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5,8 – 6,13 – 여섯가지 재앙선포와 이사야의 소명

 

이사야서 2,1-12,6절


3. 5,8 – 6,13


피할 수 없는 하느님의 심판은 일차적으로 그 책임자들에게만 가해진다. 이사야 예언자는 초기 활동 중에는 전 국가적인 재앙을 선포하지 않는다. 나라가 적군에 의해서 정복되거나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는 벌을 받으리라고 말하지 않는다. 앞장서서 불의와 부정을 저지른 상류층과 지도층의 사람들이 그에 따른 징벌을 받으리라고만 예고한다




1. 여섯 가지 재앙의 선포(이사야 5,8-24)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집을 연달아 차지하고 땅을 차례로 사들이는 자들아! 빈터 하나 남기지 않고 온 세상을 혼자 살듯이 차지하는 자들아!


만군의 야훼께서 내 귀에 대고 맹세하신다. “많은 집들이 흉가가 되어 제 아무리 크고 좋아도 인기척이 없게 되리라.


10  포도밭 열흘갈이1)에서 술 한 항아리밖에 나지 아니하고 종자 한 섬에서 곡식 한 독이 가까스로 나리라.”


11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새벽부터 독한 술을 찾아 나서고 밤늦게까지 술독에 빠져 있는 자들아!


12  수금과 거문고, 소구와 피리소리 들으며 술이나 마시고 야훼께서 하시는 일에는 관심도 없으며 그가 손수 이루시는 일은 아랑곳도 하지 않는 자들아!


13  내 백성은 지각이 없어 포로가 되고 귀족은 굶어 죽고 민중은 목이 타 죽으리라.


14  2)이 목구멍을 열고 입을 찢어지게 벌릴 것이니 귀족과 서민이 함께 떠들고 날뛰다가 빠져 들어 가리라.


15  이렇듯이 사람이 스스로 낮아졌고, 인간은 천해졌으니 거만한 자의 눈은 숙어지리라.


16  만군의 야훼께서는 그 공평하심으로 인하여 기림을 받으시고 거룩하신 하느님은 정의3)로 당신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시리라.


17  새끼양들이 거기에서 제 목장인 양 풀을 뜯고 살진 짐승이 그 폐허에서 한가로이 먹으리라.


18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소고삐로 재앙을 끌어 당기고 병거의 줄로 죄를 잡아 당기는 자들아!


19  너희4)가 빈정거리는구나. “하시고 싶은 일을 어서 해 보시오. 거룩하다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여, 당신의 뜻을 빨리 이루어 우리에게 알려 주시오.”


20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나쁜 것을 좋다, 좋은 것을 나쁘다, 어둠을 빛이라, 빛을 어둠이라, 쓴 것을 달다, 단 것을 쓰다 하는 자들아!


21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지혜있는 자로 자처하는 자들아!5) 유식한 자로 자처하는 자들아!


22  아, 너희가 비참하게 되리라. 술이 센 자들아! 독한 술을 잘 빚는 자들아!


23  뇌물에 눈이 어두워 죄인을 옳다 하고 옳은 사람을 죄있다 하는 자들아!


24  지푸라기가 불길에 휩쓸리듯 검불이 불꽃에 스러지듯 너희의 뿌리는 썩고 꽃잎은 먼지처럼 흩날리리라. 만군의 야훼의 가르침을 저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거역하였기 때문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믿고 의지하지 않고 교만하고 부정직하고 지각없는 이들을 향하여 하느님의 재앙을 선포하고 있다. 그리고 5,26-30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벌하시려고 아시리아를 도구로 사용하신다. 29절에서 심판의 도구인 아시리아를 사자로 표현하고 있는데 사자는 흔히 메소포타미아의 큰 여신이었던 이쉬타르와 연관지워지고, 군대의 깃발에 표시되었던 것으로여겨진다. 아시리아의 임금들은 곧잘 자신을 성난 사자에 비유하였고 예언자 나훔은 니느웨를 사자굴에 비유하였다(나훔2,12-14). 또한 사자의 포효는 전투를 개시할 때 군사들이 내지르는 함성에 연상되는 것인데, 이 함성은 적군 진영에 공포를 불러 일으키는 목적을 지니고 있었다(예레4,19참조). 이사야 시대에는 팔레스티나 특히 요르단 강변에 사자가 자주 나타났기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들은 사람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이사야 예언자는 불행선언과 함께 심판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 말씀을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 비추어 본다면 나는 어떤 면에서 비참한 사람이고, 그 벌은 무엇을 통해서 받았는지 함께 이야기 하여 봅시다.






