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세례
공관 복음사가들은 예수님께서 공생활에 들어가기 전에 하느님에 의해서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가 밝혀진 계시사건, 이른바 예수님께 이루어진 신적현현을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사건과 결부시켜 보도한다(마르 1,9-11; 마태 3,13-17; 루가 3,21-22).1) 이에 비해서 요한 복음사가는 약간 달리 보도한다. 즉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로 왔었다고 만 언급하면서 예수님께 이루어진 신적현현을 세례자 요한이 몸소 체험하여 증언하는 것으로 대신한다(요한 1,29-34). 아무튼 예수님께 이루어진 신적현현이 세례자 요한의 증언활동과 결부된 채 전승되었다는 점만은 복음사가들의 일치된 증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두 가지의 사건(예수님의 세례와 신적현현)에 관한 전승사적 문제는 우리 주제의 범위에 약간 벗어나기 때문에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예수님께 이루어진 신적현현의 사건을 서술묘사해주는 내용만을 살펴보기로 한다.
구약성서에서 볼 수 있는 신적현현 사화(창세 15,1-4; 신명 4,36 등)의 소재들을 우리 대목에서도 볼 수 있다. 하늘이 갈라지고(또는 열리고) 영이 비둘기처럼 예수 위에 내려왔다는 환시와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는 환청2)이 그것들이다. 사실상 신적현현 사화에서 있어서 환시와 환청은 서로 결속되어 있다. 즉 환청은 환시에 곧바로 이어져 이루어진다. 그런데 우리 대목에서 보면, 환시와 환청의 체험주체가 복음사가에 따라 약간씩 다르다. 특히 마르코에 있어서는 예수 홀로 체험한 주관적인 사실로 묘사되어 있다. 이어 반해서 마태오에 있어서는 ‘하느님의 영이 임한 것’만 예수 홀로 체험한 것으로 되어 있고, 환시의 일부분 곧 ‘하늘이 열리는 것’과 환청은 주위 사람들도 체험한 객관적인 사실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루가에 있어서는 환시는 객관적인 사실로, 환청은 주관적인 사실로 묘사되어 있다. 요한의 경우는 또 다르다. 세례자 요한이 몸소 체험한 것으로 보도되어 있는데, 공관 복음사가들이 보도한 그런 환시나 환청은 없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의 예언 말씀대로 영이 하늘로부터 비둘기처럼 예수 위에 내려와 머문 것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의 정체를 증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요한 1,32-34). 이와 같이 예수님께 이루어진 신적현현의 현상과 그 체험에 관한 보도내용이 각 복음사가에 따라 차이가 있다. 이것은 전승과정이나 각 복음사가들의 신학사상이 반영된 편집에서 기인된 결과로 본다.
‘하늘이 갈라지다’(마르) 또는 ‘하늘이 열리다’(마태, 루가)란 표현은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공관복음사가) 또는 ‘하느님이 말씀하셨다’(요한)란 표현과 함께 신적 세계의 체험을 서술묘사하는 묵시문학적인 표현기법에 속한다. 또한 ‘보았다’(εἶδεν)란 표현도 묵시문학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문용어로써 환시자의 신비스런 체험을 시사한다. 이런 표현들은 인간이 천상적인 것을 지상에서 체험한 현상들을 서술묘사하는 문학적인 표현기법인 것이다. 우리 대목의 표현들도 그 맥락을 같이한다. 따라서 ‘하늘이 갈라지다’(또는 열리라)와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란 표현은 신적현현의 장면(하느님의 영이 내려오는 것과 하느님의 계시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을 서술묘사하는 데에 있어서 도입부의 역할을 한다고 하겠다.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내려왔다’란 표현은 인간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는 그 영이 예수님께로 임했다는 사실에 대한 일종의 시각적인 표현이다. 특히 루가는 ‘몸의 모양을 하고서’(σωματικῷ)란 말을 첨가하여 좀 더 구체적으로 서술 묘사한다(3,22). 하느님의 영을 ‘비둘기처럼’표상한 까닭은 비둘기는 우선 하늘에서 움직이는 날짐승이요, 여러 날짐승 가운데 비둘기만이 혼을 지닌 神들의 새로서 당시 사람들에게는 성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고대 에집트나 희랍의 여러 종교에서 비둘기는 혼을 지닌 새로서 神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여겼던 것이다. 성서에서도 비둘기는 특별한 날짐승으로 언급된다. 야훼 하느님께 날짐승을 번제물로 바칠 경우 비둘기를 봉헌하라고 법으로까지 규정했다(레위 1,14). 예수님의 부모도 율법에 따라 비둘기를 제물로 봉헌했다(루가 2,24). 예수님의 시대에도 역시 비둘기는 성전의 제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마르 11,15; 요한 2,14).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처럼’ 예수님께 내려와 머물렀다는 것은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의 형상이란 뜻은 결코 아니다. 다만 신적현현을 묘사하는 소재일 뿐이다. 즉 하느님의 영이 비둘기의 형상으로 비유되었을 따름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이 예수님께로 임한 실제적인 통교에 역점을 둔 일종의 시각적인 표현기법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환시적인 신적현현 가운데 하느님의 영으로 무장된 예수님의 정체가 계시된 셈이라고 하겠다.
