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삶, 우리의 길

 

초대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모습을 통한 부활의 삶


5.1.우리의 길(道)


루가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오순절에 행한 첫번 설교를 듣고서부터 많은 청중들이 “마음이 찔려” (사도 2,37) 예수께 관한 선포를 받아들인 것으로 되어 있다.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으며 하느님이 그를 부활시키셨고 부활이라는 결정적인 개입을 통해 하느님이 ‘우리의 주님이 되게 하셨고 그리스도(메시아)가 되게 하신’ 인물, 예수께 관한 소식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예수를 부활시키신 하느님의 행위가 예로부터 언약하셨고 그토록 고대하던 구원을 이루는 결정적인 개입이었다고 한다면, 인간은 그 개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제 하느님이 인간에게 기대하시는 응답은 어떤 응답인가?  베드로의 설교를 듣던 청중들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런데 성서에 나오는 인간의 전형적 자세, 하느님의 구세적 개입 앞에서, 아브라함에게서 비롯되는 하느님의 부르심 앞에서 인간이 취하는 전형적인 자세는 순응(順應)이다.  평생 목숨을 걸고, 하느님이 가리켜 보이시는 ‘길’을 따라 하느님을 모시고 걷기로 약속하는 순응이다. 


예수 안에서 하느님이 이루신 구원이 전해져 올 때에, 그 앞에서 신앙인들이 드리는 응답을 일컬어 ‘길’(사도 9,2; 19,9; 22,4; 24,14.22). 구원의 길(16,17), 주님의 길(18,25)이라고 한다.  이 낱말은 구약에서 끌어온 표현이다(시편 15,11과 사도 2,28; 호세 14,10과 사도 13,10 참조). 하느님은 신앙인에게 당신의 얼을 주신다.  예언자들의 입으로 미리 언약하신 그대로 (요엘 3,1-5과 사도 2,17-21; 에제 32,26-27) 새 생명의 원리를 넣어주신다.  그 얼은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놓을 것이고, 구원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말씀과 행적에 순응하게끔 그 마음을 열어놓을 것이며, 사람이 생명의 길을 따라 걷도록 이끌어줄 것이다. 


구원이라 언제나 하느님의 선물이자 인간의 과업이다.  양심상으로나 행동으로 인간의 내면생활과 외부생활 전부를 투자하는 과업이다.  인간의 대신관계(對神關係)는 수긍이고 받아들여야 하는 사상체계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강요하거나 금지하는 계명에 의해서 성립되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께 드리는 완전무결한 순응, 이것이 근본적으로 인가에게 요구되는 응답이다.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청중들의 물음에 사도들이 “회개하시오”라고 답변한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이러 저러한 힘들고 부담스러운 행동을 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회개한다는 말의 원어에 담긴 의미는 마음을 유순하고 기민하게 갖는 것, 하느님을 모셔 들이는 데 장애가 되는 일체의 사물에서 정신을 돌리는 것을 뜻한다. 


예수께 닥친 사건과 똑같이 하느님의 왕림은 언제나 그렇듯이 전혀 예측할 수 없게, 기대하지 않는 순간에 일어난다.  어느 국민이나 그렇지만 인간 개개인도 자기 나름의 선입견과 습관, 흥미와 야망,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이 있다. ‘회개한다’는 것, 자기 마음의 알맹이를 바꾼다는 것은 바로 이것들을 송두리째 시비에 붙일 자세가 섰다는 뜻이며, 자기의 삶을 하느님이 우리 가운데 오셨다는 그 사실에 비추어 재검토한다는 뜻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순응을 보이는 본보기로 어린아이를 세우셨다(마태 11,25; 19,13-15 참조). 어린이는 과거가 따로 없으며 선입견도, 감싸며 지켜야 할 재화도 없다.  어린이는 마음을 열고 있으며, 소박하고 주어진 것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이 단순함과 개방된 마음-이것은 분명히 유치한 태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이야말로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순응자세의 본보기가 되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라”고 설교하셨다(마태 3,2; 4,17; 마르1,4).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나라는 어떤 국민과 영토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 구원을 가져오시기 위해 결정적으로 종국적인 통치행위가 무엇이냐 하면 바로 예수님의 부활과 그 뒤의 성령의 강림이었다.  그렇다면 ‘회개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치세, 하느님의 선물에 마음을 허락하고 그것을 받아들임을 뜻하며, 그 다음 하느님의 영(靈)에 의해서 지배를 받는 것을 가리킨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사는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로마 8,14).


