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길을 걷는 하느님 백성
히브리서에 드러나는 교회의 자기 이해는 `길을 걷는 하느님 백성’이라는 말로 가장 적절하게 요약할 수 있겠다. 그리스도인들은, 지난날 모세의 세대가 광야에서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어려운 여행 길, 방랑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천상의 고향을 행해 걷고 있는 하느님 백성이다. 모세의 세대가 교회에 비유될 수 있다면, 광야는 교회가 지금 길을 걷고 있는 이 세상을 상징한다: 이 세상은 우리의 고향이 아니다. 우리가 정착해서 살 수 있는 도시가 아니다. 우리의 본 고향은 우리 앞에 있고 미래에 있다.
구약의 백성과 신약의 백성은 서로 비교되고 유사할 뿐 아니라 어느 의미에서는 하나의 일치를 이루고 통일체를 이룬다고 까지 말할 수 있다. λαος 곧 `백성’이라는 개념을 구약과 신약의 두 백성에게 두루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둘을 이어주는 고리는 바로 `길을 걷고 있는 중’이라는, 이 두 백성의 `거닐음’에 있다고 할 것이다. 바로 이 `길을 걷고 있다가’ 불순종했던 구약의 세대 대부분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지 않았는가!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 것이다. 그러기에 `그들은 결코 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하느님의 맹세는 역설적으로 언젠가는 기필코 `안식에 들어갈 날이 있으리라’는 것을 다짐하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또한 시편 95의 말씀대로 신약의 백성인 교회도 `오늘 주님의 말씀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아야’ 한다(3, 7). 왜냐하면 주님께서 새로 정해주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려주시는 `오늘’이야말로 구원의 선물을 얻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이고 참회를 독촉하는 마지막 유예기간이기 때문이다(12, 17 참조).
구약과 신약의 두 백성 사이의 일치와 통일 그리고 상호 연속성 못지 않게 강조해야 하는 것이 바로 단속성이다. 그제와 이제, 어제와 오늘은 단순한 시간상의 선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제와 어제 하느님의 백성 중에 끝까지 충실하게 남았던 이들은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는 천상 성소 – 아니 장막이라고 해야 옳다! -, 천상 본향에 들어갈 수 있는, 새로운 길, 살아있는 길을 터 주셨다. 그리스도는 바로 이 `길’ 자체이시다. 그전까지는 그 길이 트여있지 않았다(9, 8). 따라서 구약과 신약의 본질적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다. 구약의 백성 중에 끝까지 충실하게 남아있던 이들도 가나안 땅, 약속의 땅에 정착은 할 수 있었는지 몰라도 하느님의 `안식’에 들어가지는 못했다는 것이 우리 히브리서 필자의 확신임에 틀림없다. 이들마저 우리 신약의 백성 없이는 그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것도 그의 확신이다. 우리는 이 구약과 신약의 관계를 연속성과 단속성의 관계로 파악해서 좋을 것이다. 이런 긴장을 유지하는 가운데 우리는 필자와 함께 신약의 하느님 백성을 구약의 하느님 백성을 대상으로 하는 여러 가지 개념으로 표현하고 적용할 수 있다:
– 백성 또는 하느님의 백성: 모두 12번: 2, 17; 4, 9; 5, 3; 7, 5; 7, 11. 27; 8,10; 9, 7. 19; 10,30; 11,25; 13, 12.
– 집 또는 집안: 모두 9번: 3, 2-6을 특히 참조하라!
– (교회)공동체: 모두 2번: 2, 12; 12, 23. (모임 또는 집회라는 뜻으로도 알아들을 수 있다.)
-아브라함의 후손들: 2, 16. 하느님 백성이 된 모든 사람들을 이렇게 일컫는다.
이와 같은 연속성과 단속성의 혼재(混在)는 `하느님의 말씀하심’의 신학을 다룰 때도 익히 관찰되던 현상이다.
