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과 예수님의 부활
1. 말씀:마르코 16,1-8(예수님의 부활)
1 그리고 안식일이 지나자 막달라 (여자)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는 (무덤에) 가서 예수께 발라 드리려고 향료를 샀다.
2 그들은 주간 첫날 이른 새벽,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
3 그들은 서로 말하기를 “누가 우리를 위해 무덤 입구에서 돌을 굴려내어 줄까요?” 하였다.
4 그러면서 눈을 들어 바라보니 돌은 이미 굴러나 있었다. 사실 그 돌은 매우 컸던 것이다.
5 그들이 무덤으로 들어가 보니 웬 젊은이가 흰 예복을 입고 오른편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몹시 놀랐다.
6 그러자 젊은이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무 놀라지 마시오.여러분은 십자가에 처형되신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지만,그분은 부활하시어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보시오, 그분을 안장했던 곳입니다.
7 그러니 가서 그분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예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에 앞서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니, 여러분은 거기서 그분을 뵙게 될 것입니다’ 하고 말하시오.”
8 여자들은 (밖으로) 나와 무덤에서 도망쳤다. 그들은 벌벌 떨며 넋을 잃었던 것이다. 그들은 아무에게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사실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2. 예수님의 부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초자연적인 사건으로, 하느님께서 몸소 인간역사에 개입하시어 계시한 사건으로 믿고 고백한다. 이런 신앙고백은 물론 원시 부활체험 곧 예수님의 부활발현체험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그 체험들은 사도들의 증언을 통해서 전승되어 오다가 부활발현사화로 엮어져 복음서에 보도된 것이다. 각기 다양하게 보도된 여러 가지 부활발현사화들은 이를 잘 반증해 준다. 사실상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조문에는 예수님께서 부활했다는 사실만을 언급하거나(1데살 1,10), 예수님의 부활사실과 더불어 부활한 예수님의 발현을 체험한 자들의 명단만 제시될 뿐이다(1고린 15,3-7). 그리고 가장 오래된 마르코 복음서에서도 이른바 예수님의 빈 무덤 사건(16,1-8)을 보도하는 가운데 부활한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에게 발현했다는 사실만을 시사할 뿐이다(마르 16,7; 14,28 참조). 이에 비해서 마태오, 루가, 요한 복음서에서는 부활한 예수님의 발현이 하나의 사화형식으로 엮어져 다양하게 보도되어 있다. 여인들에게 발현한 부활발현 사화들도 있지만(요한 20,14-18; 마태 28,9-10), 대부분이 제자들에게 발현한 사화들이다. 이 사화들을 우선 발현장소에 따라 분류해 본다면, 갈릴래아 발현사화(마태 28,16-20; 요한 21,1-23)와 예루살렘 및 그 주변 발현사화(루가 24,13-35;요한 20,19-23.24-29)가 있다. 그리고 유형에 따라 분류하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만을 알려주는 이른바 認知發現史話(루가 24,13-35; 요한 20,24-29)와 제자들에게 자신의 부활을 증언하고 선포하도록 사명을 내린 이른바 使命發現史話(마태 28,16-20)가 있다. 또한 이 두 가지 유형이 혼합되어 엮어져 보도된 발현사화들도 있다(루가 24,36-49; 요한 20,19-23; 21,2-23). 복음사가들은 예수님의 부활사건과 그 사건으로 인해 야기된 역사적인 것들(발현체험과 선포)을 신적현현사화의 양식에 따라 증언보도함으로써 예수님의 부활신비에 마음의 문을 열도록 이끌고자 한 것이라 여긴다.
