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럿이 하나에서 하나로

 

여럿이 하나에서 하나로




1. 하느님은 구원 역사에서 당신이 보내신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인간과 세계를 위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런데 이 구원의 신비는 바로 오늘 이 삼위일체 축일에서 완성됩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우리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시작이시고 중간의 과정이시며 또 그 끝이시고 완성이시기 때문입니다.




2. 구원의 역사에서 시작과 마침이신 하느님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도 시작이고 중간의 과정정이며 그 완성이십니다. 사실상 우리는 일상의 신앙 생활에서 기도할 때나 전례를 거행할 때나 선교할 때나 영성 함양으로 우리 신앙의 내실을 다져 나아갈 때나 언제나 하느님 아버지의 이니시어티브로 시작하여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마칩니다:


      – 성호경.


      – 영광송.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 사도신경.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구,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스리스도, 성령     을 믿습니다. 


      – 미사 때 시작 기도: 사랑을 베푸시는 하느님 아버지, 은총을 내리시는 우리 주 예수 그     리스도,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이 여러분과 함께!


      – 미사 때 대영광송: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 외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성령과 함께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 안에 계시나이다.


      – 미사는 아버지 하느님께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성령 안에서 드리는 제사요  성찬.


      – 세례 성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줍니다.


이와같이 삼위일체 하느님 신앙 고백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존재를 이뤄주고 지탱하며 영원한 생명이신 하느님을 성자와 함께 성령 안에서 누리게 하는 기본 신앙 고백이다.




3. 그렇지만 우리는 과연 삼위일체 신비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며 더구나 우리의 일상에서 이 신비를 살고 있는지는 한번 깊이 반성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과연 여러분은 삼위일체 교리를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하느님이 삼위일체라니 대체 하느님은 하나이십니까 아니면 셋이십니까? 아니면 동시에 하나이고 셋이십니까? 우리는 지금 농담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같은 기준을 따라 하나이요 동시에 셋이라면 그것은 분명 하나의 모순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런 모순을 고집하는 얼간이도 아니고 역설을 일삼아 하는 견백동이(堅白同異)의 궤변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삼위일체 교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4. 구약 시대의 하느님은 한분이신 하느님으로 당신을 계시하셨습니다. 당신만이 하느님이셨고 하느님은 당신 뿐이셨으며 다른 신들은 있거나 말거나 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스라엘은 생각했고 또 믿었습니다. 다른 신들을 섬긴다는 것은 그래서 헛것을 섬기는 헛된 짓 곧 우상숭배였다. 이스라엘이라고 다른 신을 섬기고 싶은 유혹이 왜 없었겠습니까마는 바빌로니아 유배 이후로는 유일신 신앙이 유다 민족 사이에 그 뿌리를 깊이 그리고 넓게 내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삼위일체의 하느님이라는 진리는 아직 계시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고 하느님이 그저 고독한 절대자로만 존재하신다고 생각하지 않고 하느님은 살아계신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당신이 만드신 피조물 특히 인간들과 함께 하실 뿐 아니라 인간들과 관계를 나누시는 가운데 당신의 풍부한 신비를 조금씩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사람을 만드실 때도 “ 자! 우리 모상대로, 우리와 비슷하게 사람을 만들자!”하시면서 마치 하느님이 여럿이서 의논하시는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또 하느님은 마므레로 아브라함을 찾아가셨을 때도 세 사람의 손님 모양 찾아가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야훼의 천사는 하느님의 대리자일 뿐 아니라 그 화신처럼 행동합니다(창세  21, 17ff; 31, 11.13; 출애 3, 2.4f). 그리고 오늘 우리가 제1 독서에서 읽은 대로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 그 조수 노릇을 하던 하느님의 지혜가 곁에 따라다녔다고도 말합니다. 또 비록 그 하느님의 지혜는 모든 피조물 이전에 태났다고 하지만, 그러나 창조되었다고는 하지 않습니다: 영원으로부터 존재하지는 않지만 모든 점으로 미루어 보아 하느님의 이 지혜는 마치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로 보인다. 이사야 예언자가 소명을 받을 때도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하고 주 하느님이 말씀하시면서 이사야의 응답을 유도하십니다. 그러자 이사야는 대답한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여기서도 야훼 하느님은 당신과 동등한 그 누군가와 의론하시듯이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하느님은 살아 계신 분이다. 그 무슨 돌기둥처럼 절대 고독자로 혼자만 계시지 않습니다. 만약 그분이 영원에서 영원에 이르기까지 혼자만 계신다면 그분은 인간적으로 말해서 매우 적적하시고 외로우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세상과 인간을 만드셨다면 그런 하느님은 이미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당신의 고독을 달래기 위해 당신 아닌 무엇인가를 필요로 하시는 분, 무엇인가가 아쉬운 분일테니까요. 또 그렇다고 하느님이 당신의 활력을 주체하지 못해 당신으로부터 당신 아닌 다른 모든 것이 필연적으로 솟아나온다면 하느님은 마치 물이 솟아나지 않을 수 없는 샘과 같은 존재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하느님은 자유와 사랑이 없는 필연적인 자기 분출의 하느님, 자기 유출의 하느님일 뿐일 것입니다. 그것은 이미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




참된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는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된 하느님이야말로 참된 하느님이시라는 것이 그리스도교 신앙의 확신입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이셨고 이십니다. 하느님은 아버지로서 당신의 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어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 마리아님께 태어나시게 하셨습니다.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을 때 복음서는 하늘이 열리고 영이 비둘기처럼 그분 위에 내리시고 하늘에서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하고 예수님의 신원을 밝혀 주셨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 벌써 삼위일체의 하느님이 처음으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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