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인자에 관한 환시(1,9-20)
1. 12~19절 개관
요한의 두 번째 예언자적 체험은 일곱 개의 황금 등경 한가운데 나타나신 ‘인자 같은 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여기서 요한이 본 환시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자 같은 분에 대한 묘사 내용이 환시의 첫 번째 부분이며, 두 번째 부분은 인자 같은 분이 요한에게 전해주시는 말씀으로 되어 있다. 인자 같은 분이 요한에게 전해주시는 말씀은 묵시 1장에서 끝나지 않고 일곱 교회들에게 전할 메시지를 받아 적은 내용을 전해주는 3장까지 지속된다. 인자 같은 분에 대한 환시 속에는 구약성서에 나오는 두 인물이 본 환시가 모델로 등장하곤 한다. 첫 번째 모델은 에제키엘이 본, 대 개막 환시로서 인자 같은 분에 대한 환시의 구조 자체의 원형 역할을 하고 있다.
에제키엘 본 환시의 형태를 보면, 그 환시는 두 시기에 걸쳐 이루어지고 있다. 첫 번째 시기에는 4명의 케루빔이 옮겨 놓은 옥좌가 나타난다(1,4이하). 뒤이어 야훼의 영광을 닮은 모습을 하고 있는 한 존재가 나타나는데, 예언자 에제키엘은 그분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런데 그 신비스러운 존재는 예언자 에제키엘을 안심시키고,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에게 행할 선교사명을 맡기게 된다. 두 번째 시기에는 예언자 에제키엘이 영에 이끌려 들어 올려지게 되고, 등뒤에서 멀어져 가는 야훼의 영광의 소리를 듣게 된다(3,12이하). 예언자 에제키엘은 비탄 속에 잠겨 얼마간의 시간을 보낸 뒤, 마침내 야훼의 영광을 보고, 자신이 수행해야 할 선교 사명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설명 듣게 되는 장소로 가야만 했다(3,22 이하).
에제키엘이 본 개막 환시는 파트모스 섬에서의 자신이 겪었던 예언자적 체험을 묘사하려는 요한에게 하나의 구조적인 틀을 제공해 주었음이 분명하다. 그 같은 점은 에제키엘이 본 환시 내용이 계속적으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로서 입증이 되고 있다(4장과 10장). 에제키엘이 본 환시와 요한이 본, 인자 같은 분에 관한 환시 사이에서 중요한 한 가지 차이점을 볼 수 있다. 즉 에제키엘서에서는 야훼 하느님의 특성을 지니고 있는 그 존재가 옥좌에 관한 환시 이후에 나타나지만, 요한 묵시록에서는 그와 반대이다.
두 번째 성서적 모델은 다니엘서이다. 다니엘서 7-12장에서 소개하고 있는 메시아적 환시 내용들이 재 투영되고 있다. 다니엘 에언서의 경우 우선 환시들이 보여지고, 뒤이어 천사적 본성을 지닌 인물이 전해주는 설명 내용이 뒤따라 나타난다. 그러나 환시들은 최종적으로 설명해 주는 것은 또 다른 인물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이 인물 역시 다니엘 예언자에게는 천사적 본성을 지닌 사람처럼 보여지지만 위엄을 갖춘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앞서 그 모습을 드러낸 바 있는 태고적부터 계신 이와 흡사하다(다니 10,5).
계시를 전달하는 기교 면에서 보면 에제키엘서보다 다니엘서가 더 단순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다니엘서에서 보면, 환시에 대한 설명은 두 시기에 걸쳐서 이루어지는데, 두 번째 시기에 설명하는 사람은 첫 번째 시기에 설명하는 사람보다 상급 주석자여야만 한다. 요한은 다니엘서에 나타난 그런 과정을 그대로 갖다 쓰고 있다. 즉 계시의 두 순간은 옛 구원 경륜(구약시대)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현된 구원 경륜(신약시대)의 역사적인 두 단계에 상응하는 것이다. 요한에게 있어서보다 출중한 인물이며 결정적 계시의 저자는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2. 12절 : 일곱 개의 황금 등경
일곱 개의 황금 등경의 이미지는 분명 그 기원을 구약성서에 두고 있다. 출애 25,40과 37,17의 내용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즈가 4,10은 등잔의 이미지가 천하를 살피는 야훼의 눈이라고 상세하게 설명해 준다. 우리는 요한이 묵시 1,4와 4,5에서 기술하고 있는 하느님의 일곱 영에 대한 상징적인 의미를 즈가 4,10에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묵시 1,4과 4,5를 연계시켜 볼 때, 일곱 영의 이미지는 성령을 지칭하는 것으로 주석되어야만 하고, 1,20의 설명은 부차적으로 덧붙여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또, 1열왕 7,49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솔로몬의 성전의 지성소에 놓여진 10개의 금 등잔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내용은 1마카 4,49와 2마카 1,8; 10,3에서도 나타난다.
