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서두에 “하느님께서 빛이 생겨라’하시자 빛이 생겨났다”(1,3)고 씌어 있습니다.
제가 아직 성서의 깊은 뜻을 깨치지 못했던 어린 시절,
첫날에 햇빛을 창조하신 하느님께서
나흘째가 돼서야 일원성신을 만드셨다(1,14-17)니 참 이상하다고 저는 느꼈습니다.
빛은 태양에서 오는 거라고만 단순히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서 전체를 정독하고 공부함에 따라
성서가 말하는 빛에는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성서 안의 빛이란 그저 눈에 보이는 물질적인 빛이 아니라 정신적인 빛인 것입니다.
우선 하느님의 속성이 빛이어서 ‘하느님 자신이 빛’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성서에서는 그 빛을 하느님의 영광이라고도 일컫습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빛은 행복, 사랑 ,평안, 질서 등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요소를 두루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 반대는 어둠과 죄악 등 온갖 부정적인 것들입니다.
이것을 동양적으로 말하자면’음양’이 되겠지요.
음은 어둠에, 양은 빛에 해당하는 것이겠습니다.
그리스철학에서 카오스와 코스모스가 되겠고,
천지창조 이전의 혼돈이라는 어둠의 카오스 상태로부터
질서정연한 빛의 코스모스상태를 이루어 놓는 것을 창조라고 부릅니다.
하느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의 첫째 본분은
하느님과 더불어 카오스를 코스모스로 만드는,
즉 이세상의 어둠을 밝히는 일이라 하겠습니다.
요한은 서두에 인용한 창세기의 “빛이 있어라”를 이처럼 바꾸어 말했습니다.
“한처음, 천지가 창조되기 전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말씀 안에 생명이 있었다.
생명은 인간을 비추는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어둠은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요한 1,1-5).
이렇듯’빛’이라는 생각은 유대교나 그리스도교뿐 아니라 모든 종교에 있습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 후광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 성인들,
다양한 제신과 부처님의 그림이나 조각에는 후광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밝다’, ‘밝음’ 따위의 말은
‘붉다’와 같이 빛을 발하는 ‘불’과 관계가 있다고 합니다.
‘깨달음’을 영어로는’enlightenment’즉 빛을 들인다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런 뜻으로 신성한 곳에 켜는 초 또는 등을 이해하면 좋을 것입니다.
12월 25일은 본래 미트라교에서 지내는 태양 탄생 축제의 날이었습니다.
이것을 그리스도교에서는
그리스도의 강생과 결부시켜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의 탄신을 경축하는 날로 잡았습니다.
요한 복음에는”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라오는 사람은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연말무렵은 일년중에도
밤이 가장 길고 어두운 시기이므로
이때부터는 태양이 날로 그 힘을 더해 갑니다.
크리스마스의 조명은 그 어둠을 몰아내려는 빛이라고 보아도 좋겠지요.
이세상의 어둠을 다시 밝히는 일,그것이 곧 구원의 의미입니다.
세상의 빛이 되라고 마태오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있는 마을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등불을 켜서 됫박으로 덮어두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등경위에 얹어 둔다.
그래야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다 비출 수 있지 않겠느냐.
너희도 이와같이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5,14-16).
신자인 우리들이 세상의 빛이 된다는 것은
부활성야 축제 거행에서 아름답게 구현됩니다.
세상의 빛이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커다란 부활초에서
우리들이 저마다 손에 들고 있는 작은 초에 차례로 빛을 옮겨 붙여 나갑니다.
그렇게 하면 깜깜하던 성당이 점점 밝아져 갑니다.
세상 안에는 지금 어둠을 의미하는
온갖 악이 횡행하고 있지만 언제가는 빛이 승리할 것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것이 세상의 완성입니다.
성서의 마지막 책인 요한 묵시록은
이 완성을 ” 그 도성에는 태양이나 달이 비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그 도성을 밝혀주며
어린양이 그 도성의 등불이기 때문입니다.”(211.23)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성서의 첫 권인 창세기에 씌어 있는
하느님의 창조가 이처럼 완성되고 있음을 말해 주는 대목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