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 이야기 2

 

요셉 이야기 2


  형들의 질투로 노예로 팔려가게 된 요셉.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어떻게 이끄실 것인가? 이제 요셉은 포티파르의 집에서 노예로 지내게 되는데, 어떤 일이 그에게 닥칠지 한번 따라가 봅시다.


열일곱의 나이에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게 된 요셉은 포티파르의 집으로 가게 된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요셉의 삶은 이제 끝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형들에 의해 노예로 팔려가고, 노예시장에서 다시 누군가에게 팔려가고, 그렇게 노예로서 삶을 마칠 것이다.


그런데 요셉은 하느님의 이끄심으로 밑바닥에서부터 지도자로서 갖추어야 할 인내와 섬김의 훈련을 받는다. 노예로 팔려가게 되면서 노예상인들이나 다른 노예들에 의해 구박과 매질을 당하면서 인내와 섬김의 삶이 무엇인지를 배웠을 것이다. 늘 떠받들어져서 살아왔던 요셉에게는 참으로 좋은 경험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주인의 신임을 얻어 청지기가 되었지만 다시 주인의 아내의 모함에 의해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그 감옥에서 파라오의 신하들의 꿈을 해몽하게 되고, 결국 파라오의 꿈까지 해몽하게 된다. 경호대장 포티파르의 집에서 이집트인의 생활과 문화를 접하게 되고, 청지기 생활을 통해 한 집안의 살림을 주관함으로써 훗날 재상이 되었을 때, 국정운영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배웠을 것이고, 또 감옥에서 파라오의 신하들을 접하면서 귀족들의  생활과 궁정 문화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즉 요셉의 삶은 황금이 불속에서 단련 되듯이 그렇게 시련 속에서 성숙되고, 단련된 것이다. 그러므로 요셉의 삶을 통해 불평만 하기에는 너무도 아까운 삶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3. 노예살이를 하게 되는 요셉(창세39,1-23)


  1) 포티파르의 종이 된 요셉(39,1-6)


  이스마엘 상인들은 요셉을 파라오의 경호대장인 포티파르에게 판다. 포티파르가 요셉을 노예로 사게 되는데 이것 또한 하느님의 이끄심인 것이다. 이제 요셉은 포티파르의 집에서 기다리는 기회와 시련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①만사형통하는 노예 요셉


포티파르의 집에 노예로 팔려온 요셉은 주님께서 함께 해 주셨기 때문에 모든 일을 잘 이루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포티파르도 요셉이 하는 일 마다 잘되는 이유가 하느님께서 함께 해 주심임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포티파르는 요셉을 자기 집 관리인으로 세워, 자기의 모든 재산을 요셉의 손에 맡겼다. 그리고 포티파르는 “자기가 먹는 음식밖에는 마음을 쓰지 않았다”(창세39,6).


그런데 요셉은 하느님께서 늘 함께 해 주셨기에 모든 것이 잘 풀리는, 만사형통한 사람으로 보이는데 아무리 잘 풀리는 요셉이라 할지라도 노예살이 하는 삶이 만사형통한 사람의 삶이라고 하기에는 좀 무리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아무리 비참한 삶을 산다 해도, 하느님이 함께 하시고 돌보아 주신다면 그 삶은 바로 만사형통한 삶이다. 아무리 어려운 삶이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아내와 아이가 있다면 그가 행복한 것처럼,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이끄시는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만 있다면 나는 행복하고, 만사형통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이제 만사형통하는 요셉은 신분이 상승하게 된다. 우선 평범한 집이 아니라 이집트 귀족이요, 권세가인 경호대장의 집에 노예로 팔려간 것이요, 밭에 나가 농사를 짓거나 들판에 나가서 가축을 키우는 노예가 아니라 집안일을 하는 노예가 된 것이다. 이 대문에 요셉은 경호대장의 눈에 띌 수가 있는 기회가 많았다. 그리고 경호대장의 신뢰를 얻어 그의 시중을 드는 심복이 된다. 그리고 경호대장의 절대적 신임을 받아서 집안의 모든 일을 총괄하는 청지기가 된다.


