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리아

 

사마리아의 유전 (遺傳)


 



우리는 신약시대의 사마리아 지방에 대하여 얼마나 알고 있는가? 설교자들은 흔히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다지방에 살던 유 대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을 “개”라고 지칭하며 천대했다고 설교 중에 말하기도 한다.


  다른 곳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 들이 사마리아 지방에 사는 사람들을 개 취급을 했다지만, 예수께서는 몇 번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 다니셨을 뿐만 아니라, 실제 적으로 사마리아 사람을 예로 들어서 가르침을 베푸신 경우도 있었다. 예수님의 승천 후에, 집사들 중의 한 사람인 빌립은 사마 리아에 가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런데 우리가 사마리아 사람이나 사마리아 지방에 대하여 이해를 제대로 하려면 [사마리아]라는 말에 얽힌 몇가지 이름들이 지 니고 있는 역사와 의미를 이해하고 넘어가야 한다. 그런 이름들 중에는 [사마리아 도시]와[사마리아 지방]과 [사마리아 사람]이 있다. 그 말들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먼저 [사마리아]라는 이름의 근원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자. 그 기원은 구약성경시대에 까지 올라간다 (왕상16:24).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져서 각축을 하던 중에 북조 이스라엘의 [오므리] 왕(기원전 885-874)이[셰메르]라는 사람이 소유하고 있던 산( 山)을 사서 왕도를 건설하게 되었다. 그는 [셰메르]의 이름을 따서 새왕도의 이름을 [숌론]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라틴어와 헬라어로 [사마리아]가 된 것이다. 정리하자면,[셰메르]라는 개인의 이름이 히브리어로 [숌론]이라는 도시의 이름으로 발전한 것이 라틴어와 헬라어 발음으로 [사마리아]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마리아]라는 이름과 관련하여 우리가 첫째로 생각하여 보아야 할 것은 [사마리아]라는 도시이다.  [사마리아] 도시 는 세겜에서 보면 서쪽으로 약 20 km 떨어져 있다. 북조의 오므리가 사마리아를 사서 새로운 도읍을 이룩한 것은 다윗이 예루살 렘을 차지하고 새로운 도읍을 이룩한 것과 비견할 만한 일이었다. 이곳은 해안고속도로와 연결하기 좋은 장소이며 좀 더 국제적 으로 국가를 경영하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그래서 새로운 왕도 [사마리아]는 [오므리]의 국가경영 솜씨를 나타내는 대표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므리]는 집권하고 나서 처음 6년 동안에 국가의 힘을 기르고 적극적으로 시리아 ([아 람-다메섹])와 대결할 차비를 차렸다. 그는 페니시아와 동반자 관계를 맺고 아들 아합을 두로 왕 [에토 바알]의 딸 [이세벨]과 결혼시켰다. 그는 또 남조 유다와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의 손녀 [아달리야]를 남조 여호사밧 왕의 아들 예호 람(요람)과 결혼시켜서 (왕하 8:26) 남쪽에 안정을 취함으로써 그의 북방 정책을 실현하는데 걸림돌이 생기는 것을 미연에 방지 하였다. 오므리는 그러한 자기의 원대한 꿈들을 새로 구성한 [사마리아] 도시에서 하나씩 실현하여 나아갔고 그의 아들 아합도 사마리아를 본거지로 삼아서 국가를경영하였다.


  두 번째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사마리아 지방]이라는 확대된 지역 이름이다. 원래 세겜, 사마리아 (도시),이블르암, 티 르짜, 므깃도 같은 도시들이 있던 곳이 므낫세 지파의 영토가 되었다 (수 17). 이 므낫쎄 지파의 땅을 대충 어림잡아서 [사마리 아 지방]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그것은 물론 [사마리아]라는 도시가 북조 이스라엘의 정치와 문화의 중심적 역할을 해내게 되 었기 때문에 된 일이었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사마리아 도시를 중심으로 해서 그 근처에 있는 도시나 마을들이 [사마리아 지방] 의 대중을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가신 일이 있듯이 (요 4:5), [사마리아]라는 이름이 신약시대 에도 한 지방 전체를 가리키는 대명사로써 쓰였다.


