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편지의 인사(1, 4-8)
이 부분은 묵시록 전반에 관한 핵심적인 내용이 요약되어 있다. 여기서 요약된 내용이 2장 이후부터 구원역사 흐름 속에서 다시 되풀이되어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부분이 전례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왜냐하면 찬미가 형태와 아멘 이라는 형태가 결합되어서 소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전례적인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삶 전체를 전례의 장으로 보시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전례적인 삶이라고 생각할 때, 여기서부터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윤리적인 삶의 형태가 나타난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의 실존을 아무렇게나 살아갈 수 없고, 아무렇게나 우리의 몸을 가눌 수 없고, 아무렇게나 행동할 수 없다는 이유가 바로 우리의 삶 자체가 전례적인 삶의 연장이라는 것 때문이다.
묵시록에 나오는 7개의 행복 중에서 첫 번째 행복은 예언의 말씀을 읽는 사람과 듣는 사람과 관계된다고 1,3에서 얘기했고 22,7에서 나오는 여섯 번째 행복, “내가 곧 오겠다. 복되어라 예언의 말씀을 충실하게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은 예언의 메시지를 충실하게 지키도록 촉구하는 여섯 번째 행복은 1,3에서 이야기하는 예언의 말씀을 읽고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천해야 된다는 것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므로 파트모스 섬에 유배가 있던 요한에게 계시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1,10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처럼 「주님의 날」에 모여있던 교회 공동체에 전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4-8 이 부분은 전례적 대화, 전례적 행위의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이 부분은 묵시록의 종결사인 22,6-21과 문학적으로 유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 중에서 동질성을 지니고 있는 부분을 보면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1,8)라는 1,4-8의 내용이 22,6-21 가운데서 특별히 22,13에서 보여진다. 1,8에서 ‘나는 알파요 오메가다“라고 말씀하시는 분은 하느님이다. 그런데 22,13에서 말씀하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다. 그런데 본성은 똑같다. 그 다음에 7절에서 언급된 것이 3인칭으로 되면서 인자의 도래를 예고를 표명하고 있는데, 22,7.12에서는 주어의 성격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오시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 공동체 전체가 아멘 이라고 응답하고 있고, 또 동일한 내용은 1,4의 내용이 개회 인사로 나타나고 마지막 폐회 인사는 22,21로 끝난다. 여기서 전례의 개회 인사는 삼위일체 하느님이 주체가 되시고, 폐회 인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체가 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묵시록 전체의 내용이 그리스도론적인 관점에서 그리스도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로 이것은 세상 역사의 흐름이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그리스도에게로 옮겨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제 그리스도가 역사의 구심점에 자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역사의 주인이시고, 그리스도가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이다. 물론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 하시는 하느님이 원천이다. 그러나 이제 역사적으로 강생하시는 그리스도, 부활을 통해 교회 공동체 안에 세상 안에 끊임없이 현존하시는 그리스도 이분이 역사의 중심에 서 계시는 분이며, 역사를 이끌어 가시는 분이다. 그래서 묵시록 전체의 내용이 그리스도론적 관점이 분명하게 표명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묵시록의 종결사는 예수가 종말론적 주님이시고 구원자이시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제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요한 묵시록은 편지를 통해서 실제적인 일곱 교회에 전달되고 있기는 하지만 전례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예수를 주님으로 섬기는 모든 공동체들에게 보내진 것이고,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전달된 메시지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은 묵시록은 전례적 독서의 대상이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개회 인사와 종결사를 보면 바로 그리스도에게서 모든 것이 종결되는 것을 알 수 있고, 이제 그리스도가 구심점이 되면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묵시록 5장의 어린양에 관한 내용 속에서 봉인된 책을 받을 수 있다. 5장에서 봉인이라는 것은 메시지의 비밀성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두루말이를 펼 수 있는 유일한 자로 그리스도가 제시되고 있다. 그런데 그 그리스도는 옥좌와 네 짐승과 장로들, 즉 세상 역사의 한가운데에 어린양이 서 있는 것이다. 여기서 살육 당한 것 같았다라는 것은 살육 당했지만 지금은 여기에 서 있다라는 것이라는 것은 살아있다라는 것이다. 그분은 역사의 구심점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하실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이 5장에서 드러나고 있다. 이런 내용에 뒤이어서 종결사에 가서 “알파요, 오메가요”라고 하면서 그리스도의 본성을 당신 스스로 계시하시면서 이제 세상 역사의 주관자가 바로 당신이심을, 세상 역사를 완성하시는 분이 바로 당신이심을 드러내는 종말론적인 주님으로서의 당신 자신을 드러내고 있다.