먼저 예수님의 빈 무덤사화를 살펴보자. 물론 이 사화는 부활발현사화와 직접적으로는 관계가 없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시사해주는 내용이 담겨져 있고 신적현현사화의 소재들로 엮어져 있기 때문에 고찰해 볼 만하다. 신적현현사화의 소재들로서는 큰 지진발생(마태 28, 2), 천사 또는 번쩍이는 흰 예복을 입은 자의 출현(마르 16,5a; 마태 28,2b -3; 루가 24,4; 요한 20,12), 전율과 공포로 싸인 목격자들의 반응(마태 24, 4.8; 마르 16,5b.8b; 루가 24,5)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소재들과 더불어 예수님의 무덤에서 일어난 신비스럽고 놀라운 사건들이 소개되어 있다. 즉 큰 돌로 굳게 닫힌 무덤입구의 돌이 치워져 있었을 뿐 아니라, 수의도 따로 잘 개켜져 있었고(요한 20,6-7),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의 부활사실을 알려 주었으며,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 안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실상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 안에 없었다는 것은 곧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전제로 하며 예수님의 부활을 전달한 천사의 말은 그 사실을 재확인시켜 준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활했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부활했기 때문에 무덤이 비어있게 되었다는 논리가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덤입구의 문이 열려 있었다는 것은 무덤 안에 갇혀진 자의 해방 곧 죽음의 벽을 뛰어넘는 부활을 시사하는 데 기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빈 무덤사화에서 특히 유의해야 할 점은 빈 무덤 그 자체가 곧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통용되는 전제조건일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부활한 예수님의 몸은 양적으로도 질적으로도 지상 육체의 생화학적인 실체에 결속된 것이 아니고 그 실체와도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자면, 무덤에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는 그 자체가 곧 부활한 예수님의 실재를 보여주기 위한 절대적인 전제조건일 수는 없다. 그렇지만 빈 부덤은 예수님의 부활을 보증해주는 하나의 ‘표징’(Zeichen)으로서 의미를 가질 수는 있다. 따라서 천사가 전달한 예수님의 부활소식이 오히려 이 사화의 핵심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소식이 천사를 통해서 전달되었다는 것은 인간편의 조작이나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해 준다.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성경말씀에 비추어서 암시한 요한의 보도내용(20,9)도 그 맥락을 같이한다(루가 24,8 참조). 또한 우리 대목에서 볼 수 있는 신적현현사화의 소재들이나 신비스런 사건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해주는 데에 기여한 묘사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부활발현사화들을 살펴보자. 사실상 제자들이 부활신앙을 갖게 된 것은 마음에서부터 저절로 우러나온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께서 부활한 ‘몸’(1고린 15,44; 필립 3,21)으로 그들에게 나타났기 때문에 부활신비에 접근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부활신앙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부활발현체험에 바탕을 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의 부활발현체험이야말로 부활신앙을 싹트게 한 중대한 요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신앙에 대한 이니셔티브는 예수님께 있고, 부활신앙은 예수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라 할 수 있다. 드라마틱하게 엮어진 부활발현사화들은 바로 이런 점들을 시사해 준다.
그렇다면 부활한 예수님의 첫 발현이 어디서 누구에게 이루어졌을까? 이에 대한 답변은 쉽지가 않다. 사실상 정확하게 말할 수도 없다. 복음서의 증언내용 가운데서 단정할 만한 근거를 찾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복음서의 보도에 따라 다만 추정해 볼 뿐이다.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예고대로(마르 14,28; 16,7) 갈릴래아에서 여러 제자들에게 발현한다(마태 28,16-20; 요한 21,1-23). 하지만 루가 복음서는 갈릴래아 발현사화는 없다.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이나 그 주변에서만 발현한다(24,13-35.36-49).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발현은 갈릴래아에서 시작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즉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처음보고 만난 곳은 갈릴래아이다. 그리고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에게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맨 처음 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근거로 두 가지 대목을 들 수 있다. 하나는 1고린 15,3-8에 전해진 신앙조문이다. “실상 나도 전해 받았고 또 여러분에게 제일 먼저 전해준 것은 이것입니다. 곧 그리스도께서는 ··· 성경(말씀)대로 사흘 만에 일으켜지시고, 게파(베드로)에게, 다음에는 열두(제자)에게 나타나셨습니다 ···.” 