교회의 자기 이해는 흔히 교훈적인 맥락과 문체를 통하여 표출된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모세의 세대가 자주 신약의 교회를 경고하기 위한 예표로 기용되기 때문이다. 그런 경고를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계기도 분명히 있었다: 신자들의 무관심(2, 1; 5, 11), 신앙에 대한 무지(5, 12-6, 3)와 미숙(같은 곳), 이단의 엄습(掩襲)(13, 9)과 같은, 당시 교회가 처해있던 정황이 이런 경고를 요구하는 계기들로 작용한 것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박해와 시련은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부로부터 오는 시련에 시달리게 되었는데 그래서야 되겠는가? 하는 것이 필자의 간곡한 호소조의 질문이라고 할 것이다. 구체적 상황이야 물론 우리로서는 잘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매우 유감스럽게도 우려할 만한 조짐들이 나타난 것이다. 박해와 같은 어려운 고비를 넘긴 이 마당에도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이 공동체에게는 여전히 아직 가시화하지 않았고 그래서 비현실적으로 여겨졌던 것일까? 그래서 공동체의 일부 신자들은 스스로 의문을 제기한 것이었을까?: 박해라는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도 신앙을 견지(堅持)할 만한 보람과 가치는 과연 있는 것일까? 이런 회의와 의문에 시달리는 교회라면 당연히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하나는, 교회의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이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판단될 때, 우선 그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 진솔한 진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문제를 덮어둔다고 해서 그것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편,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만큼 무르익을 때까지 기다릴 줄 하는 지혜와 인내도 못지 않게 필요하다; 둘은, 신앙의 회의는 흔히 교회에 대한 회의에서 퇴영적으로 발전해 나온 결과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교회에는 우리 자신도 포함시켜야 한다. 시체말로 `우리가 어디 남인가?’ 그러나 책임 소재가 흐려진다면 그 또한 바람직하지 못하다. 교회 전체가 집단적 죄책감에 우울해져서는 안되겠기 때문이다. 히브리서의 독자 공동체가 이런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면 문제는 심각했을 것이다. 필자는 아마 이 심각성을 통감하고 이 공동체를 위해서 무엇인가 나무라고 동시에 그 용기를 북돋아줘야 할 절박한 심정에서 집필을 결심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집필 동기라고 하겠다.
`임박 대기'(臨迫待期)라는 화두(話頭)로 공동체를 재촉하고 긴장을 풀지 않도록 죄는 일은 없었던 듯 하다. 10, 25. 37등과 같은 대목은 임박대기를 말해주는 본문이기는 하지만 37-8절은 70인역 이사 26, 20과 하바 2, 3의 혼합인용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재림의 임박성을 강조하기보다는, 재림이 확실하고 무한정 지연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과 신뢰를 드러낸다고 하겠다. `종말 임박’이라는 무기(?)로 공동체를 `협박’할 수야 없는 게 아닌가?! 마치 `지옥 간다’는 말로 겁을 줄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재림, 더 정확히는, 재출현에 대해서도 단 한번 언급하고 있을 뿐이다. 신앙 상으로 침체되어 있는 교회에 필자가 제시하는 귀감과 전범이 있다면 그것은 곧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요 그분이 걸어가신 길이다. 공동체도 이 길을 자기가 걸어가야 할 길로 알고 그 길을 따라 걷기만 하면 틀림없이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격려하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비하와 현양의 과정을 거치셨다. 이것은 공동체가 드리는 그리스도론적 신앙 고백이다. 필자는 이 신앙 고백을 교회론적-실천적으로 완전히 재해석하여 공동체를 격려한다.
우리는 흔히 이승과 저승, 현세와 내세를 말한다. 이 말들은 공간적 개념을 나타내는가 아니면 시간적 개념을 나타내는가? `요다음에’ 있을 세상이라는 표상의 측면에서는 공간과 시간을 동시에 나타내지만 어감 상으로는 `공간적’ 개념에 더 가깝다고 하겠다.. `이승’과 `저승’의 우리말 어원이 무엇인지는 잘 알 수 없다. `승’을 `생'(生)의 변음(變音, 또는 전음[轉音])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불교 용어 `승'(乘)에서 유래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생’이 세상 `살이’에 더 역점을 둔다면, `승’은 차안에서 피안으로 `옮겨감’을 더 강조한다고 할까… 윤회설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는 경우다.
히브리서의 필자도 그런 편이다. 그의 종말론적 개념은 저승- 곧 피안-지향적이기 때문이다. `지금 즉시’ 또는 `머지 않은 장래’에 교회는 결정적으로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차라리 `틀림없이, 확실하게’ 내세의 목적지에 도달하리라고 말한다. 임박성보다는 확실성을 더 강조하는 편이다. 시간적 개념보다는 공간적 개념이 종말론적 표상의 전면에 나타나는 맥락은 역시 현재적-종말론의 맥락이라고 할 것이다(가령 요한 복음서와 에페 2, 2 참조!). 그렇다면 우리 히브리서의 필자는 현재적 종말론자라는 결론도 언뜻 타당하게 보인다. 그러나 우리의 저자는 구원을 이미 하나의 기정 사실로, 하나의 현실로 향유하고 있다는 말은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오히려 천상의 궁극적 목표 달성이 위험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판단이 집필하게된 계기로 작용한 것 같다.
아무튼 우리 필자에게 내세와 저승, 하느님의 도성과 천상 도시야말로 우리의 안전을 보장해주는 은신처이며 바로 우리의 구원이 있는 곳이다. 이런 보호와 안전과 구원을 제공할 수 있기는 내세와 천상과 그 도시가 영속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하늘과 땅을 비롯해 이 세상과 우주는 흔들리고 불안하다. 언젠가는 살아져 없어질 것이다. 한낱 무상한 피조물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의인들을 위해 마련해 두신 천상 도시는 불변의 도시오 변화와 파멸에도 끄덕 없는 도성이다(2, 26; 11, 10.16). 이 우주적 규모의 대재난에서 마지막으로 구원을 받으려면 바로 이 세상에서 탈출해야 한다(exodus). 이로써 우리는 에집트 탈출이라는 구원 역사상 가장 결정적인 사건에 접하게 된다. 이 탈출은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목표로 한다. 그래서 필자는, 영원, 영원한 구원(5, 9), 영원한 구속(9, 12), 영원한 상속(9, 15), 영원한 계약(13, 20), 때로는 영원한 심판(6, 2) 등의 범주들을 다양하게 사용한다.