2. 이사야의 소명(이사야 6,1-13)


6 장


우찌야왕이 죽던 해6)에 나는 야훼께서 드높은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옷자락은 성소를 덮고 있었다.7)


날개가 여섯씩 달린 스랍8)들이 그를 모시고 있었는데, 날개 둘로는 얼굴을 가리우고 둘로는 발을 가리우고 나머지 둘로 훨훨 날아 다녔다.


그들이 서로 주고 받으며 외쳤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9) 만군의 야훼 그의 영광이 온 땅에 가득하시다.”


그 외침으로 문설주들이 흔들렸고 성전은 연기가 자욱하였다.


내가 부르짖었다. “큰일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10)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


그러자 스랍들 가운데 하나가 제단에서 뜨거운 돌을 불집게로 집어 가지고 날아 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고 말하였다. “보아라, 이제 너의 입술에 이것이 닿았으니 너의 악은 가시고 너의 죄는 사라졌다.”


그 때 주의 음성이 들려 왔다. “내가 누구를 보낼 것인가? 누가 우리를 대신하여 갈 것인가?”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 하고 내가 여쭈었더니


주께서 이르셨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일러라. ‘듣기는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말아라. 보기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말아라.’


10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어둡게 하며 눈을 뜨지 못하게 하여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 와서 성해지면 어찌 하겠느냐?”


11  나는 “주여, 어느 때까지입니까?” 하고 여쭈었다. 주께서 대답하셨다. “도시들은 헐려 주민이 없고 집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없고 농토는 짓밟혀 황무지가 될 때까지다.


12  야훼께서 사람을 멀리 쫓아 내시고 나면 이 곳엔 버려진 땅이 많으리라.


13  주민의 십분의 일이 그 땅에 남아 있다 하더라도 그들마저 상수리나무, 참나무가 찍히듯이 쓰러지리라. 이렇듯 찍혀도 그루터기는 남을 것인데 그 그루터기가 곧 거룩한 씨다.”




2.1. 소명 연대와 환시


이사야는 우찌야 임금이 죽던 해, 곧 기원전 740/739년 경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환시를 보았다는 말로 자기의 소명 이야기를 시작한다. 예언자는 스스로 나서는 사람이 아니다. 하느님께 부름을 받고 그분이 원하시는 사람들에게 파견되는 사자이다. 그는 구체적인 한 시점에서 하느님의 부름을 받아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 역사적인 존재이다. 이사야가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의 소명 연대를 밝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의미를 내포한다.


이사야는 소명 환시를 통해서 하느님의 한 면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 환시는 하느님 또는 그분의 세계가 어떠함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구체적인 언어로 묘사할 수 없는 분이시기에 이사야는 주님을 뵈었다고 말하면서도 그분의 모습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다만 하느님이 땅에서부터 하늘 끝까지 아득히 솟아오른 옥좌에 좌정하여 계시고, 그분의 옷자락이 성전을 가득 채우고 있다고 말할 따름이다.




2.2. 이사야의 고백과 정화


근본적으로 마주할 수 없는 하느님 앞에서 인간을 사로잡는 공포는 그로 하여금 자신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러한 인식은 자기가 더러운 존재라는 자각으로 표출된다. 이는 비단 개인적인 깨달음만이 아니다. 입술이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산다는 것은, 집단 전체에 대한 고백이면서 동시에 자기가 그 근원에서부터 거룩하신 하느님께 합당하지 못한 존재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만남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무슨 일인가 일어나야 한다. 그리고 그 일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스랍을 통하여 분향 제단 위의 숯을 부집게로 집어서 이사야의 입에 대어 주신다. 하느님의 이런 주도적인 행동으로 인간과 그분 사이에 가로놓인 장애물이 제거된다. 결국 인간이 하느님 앞에서 공포를 느끼고 생존에 대한 위협을 느끼는 것은 자기의 죄악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즉 하느님이 당신에게 합당치 않은 인간을 위압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그러한 환경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2.3. 소명