다른 하나는 엠마오의 두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처음 뵙고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갔더니, 그 곳에 모인 열 한 제자들이 “참으로 주님은 부활하시어 시몬(베드로)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루가 24,34)라고 보도한 대목이다. 그러므로 갈릴래아에서 베드로에게 이루어진 예수님의 부활발현에 이어 다른 발현도 잇달아 이루어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주제에 좀 더 접근하기 위해서 예수님의 부활발현현상과 그 체험에 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복음사가들이 보도한 부활발현사화들은 한마디로 말해 예수님의 부활발현현상과 그 체험이 단순히 자연적이거나 초자연적인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해준다. 즉 자연적이면서도 초자연적이며, 초자연적이면서도 자연적인 사건으로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간다. 예를 든다면,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여인들에게 나타나 말하자, 그들은 예수님의 발을 붙잡으며 인사를 했다는 이야기(마태 28,9),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부활한 예수를 보고서도 알아보지 못하다가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요한 20,14-16),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와 동행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는데도 알아보지 못하다가 집에서 함께 만찬을 나눔으로써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루가 24,13-32),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문이 굳게 닫힌 방으로 들어가서 자신이 곧 십자가에 죽었던 자임을 드러내 보였다는 이야기(루가 24,36-40; 요한 20,19-20.26-27),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어 먹었다는 이야기(루가 24,41-43; 요한 21,10-13),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타나 복음선포의 사명을 주었다는 이야기(마태 28,16-20; 마르 16,14-18), 제자들은 부활한 예수를 보고서도 즉시 알아보지 못하다가 대화를 나눈 다음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이야기(요한 21,4-7) 등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예수님의 부활발현현상과 그 체험이 자연 아니면 초자연이라는 양자택일적인 사고범주에서 벗어나도록 해준다. 죽었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여 제자들에게 발현했다는 것은 분명히 초자연적인 사건이다. 그렇지만 이 사건은 하느님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어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사실을 배제하지 않는다. 즉 이 사건은 하느님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시어 계시한 사건이다. 사실 하느님이 인간의 역사에 개입하실 때 인간을 당신 행동의 수동적인 대상으로만 만들지는 않으신다. 하느님은 인간과 함께 인간의 세계에서 역사하시며 활동하신다. 이러한 사실은 하느님의 초자연적 계시와 인간의 심리적 체험 곧 환시나 환청은 서로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따라서 인간의 초자연적인 사건체험은 인간의 행위요 동시에 하느님의 행위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하자면 하느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예수님의 부활과 그 발현은 인간의 심리적인 체험을 매개로 하여 파악되며 지각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부활체험들은 참으로 부활한 예수님의 발현을 그들이 목격했다는 것을 뜻하며 동시에 하느님이 그들에게 부활한 예수를 계시하셨다는 것도 의미한다. 이런 관점으로 예수님의 부활발현현상과 그 체험들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발현과 문학유형으로서의 발현사화를 엄격하게 구별할 수도 있다고 여긴다.
부활발현사화에서 또 한 가지 유의해 볼만한 점은 부활발현체험이 곧 바로 복음선포 행위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의 활동 중심지였던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이 부활한 예수를 맨 처음에 만났다는 보도는 우선 지상예수와 존재의 차원을 달리한 예수 곧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서로 다른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시사해주며, 동시에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을 다시 만나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 선포할 사도로 삼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부활한 예수와의 만남은 부활복음의 사도로 부르는 일종의 소명이었고, 부활신앙은 복음선포 행위 가운데서 더욱 구체적으로 드러났었다고 하겠다. 복음사가들도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복음선포 활동 가운데 언제나 함께 하겠다는 약속 곧 부활한 예수님의 현존약속을 증언 보도한다. 그러므로 제자들의 복음선포활동은 예수님의 부활발현체험을 기점으로 하여 이루어진 셈이다. 즉 부활한 예수님의 시현이 부활신앙을 야기시켰고, 복음 선포행위를 가능케 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은 바울로의 한마디 말로써 요약될 수 있다: “나는 사도가 아닙니까? 나는 우리 주 예수를 뵙지 않았습니까?”(1고린 9,1).
