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데 대왕

 

헤로데 가문의 통치




헤로데 집안의 족보는 가까운 친인척끼리 맺는 근친혼(近親婚)과 배다른 형제의 부인들과 맺는 수숙혼(嫂叔婚)으로 매우 복잡하다. 게다가 동명이인이 많은 만큼 주의 깊게 살펴야 혼동이 없을 것이다.




가. 헤로데 대왕


기원전 37년부터 4년까지 온 이스라엘을 다스린 헤로데는 긍정적으로든 부정적으로든 대왕이라고 불리는 데 조금도 손색이 없다. 그는 타고난 건강과 지략을 바탕으로 정적을 제거하는 데 빈틈없고 잔인하였으며, 자기가 지배하는 자들 앞에서는 권위와 오만을 마음껏 드러낸 반면, 로마의 권력자들 앞에서는 맹종과 충성을 약속하였다. 의심 많고 잔인한 그의 성격은 삼왕의 방문과 베들레헴의 영아 살해를 전하는 마태오복음서의 기록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헤로데는 이두메아인이었기 때문에 유다인들에게 이방인으로 비쳤다. 그래서 그는 유다적인 것이면 무엇에나 관심을 보이는 체하였으나 실제로는 철저한 헬라주의자요 완전한 이교도였다. 그의 생활양식과 활동, 예루살렘 성전을 비롯한 그의 건축 사업이 이를 잘 반영한다.


그의 통치는 세 시기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권좌의 확립(37-25년), 번영(25-13년), 그리고 내정의 갈등(13-4년)이 그것이다 전체적으로 그는 능력 있는 통치자였으며 놀랄 만한 업적도 많이 남겼다. 로마와의 친분과 협력 관계에서 드러난 탁월한 정치적 수완은 온 이스라엘 땅에 안정과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헤로데는 위대한 건축가였다. 그의 건축 사업은 오늘날까지도 그 흔적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그는 자신을 지지해 준 사마리아인들에게 보답하고 아우구스투스에게 충성을 표시하는 뜻으로 황폐한 사마리아를 세바스테(아우구스투스 황제의 다른 이름)로 바꾸어 재건하였다. 또 아름다운 부두를 갖춘 항구도시 가이사리아를 건설하여 로마 황제에게 바쳤다. 그 밖의 많은 도시에 이교 신전과 헬라식 체육시설들을 세우고 여느 헬라 도시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건축물들로 예루살렘을 다시 건설하였다. 특히 예루살렘 성전은 헤로데의 걸작 가운데 하나이다. 즈루빠벨이 세운 성전 구조는 낡고 잇따른 전쟁으로 곳곳이 파괴되었으며, 순례 축제 때마다 모여드는 군중을 수용하기에는 턱없이 비좁았다. 성전 재건은 기원전 20년 또는 19년에 시작되었다. 여기에는 천여 명의 레위인들이 참여하였다. 먼저 성전 경내를 넓히고 기본 구조물을 세우는 데 1년 반이 걸렸다. 그러나 후속 작업은 성전이 로마인들에게 파괴되는 기원후 70년까지 계속되었다. (요한 2,20: ‘이 성전을 짓는 데 사십육 년이나 걸렸다.’ ). 예루살렘 성전을 지으면서도 헤로데는 로마에 대한 충성을 드러내려고 성전 정문에 로마 군대의 표상인 황금 독수리의 부조를 새겨 넣었다.


헤로데는 정적이 많았다. 유다인 신하들이 그를 완전한 유다임금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으며, 로마의 불안정한 정치 판도는 언제나 그를 긴장시키고 끊임없이 정책의 방향을 바꾸게 만들었다. 또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는 권력을 잡은 여러 로마인들의 정부가 되어 헤로데가 다스리는 이스라엘을 자기 영토에 병합시키려고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헤로데는 의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자기 자리를 탐낸다는 이유로 수많은 귀족과 관리들을 처형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헤로데가 일시적인 병을 앓을 때 그를 제거하려 했다가 극심한 고문을 당하고 처형된 서기관 유다스와 마티아스도 있었다. 헤로데의 사생활과 가족생활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비극적이었다. 그는 자신을 제거할 음모를 꾸민다고 의심하여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을 유배하고 감옥에 가두거나 심지어 처형하기까지 하였다. 그의 첫 부인 도리스에게서 난 안티파테르, 마리암네 1세에게서 난 알렉산더와 아리스토불루스도 모반 혐의로 헤로데에게 처형되었다. 아우구스투스는 헤로데의 이런 행동과 유다인들의 음식 규정을 연관시켜 “헤로데의 아들이 되기보다는 그의 돼지가 되는 것이 더 안전하다” 하고 말하였다. 기원전 4년 그는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예리고 궁전에서 생을 마쳤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유다인들 가운데 아무도 자기 죽음을 애도하지 않을 줄 알고 감옥에 있던 유다인 남자 수백 명을 자기 죽음과 때를 맞추어 살해하라는 명령을 미리 내렸다고 한다. 그래야 자기가 죽고 나서 유다 땅에 곡소리가 들릴 터이니까!


헤로데가 죽자마자 예루살렘 주민들은 서기관 유다스와 마티아스의 처형을 빌미로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그의 큰 아들 아르켈라오가 군대를 풀어 대대적인 학살을 자행하였다. 아르켈라오가 동생들과 함께 헤로데의 왕권을 이어 받으려고 로마로 떠났을 때 유다에서는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났다. 이번에는 시리아의 총독 바루스가 반란을 진압하고 더 이상의 소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예루살렘에 로마 군단 레지오를 남겨 놓았다. 그러나 그 뒤에도 작은 소요가 계속되다가 갈릴래아와 베레아에서 큰 반란이 터져 나왔다. 바루스는 또다시 반란을 진압하고 이천 명이 넘는 반도들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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