다음으로는 마태 5,14-16을 떠올릴 수 있다. 신약성서의 이 내용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행하는 증언이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를 설명해 주기 위해 등불의 이미지가 사용되고 있음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대부분의 성서 본문들은 이처럼 금으로 된 등잔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요한 묵시록은 어떤 면에서, 금으로 만든 등잔을 특별하게 취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순수한 상태에서 하느님께 바치는 경신례를 위해 그것이 사용되고 있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12절에서 언급된 황금 등경을 이해하기 위해 구약성서의 내용들을 살펴보았는데,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이 구절을 이해해야만 저자의 정확한 의도를 왜곡시키지 않는 것일까? 우리는 마치 요한이 구약성서에 나오는 일곱 등경에 관한 내용 중에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 하나 갖다 썼던 것인 양, 일곱 등경이라는 형태가 구약성서의 본문들과 유사한 내용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요한은 1열왕 7,49에서 구별되는 등잔을, 출애 25,40과 즈가 4,10에서는 일곱이라는 숫자를 갖다 썼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황금 등경의 이미지가 마태 5,14에서의 의미로 변형되었다고 보고 있다. 다시 말해서 묵시 1,12는 즈가리아서의 의미로 이해되어져야만 한다. 12절에서부터는 20절에 가서야 비로소 소개될 주석 내용을 구별해야만 한다. 20절에서는 일곱 등경이 일곱 교회들이라고 주석하고 있다. 20절 이하에서는 일곱 등경이란 보편적으로 이해될 수 있는 증언을 해 나가면서 행실을 통해 충실성을 간직해 가며 기다림의 순간을 살아가는(마태25,1) 공동체의 이미지인 것이다.
3. 13-18절
여기서 소개되는 인자 같은 분의 이미지는 다니 7,13에서 빌어다 쓴 것이다. 여기에서는 초세기적 상황이 메시아적 기다림을 지속하고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니엘서의 예언은 유다이즘 안에서 이미 널리 유포되어 있었고, 에녹서나 제4에즈라서 그리고 랍비들의 글들 역시 폭 넓게 독자층을 가지고 있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인간적인 모습만을 묘사해 주려는 듯한 그 신비스러운 인물이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존재로서 인식된 메시아에 대한 열렬한 기다림을 표상해 주는 분이라고 믿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그런 점을 상기시킬 필요가 있다고 보았고, 그래서 인자라는 호칭을 예수께 의도적으로 부여했던 것이다.
여기서 계시자라는 인물을 인자와 동일시하고 있는데, 다니엘서에서 보면 인자는 옥좌에 앉아 계신 태고적부터 계신 이 앞으로 인도되어 가신 분으로 지칭되고 있으며 그것은 메시아를 표상해 준다(다니 7,9와 7,13-14).
황금 등경 한 가운데 나타난 인자는, 태고적부터 계신 이가 지니고 있는 특성과 결정적 계시의 주석가가(1,13-16) 지니고 있는 특성들을 소유하고 있다(다니 7,14-16).
요한은 에제키엘 예언자와 다니엘 예언자가 야훼 하느님께 부여하고 있는 특징들을 가지고 인자를 묘사해 주고 있다. 즉 요한은 인자의 머리와 머리털이 양털같이 희었다고 1,14에서 설명해 주고 있는데, 그것은 다니 7,9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서의 이미지는 야훼 하느님과 그분의 영원성을 특징적으로 묘사해 주기 위한 것인데, 그것을 인자에게 적용하고 있다. 요한은 그분의 눈이 타오르는 불꽃같았다고 1,14에서 설명해 주고 있는데, 이는 다니 10,6에서 따온 것이다. 그 같은 표현은 묵시 2,18과 19,12에서도 다시 나타난다.
여기서의 이미지는 하느님께서 보편적 심판관으로서의 권한을 지니고 계신다는 것을 표명해 주는 것인데, 그것을 인자에게 적용하고 있다. 요한은 그분의 발이 용광로에서 정련된 놋쇠 같았다고 1,15에서 설명해 주고 있는데 그것은 다니 10,6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서의 이미지는 하느님의 절대성을 표상해 주는 것인데 그것을 인자에게 적용하고 있다. 요한은 그분의 음성이 대단한 물소리 같았다고 1,15에서 묘사해 주고 있는데, 그것은 에제 43,2에서 따온 것이다.