2.1. 말씀연구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전날’에 십자가에 처형되어 죽었고 무덤에 안장되었다(15,42). 그러니까 이 세 명의 여인들이 샀던 날은 예수님께서 죽은 날부터 완전히 하루가 지난 그다음날 저녁(토요일 저녁) 이후가 된다. 당시 유다인들의 날짜 계산은 오늘날 우리처럼 자정을 기점으로 하지 않았고 일몰을 기점으로 했었다. 그리고 안식일(금요일 일몰부터 토요일 일몰시까지)에 상거래나 무덤방문 등의 일체 행위가 법적으로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여인들이 ‘안식일이 지나자’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료를 샀다는 표현은 당시 안식일법을 염두에 두고서 묘사한 것이라 하겠다. 루가에 따르면, 그 여인들은 예수님께서 무덤에 안장되는 날 곧 안식일 이전에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료와 향유를 샀던 것이다(23,56). 여기에 언급된 세 명의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을 멀리서나마 지켜본 사람들이다(마르15,40). 그리고 살로메를 제외한 다른 여인들은 예수님의 장례까지 목격한 사람들이다(마르15,47). 그 여인들은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장례를 급하게 치루느라고 빼놓은 것(마르 15,42 -46), 곧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는 일 등을 뒤늦게나마 보충하고자 한 것이다. 시신에 향료를 바르는 것은 물론 당시의 풍습이었지만, 이 경우에서처럼 이미 무덤에 안장된 시신에 향료를 바르는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역사적인 시각으로 사실여부까지 가릴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고자하는 그 여인들의 원의는 예수님의 무덤에로 그들이 가게 되는 하나의 동기일 뿐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그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를 수가 없었다.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 안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16,6). 그리고 만일 예수님께서 무덤에 묻히기 전에 앞서 이미 그런 예식이 에수님께 행해졌다고 하였을 경우(마르14,8) 그 여인들은 구태여 또 다시 그런 예식을 되풀이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그 여인들은 예수님의 시신이 안장된 후에까지 그런 예식을 행하려고 했었을까? 그 이유에 관해서는 성서의 내용만을 갖고서는 아무 것도 알아낼 수가 없다.
그리고 그들은 주간 첫날 이른 새벽 해가 떠오를 무렵에 무덤으로 갔다.
‘주간 첫날’은 안식일 다음날 곧 일요일을 가르킨다. 그런데 ‘이른 새벽’과 ‘해가 떠오를 무렵에’라는 표현은 시간적으로 볼 때, 서로 일치하지 않는 표현이다(참조 : 마르 1,35 ; 요한 20,1). 사실상 희랍어식 표현에는 ‘해가 떠오를 무렵에’(άνατείλαντος του ήλίου)라는 말을 ‘이른 새벽’(λιαν πρωι)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 따라서 마르코는 ‘해가 떠오를 무렵에’라는 표현을 의도적으로 첨언함으로써 어떤 상징적인 의미를 시사하고자 했다고 하겠다. 아마도 예수그리스도를 ‘빛’ 또는 ‘태양’으로 묘사했던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신학사상을 예수님의 부활사건과 관련지어서 반영했었으리라 생각한다. 여인들의 동작을 나타내는 ‘무덤으로 갔다’란 표현은 희랍어로 된 원문에서는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 ερχοναι(그들은 간다) 즉 이야기체에서 주로 볼 수 있는 이른바 ‘역사적 현재형’이다.) 우리말 문맥에 따라 다만 과거형으로 옮겨 놓았을 뿐이다. 사실 희랍어 동사는 시제보다는 동작의 종류에 일차적인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원문의 표현을 살펴본다면, 그 여인들의 무덤으로 가는 도중에 있다는 생동감 내지는 현실감이 부각된 셈이다.
그리고 그들은 ‘누가 우리를 위해 무덤입구에서 돌을 굴려줄까요?’하며 서로 말했다.
이 대화는 무덤에 예수님의 시신을 안장하고서 그 입구에 돌을 굴려 놓았다는 보도내용(마르 15,46)을 우선 상기시켜준다. 당시 유다인들은 흔히 바위를 뚫어 무덤을 만들었고, 맹수들의 침입을 막기 위해서 돌로 무덤입구를 굳게 막았던 것이다. 이 돌은 보통 사람들이 굴리는 데에 편리하도록 만들어졌다. 마치 연자멧돌과 매우 흡사한 형태였다. 그런데 여인들의 대화는 자기네들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그 돌을 굴릴 수가 없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4절에서는 그 돌이 매우 큰 것이었다는 설명이 부연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돌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기 위해서 무덤 안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그 여인들의 생각이 온통 이 장애물에만 집중된 것으로 묘사하고자 했었으리라 여긴다.
