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과 예수님의 수난
1.말씀: 마태26,69-75(베드로의 부인)
69 베드로는 안뜰 바깥쪽에 앉아 있었는데 하녀 하나가 그에게 다가와서 “당신도 저 갈릴래아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지요” 하였다.
70 그러자 베드로는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며 “당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알지 못하겠소” 하고 말했다.
71 그가 대문을 향해 나가고 있었는데 다른 하녀가 보고는 거기 있던 이들에게 “이 사람은 나자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어요” 하고 말했다.
72 그러자 베드로는 맹세까지 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고 다시 부인했다.
73 그런데 잠시 후에 서 있던 이들이 다가와서 베드로에게 “정말 당신도 그들과 한패구려. 당신의 말씨가 당신을 분명히 드러내 주니까요” 하였다.
74 이에 베드로는 저주하고 맹세하면서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하였다. 바로 그 때 닭이 울었다.
75 그러자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당신은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고 밖으로 나가 슬피 울었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예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대자들의 손에 넘어가 십자가에 달리게 되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제자들에게 3번이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수난예고). 그리고 그분은 그 일을 하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유다
그런데 열 두 제자의 하나인 가리옷 사람 유다가 대사제들에게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넘겨 주기로 약속하였습니다. 유다는 예수님 대신 돈을 요구했습니다. 세겔은 사제들이 쓰던 돈이었는데 30세겔은 하인 하녀가 사고로 죽었을 경우, 애도의 표시로 주는 돈으로 율법이 정하고 있던 금액이었습니다. 즉 사제들은 노에 한 사람의 값으로 예수님을 샀던 것입니다.
유다는 다른 열 한 제자와 함께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 때에는 틀림없이 사도로서 합당한 자격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복음사가 요한이 그가 예수님 일행의 돈을 맡고 있었다고 기술한 것으로 보아(요한12,6.13,29) 재정 책임을 맡을 만큼 신용을 받고 있었을 것이다. 또 다른 사도들과 함께 선교에 파견되고(마태10,5) 기적도 행하였을 것이다. 그런 유다가 왜 예수님을 배신하게 되었을까?
복음서의 기록을 읽어 보면 그의 마음에 차차 금전에 대한 집착과 탐욕이 깃든 것 같다. 베드로가 수위권을 받고 요한이 특히 예수님께 사랑받는 것을 볼수록, 그의 마음에는 시샘이 싹텄을 수도 있다.
또한 예수님이 그토록 경고하신 메시아에 대한 잘못된 기대에서 오는 좌절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세상의 통치자가 되시어 고통받는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해 주실 분으로, 정치적인 메시아로 잘못 받아들였기에 그것에서 오늘 실망감으로 예수님을 대사제들에게 넘겼는지도 모른다.
좌우지간 중요한 것은 유다는 예수님이 누구신지 몰랐고, 자신의 뜻에 맞지 않는 메시아였으며, 은전 30세겔에 스승이며 메시아인 그분을 팔아 넘겼다.
그리고 최후의 만찬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을때, 유다도 “선생님, 저는 아니지요?”라고 물었다. “저는 아니지요?”