여기서의 이미지는 하느님 계시의 보편성을 표상해 주는 것인데, 그것을 인자에게 적용하고 있다. 다니엘서의 내용을 그와 같이 수정하고 있는 것은 다니엘이 예고한 인자인 메시아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의미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다.
요한이 인자를 묘사해 주는 내용들은 인자인 예수 그리스도가 신적인 본성을 지니신 분으로서 야훼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시라는 것을 전해주려는 것이다. 모든 것은 마치 요한이 구약성서의 도움을 받아 서문의 신앙 고백 속에 담겨져 있는(1,4이하)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에 관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고자 했던 것처럼 전개되고 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요한은 메시아적 에언자들 가운데서 그 당시 널리 알려져 있던 인자에 관한 예언을 선택했던 것이다. 그러나 다니엘서에서는 인자라는 인물이 인간인지 신인지 분명하게 설명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요한에게 있어서 인자는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다. 묵시 1,7에서 무슨 이유로 요한이 다니엘서를 인용하고 있는지의 이유와 그 중요성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묵시 1,7에서 다니엘서 7,13을 인용하여 예수가 에언자들에 의해 예고된 메시아라는 주장을 앞당겨 해주었던 것이다. 묵시 1,12이하에서 소개되고 있는 인자 같은 분에 관한 환시는 묵시록 서문에서 이미 언급한 것을 보다 구체화시키고 그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 주기 위해 반복해 소개해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묵시 5장에서 어린양의 환시를 전해주는 내용을 볼 때 인자와 신성과의 관계는 아버지께로부터 나왔다는 의미에서 분명하게 구체화되고 있다.
요한이 파트모스 섬에서 본 환시 속에는 이처럼 인간들의 구원을 가능케 해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 제물에 관한 내용이 내포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환시의 초점이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에 맞추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이 환시를 통해서 강조해 주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하느님과 동일시하는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와 하느님과의 동일성을 표명해 주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특성들, 다시 말해서 영원성, 초월성, 보편적 통치, 심판자로부터 권능을 지니고 계신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그러한 특성들을 지니실 수 있는 조건이 영원성 속에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여정의 최종 결과인양 전개되고 있다. 그래서 요한은 그리스도를 인자로 칭하고 있는 것인데, 인자라는 이름은 두말할 여지없이 그리스도의 강생을 암시해 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강생 사건은 전 후가 있는 구체적인 시간 속에서 이루어졌다. 강생 이전의 시기, 즉 옛 계약의 시간은 ‘나팔소리 같은 큰 음성’(1,10)을 통해서 인자가 예고된 시간을 의미한다. 그 후에 요한은 황금 등경 가운데서 들려오는 음성을 알아보기 위해 뒤로 돌아섰다. 여기서 요한이 실제로 본 것은 인자가 아니다. 그가 본 것은 ‘일곱 개의 황금 등경과 등경들 가운데 서 있는 인자 같은 분’(1,12)일 따름이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는 첫 번째 계시를 성취하신 분이다. 강생 이후의 시간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일무이한 분으로 요한에게 직접 하시는 말씀들을 통해 종합되고 있다. 이 시간은 영원히 지속되는 생명의 시간에 속한다. 그리스도 자시도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며 살아있는 자’이다(1,17)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여기서는 생명이라는 개념이 강조되고 있다. 그 생명은 하느님께 유보된, 하느님의 또 하나의 다른 속성이다. 요한 묵시록 저자인 요한은 영원한 그 생명이 죽음을 통해서 얻어지게 되었다는 점을 강조해 주고자 한다. 죽음으로부터 승리할 것이라는 사상은 죽음으로부터 승리를 유일하게 전할 수 있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해 준다(1,18).
그 승리는 단순히 능력을 과시하는데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미 묵시 1,5에서 살펴본 바 있는 것처럼, 인간들의 구원을 위한 능력이다. 묵시 1,5에서 당신 피로,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셨다는 것이 여기서는 다른 형태로 소개되고 있다. 즉 요한은 환시를 보자 ‘죽은 사람처럼’ 그 앞에 쓰러졌으나, 그분은 요한에게 손을 얹으시고 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1,17). 하지만 여기서는 아직까지도 다니엘서의 내용을 재현하고 있을 뿐이다(다니 10,9-12).