그리고 그 여인들이 눈을 들어 바라보니 그 돌이 굴려져 있었다. 즉(그 돌은) 매우 컸다.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해서 보니 걱정했던 그 돌이 이미 ‘굴러져 있었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신기한 사건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 사건은 ‘굴러져 있었다’표현(완료형 수동태)과 무덤입구를 막아 놓은 그 돌이 ‘매우 컸다’는 부연설명으로 인해서 더욱 부각되어 있다. 그렇지만 누구에 의해서 그 사건이 이루어졌는지에 관한 언급은 없다. 이에 반해서 병행구절인 마태오복음 28장 2절에는 ‘주의 천사’라고 분명하게 언급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 사건에 대한 여인들의 반응이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그 여인들을 위해서 그 돌이 굴려진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한 마디로 신기한 사건 그 자체에 역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부활한 예수를 위해서 무덤입구가 열려진 것이다. 따라서 신기한 그 사건은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있지 않다는 것을, 좀더 정확히 말하자면 십자가에 처형된 채 죽어버린 예수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죽음의 세력에 놓여져 있지 않다는 것을 시사해줄 뿐이다. 그러므로 커다란 돌로 굳게 닫힌 무덤입구가 신비스럽게도 열려져 있었다는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전제로 하고서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 하겠다.
-그리고 그 여인들이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한 젊은이가 흰 옷을 입고 오른편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질겁하였다.
여인들이 무덤 암으로 들어갔다는 묘사는 우선 무덤입구가 신기하게도 열려 있었다는 사실(4절)을 재확인시켜준다. 그런데 그 여인들은 자기네들이 찾고자 하는 예수님의 시신을 찾지는 못했고, 그 대신에 ‘흰 옷’을 걸친 ‘한 젊은이’를 보게 된 것이다. ‘흰 옷’은 하얀 천으로 만들어진 두루마기와 같은 긴 드레스를 가리키는데, 천상적 使臣을 묘사할 때 흔히 사용되는 표현이기도 하다(참조 : 2 마카 3,26. 33 ; 마르 9,3 ; 사도 1, 10 ; 묵시 6,11 ; 7,9. 13),) 그러니까 그 여인들은 부활한 예수를 본 것이 아니라, 천사를 본 것이다. 그 여인들이 ‘질겁하였다’는 묘사는 시현사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이다. 즉 ‘경이로운 신비’에 사로잡힌 인간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천사가 ‘오른편에 앉아 있었다’는 묘사는 아마도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알리는 천사(6-7)의 권위를 부각시키려는 표현일 게다. 그 묘사내용이 복음사가에 따라 각기 다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고 하겠다.
그러자 그는 그 여인들에게 말했다. “질겁하지 마시오! 여러분은 십자가에 처형되신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고 있습니다만, 그분은 부활하시어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 보시오! 그분을 안장한 곳입니다. 그러니 떠나가서 그분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그분께서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바대로 그분은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것이니, 여러분은 거기서 그분을 뵙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시오.”
천사는 몹시 놀란 여인들에게 ‘질겁하지 마시오’하며 먼저 위로의 말을 한다. 희랍어로된 원문에서는 ‘말한다’(λεγει) 곧 현재형으로 되어 있다. 그렇지만 필자는 우리말의 문맥에 맞게 ‘말했다’로 번역하였다. 여기에서도 앞서 언급했듯이 ‘역사적 현재형’이 사용된 것이다. 마르코는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알리는 천사의 모습을 생생하게 재현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천사의 이 위로의 말은 천사가 전할 메시지를 경청하도록 그 여인들의 마음을 준비시키는 데에 기여한다. 천사는 무덤 안으로 들어온 여인들에게 ‘십자가에 처형되신 나자렛 사람 예수’는 부활했기 때문에 그 시신을 볼 수 없다고 말한다. ‘십자가에 처형되신 나자렛 사람 예수’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지상운명을 간략하게 요약해주는 말이고, 또한 부활한자가 곧 수난을 겪고 십자가에 처형되어 죽은 바로 그 예수라는 사실을 밝혀준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했다’는 표현은 신학적인 의미가 내포된 수동형으써, 죽었던 예수님께서 하느님에 의해서 ‘일으켜졌다’는 것을 뜻한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에 의해서 ‘십자가에 처형되어 죽고 무덤에 묻혔다’는 것과 대조를 이루는 표현도 된다. 즉 신적인 행위와 인간적인 행위가 크데 대조를 이룬 것이다. 이와 같이 천사는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을 알려준 것이다.