1. 삼위일체이신 하느님 (1,4-5a)
① 하느님 야훼
이 부분은 개회사로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에 대해서 묘사해 준다.
‘지금도 계셨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그분’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이름을 의미하는 것인데 8절에서 재차 언급되고 있다. 이 이름은 출애 3,14에서 모세에게 당신의 이름을 처음으로 계시하신 야훼라는 이름을 신학적으로 의미를 확대 해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야훼라는 하느님의 이름은 신앙의 결과로 이해된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출애굽에서 전해주신 야훼라는 이름은 실존적인 의미를 지닌 이름이다. 바로 「지금도 계셨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그분」 인류의 역사 속에서 어느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계속적으로 현존하고 계시고, 실존하고 계신 하느님의 특성을 표명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야훼 하느님은 역사의 순간 순간에 늘 변함없이 함께 계셨던 분으로서 신앙의 눈으로 우리가 역사를 바라봄으로써 지금도 이 자리에 계시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희망의 결실로서 다시 이 자리에 오시어 현존하실 분이 바로「지금도 계셨고, 전에도 계셨고, 또 장차 오실 그분 」이라는 표현으로 소개가 되고 있다.
② 성령
그분의 옥좌 앞에 있는 ‘일곱 영’은 성령을 지칭하는 개념이라는 것은 묵시록 안에서 항구하게 사용하고 있는 표현이다. 여기서 성령의 모습은 계약을 보증해 주시는 분, 또 파라클레이토스적인 요한적 개념으로서의 성령의 모습을 이야기해주고 있다.
③ 예수 그리스도
중요한 것은 역사의 구심점에 자리하고 계신 그리스도에 관한 표현들이다. 여기서는 충실한 증인으로써,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으로써, 땅위 왕들의 지배자라는 삼중적인 내용으로 그리스도가 선포되고 있다.
‘죽은 자들 가운데서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땅위 왕들의 지배자‘, 이것은 크게 보면 영광의 개념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라는 표현은 연대기적으로 우리보다 앞서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제일 먼저 살아나신 분’이라는 것은 구원의 문을 첫 번째로 열어 주신 그러한 분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닫혀졌던 하늘의 문을 열어 주신 모습이다. 모든 인간의 최종 희망인 이 영광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신 분이었다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영광은 충실한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얻어진 결과이다. 십자가의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임으로써 충실한 증인이 되셨던 그리스도는 세상에서 어떤 권세 앞에서도 당당하게 아버지를 증언하신 분이시다. 그래서 서간에서도 이야기하고 있듯이 그리스도의 이러한 순종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그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일으켜 세우셨다라고 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은 절박한 선택을 해야되는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신자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던져준다. 박해라는 피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던 그들은,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모습 속에서 희망과 용기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러한 희망과 용기는 어떠한 권세 앞에서 그리스도를 당당하게 증언할 수 있는 삶을 살게 해주었던 원동력이고, 그것은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수 있다는 강한 희망을 갖고 살아가게 해주었다.
이렇게 묵시록은 삼위 일체 하느님께서 개회 인사를 하시면서 구원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 계신다. 하느님은 지금 이 자리에 현존하여 계시고, 그 현존함 가운데 성령의 충만함이 주어져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승리를 거두셨기 때문에 은총과 평화가 교회 공동체들에게 보증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역사 안에서의 현존이 선택을 강요받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거대한 제국의 세력을 거부하고 하느님께 대한 온전한 신앙을 고백할 수 있는 유일한 힘이었던 것이다. 이런 희망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과감하게 자신들의 목숨을 증언과 맞바꿀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평화의 인사가 말해지고 있는 가운데 공동체적인 응답이 나오고 있다(1,5b-6).