  이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이끄셨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수많은 종 가운데 주인의 눈에 띄어 청지기가 된다는 것은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요셉의 증조부인 아브라함이 318명이나 되는 종을 거느리고 있었다면(창세14,14) 이집트 대제국의 경비대장은 그보다 더 많은 종을 거느리고 있지 않았을까?



  요셉은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고, 하느님께서도 요셉을 포기하지 않으셨다. 만일 요셉이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포기했다면 하느님께서도 어찌 하시지 못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존중해 주시기 때문이다. 부잣집 도련님이 종으로 팔려갔을 때, 그것도 형제들에 의해 종으로 팔려갔을 때, 그는 한 생을 원망하면서 괴로움과 비통 속에 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셉은 포기하지 않고,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한다. 




   ② 하느님께 삶을 불평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하느님과 인간의 동행은 중요하다. “나는 상처를 싸매고 하느님께서는 그 상처를 낫게 하셨다”는 말이 있다. 인간의 병을 낫게 해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시지만 그 전에 인간이 그 상처를 싸매야 한다는 것이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인간이 빵으로만 살게 되어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왜 빵나무를 만들지 않으셨을까?” 대답은 이러하다. 하느님은 인간을 동반자로 여기신다. 그래서 인간의 협력을 요구하신다. 하느님은 인간이 손수 밭을 갈아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고, 밀을 거두어 방아를 쪄서 고운 가루를 만든 다음 그것으로 빵을 만들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빵나무를 만들지 않으신 것이다.


가정불화나 이혼, 실직, 갈등 등으로 술이나 기타 도박에 빠져서 삶을 망가뜨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그들 삶을 스스로 포기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요셉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삶에 최선을 다 했으면 좋겠다.


   


   ③ 하느님과 함께 하는 요셉의 삶: 모범적인 종살이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고, 불평하면서 꾀를 부리는 사람이 있다. 예수님께서 탈렌트의 비유에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 종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잘 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마태25,21).


요셉도 그렇게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었다. 요셉의 삶에 비추어서 최선을 다하는 삶이 무엇인지 알아보자.




첫째,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은 인간의 눈을 의식해서 일하지 않는다. 그래서 일을 시키는 사람이 볼 때는 열심히 일하고 그렇지 않을 때는 게으름을 피우는 그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


       지하철 공사장에서 한 아저씨가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쉬엄쉬엄 하면서 감독관이 올 때만 일하는 척 했다. 그래서 그 아저씨에게 물었다. “왜 그리 열심히 일하세요?” 그러자 그 아저씨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하루 삼만 오천 원을 받는데 그만큼은 일 해주고 가야지요…”




둘째, 땅만 쳐다보지 않고, 눈을 들어 하늘을 본다.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의 수고와 그렇지 않은 이들의 수고가 다른 것은 남모르는 상급을 희망하면서 가슴 설레어 일하기 때문이다. 그 상급이 비록 이 세상에서 주어지지 않는다 해도 언젠가는 하느님께로부터 받게 될 상급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결코 내 삶을 외면하시거나, 나의 땀과 수고를 흘려버리시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분명 내  삶에 축복해 주실 것이다. 이것을 믿고 있기에 오늘도 신앙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생각하면서, 주님 앞에서의 내 모습을 생각하면서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힘들 때 주님께 기도하면서 하늘을 바라본다. “주님! 저 잘 하고 있지요?”하면서…,




셋째, 겸손하게 모든 영광은 하느님께로.


요셉이 감옥에 갇혔을 때 함께 갇혀 있을 때, 고관들은 꿈을 풀이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말하자 “꿈 풀이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아닙니까?”(창세40,8)라고 말하면서 꿈 풀이를 해 준다. 그리고 파라오의 꿈을 풀이해 줄 때도, “저는 할 수 없습니다만, 하느님께서 파라오께 상서로운 대답을 주실 것입니다.”(창세41,16)라고 말한다. 요셉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로 돌렸다.