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이제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 새로운 존재의 차원에서 생존해 게시기 때문에 무덤 안에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참조 : 참조 루가 24,6 ;사도 2,24-31),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무덤은 시신이 안장되는 장소일 뿐 아니라, 죽은 자들의 거처였다. 따라서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했다’는 것을 예수님의 시신이 더 이상 무덤 안에 갇혀 있지 않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무덤이 비어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했다’는 사실을 보증해주는 하나의 표징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천사가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시신이 안장된 곳을 지시하면서 보라고 말했다는 것도 그 사실을 재확인시켜주는 역할을 한 것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무덤이 비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부활했다’는 논리는 결코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했기 때문에 무덤 안에서 예수님의 시신을 볼 수 없게 되었다는 논리라고 하겠다. ‘그분은 부활하시어 여기에 계시지 않습니다’는 천사의 말은 바로 이 논리에 따른 표현이다. 이 논리가 4절의 내용에도 적용된다. 즉 예수님께서 부활했기 때문에 무덤입구가 열려져 있게 된 것이다.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무덤 안에 갇혀 있지 않기 때문이다. 천사는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가서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알리도록 그 여인들을 보낸다. 이제 그 여인들은 천사의 사신들이 된다. 그러나 그 여인들은 아무에게도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알리지 않았던 것으로 마르코는 묘사한다(16,8).여기에서 무엇보다도 부활 메시지가 근본적으로 선포되고 전파되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천사의 입을 통해서 시사된 것 같다. 그리고 마르코는 제자들이 그 여인들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듣고서 부활신앙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했었으리라 여겨진다. 마르코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체포되었을 때 제자들 모두는 예수를 버리고 떠났다(14,50) 베드로도 예수를 세 번이나 배신했다(14,66-72). 바로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소식이 우선적으로 알려지게 되는데, 이것은 제자들의 사명을 시사해주는 객관적인 보도라기 보다는 제자들이 예수 부활의 첫 번째 증인들이었다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견해에 따라 윤색된 내용이라 하겠다. 사실상 제자들은 예수로부터 부활에 관한 가르침을 직접 들었고(마르8,31 ;9,31 ; 9,9 ; 10,34 ; 14,28). 예수 부활의 첫 번째 증인들이었던 것이다(1고린 15, 5). 그러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듣고 신앙을 갖게 된 것은 그 여인들의 증언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깊은 체험 곧 부활한 예수와 함께 나눈 친교로 인한 것이라 하겠다(참조 : 1고린 15, 5-11).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보다 앞서 갈릴래아로 갈 것이고 제자들은 거기서 그분을 만나보게 될 것이라는 천사의 이 말은 “나는 부활한 후에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입니다”(마르14,28)라는 예수님의 예언을 상기시키면서 동시에 예수님의 부활을 재확인해주는 내용이다. 달리 말하자면 예수님의 부활을 여인들에게 알리는 천사의 말(6절)을 보증해주는 내용은 아니다. 특히 ‘여러분에게 말씀하신 바대로’라는 표현은 예수님의 이 예언내용에 역점을 둔다. 즉 예수님의 예언대로 부활사건이 이루어졌다는 점이 강조된 것이다. 그뿐 아니라 예수에 대한 제자들의 신뢰심 내지는 예수 자신에 근거를 둔 제자들의 믿음은 부활한 예수님의 발현 체험에 기인되었다는 점이 간접적으로 시사된 것이다. 부활한 예수님께서 제자들보다 앞서 갈릴래아로 갈 것이라는 표현도 이미 예수님의 부활을 전제로 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다만 예수님께서는 이제 부활한 자로서 자신의 과업을 새롭게 수행할 것이라는 점이 강조되었을 뿐이다. 지상 예수님의 공생활이 갈릴래아에서 시작되었듯이 부활한 예수님의 새로운 활동도 갈릴래아에서 시작될 것이다.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불러 모아서 부활한 그리스도와 함께하는 공동체를 이룩하게 될 것이다.(참조 : 사도 1,11 ; 2,7)