예언자의 소명은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사야가 받은 소명의 특징은  당신이 파견하실 사람을 하느님께서 직접 부르시는 것이 아니라 간접적인 방식을 통해서 그를 당신의 생각과 논의에 이끌어 들이신다는 사실이다. 이는 이사야가 예언자 직을 자원하고 나서는 것으로 이어진다.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저를 보내십시오”(8절)


이사야 예언자의 소명과 다른 예언자들의 소명을 비교하여 보자




모세, 사울, 기드온, 예레미아 성소의 특성      


▷1.모세


  1.소명시의 이스라엘의 상황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에서 고역으로 인하여 신음하며 울부짖었다고 하는 것과 하느님께서 이 울부짖음을 들으셨다. 히브리인들이 에집트에서 갖은 압박을 받고 살아갈 때 모세가 탄생하여 앞으로 민족의 구원자가 될 준비를 한다. 신음하는 백성의 소리를 들으신 하느님이 호렙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나시어 그를 백성의 구원자로 부르시고 백성들을 에집트에서 이끌어낼 사명을 맡기시어 파라오에게 보낸다.




  2.모세의 소명(출애3장) 


모세의 소명은 두 가지 자료에 있어서 약간씩 다르게 표현되어 있다. 야휘스트에 의하면 모세는 야훼가 이스라엘을 에집트에서 이끌어 내시겠다고 선언하는 말씀을 들으며(3,7.8절) 이러한 야훼의 계획을 에집트에 있는 이스라엘에게 알리라는 명령을 받는다(16절이하). 여기서 모세는 단순히 야훼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에 관한 소식을 받아서 이 소식을 이스라엘에게 전하는 하느님의 使者이며, 그것도 사명을 부여하는 자를 대리하여 일인칭으로 말하는 선포 형식을 갖춘 하느님의 사자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알려져 있는 후대의 예언자들을 상기시키는데, 다만 차이가 있     다면 여기서는 야훼의 구원하시는 행동이 선포되고 있는 데 반하여, 후대의 예언자들의 경우에는 주로 임박한 하느님의 심판이 문제되고 있다는 점이다.


엘로히스트에 의하면 역시 모세를 보냄을 받은 자로 묘사하고 있다. 엘로히스트의 문맥 안에서는, 하느님이 모세를 보내신다라는 말이 세번 언급되고 있다(10.12.13절).이 말은 후대의 예언자들이 그들의 사명을 특징지을 때 사용하는 말과 동일하다(예레 26,12.15참조). 그러나 또한  엘로히스트에 있어서는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에집트에서 이끌어내라고 하는 명령이 주어지는데(10.11.12절), 그 반면에 야휘스트에 의하면 이끌어 내고자 하시는 분은 야훼 자신이다(8.17절)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세는 다만 이끌어내시는 하느님의 행동의 도구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소명의 형식을 보면


  1.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의 부르짖음


  2.이것을 들으신 하느님이 모세에게 이스라엘을 이끌어내라고 하는 사명을 부여한다. 


  3.모세는 거부-제가 무엇인데 감히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에집트에서 건져 내겠습니까.


  4.야훼의 다짐-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그리고 하느님으로부터 그의 사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한 증거가 제시




▷2.사울


사울은 이스라엘을 다스릴 왕으로 뽑혔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다. 즉 왕도 그분의 신하인 것이다. 그리고 야훼의 뜻을 거슬러 제사를 바치자 사무엘은 그를 꾸짖고 하느님이 그를 버리시리라고 예고한다. 즉 하느님의 도구 역할인 것이다. 사무엘을 통해 징표를 보여주시는데, 1).잃어버린 암나귀를 찾아주고,2).순례자들로부터 빵을 받아 배고픔을 해결하고,3).사울이 황홀경에 빠짐.


