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중동을 여행하노라면
사막이 자아내는 신비적인 매력에 사로 잡히곤 했습니다.
1983년에 약 석 달 동안 예루살렘에서 성서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매주 야외연구여행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때 이틀 동안 네겝사막에서 지낸 적이 있습니다.
해질 무렵 색색으로 변해 가는 사막의 아름다움,
이것이 지금도 가장 인상에 남아 있습니다.
모래위해 침낭을 깔고 드러누운 채 쳐다보는 하늘에 가득한 별들은
공기가 건조한 탓인 마치 손에 잡힐 둣 가까이서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물론 한 여행자의 낭만적 감상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사막에는 엄연히 죽음의 일면도 있습니다.
모래바람에 굶주림과 목마름, 뱀과 전갈의 위험에 도사리고 있습니다.
풍요와는 정반대의 세상이 사막을 지나다니는 사람을 언제나 기다리고 있습니다.
에집트 신화에는
풍요의 신인 오시리스와 사막의 신인 셋과의 사이에
언제나 적대관계가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생명과 죽음의 싸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야말로 이러한 사막의 무서움을 체험해온 민족입니다.
“우리는 호렙을 떠나 너희가 본 저 끝없고 무서운 광야를 지나서
우리 하느님 야훼께서 분부하신 대로 아모리인들이 사는
산악지대로 들어서는 길목,
카데스바르네아에 이르렀다”(신명1,19)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탈출기에 적혀 있듯이 사막을 지나간 40년 동안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있어 고통과 시련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고행에 의하여 정화되기도 하였습니다.
호세아는 시련과 정화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녀(이스라엘)를 꾀어내어
빈들로 나가 사랑을 속삭여 주리라,
거기에 포도원을 마련해주고 아골(고뇌의) 골짜기를
희망의 문으로 바꾸어 주리라”(2,16-17)고 예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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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창조를 나타내는 중요한 말 두 마디가 있습니다.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그것입니다.
카오스는 천지 창조 이전의 혼돈 상태를,
코스모스는 질서 정연한 우주를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창조는 카오스를 코스모스로 바꾸어 놓는 일입니다.
창세기는”한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내셨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물 위에 하느님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1,1-2)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런의미에서 사막은 ‘카오스의 상징’ 이 되었습니다.
“내가 보니 땅은 혼돈과 불모요 하늘에는 빛이 사라졌다.
내가 보니 산은 떨고 있고 모든 언덕은 다 흔들리고 있다.
내가 보니 사람도 없고 하늘의 새들도 모두 도망가 버렸다.
내가 보니 옥토는 사막이 되고 모든 성읍은 허물어졌다.
주님 앞에서 주님의 열화 같은 분노 앞에서 그렇게 되었다.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온 땅이 폐허가 되겠지만 아직 끝장은 내지 않겠다'”(예레4,23-27)고
하신 대로,
하느님께서 내리신 벌의 무서운 힘은
코스모스를 도로 카오스로 돌려놓는 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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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대중신앙에는 흥미로운 신심도 있었습니다.
이에 따르면 사막의 주인은 아자젤이라는 악령이었습니다.
레위기에는
“아자젤의 몫으로 뽑힌 숫염소는
산 채로 야훼 앞에 세워 두었다가 속죄물로 삼아
빈 들에 있는 아자젤에게 보내야 한다”(16,10)는 규정이 나옵니다.
하느님께서는 코스모스(질서)를 카오스(혼돈)로 돌려놓으실 수 있으시듯이.
키오스를 코스모스로 되돌려놓기도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원의 의미입니다.
이사야서에는 “메마른 땅과 사막아, 기뻐하여라,
황무지야, 네 기쁨을 꽃피워라”(35,1)하였고,
이어서”그때에 절름발이는 사슴처럼 기뻐 뛰며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
사막에 샘이 터지고 황무지에 냇물이 흐르리라.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숲이 되고 메마른 곳은 샘터가 되면
승냥이가 살던 곳에 갈대와 왕골이 무성하리라”(35,6-7)고 기약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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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는 또한 “한 소리 있어 외친다. ‘야훼께서 오신다.
사막에 길을 내어라 우리의 하느님께서 오신다.
벌판에 큰길을 훤히 닦아라, 모든 골짜기를 메우고, 산과 언덕을 깎아내려라,
절벽은 평지를 만들고, 비탈진 산골길은 넓혀라.
야훼의 영광이 나타나리니 모든 사람이 그 영화를 뵈리라.
야훼께서 친히 이렇게 약속하셨다'”(40,3-5)고 말합니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의 사명을 예언한 대목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너희는 주님의 길을 닦고 그의 길을 고르게 하여라” 하고
회개의 세례를 선언하면서, 낙타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두르고
메뚜기와 들꿀을 먹으며 사막에 살던 수행자였습니다(마르 1,3-6).
그리고 예수님 자신은
선조들이 홍해를 가른 물벽 가운데를 지나면서
에집트로부터 탈출한 것과 마찬가지로 요르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고,
또, 선조들이 사십 년 동안 사막을 헤맨 것과 마찬가지로
사십 일 동안 광야에서 악마(아자젤?)의 유혹을 받고 이를 물리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이제 곧 시작하실 선교생활을 위한 시련을 거쳐
정화되셨던 것입니다.(마태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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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공인한 미라노 칙령(313년)이후
그다지 순수했다고 할 수 없는 동기로 많은 사람이 영세를 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교신앙은 종전의 순교시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식어갔습니다.
이럴 무렵 열심한 신앙생활을 그리워하던 초대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사막으로 숨어들어 엄한 고행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분들이 후대에’사막 교부’로 부리게 되었고
그중에서도 성 안토니오(252-356)가 유명합니다.
성 아타나시오(296-373)가 쓴 성 안토니오 전기에 의하면
사막에서 대적하여 싸워야 하는 악마의 유혹은 정말 대단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성 파코미오(290-346)는
이런 사막 교부들을 한데 모아 처음으로 공동체를 이루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그리스도교 수도원의 기원입니다.
이들 수도자와 열심한 신자들의 영성을 살펴보면
사막은 오늘도 ‘시련과 정화의 상징입니다.
정화의 사막을 거치지 않고서는 하느님과의 일치에 이를 수 없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