그리고 그들은 밖으로 나와서 무덤에서 도망쳐 버렸다. 왜냐하면 그들은 전율과 공포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아무에게도 어떤 말을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서워했기 때문이었다.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들은 여인들은 기뻐서가 아니라 ‘전율과 공포’에 사로잡혀 무덤으로부터 도주해버렸다고 마르코는 보도한다. ‘전율과 공포’는 신적인 현시나 계시에 수반되는 것으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경이로운 신비’에 접하도록 해준다. 즉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님의 시신에 향료를 바르고자 벌벌 떨고 몹시도 당황했다는 것이다. 마르코는 이와 같은 묘사로써 천사는 그 여인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소식과 함께 압도적인 그 신비를 털어 놓고야 말았다는 것을 시사해준 것이라 하겠다. 마르코는 이어서 그 여인들은 제자들에게 가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리라는 부탁을 천사로부터 받고서도 겁이 나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다고 보도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소식은 어떻게 퍼져나갈 수가 있었을까? 이 점에 대해서 마르코는 분명히 밝혀주지 않는다. 아마도 마르코는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복음내용(1 고린 15,3-5)을 알고는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점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제자들이 예수 부활의 첫 번째 증인들이었다는 전통에 따라 다만 그렇게 묘사했을 뿐이다. 그러나 또 다른 관점으로 볼 때, 마르코는 아마도 형언할 수 없는 부활의 신비를 부각시키고자 의도적으로 그렇게 묘사했을 것이다. 즉 예수님의 부활은 오로지 믿음 안에서만 파악될 수 있는 하나의 신비라는 것을 시사하고자 했을 것이다. 사실상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곧 신비로운 일이다. 왜냐하면 선포된 복음말씀을 듣는다고 해서 누구나 다 신앙인이 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마르코의 메시지
마르코가 ‘빈 무덤사화’의 보도를 통하여 무엇을 말하고자 했는지를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토대로하여 요약정리해 보기로 하자.
① 여인들은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를 목격한 증인들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의 무덤에서 전혀 예기치도 못한 사건을 체험하였다 .즉 굳게 닫힌 무덤 입구가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고, 예수님의 시신은 볼 수가 없었으며, 예수님의 부활 소식을 알려주는 천사를 마주 보게 된 것이다. 마르코는 이런 내용을 마치 한 폭의 그림을 펼쳐 보이듯이 생동감 있게 이야기식으로 전한 것이다. 또한 마르코는 여인들이 참으로 예수님의 빈 무덤을 발견했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아무런 통찰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몹시 놀란 여인들의 모습만을 생생하게 묘사 하였을 뿐이다. 마르코는 아마도 독자들을 그 여인들과 함께 예수 부활의 신비에 젖어 보도록 이끌어보고자 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빈 무덤 사건은 마르코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하나의 신비요, 그 사건 자체는 예수님의 부활을 보증해 주는 하나의 표징으로만 여겨졌을 것이다.
② 마르코는 예수님의 부활 소식이 천사의 입을 통해서 선포된 것으로 묘사한다. 이런 묘사를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 소식은 하느님의 말씀이지 인간편의 조작이나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하고자 했었을 것이다. 복음사가들이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사화에 따르면, 예수를 가까이서 추종했던 제자들과 여인들은 한 번도 스스로 예수님의 운명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부활메시지를 받아들였을 뿐이다. 오늘날 독자들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전달되는 예수님의 부활메시지에 중립적인 자세를 취할 수는 없다.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겸허한 자세로 받아 들이느냐 아니면 자신의 완고한 마음과 변명으로 거부하느냐의 기로에서 있을 뿐이다.
③ 마르코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였다’는 사실을 세 가지 방식을 묘사하여 알려준다. 첫째로 무덤입구를 막아놓은 커다란 돌이 신기하게도 굴려져 있었기 때문에 공공연하게 무덤안을 드나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로 여인들은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 안에 있지 않은 것을 발견하고 확인했다는 것이다. 셋째로 부활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보다 앞서 갈릴래아로 갈 것이며 제자들은 거기서 그분을 만나보게 될 것이라는 메시지가 제자들에게 전달되어다는 것이다. 마르코에게 있어서 ‘부할’은 하느님의 놀라운 권능으로 인해 시신이 더 이상 무덤 안에 갇혀져 있지 않음을, 곧 죽은자들 가운데에 더 이상 있지 않음을 뜻한다. 따라서 마르코는 이와 같은 묘사방식으로 십자가에 처형된 나자렛사람 예수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죽은 자들 가운데에 있지 않고 존재의 차원을 달리한 채 살아있다는 것을 선포한 것이라 하겠다.
