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굴라
37년 티베리우스가 죽자 원로원은 그가 황제 자리에 오를 때 정적이었던 게르마니쿠스의 아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황제로 선포하였다. 가이우스는 ‘칼리굴라’ (caligula 장화)라는 별명으로 더 잘 알려졌는데. 이 별명은 그가 어릴 때 장화를 즐겨 신었던 데에서 유해한다. 25세에 권좌에 오른 칼리굴라는 오만함과 잔인함으로 악명이 높았던 인물이다. 그는 지도 체제의 대표라는 뜻의 ‘프리쳅스’ 칭호를 ‘절대 군주’로 해석하였다.
칼리굴라는 로마인들에게 자신을 신으로 떠받들도록 강요하였다. 그는 외국에서 유명한 신상들을 수입한 다음, 신상들의 머리를 자기 머리 모양으로 바꾸어 자신의 신령한 영에게 바쳐진 새 신전들에 세워 놓았다. 이 신전들에서는 수많은 사제들이 온갖 기이한 제물을 바쳤다. 칼리굴라의 신격화는 원로원과 일부 로마 시민들의 반발을 샀다. 칼리굴라의 선임자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는 언제나 열광적인 황제 숭배자들과 신중론자들 사이에서 중립을 지켜왔는데, 칼리굴라는 이런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칼리굴라가 요구하는 신적인 예비와 공경을 거부하는 자들은 모두 박해의 대상이었다. 야훼 하느님 이외에 어떤 신도 섬기기를 거부하는 유다인들은 당연히 그의 분노의 표적이 되었다. 칼리굴라는 예루살렘에 자기 동상을 세우라고 지시하여 유다 사회 전체의 반발을 샀다. 필로가 이끄는 단체를 비롯하여 여러 유다 단체들이 황제의 명령을 취소해 달라고 아그리빠 1세를 통하여 청원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다행히 시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가 명령의 집행을 지체하는 사이에 황제가 친위대 병사들에게 살해됨으로써 큰 소요 없이 위기를 넘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