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우디우스-기원후 1-2세기의 로마 황제들

 

클라우디우스




41년 칼리굴라가 살해되자 원로원은 다시 공화국 체제를 회복하려고 하였으나, 칼리굴라를 제거한 친위대가 꼭두각시 황제를 하나 내세워 그 배후에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는 바람에 그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친위대는 병영에서 칼리굴라의 삼촌 클라우디수스(Tiberius Claudius Nero Germanicus)를 황제로 추대하였다. 원로원 의원들도 깊이 논의한 끝에 그를 황제로 인정하는 데 찬성하였다.


클라우디우스는 13년의 통치 기간 동안 친위대나 원로원이 전혀 예상치 못한 훌륭한 정치를 폈다. 새 황제에게 합당한 칭호와 존경을 바치기로 결정한 원로원은 곧바로 클라우디우스의 전임자 칼리굴라를 불명예스럽게 할 조치를 취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클라우디우스가 이를 만류하고 그 대신 칼리굴라의 이름과 업적을 모든 공식 기록에서 삭제하게 하였다. 칼리굴라의 축출이 과대한 칭호와 영예의 요구 때문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던 클라우디우스는 의례적이면서도 적절한 몇몇 칭호,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는 예식, 자기 가문과 제국의 평화를 위한 제사 이외에는 원로원과 시민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할 만한 어떤 칭호나 영예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성전과 사제직은 신들에게만 유보된 것이라고 하면서 자신에게 성전을 지어 바치거나 사제직을 맡기는 전통을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클라우디우스는 자신의 인간적 한계를 똑바로 인식한 동시에 과도한 영예를 요구한 뒤에 닥칠 결과를 올바로 내다보았다.


클라우디우스의 가장 큰 업적은 제국의 질서와 안정을 되찾은 것이었다. 이집트 북부 알렉산드리아의 시민들에게 보낸 그의 편지를 보면, 그가 로마 제국의 평화를 위하여 얼마나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그 당시 알렉산드리아에는 유다교의 전통과 관습을 고수하는 유다인들과 그 밖의 다른 민족들 사이에 갈등이 고조되고 있었다. 양쪽에서 황제에게 대표들을 파견하여 자신들의 입장과 이익을 알렸다. 클라우디우스는 한편으로 오래 전부터 이 도시에 자리잡아온 유다인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그들이 고유한 종교 전통을 지키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유다인들에게 그들이 이 지역에서 이방인들임을 상기시키면서 그들을 환영하지 않는 다른 민족들의 모임이나 행사에 공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자제하라고 경고하였다.


수에토니우스는 크레스투스(Chrestus) 때문에 계속 소요가 일어나자 클라우디우스가 유다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였다고 기술한다. 여기서 말하는 크레스투스는 크리스투스일 가능성이 높고, 결국 로마에서 일어난 이 소요는 나자렛 예수를 ‘기름 부음 받은 자’ (Chrisrus), 곧 메시아로 인정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이를 부인하는 유다인들 사이의 갈등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짧은 통치 기간에 비하여 로마의 질서와 안정을 위하여 놀랄만한 업적을 많이 남긴 클라우디우스는 불행하게도 자신의 아내이자 네로 황제의 어머니인 아그리피나에게 독살되었다. 로마 역사가들은 아그리피나가 독버섯을 먹여 남편을 살해하였다고 증언한다. 생전에 자신의 신격화를 단호하게 거절한 클라우디우스의 소신과는 달리 원로원은 그가 죽은 다음 곧바로 그를 신으로 인정하였다.




이 글은 카테고리: 신약성경이야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