2.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목자로서의 사목적 행위와 그에 대한 공동체의 응답 (1,5b-6)
여기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목자로서의 행위에 대한 공동체의 응답이 함께 소개되고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께서 인간 역사, 즉 Χρονος적인 그 역사 속에서 이루신 구원사적인 업적이란 무엇인가? 여기서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업적의 내용을 세 가지로 선포된다.
▶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
▶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신 분
▶ 우리로 하여금 왕국을 이루게 하시고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들이 되게 하신 분
이 세 가지 목적이 바로 목자로서 그리스도께서 베풀어주신 사목적 활동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 중에 가장 감동적인 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①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
이 중에서도 가장 감동적인 것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다. 여기서의 동사는 현재분사형으로 쓰였다. 이 ‘사랑한다’는 의미를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서 드러나고 있다. 필라델피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3,9) 속에서 이 필라델피아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을 사랑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입증해 주기 위해서 거짓을 말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 앞에서 무릎을 꿇게 한다. 이 정도로 필라델피아 교회 구성원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감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리고 라오디게이아(3,19) 교회에 보낸 편지 속에서 충성심을 가지고 회개하라는 근거는 그리스도께서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 때문이다. 이만큼 사랑은 삶의 형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그런 결과를 창출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묵시록에서 전해주고 있다. 그런데 현재 분사로 사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그리스도께서 지금 이 순간 베풀고 계신 사랑은 그 옛날 그리스도께서 인간들의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를 기꺼이 수락하심으로써 구체적으로 표명된바 있던 그런 사랑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갈라2,20; 에페5,2). 인간에 대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인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이제 수평적인 형제들과의 관계 속에서 구체화되어야 된다는 점을 권고의 형태로 전해주고 있다. 그 근거가 사랑이다.
이 ‘사랑하다’라는 동사가 예수께서 펼쳐 보여주신 구체적인 행위를 묘사할 때, 신약성서 어느 곳에서도 묵시록(1,5b)에서처럼 현재형으로 사용되는 곳이 없다. 대개가 십자가 사건을 염두해 두고 과거에 일회적으로 보여졌던, 구체적으로 보여졌던 그리스도의 사랑을 지칭할 때 이 표현을 쓴다. 묵시록에서는 현재분사형을 씀으로써 상당히 강렬한 인상을 전해준다. 현재분사형을 쓴다는 것은 지금 이 순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강조해 주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 상당히 많은 점을 시사해 준다고 할 수 있다. 핵가족화된 우리 가정에서 사랑이 결핍되어 있는 상황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이 현재형은 과거에도 잘했기 때문에 지금도 잘해준다는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이 사랑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묵시록에서 보면 “내가 지금 문 앞에서 두드리고 있다. 문을 열어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라는 표현처럼 마치 사랑을 구걸하고 있는 것 같은 이런 모습으로까지 인간들에게 다가오시는 그리스도의 현재적 사랑의 의미가 여기서 강력하게 표명되고 있다. 그래서 감동적인 그런 의미를 담아주고 있다. 그러니까 문 앞에서 사랑을 구걸할 정도로, 즉 문을 열어주기를 애타게 기다리면서까지 받아드릴 준비를 갖추고 있는 그리스도의 그런 모습의 사랑의 현재적인 모습으로 보여지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그분께서 죄의 종살이로부터 해방을 가져다 준 공동체 안에 지속적으로 베풀고 계시는 사랑의 영속성을 강조해 준다. 어떤 경우에도 조건에 관계없이 사랑해 주시는 분으로 표명하는 것이다. 이것이 인간과의 근본적인 차이이다. 사랑의 영속성을 살아간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에수께서 진실한 증인으로써 순교의 삶을 기꺼이 수락하신 것을 의미한다. 이 정도로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예수 그리스도는 자기의 십자가를 통해서 가시화 시켰다. 그 결과로서 죄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서 자유인이 되게 해 주었다. 그 사랑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② 당신 피로 우리를 죄에서 풀어 주신 분