예수님의 정체에 관한 또 다른 계시는 청각적인 표현기법 곧 환청으로 이루어진 신적현현을 통해서도 이루어진다.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란 표현은 우선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示顯을 가리키고, 환청으로 들린 계시말씀 곧 하느님의 계시말씀은 예수님의 정체를 더욱 분명하게 밝혀준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나는 너를 어여삐 여겼노라”(마르 1,11 병행구). 이 계시말씀은 시편 2,7과 이사 42,1에 바탕을 둔 것으로써 공관복음사가가 모두 보도한 내용이다. 그런데 마태오만은 2인칭이 아니라, 3인칭으로 언급되어 있다. 즉 예수님께 직접적으로 행해진 말씀으로 되어 있지 않고 객관화되어 있다. 아마도 마태오는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예수님의 정체를 밝혀주는 데만 역점을 두는 듯하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처음부터 즉 태어나는 순간부터 하느님의 아들로 계시되었다는 사실을 전제하고서 이제(예수님의 세례 시) 그 사실을 재확인 시켜주고자 한 것으로만 볼 수 있다. 세례자 요한의 증언을 통해서 예수님의 정체를 밝혀주는 요한 복음사가의 보도내용(1,34)도 같은 맥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마르코와 루가에 있어서는 좀 다르다. 예수를 직접적으로 가리키면서 언급된 계시말씀으로서 예수님의 정체를 밝혀주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사명을 앞으로 이행하게 될 것이라는 선포에 그 역점이 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영’(πνεύμα)을 받았다는 것은 ‘하느님의 영으로 무장된 메시아’(이사 11,2; 42, 1; 61,1)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ὁ υἱóς ὁ ἀγαπητóς)이란 말은 하느님의 ‘유일무이한 아들’이란 뜻으로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히브리어 yāhîd란 낱말이 ‘사랑하는’ 또는 ‘유일무이한’이란 뜻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예수님께서는 요한계 문헌에 나오는 하느님의 ‘외아들’(ὁ υἱóς ὁ μονογενής)이란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하느님과 예수와의 이런 관계는 또한 서로 ‘하나’(ἕν)가 되는 일치의 관계라는 뜻도 내포한다. 그리고 하느님이 예수를 ‘어여삐 여겼다’(εὐδóκησα)란 표현은 하느님이 예수 안에서 어떤 기쁨을 찾아 얻었다는 본래의 의미를 의역한 말이다. 따라서 하느님은 인간세계에서 당신을 가장 기쁘게 해줄 수 있는 인물로서 즉 당신의 뜻을 가장 잘 구현시킬 수 있는 인물로서 예수를 선택했다는 그리스도論적인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께 이루어진 신적현현은 우선 지상에서 하느님과 예수와의 내적인 통교 내지는 신비스런 만남이 있었다는 것을 시사해 주고, 예수님의 인격을 그리스도論적으로 설명하는 데 기여함으로써 신학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이런 신적현현이 예수님께 이루어졌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되었다는 말 보다는 오히려 그 반대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예수님께 그런 계시사건이 이루어질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우리 대목의 신적현현 사화는 그리스도論적인 이해지평선상에서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성서적인 사화라고 말 할 수 있다.
세례: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받은 세례는 성령의 세례가 아니었다. 그 세례는 예수님의 신원과 정체가 밝혀진 계시사건의 계기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예수님께 이루어진 신적 현현이 마치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응답인 것 처럼 생각하면 안 된다. [02/26]
세례: 요한 복음사가는 공관 복음사가들과는 달리 하느님이 세례자 요한에게 직접 계시하신 것으로 묘사하며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의 정체를 증언한 것으로 보도한다(1,33 -34). 이것은 예수님의 정체를 증언하는 세례자 요한의 활동을 보여주고자 하는 요한 복음사가의 신학적인 의도의 반영으로 볼 수 있겠다. [02/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