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의 믿음
우리는 지난 시간에 창세기 1장부터 9장까지를 살펴보았다. 그 말씀 안에서 ①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과 ② 죄는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교만과 불순종에서 나왔다는 것과 ③ 노아처럼 하느님의 말씀에 순명해야 살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오늘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살펴 볼 것이다.
1. 창세기 10,1-11,9 : 종족의 분열과 그 의미 – 바벨탑 사건
초기 신앙인들은 다양한 백성과 언어가 생긴 이유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을 제시한다. 인류가 여러 백성과 언어로 갈라진 것은 집단적인 교만에 대한 벌이라는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 없이 일치를 시도하였다. 하느님 없이 단결한 그와 같은 백성은 지금도 그렇지만 힘 있는 나라들의 잔인한 침략 전쟁으로 이어졌다. 바빌론은 강대국들의 본보기가 된 문명 제국이었다. 바벨은 교만으로 일그러져 약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불의한 구조를 낳는 도시의 상징으로서 제시된다. 백성들과 언어들의 재통일은 오순절(성령강림, 사도행전 2장)과 역사가 마칠 때 이루어질 것이다(묵시 21-22).
2. 창세기 12,1-25,11 : 아브라함 – 오직 믿음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다
아브라함은 혼란해진 세계, 우리의 세계에 있어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처음에 아담과 하와를 통해서 이루어져야 했던 바를 아브라함에게서 이루신다. 인류의 첫 조상인 아담과 하와가 배은망덕함으로 하느님께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비로우신 하느님은 그들을 죄 속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인간을 죄에서 다시 구원해 줄 구세주를 그들에게 약속하셨다. “네 후손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라. 너는 그 발꿈치를 물려고 하다가 도리어 여자의 후손에게 머리를 밟히리라.”(창세 3,15) 아브라함은 첫 인간에게 요구된 것보다 더 가혹한 명령에 순종하도록 요구받는데, 아담과는 달리 아브라함은 그 명령에 복종한다. 카인과는 달리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보살피고 지켜 주고, 생명을 구해주었다. 라멕은 자기에게 모욕을 가한 그들에 대해 무분별한 보복을 꾀했지만 아브라함은, 좋은 땅을 전부 차지하고 자기에게는 가장 나쁜 땅만을 남겨 놓았던 조카 롯의 생명을 구해 냈을 뿐 아니라 죄인들의 목숨을 살리기 위해 중재까지 하였다. 아브라함은 새로운 시작이요,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 계획의 성공적인 출발점이 된다. 하느님께서 의도하시는 일들이 아브라함에게서 풀려 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① 12장 – 아브람이 부르심을 받다
기원전 18,9세기 경(청동기 시대), 바빌로니아 남부의 우르(Ur)라는 지방에는 아브람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는데 하느님은 구세주를 보내시기 위한 준비의 첫 단계로서 그를 부르셨다. “야훼께서 아브람에게 말씀하셨다. ‘네 고향과 친척과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장차 보여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리라. 너에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떨치게 하리라. 네 이름은 남에게 복을 끼쳐 주는 이름이 될 것이다.’”(창세 12,1-2)
이에 아브람은 주저하지 않고 하느님의 명을 따라 ‘보여줄 땅’(가나안)으로 떠났다. 피상적으로 본다면 그 당시에 유목민들이 천막을 거두고 짐승들을 몰아 다른 곳으로 떠난다는 것은 목초지를 이동한다는 것 외에 큰 의미가 없겠으나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아브람의 순명은 사실 모든 세대에 영향을 미치는 일대 변혁의 시작이 되었다. 아브람이 하느님께 순명하여 고향을 떠나 미지의 땅으로 향했다는 창세기의 기사는 우리에게 몇 가지 중요한 점을 제시해 준다.
첫째, 하느님은 당신 마음대로 아브람을 선택하셔서 당신이 세우실 새로운 민족의 조상으로 삼으셨다는 점이다. 사실 아브람은 세계사에 이름도 없던 일개 유목민 족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하느님은 많은 유능한 사람들을 제쳐 놓으시고 그를 택하셨다. 이것은 인간의 구원이 온전히 하느님의 손에 달려 있음을 잘 말해준다.
75세의 나이에 아브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예”하고 응답하고 길을 떠난다. 하지만 그가 완벽한 사람이라 하느님께서 그를 부르시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부르신다. 아브라함은 대답을 한 것이고, 나는 대답을 하지 않은 그 차이가 있는 것이다.