예수께서 이루신 첫 번째 업적은 당신의 십자가를 통해서까지 인간을 위해서 당신 자신을 내 던지신 지고한 사랑의 모습을 통해서 얻어지게된, 인간으로 하여금 얻게 한 해방이다. 즉 구원사적 업적이 죄로부터 우리를 풀어주시는 것이다. 바로 이것은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지고한 사랑 때문이다. 그래서 피를 통해서 우리를 죄로부터 풀어주셨다. 자신의 몸값을 지불하고 인간을 사신 것이다. 이만큼 인간을 사랑하신 것이다. 바로 여기서 보면 ‘우리를 죄에서 풀어주다’ 동사는 단순과거형(아오리스트)이지만, ‘사랑하다’ 동사는 현재형이다. 그러니까 십자가 사건은 역사적 예수의 구체적인 행위를 지칭하는 것이다. 바로 이것은 사랑에서 비롯되어 그 결과로 나가는 것이다. 피 흘림을 통해서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시킨다는 것은 출애굽을 암시하고 있는 5,9에서도 언급된다. 어린양의 피흘림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해방된 것이 그리스도의 피흘림을 통해서 인간들이 해방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순종의 행위는 파스카적인 구속을 가져다주는 결과를 내게 된다. 파스카적인 구속이라는 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해방을 의미한다. 즉 하느님과 인간의 단절된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것이며 인류에 대한 구체적인 하느님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는 우리로 하여금 왕국을 이루게 하시고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들이 되게 하신 분이신 것이다. 그러니까 진실한 증인으로써 순교자처럼 당신 자신을 십자가 위에 내놓으신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의 왕국을 이루게 하시고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들이 되게 하는 두 가지 결과들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③ 우리로 하여금 왕국을 이루게 하시고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들이 되게 하신 분
이처럼 그리스도 그분께서는 믿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되게 하는 것이다. 이 표현을 통해서 보면 우리로 하여금 하느님 왕국을 이루게 했다. 즉 수동적인 의미가 있다. 결국 우리그리스도께서 신앙인 들로 하여금 한 왕국일 이루게 하신다는 표현은 수동적 표현을 통해서,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의 통치하에 놓여져 있다는 의미로 알아듣게 한다. 그런데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됐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통치하에 놓여져 있다는 것이고, 그리스도의 통치하에 놓여져 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통치 방식에 동참해야 됨을 의미한다. 그래야 그 질서 속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통치 방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십자가에 자신을 내놓으신 것처럼 하느님의 사랑을 인간에게 전달해야 된다는 것이다. 봉사와 사랑을 구체화시키는 이런 모습으로 통치해 나가는 방식이다. 그래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께 동참하기로 응답한 모든 신앙인 들은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이와 같은 봉사와 사랑을 통해서 자신들의 삶을 이끌어나가야 한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 왕국의 시민으로서 살아가는 자격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들이 된 것이다. 그 내용은 출애 19,4(너희야말로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에집트로부터 고통받던 당신의 백성들을 끌어내신 후에 출애굽기 19,4에서 어떻게 그들을 해방시키게 되었는지를 상기시켜 주면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사제의 직책을 맡은 내 나라, 거룩한 내 백성이 되리라는 말씀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내세우는 것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시나이 산에서 계약을 맺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얻게 된 영광의 칭호, 즉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라는 칭호를 받고 있는 것이다.