➢베드로
예수님께서 당신의 수난을 예고하시자 베드로는 호언장담을 한다. “비록 모든 사람이 주님을 버릴지라도 저는 결코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베드로는 진실된 마음으로 이렇게 고백했을 것이다. 그는 주님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베드로의 사랑은 시련을 통해서 성숙해져야만 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소아시아인은 닭의 울음소리를 두 가지로 구별했다. 첫소리는 밤중 12시 경, 두 번째 소리는 오전 3시경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은 첫소리에서 두 번째 소리까지의 시간을 “수탉소리”라고 부르고 있다. 곧 베드로의 부인(否認)은 오전 3시나 4시경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죽는 한이 있더라도 결코 주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다”는 고백을 하였다. 그런데 동산에서 예수님께서 붙잡히시자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어찌 되실 것인가를 지켜보기 위해서 대사제의 관저로 따라갑니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그곳에서 그를 알아보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당신도 저 갈릴래아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니던사람이군요” 하지만 베드로는 부인을 합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라고 맹세까지 합니다.1)
거짓말이라면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하는 베드로. 그만큼 그는 두려웠을 것입니다. 절망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닭이 울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허구한 날을 후회하며 살아 간 베드로의 뺨에는 두 줄기 눈물 자국이 패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적어도 마음으로 예수님을 부인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스승에 대하여 입으로 고백할 용기가 없었던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어떤 상황에서 “예”라고 당당하게 이야기 해야 하지만 그렇게 할 용기가 없어서 우물쭈물하다가 기회를 놓쳐 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게쎄마니에서의 기도
주님은 기도로써 고통의 때를 시작하십니다.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 너희는 여기 앉아 있어라” 예수님께서는 여덟 제자를 동산 입구에 남겨 두시고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만을 데리고 올리브 나무 숲 속 깊은 데로 가셨습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나와 같이 깨어 있어라” 하시고 조금 더 나아가 땅에 엎드려 기도를 하십니다. 다가올 고난에 대한 예상, 배신자의 입맞춤, 군인들의 손찌검과 침뱉음, 제자들의 도망, 적들의 조롱, 채찍질과 가시관, 십자가의 못, 십자가 아래에 서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예수님은 마음의 고통을 이렇게 표현하십니다.
“내가 받아야 할 세례가 있다. 이 일을 다 겪어 낼 때까지는 내 마음이 얼마나 괴로울지 모른다”
그분은 피땀을 흘리시며 번민하시고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물으셨습니다. 사람이 극도로 고민에 빠지면 모세혈관이 파혈되어 땀과 함께 피가 흐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직 제자들은 예수님의 그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제자들이 깨어있지 못했던 이유는 근심걱정에 극도로 지쳐 있었고, 쏟아지는 잠을 억제할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에 오면서 열심히 싸워서 서열을 정했는데 그래서 이제는 뭔가 한자리 하겠구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무언가 형언키 어려운 공포에 휩싸여서 그들을 의기소침하게 만듭니다. 베드로도 예수님께서 변모하셨을 때의 그 영광스러움과 지금의 예수님의 고민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두번이나 제자들에게 하신 명령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유혹을 받지 않을 수 없고, 유혹에 당당하게 대항하기가 쉽지는 않다는 것을 잘 알고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도 기도를 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의 기도는 이러했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뜻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이 잔을 제게서 거두소서.” 고통이 없어지고 악이 멀리 사라지기를 기원하는 기도였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기도는 하느님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기도였습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뜻에 맡기는 기도였습니다.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소서.”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러나 예수님의 기도의 효과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내적으로도 예수님 안에서 처음부터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또 번민이 없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기도는 내적 힘을 줍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루어 지도록 하게 합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힘이 주어질 때 인간의 정신은 하느님의 성령으로 지탱되고, 인간의 연약함이 하느님의 힘으로 다시 강화되는 것입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예수님께서 “너희 중에 하나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을 때 베드로 사도는 죽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을 했습니다. 다른 제자들도 그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특별한 이유나 상황이 없다면 문제 없이 신앙생활을 하지만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하느님께서 저에게 그러실 수가 있느냐?”고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어려운 상황에서는 신앙인임을 숨기기도 합니다. 베드로 사도와 같은 행동을 어떤 때 하게 되는지 함께 나눠 봅시다.
2. 유다는 자신의 뜻에 맞지 않아서인지 예수님을 넘겨버립니다. 가끔은 내가 예수님보다 높은 사람으로 처신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해 주셔야 하고, 이러셔야 하고…그런데 믿음은 내 틀에 예수님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님의 틀 안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내 틀 안에 가두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3. 그리스도인들은 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용서받은 죄인들입니다. 다른 사도들은 모두 다시 돌아왔지만 유다만은 돌아오지 못하고 목을 매달고 말았습니다. 그분께 용서를 청하면, 그래서 회개의 삶을 살아가면 그분은 받아들여주시는데 용서 못하는 이는 그분이 아니시라 나 자신인 듯 합니다. 혹시 내가 내 자신에게 있어서 용서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까? 그리고 나는 용서해주고, 화해하려고 노력하는데 다른이들이 나에게 용서를 청하지 못하는 것들이 있습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