묵시록의 이 본문과 다니엘서가 병행하고 있는 모습을 의미 축소시켜서는 안된다. 특히 신약성서에서 위로와 격려의 내용이 자주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더욱 그렇다. 즉 유년기 이야기와 부활을 전해주는 이야기 속에서 천사들이 하는 위로의 말이 그렇고, 빈 무덤에서 천사가 예수의 부활을 선언하고 발현을 예고하는 내용 속에서 그런 언어 표현을 사용하고 계신다.
“쓰러졌으나 오른손을 얹으시고”라는 대조 형태의 모습은 세상의 주인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종들을 걱정하시고 염려하시는 바로 그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전해주려는 것이다. 그분은 인간에게 다가와 말씀하시고 격려하시고 오른손을 얹으시는 분으로서 16절에 의하면 일곱 별을 손에 쥐고 계신 분이시다.
그러나 ‘죽은 사람처럼’이라는 표현은 다니엘서의 표현보다 훨씬 강렬하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강생하시어 세상에 오시기 전의 인간들의 상태를 엿보게 하는 것 같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시기 전까지 인간들은 원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들과 같은 사람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영원한 생명 즉 신적 생명을 죄로 인해 잃어버린 자들이었다. 그러나 인간 조건을 6,7-8에서 저자는 구체적으로 밝혀준다.
4. 왕이요, 사제요, 보편적 심판관으로서의 인자 (이 부분부터는 녹음이 됨)
13절에서는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두르고 있었다”라고 되어 있다. 요한은 인자가 입고 있는 옷에 대해서 상세하게 전해주고 있는데, 이 긴 옷은 히브리 사제들이 입고 있던 옷을 지칭한다. 즈가 3,4; 지혜 18,24; 집회 45,8; 50,11에서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대사제들이 입던 옷을 지칭하는 것뿐만 아니라 왕들과 고관들이 특권적으로 입던 옷이기도 했다. 사회적으로 통용되던 옷이기도 했다. 의복이 지닌 사회적인 개념도 이 속에 들어가 있다.
이레네오 교부이래, 주석학자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성서학자들은 이 ‘긴 옷’이라는 표현이 대사제와 왕의 특성을 표명해 주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인자가 이 긴 옷을 입고 있다는 1,13의 정확한 묘사 내용에 근거해서 여기서 말하는 긴 옷은 그리스도의 왕권과 사제직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성서학자들은 주장을 한다.
우리는 요한이 구약성서의 내용을 다시 갖다 사용함으로써 그것이 지금 언급한 의미 이외에 또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다니엘서를 보면 ‘긴 옷’은 다니엘 예언자가 본 환시들을 결정적으로 설명해 준 인물이 입던 옷이었기 때문이다(다니 10,5).
물론 요한은 두말할 나위 없이 다니엘서에서 말한 그 인물이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 이라는 것은 사제의 복장을 지칭해 주는 전문적인 용어로써, 묵시록 저자에게 환시를 통해 나타난 인자가 참다운 사제로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가 이미 희생제사를 바쳤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사제가 하는 일에 있어서 본질적인 직무는 희생제사를 하느님께 바치는 것이다. 바로 이점은 요한이 본 환시가 십자가 죽음을 뛰어 넘어 부활을 통해 열어 젖힌, 그래서 이제부터는 전혀 변함이 없는 상태에서 인자가 행하시는 계시의 최고봉에 자리하고 있다는 새로운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이미 인자는 ‘죽음과 저승으로부터 승리하여 영원히 살아 계신 분으로’(1,18) 묘사되고 있고, 그런 점에서 더 이상의 새로운 변화는 있을 수가 없다. 인자는 왕으로서 인간을 원죄로부터 해방시켜 준 희생제사를 바치셨다는 점에서 영원한 사제이시다. 그러니까 예수의 왕권이 지니고 있는 역설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이미 요한 복음을 통해서 살펴보았다. 예수가 왕이라면 그것은 십자가를 통해서 왕이 되셨다는 점이다. 여기에도 이미 대사제가 입던 옷을 입고 있는 인자의 모습을 통해서 그 이면에는 희생제사를 봉헌하시는 물론 인자 당신 자신이 희생 제물로 바치셨다는 점이 있다. 그분은 창조에 있어서 주님성을 행하시는 분이시며 이것이 바로 왕권이 지닌 의미이고, 창조주 하느님 곁에서 온 세상을 대표하시는 권한을 지니신 분(사제직 직분을 수행하시는 것을 의미)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미 1,6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왕국을 이루게 하시고,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들이 되게 하셨다’라는 말을 통해서 사제직을 수행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이미 묘사된 바 있다. 이렇게 사제직 직분을 수행하시는 것은 당신 증언을 통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의 자격으로 행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여정을 성취하심으로써 보편적 심판관이 되시는 것이다. 보편적 심판관으로서의 특성을 지닌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여기에서 묘사되고 있는 내용들을 통해서 밝혀지고 있다. 즉 타오르는 불꽃같은 눈(묵시 1,14)과,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쌍날칼(묵시 1,16)이다. 그러니까 옛날부터 심판이라는 것은 엄정하게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현대 사회에서는 정치적인 타협에 의해서 심판이라는 것이 약자에게는 강하고, 강자에게는 별 의미 없는 것으로 보여지는 경우가 많다. 여기서 볼 때 보편적 심판관은 선택된 민족이든 아니든 이방인이든 누구든 관계없이 똑같은 기준에 의해서 엄정하게 이루어질 것이라는 모습이 날카로운 쌍날칼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드러난다.