이러한 징표가 나타남으로써 사울은 하느님의 도우심을 더욱 더 확신했다. 그리고 블레셋과의 전투들에서 승리를 하면서 하느님의 도우심을 보았던 것이다.  




▷3.기드온의 소명(판관기 6,11-24)


기드온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고 처음에는 거절하지만 책임지고 돌봐주시리라는 하느님의 약속(6,12.16)을 받고 결국 구원자로 나서서 적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다. 이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의 영웅인 기드온을 왕으로 추대하지만 기드온은 그대들을 다스릴 분은 야훼시오(8,23) 하고 말하면서 그들의 청을 거절한다. 같은 주제는 사무엘上 8장7절과 12장12 절에서도 발견되는데 이는 신명기 편집자의 사상을 표현한 것이리라


  기드온은 카리스마적으로 그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이 요소는 12절이하, 곧 “이것이 너의 힘이다” 라는 표현 속에서, 그가 부름을 받은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기드온이 특별한 은사를 받은것은 이 사명을 위해서였다. 즉 이스라엘을 미디안에게서부터 구원하는 것에 관한 문제였다. 그런데 기드온은 자신이 빈약한 재원을 가진 작은 집단의 일원이라는 점 또는 자신이 가문 가운데서 가장 어리다는 점을 들어 부름을 받은 그 사명에 자신의 부적절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4.예레미아의 소명


예레미야가 체험한 소명은 야훼께 철저하고 완벽하게 흡수당하는 체험이었다.그의 전 존재는 심지어 그가 어머니의 태 안에서 생명을 얻기 전부터 하느님께 알려져 있었다.하느님께 알려져 있다는 것은 그분이 그를 사랑하시고 그를 원하시고,또 당신을 섬기도록 부르시는 것을 체험한다는 것이다. 이 관계는 너무나도 깊어서 설령 예레미야가 그것을 잊어버리고 거부하려고 애를 쓴다해도(사실 그는 그렇게 하려고 애썼다)결코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예레미야는 자신의 소명을 모세의 소명과 매우 흡사하게 표현하고 있다. 예레미아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저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하고 항변하는데 모세 역시 자기가 그 임무에 적합하지 않다고     항변하지만(출애4,10) 야훼께서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늘 옆에 있어 위험할 때면 건져주리라” 다짐하신다.


예레미아의 소명의 두드러진 특징은 소명 자체는 야훼와의 대화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은 태어나기 전부터 예언자의 직책으로 예정되어 있었다는 것을 예레미야가 자각한 점, 그리고 야훼의 말씀이 그의 입에 담긴 점이다. 예레미야가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그 자신에게 나온 것이 아니라 야훼께로부터 나왔다는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데 예레미야는 자신을 실제로 야훼의 대변자, 곧 천상회의에서 한 야훼의 말을 듣고 그것을 보고하는 사신으로 이해하였다.




모세, 사울, 기드온, 예레미아 성소의 공통점


1. 기드온의 소명 설화(6,11-24)나 모세(출애3장)나 예레미야(예레1장)의 소명설화 및 사울의 소명설화는 모두 하느님의 발현을 통해서 소명을 받으며(사울만 예언자 사무엘을 통해서 소명을 받음), 하느님의 도구로서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자기가 그 임무에 적합하지 않다고 항변하지만 야훼께서는 당신이 친히 그와 함께 있겠노라고 다짐하시는 것과 같은 야훼와의 대화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리고 하느님꼐서 그에게 증표를 보여주신다. 그리고 아래에서와 같이 볼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소명의 형식이 대화식이라는 것도 공통된 특징이다.


   


소명의 형식


   1. 이스라엘 백성의 구원의 부르짖음


   2. 이것을 들으신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이끌어내라고 하는 사명을 부여한다(하느님의 발현을 통해서).