< 잠깐 생각해 봅시다: 창세12,10-20>
에집트에서 아브람은 아내 사래에게 오라버니라고 부르라고 한다. 사래의 미모가 뛰어났기 때문에 죽임을 당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에집트 왕은 사래를 왕궁으로 불러 들였는데 결국 야훼 하느님께 벌을 받게 된다. 내가 아브라함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혹시 지금도 눈앞에 보이는 이익 때문에 거짓말이나, 말을 바꾸지는 않는지?
둘째,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아브람의 순명이다. 하느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미 자유의지를 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순응할 수도 있고 거역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추호의 의심도 없이 곧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순응했다. 이것이 바로 믿음과 불신, 삶과 죽음 사이에서 인간이 내려야 하는 결단이다.
셋째, 아브람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기 위해서는 큰 희생을 지불해야만 했다는 점이다. 그 당시에 부모와 고향을 떠나 전혀 알지도 못하는 곳으로 간다는 것은 일종의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는 희생을 감수 인내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민족의 축복받은 조상이 될 수 있었다.
② 13장 – 롯이 분가하다.
아브람과 롯의 재산이 불어나자 둘은 분가를 하게 된다. 아브람은 자신이 먼저 땅을 차지하지 않고 롯에게 먼저 선택의 기회를 준다. “네가 왼쪽을 차지하면 나는 오른쪽을 가지겠고, 네가 오른쪽을 원하면 나는 왼쪽을 택하겠다”(창세13,9).
롯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도시 국가들이 위치한 지방을 선택한다. 이렇게, 롯은 백성을 착취하고 억압함으로써 유지되는 사회 구조와 분위기 속으로 들어간다. 그와 반대로, 아브람은 오로지 야훼의 약속과 계획에 기초한 새로운 역사에 자기 자신을 열어 놓는다. 아브람은 자기 마음대로 나아갈 길을 택하지 않고 믿음으로, 하느님께 자기 자신을 내 맡기고 하느님의 말씀에 따른다. 그리고 축복을 받게 된다. “나는 네 자손을 땅의 티끌만큼 불어나게 하리라. 땅의 티끌을 셀 수 없듯이, 네 자손도 셀 수 없게 될 것이다.”(창세13,16)
③ 14장 – 아브람이 롯을 건지다. 아브람과 멜기세덱
아브람의 조카 롯은 그돌라오멜 왕과 동맹을 맺은 왕들에게 잡혀갔다가 아브람의 도움으로 살아 돌아오게 된다. 아브람은 자신의 조카 롯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것이다. 가족을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다는 것 또한 용기요 축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을 맺은 왕들을 쳐부수고 동라올 때 살렘 왕 멜기세덱은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아브람에게 복을 빌어 준다.
멜키세덱(“나의 왕은 정의로운 분이시다.”라는 뜻.)은 예루살렘의 왕으로서, 레위 지파의 사제직이 정립되기 이전부터의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였다. 교회는 멜키세덱을 그리스도의 사제직의 모상으로 간주하고 있으며(히브7장), 이 사건에 나오는 빵과 포도주는 성체성사의 예표로 보고 있다.
소돔왕은 아브람에게 물건은 가지되 사람만은 돌려 달라고 청하였으나 아브람은 “젊은 이들은 먹은 것” 외에는 아무것도 취하지 않는다. 아브람과 소돔왕의 합의는 백성을 억압하고 부를 쌓는데 관심이 없는 정치권력을 생각하게 한다. 아브람은 정의를 실천하는 모범을 보여준다.
④ 15장 – 하느님께서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시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수많은 자손을 약속하셨다. 하지만 지금 아브람에게는 자식이 없다. “야훼 나의 주여, 나는 자식이 없는 몸입니다.”(창세15,2)
아브람은 인간적인 해결책으로 자기 종들 중하나를 법적 상속자로 맞아들이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느님께 말씀을 드리고 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네 대를 이을 사람은 그가 아니다. 장차 네 몸에서 날 네 친아들이 네 대를 이을 것이다.”(창세15,4)라고 말씀을 하신다.