나는 어떠한가? 좋은 것은 모두 내 능력이요, 잘못된 것은 모두 하느님의 시련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하느님께 나는 얼마나 겸손하게 영광을 드리고 있는가?




결국 이렇게 살아온 요셉은 포티파르의 눈에 띠게 되고, 집안의 모든 일을 맡게 된다. 집안의 모든 일을 관리한다는 것은 집안일은 물론이요 주인이 소유한 토지와 재산 등 모든 것을 관리한다는 것이다. 포티파르가 마음 쓰는 일이 있다면 “그가 먹는 음식”(창세39,6)밖에는 없었다. 그런데 음식은 글자 그대로 음식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아내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유다인들은 부부관계를 표현할 때 음식과 연결해서 완곡하게 표현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므로 포티파르는 요셉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열심히 살게 되면 그렇게 믿음을 받게 되고, 믿음을 받게 되면 또 그렇게 축복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2) 요셉과 포티파르의 아내(39,7-20)


그런데 요셉은 몸매와 모습이 아름다웠다. 즉 요셉은 성적 매력이 넘치는 청년이었던 것이다. 요셉은 청지기였기에 주인마님과 자주 만났을 것이고, 그녀는 차츰 요셉의 따뜻한 마음과 인품, 잘생긴 외모에 반했을 것이다.


미드라쉬에  따르면 그녀는 마당을 가로질러 가는 요셉을 보려고 걸어놓은 발을 살짝 들춰보기도 하고, 일부러 일을 만들어 요셉을 불러 말을 걸기도 하였다. 요셉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아름답게 화장하고 화려한 보석으로 치장한 것은 물론이다. 그녀가 요셉에게 눈길을 보내며 “나와 함께 자요!”라고 말할 때 우리는 요염한 눈 화장을 하고서 요셉에게 말을 건네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와 함께 자요!”라는 것은 청유형이 아니라 명령형임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요셉은 노예고 그녀는 주인이기 때문이다.




       ① 미드라쉬


         성서의 주석과 해석, 구체적으로는 성서 해석의 특별한 방법이나 성서 주석의 문헌적 방법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미드라쉬는 랍비 문학에서 주석과 해석의 의미를 띠고 있지만 구체적으로는 성서 해석을 가리킨다. 특별히 미드라쉼이라는 복수 형태는 성서 주석서를 말한다. 미드라쉬는 구전이나 문서로 된 하나의 문학 형태로서 권위 있고 계시된 하느님의 말씀으로 확정된 정경 본문과 직접적인 관련을 맺고 있으며, 정경 본문을 명백하게 인용하거나 성서적 사건을 분명하게 암시하고 있다고 하였다. 미드라쉬의 본질은 성서 본문에 나타나 있든 여러 가지 문제들을 현실에 맞게 해석하여 정경 본문, 특별히 토라에 대해 순종과 애착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주석자들은 성서 본문을 현실에 올바르게 적용시키기 위하여 시대에 따라 성서 본문을 새롭게 해석하였으며, 성서에 언급되지 않는 새로운 사실이나 이야기들을 첨가하기도 하였다.




탈무드는 구체적 장면 하나를 소개한다.


“어느날 이집트 상류사회 부인들이 포티파르의 집에 모였다. 여주인이 상냥한 태도로 과일을 대접하고 있을 대 저쪽에서 요셉이 걸어 들어왔다. 모여 있던 귀부인들은 동요했고, 혼란스러워 했다. 그들은 너무 놀라 팔을 움츠렸다. 포티파르의 아내가 숨죽이며 내뱉듯이 말했다. ‘바로 이 사람이 내가 매일, 매순간 참아야 하는 그 사람이에요.’”




이슬람 경전인 코란도 요셉과 여주인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요셉의 잘 생긴 외모는 이집트 상류층 부인들의 연회를 피 흘리는 연회로 만들었다고 보도한다. 귀부인들이 함께 모여 과일을 깎으며 이야기를 하다가 잘생긴 요셉이 나타나자 모두 얼이 빠져 쳐다보다가 그만 모두 과도에 손을 베었다는 것이다.