묵시록의 관점에서 볼 때, 사제직이란 제사 거행과 전례적 찬미를 위한 것이라는 데에는 원칙적으로 이의를 제기할 수 없지만, 세례 받은 모든 이가 사제가 된다는 것은 우선적으로 세상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를 위한 것이다.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이 후에 평신도들이 왕직, 예언직, 사제직에 동참해야 된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 통치 방식에 동참하는 자들로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된 사람들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그들의 실존의 의미를 찾아갈 수 있는 사람들이다. 바로 신앙인 들은 하느님의 사제들이고, 하느님을 찬양하는 자들이라는 점에서 사제인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믿는 신앙인 들을 위해서 이룩하신 업적이 여기서는 이미 성취된 것처럼 소개되지만, 묵시 22,3-5에서는 미래의 언약으로 남아 있다. 여기서 보면 바로 미래에 이루어지게 될 언약의 내용으로 그리스도의 업적이 소개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묵시록이 가지고 있는 시간과 역사에 대한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첫 번째 지표를 대하게 된다. 묵시록에서 말하는 종말은 복음서들이 말하는 종말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업적으로써 6절에서 소개된 내용이 마지막 부분에 가서 언약의 내용처럼 소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계획 속에서 묵시록에서 소개되고 있는 모든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다 하나로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라는 것은 미래에 대한 투영이고, 또 과거에 대한 반영으로 모두가 다 현재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장엄하게 선포된 하느님 말씀, 또 예수 그리스도의 실제적인 실존 속에서 드러난 구원 이외에, 하느님께서 결정적으로 최종적으로 하실 다른 말씀이 더 이상 없다. 이제는 그리스도 중심적인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가야할 지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이루신 업적을 상기시키는 공동체의 응답으로서 1,5b-6은 묵시록 다른 곳에서 길게 언급하고 있는 찬미가들의 내용들과는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바로 그리스도에게 바쳐진 찬미가 속에는 수없이 많은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서는 단순히 영광과 권세라는 두 내용만이 그리스도께 찬미를 드리고 있다. 영광과 권세를 통해서 신앙인 들은 그리스도의 승리를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박해 상황에 직면해 있던, 피할 수 없는 선택의 상황에 직면해 있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는 그리스도만이 최고의 권세를 행사할 수 있는, 그리스도만이 이 역사를 이끌어 가고 완성할 수 있기에,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어떤 것에서도 세상 역사의 완성을 찾을 수 없다는 이런 의미를 전달해 주는 묵시록에서 의해서 강력한 힘을 줄 수 있었고, 희망의 원천으로 제시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러한 찬미가에 대해서 공동체원 모두는 ‘아멘’이라는 말로 응답하고 있다. 이것은 유다교에서 사용된 표현이 그리스도교에 전승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전체적인 내용이 전례적인 형태를 띄면서, 결국 전례라는 것이 하느님의 역사 하심이 그리스도의 실존을 통해서 구체화되고 현재 속에서 구현되고 실현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현재성․항구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것에 찬미를 바치는 내용을 보면서, 우리는 역사의 열쇠를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세상이 자연적인 현상을 보면서 종말에 대한 호기심을 가질 이유는 더 이상 없는 것이다. 마태오 복음 24-25장에서 종말에 관한 것을 묘사하고 있고, 공관복음을 보면 종말에 이루어지게 될 상황을 묘사해 주는데, 여기서도 그런 의미가 계속해서 이어지지만 같은 관점에서 보면 안된다. 그리스도 현존의 의미는 묵시록 안에서 아주 강력하게 소개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현존이라는 것 자체가 어떤 형이상학적인 의미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구원의 업적을 통해서 이루어진 사랑에 현재와 영속성의 바탕 위에서 지속되고 있다는 점이 묵시록에서 가장 독특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 신앙인 들에게도 말씀을 선포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런 점이 아닌가 한다. 어떤 면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신앙인 들에게는 순교라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더 많은 갈등의 요인을 갖고서 살아가는데 거기서 수 없이 많은 선택을 하면서 신앙을 지켜가려는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 오늘의 시점이 아닌가? 싶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신앙인 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는 복음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이것이 어떻게 보면 성직자들이 담당해야 되는 몫이고, 복음 선포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종으로써의 모습을 갖고 있어야 한다. 또한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희망과 용기의 메시지는 그리스도 사랑의 영속성을 강조해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런 모습은 봉사와 사랑의 수평적인 모습으로 드러나야 한다. 이런 모습이 담겨져 있을 때 그리스도의 사랑을 외칠 수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