하느님은 약속을 해 주시고, 인간은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를 열망한다. 그러나 아직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아브람은 여전히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하느님께 신뢰한다. 인간의 정의로움은 약속하신 바를 이루어 주시겠다는 하느님의 약속이 비록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할지라도 하느님을 신뢰하며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겨 드리는 데 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람과 계약을 맺으신다. 하느님께서는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를 지나가시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신다. “해가 져서 캄캄해지자, 연기 뿜는 가마가 나타나고 활활 타는 횃불이 쪼개 놓은 짐승들 사이로 지나가는 것이었다.”(창세 15,17)
마치 하느님께서 “만일 내가 아브람에게 한 약속을 지키지 않는다면 나는 이 짐승들처럼 두 동간이 나도 좋다”고 말씀하시는 것과도 같다. 즉 계약은 쌍방이 맺는 합의인데 그 계약을 깨뜨린 쪽은 그 동물들과 동일한 운명에 처해질 것임을 표시하는 것이다. 그런데 야훼 하느님만이 동물들 사이를 지나가시는데 이것은 아브람과의 계약이 하느님 편의 호의에서 나온 일임을 보여 주는 것이다. 오로지 하느님만이 당신이 약속하신 바를 실현해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을 통해 출애굽 사건이 미리 예견되고 있다. 하느님이 땅을 주려고 아브람으로 하여금 우르를 떠나게 하고, 그와 동일한 모양으로 아브람의 후손들은 에집트에서 노예살이를 할 것이고, 하느님이 땅을 주려고 그들로 하여금 에집트를 떠나게 하실 것이라는 것이다.
④ 16장 – 이스마엘이 태어나다.
고대 동방에서는, 아기를 낳지 못하는 아내가 남편에게 몸종과 관계하여 후손을 보게 하는 것을 법으로 허용했다. 그렇게 하여 종에게서 태어난 아들을 적자로서 인정을 하였다. 이 인위적인 법 규정에 의지하여 아브람은 자기가 하느님께 받은 약속의 실현을 쉽게 하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86세가 되던 해 사래의 몸종 하갈을 통하여 아들 이스마엘을 얻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가 아니다. 몸종에게서 태어난 아들 이스마엘도 야훼 하느님의 축복을 받지만, 야훼 하느님께서 이스마엘을 통하여 당신 약속을 실현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⑤ 17장 – 계약과 할례
아브람이 90세가 되던 해에 하느님께서는 아브람을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삼으시면서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신다. 이름을 바꾼다 함은 새롭게 난다는 것으로서, 이제 하느님의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하느님께 몸 바쳐야 함을 가리킨다. 사제나 수도자들도 서품식이나 종신서원 때 하느님을 위해서 새롭게 태어나겠다는 의미에서, 그래서 더욱 새롭게 살겠다는 의미에서 세례명을 바꾸기도 한다. 사래도 사라로 이름을 바꿔 주신다.
“내가 너를 많은 민족의 조상으로 삼으리니, 네 이름은 이제 아브람이 아니라 아브라함이라 불리리라”(창세 17,5). 그 당시에 누가 이름을 지어 준다고 하면 그것은 그 사람을 소유하는 것이며 그에게 어떤 사명을 주는 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느님이 아브람에게 아브라함, 즉 ‘모든 백성의 아버지’라는 이름을 주신 것은 하느님께서 모든 백성을 소유하시고 그에게 특수한 사명을 주셨다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 계약의 표지로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 중동에서 널리 시행되던 할례는 여기서 새롭고 명확한 의미를 띠게 된다. 다른 여러 부족들의 경우 할례는 사춘기의 의식이었으나, 하느님 백성의 경우 할례는 공동체와의 계약 관계를 나타내는 표지가 되고, 생후 여드레가 된 모든 남자아이들이 할례를 받아야 했다. 이 의식은 친아들에게 한정되지 않고 종들에게도 적용됨으로써 그들도 계약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었다. 또한 이것은 하느님 앞에서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드러내고, 세상 모든 이들이 동등해 져야 한다는 초대이기도 하다.
⑥ 18장 1-15 : 마므레 상수리나무 곁에서 하느님을 만나다.
아브라함은 마므레 상수리 나무 곁에서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손님으로 아브라함을 찾으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을 맞아들이고 하느님께 극진한 정성을 다 한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축복을 내리신다. “내년 봄 새싹이 돋아날 무렵, 내가 틀림없이 너를 찾아오리라. 그 때 네 아내 사라는 이미 아들을 낳았을 것이다.”(창세18,10)
인간은 평범한 상황에 개방되어 있어야 한다. 하느님은 평범한 상황을 통하여 나타나 당신선물을 주신다.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선물은 많은 경우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고 심지어 인간이 수용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일을 통하여 당신 계획을 실현하신다.