        ②포티파르의 아내 ‘줄라이카’


경호대장 포티파르 의 아내는 어떤 여인이었을까? 성서에서는 그녀의 이름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았다. “요셉 주인의 아내”나 “포티파르의 아내”로 소개될 뿐이다. 그런데 이슬람교 경전 코란1)에 따르면 그녀의 아름은 줄라이카였다. 이 이름은 이슬람권에서는 흔한 이름인데 만일 줄라이카가 음탕한 여인이었다면 이슬람 여인들이 굳이 이 이름을 짓지 않았을 것이다. 줄라이카는 이슬람  종교 문화권에서 영웅으로 간주되고 있고, 그녀와 요셉의 사랑 이야기는 이슬람교도들에게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회자되고 있다. 요셉과 그녀는 플라토닉한 사랑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 줄라이카는 음탕한 여자라기보다는 외로운 여자였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녀의 남편 포티파르는 세계를 제패한 파라오의 경호대장 이었기에 파라오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수행해야 했고, 그렇지 않더라도 언제나 파라오 곁을 지켜야 했기 때문에 아내와 함께 할 시간이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줄라이카가 요셉에게 관심을 보인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③포트파르의 가정에 필요한 것


남자와 여자의 다른 점을 생각해 보자. 남편이 아내에게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욕구 다섯 가지는 첫째, 그의 성적 욕구를 채워주는 것, 둘째, 남편이 좋아하는 놀이와 취미생활에 함께 해 주는 것, 셋째, 매력적인 배우자, 넷째, 성실한 집안 살림, 다섯째, 남편을 자랑스러워하고 존경하는 것 등


아내가 남편에게 요구하는 가장 중요한 욕구 다섯 가지는 첫째, 친밀한 애정 표현, 둘째, 대화, 셋째, 솔직함과 열린 마음, 넷째, 재정적 도움, 다섯째, 가정에 대한 관심과 함께함이다.




하지만 남편이 아내를 모르고, 아내가 남편을 모른다. 포티파르는 모든 것을 아내와 요셉에게 맡겨 두고 열심히 파라오를 위해서 일했다. 물론 가정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아내는 그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서히 감정이 메말라 가면서 요셉에게서 위안을 받으려 했던 것이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남자는 하루에 25,000마디를 해야 하고, 여자는 30,000마디를 해야 편안하게 잠을 잔다고 한다. 그런데 남편은 직장에서 하루 종일 해야 될 말을 다 하고 들어오는 것이고 아내는 남편이 퇴근해야 만이 이제 말할 상대가 생겨나는 것이다. 그러면 두 사람의 관계는 어떨까? 또한 반대로 아내가 직장 생활을 하고 남편이 전업주부라면…,



포티파르의 아내에게 있어서 하루는 너무도 길고 무료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포티파르는 내시였을지도 모른다. 파라오의 신하로 표현되는 포티파르는 “신하”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 “세리스”는 “신하”라는 뜻 말고도 “내시”란 뜻도 있다. 고대 동방에서는 왕을 가까이서 보필하는 관리들이 때로 거세당하는 관계가 있었다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줄라이카의 결혼은 정치적 지위와 재력으로 이루어진 강제 결혼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함께 이야기해 봅시다>


만일 위와 같은 상황이라면  포티파르는 자신의 가정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그렇게 열심히 일만 하면 될까요?




        ④ 의로운 요셉


요셉은 주인마님의 유혹을 즉시 거절한다. “보시다시피 주인께서는 모든 재산을 제 손에 맡기신 채, 제가 있는 한 집안일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으십니다. 이 집에서는 그분도 저보다 높지 않으십니다. 마님을 빼고서는 무엇 하나 저에게 금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마님은 주인어른의 부인이십니다. 그런데 제가 어찌 이런 큰 악을 저지르고 하느님께 죄를 지을 수 있겠습니까.”(창세39,8-9)


요셉은 신의를 중요하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가 어디서 온지를 깨달으면 그는 저절로 관대해지고 무심해지며, 사람이 자기가 어디로 갈 것인지를 깨닫게 되면 즐거워지고 할머니와 같이 인자해지며 왕과 같은 위엄을 갖추게 된다.”