그래서 묵시록과 다니엘서, 이사야서, 지혜서에서 보면 보편적 심판관을 지칭하기 위해서 ‘칼’이라는 이미지가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분의 타오르는 불꽃 같은 눈과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날카로운 쌍날칼은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즉 인간의 내면 속에 있는 비밀을 꿰뚫어 보고, 그래서 선과 악을 냉혹하게 분별해 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분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점을 묘사해 주고 있다. 예언자적인 전승은 하느님의 심판을 메시아가 도래하는 사건과 연계된다고 전해주고 있다. 바로 요한이 그러한 사상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즉 예수는 메시아이기 때문에 강생하신 예수 안에서 하느님의 심판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 요한 묵시록 전체 안에서 핵심주제로 나타나고 있다. 에언자적인 전승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요한 묵시록은 강생을 통해서 메시아로 오신 예수 안에서 이미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요한 복음에서 늘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예수의 현존 앞에 서 있는 내 모습 자체가 이미 심판의 순간을 맞고 있다는 점이 요한 묵시록 안에서도 계속 언급되고 있다.
요한 묵시록 저자에 의하면, 하느님의 심판은 분명 영원으로부터 진행 중에 있고, 역사의 흐름 속에 내재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진다. 그러나 묵시록 본문을 계속 읽다보면 알게 되겠지만 요한에게 있어서는 더할 나위 없이 출중한 사건, 즉 예수의 죽음이 구체적으로 가시화 될 때, 하느님의 심판은 절정에 달하게 된다. 하느님의 아들로서 예수가 높이 들어올려지는 그 순간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은 절정에 달하게 된다. 예수의 죽음은 이미 이루어진 사건들의 감추어진 의미와 그 사건들의 실제적인 가치를 벗겨 내주었을 뿐만 아니라, 심판의 판단 기준을 고정시켜 놓게 되었다. 그래서 이제 심판은 그 기준에 따라 이루어지게 될 것이고, 그것은 세상 끝날 까지 그런 모습으로 행사될 것이다. 그리고 그 심판 기준이 설정되었다면 하느님은 충실성을 늘 간직하시는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그 심판 기준은 세상 끝날 까지 변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더불어 종료된 하느님 심판의 첫 번째 단계는 원수들을 쳐부수기 위해 흰말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시는 하느님의 로고스에 대한 환시 속에서 묘사될 것이다. 즉 19,11이하에서 묘사될 것이다. 세상을 심판하러 흰말을 타고 오는 로고스 역시 불꽃같은 눈을 가지고 있고, 입에서는 날카로운 칼이 나온다. 그러나 그 때에는 아직 심판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로고스는 인자와 같이 사제들이 입는 긴 옷을 입는 대신에 이 19장에서는「피에 젖은 옷」을 입고 있다. 벌써 한 단계 진전된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다. 「피에 젖은 옷」이란 것은 로고스가 아직 감수해야만 하는 희생제사를 상징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분의 이름은 역시 그분 자신 외에는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있다.