성령의 인도를 따라 산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아직은 분명치가 않다.  그 뜻을 터득하려면 신약 전부를 헤아려야 할 것이며 역사의 종말에 이르기까지의 교회의 생활 전부를 살펴야 할 것이다.  그때까지 성령은 줄곧 교회에 생명을 주시면서 전혀 예견 못한 길과 길을 이어 교회의 주님을 뒤따르게 자극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들은 최초로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권하였다.  그런데 이 세례는 하느님의 구원행위를 믿는 내적 신앙을 외부로 공공연히 표명하는 예식인 것이다.  그 예식에 의해서 한 인간 전체가 예수님의 인격 속으로 축성(祝聖)되어 들어가며, 예수님의 빠스카 신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빠스카 신비란 죄악의 세계와 하느님과 분리된 세계는 죽고, 은총의 세계,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세계에로 부활하는 것이다. 성 바울로가 세례의 깊은 뜻을 설명하는 자리에서(로마 6,1-14 참조) 언급한 바 있거니와, 하느님의 이 사랑은 당신의 외아드님을 사랑하시던 바로 그 사랑을 가리킨다.  사도들, 믿고 세례를 받은 이들은 드디어 하나의 단체를 이루고 그리스도와 각별한 일치를 이루고 자기들끼리도 단결되어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스도와의 일치, 자기들끼리의 일치는 외양으로, 단체적으로, 또 눈에 보이게 표현되기 마련이었다.  내적이고 영성적인 테두리에서 그칠 수가 없는 것이다. 


신앙인들에게 활력을 주시는 성령은 생명이시며, 생명은 그 생명력을 나타내는 행동으로 전환되는 법이다.  성 루가는 이 새 생명이 최초로 나타내던 현상을 몇 가지 양상으로 간추리고 (사도 2,42-47; 4,32-35; 5,12-16) 몇 편의 일화(逸話)도 곁들이고 있다.  그 양상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성은 초대 신자들을 지배하던 친밀과 합심과 ‘친교’이다.  루가가 기록해 남긴 양상 중의 첫째 장면은 참으로 내용이 풍부하다.  루가는 새로 형성된 공동체 생활의 네 가지 요소를 다음과 같이 간추렸다.  신도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듣고 서로 도와주며 빵을 나누어 먹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5.2.형제적 친교


한 형제가 되고 하느님의 새 백성의 일원이 되고 예수님의 표양과 말씀에 따라 사랑의 법에 의거하여 산다는 의식이 있었기 때문에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실생활에서도 ‘공동사회’를 이룩하려고 노력하였다.  실현하기는 쉽지가 않지만 참으로 이상적인 삶이었으니, 모두 자기 재산을 공동소유로 내어놓고 각자가 생활에 필요한 만큼 받는 것이었다(사도 2,44-45; 4,32).  이것은 하느님의 나라를 얻기 위해 가난을 실천하는 길이기도 했다. 


애덕과 형제애로 미루어 본다면 한 아버지의 자녀들 사이에 차등이 있을 수가 없었다.  이것은 인생의 짐을 벗자고, 또는 안락한 생활을 포기한다거나 하는 그런 동기 때문에 재산을 포기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하느님의 나라에서는 가난이 절대적 가치가 못된다.  사랑이 절대가치이다.  그들이 실천하는 가난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라면 가진 것 전부를, 자기의 사람됨 전부를 내놓겠다는 자세 외에 다른 것이 아니었다.  청빈의 목적은 곤궁이 아니고 형제들의 어려움을 덜어주자는 데에 있었다(사도 4,34). “한마음 한뜻” (사도 4,32)임을 생생하게 표시하고 또 그것을 조성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이리하여 초대교회는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서 ‘가난의 행복’을 이미 생활에 옮기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도 어떤 ‘계명’에 복종하는 뜻에서가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과 표양을 깊이 깨달은 데서, 그리스도교 인인애(隣人愛)의 필요에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이같은 ‘형제적 친교’는 시대에 따라서, 그리스도 신자들이 살아가고 활동하는 문화적 사회적 경제적 환경에 따라서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지만, 그것이 언제나 그들이 추구하는 이상이 되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아나니아와 삽피라(사도행전5,1-11)와 같이 사람들도 있었다.


