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소금

소금은 간을 본다는 말에도 나타나듯이 음식의 맛을 맞추는 기본입니다
소금에 절여 음식을 보존하기도 하고 때로는 소금이 정화하는 뜻도 가집니다.
소금 없이는 인간이 살 수없습니다.

우리네 삶에서는
소금이 부정을 씻는다는 의미가 특히 강조되어
초상집에서 돌아오면 소금을 뿌려 정화를 한 다음에야 집에 들어가곤 합니다.
일본에서는 씨름(스모)꾼이 정화의 소금을 한줌 휙 뿌리고 나서
씨름판에 오르는 모습을 텔레비전에서도 흔히 봅니다.

그리스도교에서도 소금에는 ‘정화’의 의미가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는
세례 때에 영세자의 입에 소금을 조금 넣었습니다.

에제키엘서에
“네가 나던 일을 말하자면, 네가 세상에 떨어지던 날
탯줄을 잘라 줄 사람도 없었고 목욕시켜 줄사람도 없었으며
소금을 문질러 줄 사람도 없었고 포대기에 싸 줄 사람도 없었다”(16,4)고 한 것으로 미루어
옛날에는 갓 태어난 아기를 소금으로 정화했던 모양입니다.

열왕기 하권에는
“성읍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말하였다.
‘스승께서도 보시다시피 저희 성읍은 매우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이 나빠서 이 고장에서는 자식을 낳을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듣고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담아 오라고 하였다.
그들이 그릇에 소금을 담아 가져오자,
엘리사는 샘터에 가서 그 소금을 뿌리며 말하였다.
‘야훼께서 말씀하신다.
내가 이 물을 정하게 하리라,
이제 다시는 사람들이 이 물 때문에 죽거나 유산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그물은 엘리사가 말한 대로 정하여져서 오늘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2,19-22).
이것은 소금을 가지고 물을 정화하는 관습이 성서의 세계에 이미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까지는 세례수와 성수에 소금을 넣었습니다.
물이 썩지 않도록 하는 배려에서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소금이 정화의 힘을 지녔다는 의식이 모처럼 있느니만큼
세례 때에 성수 축별에 소금을 쓰지 않게 되었다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토착화에 역행하는 방향으로 간 느낌이 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만일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만들겠는냐?
그런 소금은 아무데도 쓸데없어 밖에 내버려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마태오5장 13절에 나오는 유명한 말씀입니다.
신자를 소금에 비유하여 이 세상에 모범이 되는 삶을 살 줄 모르면 안된다는 교훈입니다.

이 가르침에 있어 한가지 알아듣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는다”는 데가 그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시대에는 실제로 소금기가 없는 소금이 있었습니다.
정제 기술이 미숙했기 때문에
거기 섞인 다른 광물 따위나 모래만이 남고 염분은 녹아서 다 빠져나간
‘소금’이라는것이 과연 있어서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었습니다.

욥기에는 “소금을 치지않고 싱거운 것을 먹겠는가.
멀건 흰죽에 무슨 맛이 있겠는가”(6,6) 하는 말이 있고,
레위기에는 “너희가 드리는 곡식예물에는 반드시 소금을 쳐야 한다.
너희 하느님과 계약을 맺을 때 너희 곡식예물에 치는 소금이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
너희가 바치는 모든 예물에 소금을 쳐야 한다(2,13)고 하였습니다.

에제키엘서도
“사제들은 번제물 위에 소금을 뿌려 야훼께 바쳐야 한다”(43,24)고 명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역시 소금기 없는 음식은 별로 입에 받지 않으셨던 모양입니다.

아울러 제물 위에 뿌리는 소금에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밎는 계약의 의미도 있었습니다.
같은 상에 앉아 음식(맛,소금)을 나누는 것은 서로가 하나로 이어짐을 뜻합니다.

말이 나온 김에, 로마 시대에는 병정에게 소금으로 보수 지불했습니다.
그것을 ‘쌀라리움'(소금)이라고 일컬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네 말로도 월급쟁이 를 ‘
‘샐러리맨’ 즉’소금을 타는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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