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두가이파 , 유다이즘

 

6. 사두가이파


사두가이파로 알려진 당파는 관용과 타협의 정책을 대변하다. 이들은 제관의 특권과 정치적인 영향력을 지닌 가문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태도를 지녔다는 것이 이해할 만하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이란 표시는 분명히 사독(Zadoq)이라는 이름과 관련을 지을 수 있는데 그는 예전에 솔로몬 왕 밑에서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Ⅰ열왕 2, 35). 시리아왕 안티오쿠스 4세가 지배하는 혼란속에서 옛날 대사제장의 사독 왕조는 불명예스러운 최후를 맞이한다. 하스모네어 집안이 사독의 혈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얼마동안 대제사장이 직분을 넘겨받았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는 제사장으로서의 직무를 수행했던 사독이 아들들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 중 율법에 엄격한 동료 사제들은 의(義)이 선생 주위에 모여 들어 하나의 집단으로서의 연합하였으며, 이 집단은 율법의 구정을 철저하게 엄수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들은 토라에 너무나 철저한 나머지 토라와 관련해서 끌어모아 놓은 구전 율법 체계를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들은 토라에서 아무런 근거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부활 교리를 배척했고(마르 12, 18 참조), 마찬가지 이유로 천사와 악마에 대한 믿음, 마지막 때에 관한 예언처럼 묵시사상의 여러가지 관점들도 반대했다(사도행전 23, 8 참조). 그들의 역사관은 본질적으로 모세오경이 제관계 해석에 의한 것이었다.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안식일이 아주 신중하게 준수되어야 하고, 주어진 벌은 율법의 규정에 일치해야 했다. 그들은 미래를 바라보기보다는 율법을 엄격히 준수함으로서 특별히 제관들의 본분과 제사에 관련된 규정을 철저하게 지킴으로서 현존하는 거룩한 공동체를 지켜나가려고 애썼다. 그들은 제관들의 현재상태에 관심을 가졌으므로 외국이 통치자들과 협력하는 정책을 지지했으며, 심지어는 어느 정도 헬레니즘과의 타협까지 함으로서 계속 거행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적극적인 저항운동을 주장하는 혁명당원들이 적이었다. 그리고 또한 이방인 정부에 내적으로 거부하면서 대립하여 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적이기도 했다. 예루살렘이 명망은 그들의 운명을 결정지어 버렸다. 도시와 성전이 파괴될 때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에 유대 공동체의 재건은 단지 그 재난을 견디어낸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의해서만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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