④ 천사는 예수님의 부활소식을 제자들에게 가서 알리도록 여인들을 파견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부활메시지가 근본적으로 선포되어야한다는 것을 강하게 시사해준다. 즉 부활메시지는 어느 한 특정인에게만 국한되거나 그 메시지를 듣는 자만을 위해서 간직되지 않음을 뜻한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님께서 제자들보다 앞서 갈릴래아로 갈 것이며 제자들은 거기서 그분을 만나보게 될 것이라는 말은 한 마디로 예수님의 과업의 지속성을 뜻한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한자로서 이제 자신의 과업을 새롭게 수행할 것이다. 비록 제자들은 예수를 배신하고 떠나갔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다시 불러 모을 것이며 그들에게 자신의 과업을 위임할 것이다. 그리하여 제자들의 설교는 부활한 예수님께서 기인하게 되고, 부활한 예수자신은 복음 선포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부활메시지를 듣고 받아들인 자는 그 메시지를 선포 할 임무도 부여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의 삶은 곧 증언의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엮어 나가는 것이라 하겠다.
⑤ 마르코는 ‘빈 무덤사화’를 마무리하면서 몹시도 놀란 여인들의 모습에로 독자들의 시선을 모은다. 예수님의 부활소식은 여느 소식과는 질적으로 다르기 때문이다. 그 소식을접한 자는 하느님의 놀라운 업적에 대면해 있기 때문에 ‘전율과 공포’속에서 압도당하고야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르코는 여인들이 너무도 무서워한 나머지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한 것으로 묘사한다. 마르코의 이 묘사는 두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하나는 예수님의 부활소식이 여인들의 입을 통해서 선포되지 않았음을 시사한 것이라 하겠고, 다른 하나는 마치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듯이 그 여인들도 예수님의 부활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시사한 것이라 하겠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인간의 몰이해와 완고함을 반영한 것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선포하기 위해서 인간은 누구나 성령의 활동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부각시켜준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마르코는 여인들의 이와같은 모습을 묘사해줌으로써 독자로 하여금 부활신비에 마음의 문을 열도록 자극을 주었다고 하겠다.
3. 토마스의 불신앙 –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 이후 제자들은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그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이 기쁨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요? 제자들은 너무도 기뻤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토마는 그곳에 있지 않았었습니다.
토마가 돌아오자 제자들은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지만 토마의 반응은 제자들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었습니다.
“내가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눈으로)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어 보고, 또한 내 손을 그분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 하겠소”
문득 토마의 모습을 우리 공동체 안에서 찾아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형제님! 우리 함께 신앙생활 합시다.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우리 말씀나누기도 하고, 평일 미사에도 나갑시다.”
“열심히들 해보셔. 난 바빠서 못 나가셔. 혹시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나를 끌고 가지 않는 이상 난 절대로 안 나갈거셔. 그리고 나 신앙 없어도 잘 살고 있으니까 나 방해하지 마셔. 놀기도 바빠서 시간 없으셔.(날아라 슈퍼보드의 저팔계 버젼)”.
토마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오늘의 우리 그리스도인과 너무도 같은 상황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토마도 예수님의 부활을 제자들에게서 전해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예수님의 부활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전해들은 것을 받아들였고 믿었는데, 토마는 믿지 않고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토마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을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전해준 것을 믿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믿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토마가 생각하기에는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난다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토마는 믿지 않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다. 사실 요즘 현대인들에게 종교는 그리 매력적인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귀찮게 하고 구속하는 것이 종교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기에 앞서 토마 사도처럼 어떤 구체적인 증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좋다. 나 예수님 믿겠다. 내가 믿을테니 예수님보고 나한테 나타나 주시라고 해라. 그렇게하면 믿겠다…”
사실 예수님을 대하는 사람들도 예수님께 의심과 불신을 드렸고, 표징이나 기적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토마가 믿던 믿지 않던 간에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 토마에게 일대 엄청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제자들과 함께 있는데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평화!”
토마 사도는 너무 기뻤을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또 다른 마음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 전의 불신이 그를 괴롭혔을 것입니다. 아마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지 않았을까요?
예수님께서는 토마의 부끄러운 마음, 불신의 마음을 향하여 말씀하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