        ⑤ 줄라이카의 좌절과 모함


포티파르의 아내 줄라이카는 체면을 버리고 종인 요셉에게 애원하였지만 요셉은 번번히 거절하였다. 그러자 드디어 행동으로 옮겼다. 집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줄라이카는 요셉의 옷을 붙잡고 유혹을 했다. 하지만 요셉은 자기 옷을 그의 손에 버려둔 채 밖으로 도망쳐 나왔다. 요셉은 유혹으로부터 도망친 것이다. “유혹에 빠지지 말게 하시고…,”기도할 시간이 없다. 도망쳐야 한다. 그래야 겉옷은 잃어도 순결과 신의를 잃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서양속담에 “미움으로 변한 사랑에 버금가는 사나움이 하늘에는 없고, 무시당한 여자의 분노에 버금가는 격분은 지옥에도 없다”라는 말이 있다. 우리 속담에도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라는 것과 같은 말이다. 부와 권력을 지닌 여인의 유혹을 물리치는 것은 상당히 위태로운 짓이다. 어떤 복수가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요셉의 겉옷을 움켜쥔 포티파르의 아내 줄라이카는 처음에는 수치심과 굴욕에 어쩔 줄 몰랐을 것이다. 그녀는 분노와 증오심으로 불타올랐을 것이다. 그녀의 손에 쥔 요셉의 겉옷을 결정적 증거로 사용해서 요셉에게 누명을 씌우기로 작정하고 종들을 불러 증인을 만든다.




“이것 좀 보아라. 우리를 희롱하라고 주인께서 저 히브리 녀석을 데려다 놓으셨구나. 저자가 나와 함께 자려고 나에게 다가오기에 내가 고함을 질렀지. 저자는 내가 목청을 높여 소리 지르는 것을 듣고, 자기 옷을 내 곁에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쳐 나갔다.”(창세39,14-15)


  포티파르의 아내는 아주 교활하게 “우리”라고 표현하면서 자기의 말을 듣고 있는 종들도 모두 그녀와 함께 피해자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이 표현은 마치 요셉이 집안의 모든 여자를 겁탈하려 한 것처럼 만들어 버린다. 또한 요셉에게 혐오감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요셉을 “히브리 녀석”이라고 부른다. 그녀는 “히브리 종 녀석”이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지금 그녀의 말을 듣고 있는 이들도 종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중에 남편에게 말할 때는 요셉을 “히브리 종 녀석”(창세39,17)이라고 한다.


에집트인들은 “이스라엘”보다는 폭넓은 의미를 지녔던 “히브리인”이라는 명칭을 더 잘 알고 있었다. 여기에는 이 종족에 대한 적개심도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그녀는 종들 앞에서 요셉뿐 아니라 남편도 고발한다. “주인께서 저 히브리 녀석을 데려다 놓으셨구나.”라는 말은 사건의 근본적 책임이 남편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즉 주인이 히브리 녀석을 데려오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요셉이 없었다면 줄라이카의 마음이 그렇게 흔들리지는 않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맞는 말은 결코 아니다.




포티파르의 아내는 남편이 집에 돌아오자 즉시 일러바친다. 대제국 경호대장의 부인이 히브리 남자에게 성폭행당하는 것도 보통일이 아닌데, 그것도 히브리 종놈이 성폭행을 하려 했다면 그것은 엄청난 사건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데려다 놓으신 저 히브리 종”이라는 표현은 에덴동산에서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이 하느님 앞에서 했던 변명을 기억나게 한다. “당신께서 저와 함께 살라고 주신 여자가 그 나무 열매를 저에게 주기에 제가 먹었습니다.”(창세3,12) 아담의 이 말은 궁극적 책임이 하느님께 있다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여자를 짝지어 주지 않았다면 그런 잘못을 할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듯 인간은 자신의 범죄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을 때, 그 책임을 상대방에게 뒤집어씌우면서 궤변을 늘어놓는다.