그런데 사라는 믿지 못한다. 벌써 나이가 들만큼 들었는데 그 늦은 나이에 아이를 낳는다는 소리를 듣고서 웃고 말았다. 하느님께서는 그런 사라를 꾸짖으신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내가 사라였다면 이런 말씀을 믿을 수 있을까요? 더 나아가 불가능한 이야기들을 누군가가 할 때 나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18,16-33 : 아브라함이 소돔과 고모라 때문에 빌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소돔과 고모라를 벌하시려는 계획을 말씀하십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들려오는 저 아우성을 나는 차마 들을 수가 없다. 너무나 엄청난 죄를 짓고들 있다.”(창세18,20)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서 하느님께 청을 드린다. “저 도시 안에 죄 없는 사람이 오십 명이 있다면 그래도 그 곳을 쓸어버리시렵니까?”….“주님!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한 번만 더 말씀드리겠습니다. 만일 열 사람밖에 안 되어도 되겠습니까?”(창세 18,23-33절 )
하느님이 아브라함과 협상을 벌이시는 이 내용에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사건들이 하느님과 인간의 상호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선택된 백성의 특수 역할이다. 아브라함과 하느님의 백성은 그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선택을 받은 것이다. 아브라함의 교묘한 주장을 겉으로 보면 의인이 죄인들과 함께 파멸되어서는 안 된다고 애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좀더 깊이 보면 아브라함이 사악한 자들의 파멸을 막아 보려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알고 있는 사람, 미리 세례를 받은 사람, 교회 내에서 봉사하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아브라함을 통해서 다시금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야훼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예루살렘에 단 한 사람의 의인이라도 있다면 이 도시가 곧 닥칠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시는데(예레미야 5,1)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 모든 이를 대신해서 홀로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구원하시고자 함을 보여주는 예표라고 볼 수도 있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청을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그 열 사람을 보아서라도 멸하지 않겠다고 다짐을 하십니다. 그런데 그 열 사람이 있을지…,
누군가를 위해서 이렇게 간절한 청을 드린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며, 용기 있는 일입니다. 내가 말을 해야 하는데, 말을 하지 못하고 살 때가 얼마나 많은가를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⑦ 19장 – 소돔이 망하다.
하느님의 천사를 롯은 맞아들인다. 그런데 소돔 시민들이 손님(천사들)을 괴롭히려고 하자 롯은 손님(천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자기 딸 까지 내어 주려고 하나 실패로 돌아간다. 사람들이 억지로 문을 열려 하였으나 천사들은 그들이 보지 못하게 하고 롯의 가족을 피난시킨다. 천사들은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으나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다가 그만 소금 기둥이 되어 버렸다.
우리는 나약한 인간 롯을 만났다. 그는 천사들을 보호하려 했으나 별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또 하느님의 결정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지를 사위될 사람들에게 설득하지도 못하였다. 그는 소돔을 떠나기를 주저했으며, 오히려 하느님 편에서 그를 불쌍히 여기시어 그의 팔을 잡아끌어 주시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절박한 명령에도 불구하고 당황하여 흥정하려 들고(18-21절), 마침내 그는 방탕한 외톨이 노인이 된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결단을 내려야 할 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방황하거나 당황한 적은 없습니까? 우리는 매 순간 결단의 시간과 만나게 됩니다. 좋은 결단, 단호한 결단, 의로운 결단을 통해 좀더 하느님께 가까이 나아가고, 하느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⑧ 20장 – 아브라함이 그랄에 가다.
이 이야기는 12,10-20절의 반복이라고 볼 수 있다. 아내 때문에 죽을 까봐 아내를 누이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된다. 아내 사라는 “그런 아브라함을 어떻게 믿고 따랐을까?”하는 생각마저도 들게 만든다.
⑨ 21장,1-21 : 이사악이 태어나고 이스마엘이 쫓겨나다.