  세 번째로,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을 생각하여 보아야 한다. 이 말은 사마리아 도시에 사는 사람이나 사마리아 지방에 사는 사 람을 뜻하며 또한 북조 이스라엘에 사는 사람을 대충 일컬을 때에도 쓰일 수 있는 말이었다.  우리가 네 번째로 생각해야 할 것은 [사마리아] 왕도와 [사마리아 지방]이라는 이름들이 변천을 겪게 되어 새로운 뜻을 품게 되 는데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지 않고 그저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그 확실한 전환기는 아씨리아가 북조 이스라엘을 침공 하여 [사마리아] 도시를 멸망시킨 기원전 722년에 시작되었다(왕하 17:3-6).  아씨리아는 사마리아 지방에 살던 이스라엘 사람들 일부를 잡아서 아씨리아로 이주시켰다. 사마리아 도시를 중심한 사마리아 지 방 사람들이 많이 잡혀 갔겠지만, 북조 이스라엘의 다른 도시들이나 마을들에서도 포로로 끌려간 사람들이 있었다. 그리고 아씨 리아는 사마리아 지방의 빈 공간에 아씨리아 제국의 여러 곳에서 데려온 사람들을 이주시키고 아씨리아 총독 관할 하에 두었다. 괴스타 알스트룀 같은 학자는 아씨리아 관할 하의 사마리아 지방은 [사메리나] 지방이라고 구별하여 불러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씨리아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가 이스라엘을 차례로 석권하게 될 때에 사마리아는 그 부침(浮沈)에 늘 영향을 받았다.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과 아씨리아 사람들이 섞여서 혼혈하게 된 기원이다. 이 혼혈인들을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하는 것 보 다는 [사마리탄] 사람들이라고 하는 것이 더 올바를 것이다. [사마리탄]들은 꾸준하게[사마리아 지방]에서 번성하면서 신약시대 에까지 이어져 내려 오고 있었다. 그들의 후손들은 지금도 그리심산 위에서 마을을 이루며 살고 있다. 한글 성경에는 이 사람들 을 “사마리아” 사람들이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영문 성경들에는 “사마리탄”이라고 되어 있다. 예수께서 선 한 사마리탄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눅 10:33) 또한 수가라는 마을 근처에서 사마리탄 여자에게 진리를 깨닫게 가르치셨다 (요 4: 9). 그러니까 “사마리아 사람”이라는 말은 시대를 막론하고 사마리아 지방이나 사마리아 도시에서 온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긴 하겠지만, 반면에 “사마리탄”을 가리킬 때도 많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신약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 지방]에 살던 사람들을 경멸하였다. 근동의 여러 곳에서 온 족속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이 혼혈하여 생긴 잡족이라는 것이 그 이유의 밑 바닥에 깔려 있었다. 그러나 자세히 따지고 보면, 이것은 하나의 구실일 뿐이고 남조와 북조의 불협화음은 그 보다 훨씬 전에 이미 반목과 갈등의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그 좋은 예가, 솔로몬이 죽은 후에 통 일왕국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쪼개지는 큰 불행이 세겜에서 일어난 것이다. 세겜의 중요성이 나중에 사마리아로 옮겨 갔을 뿐이 며, 그들은 다 같은 사마리아 지방 혈족이었다. 그 만큼 북조 이스라엘과 남조 유다 사이의 지파간 반목과 불신은 뿌리 깊은 것이었다. 이러한 반목은 남조 유다가 멸망하고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 갔던 사람들이 돌아 와서 예루살렘을 재건할 때에도 잘 드러나 있다 . 즉 사마리아 지방 사람(사마리탄)들이 그 일을 못 하도록 방해하였다 (느 3:33-4:2). 그러니 남쪽 유다인들이 사마리아 사람들 을 더욱 싫어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여간 이스라엘 밖에서 사마리아 지방으로 다른 족속들이 들어 와서 섞여 살게 되었다 는 그 사실은 남쪽의 유다인들이 사마리아 지방에 살던 사람들을 경멸하는데 무척 좋은 자료를 제공하게 된 셈이었다. 예수 시대의 사마리아 지방은 이렇게 복잡한 배경을 가지고 있던 지방이었다. 그 지방에 있는 여러 도시/마을들 중에서 신약성 경에 언급되고 있는 이름은 [사마리아] (헤롯이 [세바스테]로 개명)와 [수가]가 있다. 예수께서는 사마리아 지방을 여러번 지나 다니셨다 (참조: 요 2:13; 3:22; 4:4; 5:1; 7:1-10; 11:54). 헤롯왕은 사마리아를 유럽 풍으로 재건하고 자기의 후견인인 로마 황제 어거스터스의 이름을 헬라어표기로 [세바스테]라고 개명하였다. 발굴된 유적을 중심으로 생각하건대, 신약시대의 사마리아 도시는 무척 번성하고 화려한 도시이었다. 사마리아의 중 심부에는 어거스터스 황제를 기리는 신전을 웅장하게건립하였다. 헤롯이 예루살렘에는 유대인들을 위한 성전을 건립하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가 시세(時勢)에 민감한 정치꾼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예수께서 활동하던 때의 도시 사마리아 (세바스테)는 아직도 헤롯 대왕의 자취가 역력하던 시대이었다. 그곳은 이방 문화의 집 산지로써 로마 황제를 신으로 떠 받들고 잡신들을 섬기던 곳이었다. 무당 시몬이 예수를믿는 신자로 개종하는 과정이 그런 사회 상의 단면을 보여 주고 있다 (행전 8:4-25). 그런 곳에 빌립이 예수의 복음을 전하러 가서 유다지방 밖에 선교 거점을 이룩하였 으니 그의 신앙이 담대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세진 교수 (이스라엘 예루살렘대학 성서고고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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