다소 현실 도피적이고 현세 도피적인 그의 전망에서 볼 때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이 현세에서 자신의 실존을 어떻게 윤리적으로 실현해 갈 수 있는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하느님의 백성은 이 현세에서 지금 나그네길을 걷고 있다. 이 여정의 마지막 목표는 물론 하느님이 주시는 안식일 휴식이다(4, 9). 그것은 동시에 하느님의 휴식이기도 하다. 종말이 하느님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종말론은 궁극적으로 신론 안에 통합된다고 하겠고 또 그래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을 도구로 삼아 우리의 종말론적 완성과 구원을 획득한 다음에는, 마치 인공 위성의 로켓처럼 떼버려도 무방한 것으로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하느님은 목표이시지 도구나 수단이나 방편이 아니다. 그리고 그분이 곧 우리의 구원이시고 행복이시고 완성이시다. 그러기에 이 휴식은 인생이라는 힘든 여정 끝에 이제 푹 쉬라고 하는, 하나의 `비교’ 이상의 것을 의미한다. 창조주 하느님의 흉내내기만도 아니고(4, 10) 우리가 실적과 공로를 세워 벌어들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안식일 휴식에 참여한다는 뜻에서만 의미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은총의 선물로 베풀어지는 것이지 인간이 제 힘으로 벌어들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약속은 하느님의 선한 자유 의지에서 나왔다. 이 자유가 없다면 약속도 있을 수 없다. 자유는 은총이다.
하느님의 휴식을 너무 강조하는 나머지 다른 종말론적 표상들, 가령 천상 성소, 천상 도시, 천상 고향(2, 5; 11, 10등. 14. 16; 12, 22. 28; 13, 14) 따위 표상들은 다소 빛을 잃을 정도라고 하겠다. 휴식이 하느님과 함께 하는 휴식일진대, 그리스도와의 만남, 그분과의 일치와 친교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하느님의 휴식만이 전부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지낼 수 있는 자리는 없다는 말인가? 이런 의문이 제기될 만큼 이 편지의 탁월한 신론적 특징은 단연 압도적이라고 할만 하다.
개인 종말론에 대한 관심도 조금 엿보인다. 사람은 각자 죽은 다음 심판을 받는다고 한다. 죽은 다음 즉시 사심판(私審判)을 받는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일까?(9, 27등) 이 말에 이어오는 9, 28절의 말씀은 27절과 어떻게 연결해서 알아들어야 하는가? 조심스럽지만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겠다: 사람은 누구나 한 번은 죽어야 한다. 기왕 죽을 바에는 그리스도를 따라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예수 추종의 결정적 계기로 활용함으로써 이 다음 그분이 다시 나타나실 때 우리도 죄 없이 나타날 수 있도록 하자는 뜻이겠다. 이것이 그분의 속죄사에 참여함으로써 얻게될 우리 죽음의 의미라고 할 수 있겠다.
히브리서에는 교회의 구조, 직제, 실생활 등에 관해서 전해진 것이 별로 없다. 물론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책임을 맡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있다. 편지의 결미에 해당하는 13, 7. 17. 24에서는 이 책임자들을 일러 `헤구메노이'(ηυγουμενοι)라고 부른다. 지도자라는 뜻이다. 그들의 임무는 주로 선포와 공동체 운영이었던 것 같다. `초보적 교리’의 수준은 가급적이면 빨리 넘어서야 한다는 충고는(6, 1등) 정규적 교리강좌가 있었음을 전제한다. 이 교리 강좌는 물론 영세 예비자 교리로 시작했을 것이다. 또 세례는 `조명'(照明)이라는 일종의 은유로 그 의미를 밝혀주기도 한다(6, 4). 또 10, 22의 “몸을 씻어 마음을 깨끗이 한다”는 언급도 세례성사로 죄를 깨끗이 씻는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성찬례 곧 성체 성사에 관한 교리나 전례에 대해서 히브리서는 상대적으로 과묵한 편이라고 하겠다. 흔히 13, 10이 성찬례에 관련되는 구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역점이 구약과 신약의 제의 상(祭儀上)의 차별성에 있기 때문에 단언하기는 어렵다. 히브리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약과 신약을 대비하는 또 다른 예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아무래도 히브리서의 중심은 그리스도론에 있다고 하겠다. 그리스도께서 단 한번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바치셨다는 사실이 필자에게 가장 중요했다. 일체의 구원이 바로 여기에서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