   3. 이의제기:저는 그 일에 적합하지 못합니다하고 항변


   4. 야훼의 다짐-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


   5. 야훼로부터 그의 사명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증표가 제시    


 


2.어떤 사람이든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섬기도록 직접 부름을 받은 사람은 그 사람의 보잘 것 없는 특성으로 인해 부름을 받는다. 기드온도 자신의 문중의 비천함과 관련하여 자신의 무력함과 약함을 강조한다. 그리고 예레미야도  그가 비록 사제 가문에 속하여 있기는 했지만 이러한 류의 이유를 제기하려고 사울도 이러한 어투로 규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무능함을 말하는 이 공통된 주제는 부름을 받은 사람이 부름을 받을 때 흔히 하는 상투적 응답의 성격을 띠고 있다. 즉 이런 것은  공손한 고백이다.


  


3.소명에 관한 모든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오직 하느님께 영광이라는 정식과 대체 될 수 있는 요소이다.






이런 면에서 이사야의 소명을 바라본다면 다른 이들과는 전혀 다른 것을 알아낼 수 있다. 다른 이들은 주저했지만 이사야는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자기를 보내 주십사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소명을 하느님이 죄인인 인간에게 부여하시는 무상의 은혜로 받아들인다. 자격없는 인간이 하느님의 특별한 조치로 정화되어 그분의 심부름꾼으로 자원하고 나서는 것이다.




2.4. 파견과 사명(6,9-10)


주님이 이사야를 파견하시면서 내놓으시는 말씀은 예언서와 친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상상을 초월하는, 놀랍고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일러라. ‘듣기는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말아라. 보기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 말아라.’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어둡게 하며 눈을 뜨지 못하게 하여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 와서 성해지면 어찌 하겠느냐?”


예언자는 회개나 구원을 선포한다는 우리의 일반적인 예상과 정 반대되는 말씀을 듣게 된다. 그래서 이 말씀은 이사야의 예언 활동에 대한 일종의 결산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없지 않다. 예엉ㄴ자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했지만 그들은 깨닫지 못하여 벌을 받아야만 했다는, 결국은 이사야의 예언 활동이 백성의 완고함에 부딪혀 실패로 돌아갔다는 쓰라린 체험을 전제 한다는 것이다.


이사야가 만나게 될 사람들은 이스라엘이나 야곱 집안과 같은 정식 명칭이 아니라 꾸짖는 투의 “이 백성”이라는 표현이 쓰인다. “이 백성”은 마음이 완고한 백성이다. 주님의 업적에는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고, 주님의 손이 이루신 일에는 눈도 돌리지도 않는 자들이다(5,12). 바로 이러한 사람들에게 예언자는 파견된 것이다.


그래서 예언자는 “주님! 언제까지입니까?”라고 괴로운 질문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11절)


예언자는 단순히 예언이나 비판만 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더러운 백성 가운데 사는 더러운 사람으로서 이 백성의 죄를 낱낱이 밝혀야 하고, 그 죄악에 따른 하느님의 심판을 선포해야 한다(11-13절). 그는 하느님이 열어 주신 눈과 귀로 백성의 현실을 깊이 깨달아, 그 현실이 내포하고 야기하는 재앙을 누구보다도 뼈저리게 느끼면서 선포하고 예고해야 하는 사람이다.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나는 어떤 모습으로 하느님께 응답을 하고 있습니까?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있습니까? 아니면 이사야 예언자처럼 자발적으로 손을 들고 있습니까? 그리고 예언자로서의 나의 삶은 어떻습니까? 내 잘못을 인정하고 다른 이들 앞에서 바로잡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다른 이들의 잘못을 옹호하고 덮어주고 함께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소명 받은 자가 행할 자세는 이런 것입니다.


① 즉시 순종할 것(1사무3,10) ② 환경을 핑계대지 말 것(마태16,24) ③ 부르신 이의 뜻대로 행할 것(1고린7,17) ④ 부르심에 감사할 것(골로3,15) ⑤ 부르신 이의 뜻을 이룰 것(1베드2,9)


⑥ 믿음으로 순종할 것(이사11,8-10) ⑦ 소명의식을 가질 것(1고린4,1-2)


⑧ 사리 사욕을 금할 것(갈라5,13)  ⑨ 부르신 이의 뜻을 생각할 것(히브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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