인정할 것은 인정했으면 좋겠다. 그렇다고 자신의 잘못이 선행으로 바뀌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부족한 부분은 채워 나가면 되지 않을까?


또한 줄라이카의 모습 안에서 아버지 야곱의 장인이요 요셉의 외삼촌인 라반이 생각나는 이유는 왜일까? 너무도 거짓말을 잘하는 포티파르의 아내의 모습을 보면서 “혹시 라반에게 특별수업을 받은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마저 들게 된다.




        ⑥ 감옥에  갇힌 요셉(39,21-23)


포티파르는 요셉을 감옥에 가둔다. “…아내의 말을 듣고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래서 요셉의 주인은 그를 잡아 감옥에 처넣었다. 그곳은 임금의 죄수들이 갇혀 있는 곳이었다.”(창세39,19-20)


그런데 만일 포티파르가 요셉이 자신의 아내를 폭행하려 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죽여 버렸을 것이다. 절대권력을 가진 경호대장이 종 하나 죽이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그냥 감옥에 가둬 둘 뿐이다. 아마도 포티파르는 요셉을 알았을 것이다. 지난 10년 동안 요셉을 데리고 있으면서 그의 인간성을 알았고, 또 신뢰하고 있었을 것이다. 또 하나는 자신의 아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코란에 따르면 포티파르의 아내가 증거물로 제시한 요셉의 찢겨진 겉옷을 보고 아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것을 알아 차렸다. 요셉이 정말 그의 아내를 겁탈하려 했다면 아내의 반항으로 앞쪽이 찢어져야 하는데 찢어진 부분은 뒤쪽이었다. 즉 그의 아내가 도망치는 요셉을 뒤에서 붙들면서 찢어지게 되었다는 정황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포티파르는 아내가 수치를 당하고 그의 가정이 곤란한 처지에 빠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미드라쉬에 따르면 포티파르는 자식들의 명예를 위해서 아내를 수치스러운 자리로 몰고 가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무죄한 요셉을 성폭행자로 몰아 죽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감옥에 가둔 것이다.




또 다른 미드라쉬의 진술을 받아들인다면 포티파르가 화를 낸 까닭은 자기 아내 때문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그가 정말로 아끼고 믿었던 종, 그리고 그에게 부귀를 가져다 준 요셉을 자기 아내 때문에 잃게 되었기 때문이고, 또 그의 아내가 모든 하인들에게 내놓고 요셉을 성추행자로 고발함으로써 요셉을 살릴 수 있는 해결책들을 다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미드라쉬뿐 아니라 고란에서도 마찬가지 진술을 하고 있다.




         ⑦ 하느님의 섭리


감옥에서 요셉은 후회 했을지도 모른다. 그냥 포티파르의 아내가 하자고 하는 대로 했으면 적어도 감옥에는 안 왔을 것이 아닌가? 하지만 감옥에는 안 왔을지 몰라도 더 큰 불행이 요셉에게 닥쳤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비극적 상황에서도 요셉과 함께 하셨고, 요셉을 돌보아 주셨다. 감옥에 갇힌 요셉을 전옥(교도소장)의 눈에 들게 해 주셔서 전옥은 감옥에 있는 모든 죄수를 요셉의 손에 맡기고, 그곳에서 하는 모든 일을 요셉이 처리하게 하였다. 전옥은 요셉의 손에 맡긴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다.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셨으며, 요셉이 하는 일마다 주님께서 잘 이루어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요셉에게 불어 닥치는 바람을 막아 주시지는 않았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 바람을 요셉과 함께 맞고 있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이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 어려움 속에서 주님께서는 나와 함께 아파하시고, 즐거움 속에서는 주님께서 나와 함께 기뻐해 주신다. 하지만 즐거울 때는 주님을 잊다가 어려울 때만 주님께 애원하고, 이 상황을 없애 달라고 청하다가 하느님께 등을 돌리고 만다. 그것이 내 모습인 것이다. 하지만 요셉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은 요기까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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