선과 악, 생명과 죽음 사이에서 어느 것 하나를 자유롭게 선택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에게 내려질 하느님 심판의 두 번째 단계는 인자의 모습을 묘사해주고 있는 1,13-19에서 보여지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 스스로가 고통을 감수하는 희생제사로써 당신 자신을 십자가에 바침으로써 실제적으로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구체적으로 표명이 되었고, 하느님의 사랑이 결정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그 시각이야말로 심판의 결정적 순간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죽기까지 순종하신 그리스도를 죽음으로부터 되살리심으로써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승리하신 분으로 세상에 드러내 보이셨다. 바로 그리스도의 승리는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을 드러내는 것이며, 이제부터 부활을 통해서 영원히 현존하시는 그리스도가 심판의 기준점이 되는 것이다. 세상이 완성되는 그 시간까지 그분의 현존 안에서 어떠한 자세를 우리가 지니느냐? 어떠한 결단을 내리느냐? 에 따라서 순간 순간의 심판은 이미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심판의 의미가 실존적인 심판의 의미로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현존에 관한 신앙을 강화시켜주면서 실제적으로 밖에 직면해 있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강하게 전해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 이후에 나오는 내용 속에서 보면 “이제 네가 본 것과 지금의 일들과 이 다음에 일어날 일을 기록하라”라는 것이다. 여기서 의미하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의 사건이다. 그러면서 일곱 교회에 구체적으로 편지를 써서 보내는데, 일곱 교회에 편지를 써 보내라고 명령하시는 분은 1,13-19에서 묘사된 인자 바로 그분이다. 그러면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서는 “귀가 있는 자들은 여기 교회에게 하신 말씀을 들어라”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 그리고 실천하는 것 것이 실제적으로 심판을 살아가는 실제라는 점임을 분명하게 해주고 있다. 그래서 상징적으로 표상 되지만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 서술되고 있는 내용을 보면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는 각 교회가 처해있는 상황을 정말 구체적으로 꿰뚫어 보고 계신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로 출애굽의 해방을 이루기 위해서 모세에게 “내 백성이 고통 당하는 것을 보았고, 내 백성이 신음하는 소리를 들었다”라고 말씀하시는 야훼의 모습이 인자의 모습 안에서 그대로 보여지고 있다. 각 교회가 처해있는 구체적인 상황을 적나라하게 알고 계시고, 그들로 하여금 올바른 길로 걸어가게 함으로써 승리에 동참할 수 있는 자들이 될 수 있도록 촉구하는 이런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현존의 의미가 더욱 강하게 부각되고 있다. 그리고 선택의 귀로에 서 있었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이런 그리스도의 모습이 변질되지 않는 희망의 메시지로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있어서도 그리스도의 현존의 의미는 정말 우리 안에 더 강력하게 다가와져야 되는 것이고, 이것이 어떤 면에서 신앙의 성숙과 직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묵시록 저자가 본 지금 본 것, 지금에 일어날 일들, 그리고 다음에 일어날 일들로 변함없는 그리스도 현존의 사건이다. 바로 이것이 오늘 현대의 독자들로써도 꿰뚫어 볼 수 있는 안목과 시선을 갖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어떤 면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부분이며, 묵시록에서 귀담아 알아야 되는 부분이며 묵시록에서 배워야 될 그런 부분이 아니겠는가 싶다.
여기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는 상당히 구체적이고, 우리의 삶과도 직결될 수 있는 내용을 많이 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다뤄보아야 되는 부분이지만, 그 중에서 한 가지만을 생각해 보면 문 앞에서 사랑을 구걸하는 그러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강력하게 묘사되고 있는 그리스도의 현존의 모습이 오늘 우리에게 어떻게 제시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할 것이다. 요한 복음 4장에서 보면 하느님은 영과 진리로 예배하는 자들을 찾고 계신 분이다. 즉 우리보다 앞서 가시는 분이시다. 우리가 기다리고 계시는 분이다. 이렇게 우리를 기다리고 계시는 그분의 현존 앞에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서야 되는가? 바로 묵시록 1,3에서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고, 실천하는 사람이 복되다”라는 말씀처럼 행복한 삶의 여정이 묵시록 안에서 기술되고 그것을 배우면서 우리의 삶을 살아갈 때 진실로 그리스도께서 언약해 주신 이 복된 삶에 동참하게 된다. 토마에게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복되다”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믿는다고 하는 것은 행위를 수반하는 것으로 우리의 인식이 삶 속에 녹아 내릴 수 있는 노력들을 스스로 해 나가지 않으면,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듣기는 듣되 듣지는 못하는, 보기는 보되 보지 못하는 사람으로 전락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현존에 담겨 있는 확실한 이런 언약의 바탕 위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행복의 길이 제시된 이런 상태에서 이 길 외에 다른 어떤 길을 가겠는가하는 점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복음에 살아있는 모습이 된다면 복음서를 배우는 목적이 우리 안에 충만해 질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