아브라함이 백살이 되던 해, 하느님께서 약속한 아들이 태어나자 사라는 이스마엘을 내 보내기를 원한다. 아브라함은 괴로워하는데 여기서 다정한 아버지로서의 인물됨이 드러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서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 보낸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그도 큰 민족을 이루게 하리라”(창세 21,13)라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하갈 모자가 브엘세바의 빈들에서 삶을 포기하려 하였다. 어머니 하갈은 죽어가는 아들의 울부짖음을 듣지 않으려고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하느님께서 직접 나서신다. 하느님께서는 곤경에 처해 있는 사람들의 외침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21장,22-34 :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계약을 맺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계약을 맺는다. 그 당시 우물은 유목민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아브라함은 아비멜렉에게 “이 어린 암양 일곱을 받으시고 이 우물을 내가 팠다는 것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오”(창세 21,30) 라고 말하면서 서로 맹세를 했다하여 그곳을 브엘세바라고 하였다.
⑩ 22장 – 아브라함이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다.
불가능하게 보였던 하느님의 약속이 아들 이사악의 출생으로 실현되자 아브라함은 안심한 나머지 하느님의 위대한 계획을 위하여 자신이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점점 잊어 갔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하여 새로운 믿음 행위를 요구하신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늘 깨어 있기를 바라신다. 그래서 줄곧 하느님 안에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기를 원하신다. 도전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께서도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사람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라고 말씀하셨다. 불가능해 보이지만, 내가 하느님께 마음을 열고, 모든 것을 믿고 맡긴다면 가능하다. 불가능한 것은 나의 한계이지 하느님의 한계는 아니다. 하느님은 한계가 없으신 분이시다. 불가능이 없으신 분이시다. 그것을 착각해서는 안 된다.
아브라함은 믿음을 보였다. 눈물로 길을 적시며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였다. 사흘을 걸어서 하느님이 일러 주신 곳에 가까이 온 그들 부자의 대화는 그때의 처절한 모습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창세 22,7-9). 아브라함이 아들을 쳐 죽이려 칼을 높이 든 순간 그의 굳은 믿음을 보신 하느님은 이사악을 구출하시고 대신 양을 바치도록 하셨다(창세 22,10-13). 이와 같은 시련을 겪고 난 후에야 아브라함은 결국 모든 믿는 사람의 표본이 되었으며 구세주를 탄생시킬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사도 바울로는 다음과 같이 외쳤다. “아브라함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믿어서 마침내 ‘네 자손은 저렇게 번성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만민의 조상’이 되었습니다”(로마 4,18)).
하느님께서 나에게 불가능한 것을 원하시지는 않는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원하신 것은 아들 이사악의 목숨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아브라함의 믿음과 순종이었다.
야훼이레: 야훼께서 이 산에서 마련해 주신다.
⑪ 23장 – 아브라함이 막벨라의 무덤을 사다.
아브라함은 에브론 소유의 막벨라 무덤을 아내 사라를 안장하기 위해서 사게 된다. 이 땅이 이스라엘의 선조들이 가나안에서 처음으로 지니게 된 땅뙈기가 되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약속이 이루어지기 시작함이라고 볼수 있다.
⑫ 24장 – 이사악이 아내를 맞다.
이사악은 리브가를 아내로 맞아 들이게 된다. 아브라함은 가나안 사람의 딸들 가운데에서 며느리감을 고르지 않고 아버지의 가문에서 며느리 감을 골라 오라고 종을 보냈다. 아브라함의 종이 리브가와 만나는 장면은 영화의 한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그렇게 리브가를 이사악과 맺어 주셨다.
⑬ 25장 – 아브라함의 죽음과 에사오와 야곱의 탄생
아브라함은 백칠십오세를 살고 하느님 품으로 가게 된다. 오래 살다가 죽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온전히 살았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 모두는 죽는다. 의인도 죽고, 악인도 죽는다. 하지만 우리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새로운 시작이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새로운 시작인 것이다. 축복을 받으며 영생을 삶 수 있도록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내가 실천해야 하는 것들을 찾아보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늘 고민해야 할 문제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이해타산적인 것이 아니었다. 믿기에 앞서 내게 돌아올 이익이나 손해를 계산하는 태도는 진정한 믿음의 태도가 아니다. 과연 “나의 믿음은 어떤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이제 이사악을 통해 태어난 에사오와 야곱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서로 싸운 야곱과 에사오는 어떻게 하느님의 말씀안에서 살아가게 되는가를 보게 될 것이다.
오늘은 요기까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