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례자 요한과 엘리야

 

4.세례자 요한


4.1. 여자에게 태어난 사람들 중에 가장 큰 인물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 진리를 위해서는 목숨을 바칠 수 있는 사람.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사람. 그가 바로 세례자 요한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사람들 중에 요한 세례자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그의 임무에 있어서 위대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인간으로서도 위대한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대의 어느 누구보다도, 과거의 어느 누구보다도 뛰어난 사람으로 세례자 요한을 높여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한가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습니다. “여자의 몸에서 태어난 사람은 예수님도 마찬가지가 아닙니까? 그럼 예수님 다음이어야지 왜 첫째입니까?”왜냐하면 예수님의 탄생은 인간적인 영역을 초월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 그러나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이라도 그 사람보다 더 큽니다.”


세례자 요한이 위대하기는 하지만 하늘나라에 있는 자와는 비교할 수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언자로서는 구약시대에 속하고 선구자로서는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교량입니다. 그런데 복음위에 서 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본다면 크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명과 신분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시작하시는 은총의 시대는 요한이 머물고 있는 율법의 시대보다 뛰어난 것이기 때문이고, 세례자 요한은 단지 그 길을 준비하는 사람이기에 자신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옛 세대를 닫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사명을 지닌 사람이 바로 세례자 요한입니다. 요한까지가 예언자와 율법의 시대이며, 이제부터는 복음이라는 새로운 제도의 시대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하느님의 나라와 회개를 선포했기에 세례자 요한의 날부터 지금 예수님의 날까지를 한데 묶어서 하늘나라 시대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의 나라는 박해를 당하고 있었습니다.


헤로데 안티파스가 요한을 마캐루스 요새에 가두었고, 율사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스스로도 들어가려 하지 않고 다른 이들도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늘나라의 문을 잠가 버렸습니다.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힘쓰는 사람들이 하늘나라를 강탈한 것입니다. 게다가 세례자 요한에게도, 예수님에게도 관심이 없었으니 하느님의 나라는 선포까지도 어려웠던 것입니다.


어찌보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도 하느님의 나라를 강탈하고,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방해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역할은 앞으로 일어날 일에 앞서서 지시하고 안내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앞으로 일어나게 되어 있는 일이(메시아에 대한 일) 세례자 요한과 더불어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예언의 시대는 끝이 났고 완성의 시대가 온 것입니다.




4.2. 세례자 요한과 엘리야


엘리야 예언자는 죽지 않고 산 채로 불수레를 타고 승천했습니다(2열왕2,11).그는 하느님이 세상을 심판하기 직전에 다시 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화해시키고 열두 부족을 재건할 것입니다(말라3,1.23;집회48,9-10). 엘리야는 종말 심판자이신 하느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하느님의 심부름꾼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메시아가 오시는 것을 준비하기 위해 먼저 엘리야가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바로 엘리야인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요한을 통해 육체적으로 나타났다거나 세례자가 엘리야의 화신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요한은 엘리야의 정신과 능력을 가지고 예수님 앞에 온 것입니다.


하지만 힘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하기에 요한을 엘리야로 보지도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었기에 세례자 요한의 일을 바라보지 못했고, 믿음이 없었기에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귀가 있는 사람은 새겨들으시오.”




4.3. 세례자 요한의 세례운동


   요한의 세례, 정확히 말하면 침례는 1세기 유대교 안에서 성행했던 침례 운동의 맥락 안에 위치한다. 그러나 양자 간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첫째, 당대의 일일 세례자들은 명백히 스스로 물에 잠기는 침수자들이었다. 그러나 요한은 그 별명이 시사하듯 자신의 인격적인 권위에 근거하여 세례를 베푸는 세례자였고, 에세네파의 빈번한 목욕 재계나 일일 침수자들의 행위와 달리 그의 세례는 유일회적인 것이었다.


    둘째,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통하여 하느님의 용서를 받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요한의 세례를 받으러 와서 자신들의 죄를 고백하였다고 한다. 그것을 대속죄일에 행하는 죄의 공개적인 고백과 유사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요한의 경우 고백이 개별적이라는 것이다. 요한은 유대교가 일 년에 한번 속죄의 날, 대사제에게 부여한 사죄의 선포권을 수시로 행사함으로써 성전 체제에 대한 심각한 도전으로 비춰졌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이것은 유대교의 근본을 건드리는 문제였다.


   셋째,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을 쇄신하기 위한 목적으로 자기에게 다가오는 이는 차별 없이 죄인과 창녀를 포함하여 모두 받아들이고 세례를 베풀었다. 이것은 바로 바리사이파의 배타적인 집단 행위와 대조된다. 이런 접에서 페로의 말은 참으로 적절하다고 하겠다. “유대인의 세정례가 사람들을 불리시키는 기능을 수행하였다면 요한의 세례는 그들을 일치시키는 기능을 발휘하였다.”




요한이 베풀었던 세례 행위는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있었다. 종교적 재생 운동이라고 불릴 정도로 모든이에게 개방되어 있었고, 민중환경권에서 베풀어졌고 종말론적 심판이 목적에 다가왔다고 선포하고 마음의 회개와 죄의 사함을 위해서 흐르는 물에 몸을 담그는 의식에 참여해야 한다는 그런 운동이었다.


그러나 요한 복음서에서는 이 운동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내용으로서 종말론적인 복음 선포에 대해서 즉 세례자 요한이 종말론적인 복음 선포를 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오지 세례자 요한은 선구자로서 어린양에게 행한 요한의 증언만을 요한 복음서에서 전해주고 있을 뿐이다. 이제 성령의 선물로 시작된 새로운 시대가 열리면서 요한의 세례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베풀어지는 세례로 대체된다.




이 글은 카테고리: 신약성경이야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