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뜻한다. 그래서 다시 빛을 받을 가망은 없다는 것이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제사가 결정적인 것처럼 세례의 조명도 결정적이며 따라서 반복이 불가능하다. 둘은, 믿음을 저버린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을 다시 한번 봉헌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요구는 현실적으로 볼 때 -따라서 심리적으로도- 불가능한 요구다. 더구나 신학적-법적으로는 더욱 그렇다. 십자가 희생은 반복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다만 궁금한 것은, 이와 같은 제2의 참회 거부가 법적-제도적으로 굳혀진 교회의 규율을 전제하는 것인 지이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필자는 재참회(再懺悔)를 하나의 권고 사항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 같다. 에사우의 경우를 보더라도 이 재참회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필자는 경고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경솔과 재간으로 저지른 과오 때문에 다시는 되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 떨어지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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