5 장


그런데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자기 아내 삽피라와 함께 땅을 팔고는


아내도 양해하여 그 값의 일부는 떼어 놓고 일부만 사도들의 발치에 가져다 놓았다.


그러자 베드로가 말하였다. “아나니아, 왜 사탄이 당신의 마음을 다 차지하여 당신으로 하여금 성령을 속이고 밭 값의 일부를 떼어 놓게 했습니까?


밭을 그대로 두었더라면 당신 것으로 남아 있었을 것이요, 판 뒤에도 (그 돈을) 당신 마음대로 할 수 있었을 것이 아닙니까? 어쩌자고 이런 일을 당신 마음 속에서 꾸몄습니까? 당신은 사람들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속인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이 말을 듣고 거꾸러져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소문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다.


젊은이들이 일어나 그를 싸서 내어다 묻었다.


세 시간쯤 지났을 때 그의 아내는 그런 일을 모르고 들어왔다.


베드로가 그를 향하여 “당신들이 이 가격으로 밭을 넘겨 주었습니까? 대답해 보시오” 하자 그는 “예, 그 가격입니다” 하고 말했다.


베드로가 그에게 “어쩌자고 당신들은 공모하여 주님의 영을 시험합니까? 이제 당신의 남편을 묻은 이들의 발이 문에 이르렀으니 그들이 당신을 메고 나갈 것이오” 하고 말했다.


10  그러자 그는 당장 베드로의 발치에 거꾸러져 숨을 거두었다. 젊은이들이 들어와 그가 죽은 것을 보고 그를 내어다 남편 곁에 묻었다.


11  이에 온 교회와 이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크게 두려워하게 되었다.




사도시대의 공동체가 시도한 그 경험을 오늘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겠지만,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스스로를 배반하려 하지 않는 이상 언제나 그것을 귀감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느님의 나라는 지금 여기에 세워진다.  그렇다면 현세 재물은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즉각 나설 채비가 갖추어져 있느냐를 증명해 보이는 시금석이 된다고 하겠다 (마르 10,17-31 참조). 


루가는 교회의 첫 세포가 어떻게 분열하며 많아지는가를 매우 흡족한 눈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날마다 한데 모였으면 기쁘게 음식을 함께 먹었다(사도 2,46).  그들은 자기네 스승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하게 된 것을 기뻐하였다(사도 5,41; 마태 5,10-12 참조).  그들은 사도들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하는 기적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권능이 드러나고 그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을 발견하는 것을 기뻐하였다(사도 3,12-16; 8,8).  이 깊숙한 기쁨은 그리스도를 시켜서 하느님이 이룩하신 구원을 발견한 데서 오는 기쁨이요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발견한 데서 오는 기쁨이다.  이 기쁨은 그리스도교 신자 생활의 ‘규준이 되는’ 분위기이며, 이것은 자연히 하느님 아버지께 올리는 찬미와 감사로 바뀌기 마련이다. 


사도들과 그 협력자들은 교회를 세우면서, 자기네가 빠스카 이전에 함께 모시고 살았던 그리스도를 갈수록 더욱 깊이 깨닫기에 이르렀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을 통해서 그리스도 신자들 틈에 살아 계시고 일하신다는 사실을 갈수록 생생히 깨닫기에 이르렀다.  공동체가 늘어나면서 사도들이 어느 곳에나 가 있을 수 없게 되자 그들은 글을 써서 보내어 구두 설교를 대신하였다.  이 글들은 구전을 결정(結晶)시키고 고정시킨 것으로서 신약성서를 이루게 된다.  또  이 글들은 부활하신 예수,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 구세주께 대한 신앙의 자양분이 되고 그 신앙의 표현이자 신앙을 심화시키는 역할을 한다.  동시에 교회를 구성하는 새로운 현실을 파악하는 길이 되고, 신앙을 필요로 하고 하느님의 백성에 소속되어야 할 새 생활 ‘양식’을 찾아내는 길이 된다.  하느님의 성령은 천지창조 때와 마찬가지로 (창세 1,2) 지금도 역사(役事)하고 계신다.  새로운 창조를 이루시기 위함이다.  사실 그리스도교 신자는 새 사람이요 새 피조물인 것이다 (2고린 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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