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형들에 대한 요셉의 마지막 시험(창세기 44,1-34)
지금까지 의도적으로 형들의 내적 변화 상태를 시험해 온 요셉이 이제 마지막 갈등 상황을 전개시킨다.
① 은잔을 벤야민 자루에 집어넣은 요셉
“요셉이 자기 집 관리인에게 명령하였다. ‘저 사람들의 곡식 자루에다 그들이 가져갈 수 있을 만큼 양식을 채워 주어라. 그리고 각자의 돈을 그들의 곡식 자루 부리에 넣는데, 막내의 곡식 자루 부리에는 곡식 값으로 가져온 그의 돈과 함께 내 은잔을 넣어라.’ 그는 요셉이 분부한 대로 하였다.”(창세기 44,1-2)
요셉은 어제 식탁에서 동생 벤야민에게 다른 사람의 다섯 배를 줌으로써 형들의 마음을 시험해 보았다. 그리고 이제 동생의 자루에 곡식 값으로 가져온 은전과 함께 자신의 은잔까지도 넣게 하였다. 요셉은 이 위기 상황에서 형제들이 어떻게 나오는지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이튿날, 날이 밝자 형제들은 나귀들을 끌고 길을 나섰다. 이집트 총리에게 귀한 대접을 받았고, 식량 자루에는 식량이 가득했고, 시메온도 무사하고, 그리고 아버지 야곱이 염려하고 있는 벤야민까지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가고 있으니 그들의 앞날은 순조로워 보였다. 그런데 아직 요셉의 화해와 인간성 회복의 단계는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었다.
형제들이 얼마 가지 않았을 때, 요셉은 자기 집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어나 그 사람들을 쫓아가거라. 그들을 따라잡거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여라. ‘너희는 어찌하여 선을 악으로 갚느냐? 이것은 내 주인께서 마실 때 쓰시는 잔이며 점을 치시는 잔이다. 너희는 고약한 짓을 저질렀다.’”(창세기44,4-5)
관리인이 요셉의 형제들을 따라잡고 요셉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 말하였다. 요셉의 관리인은 형제들을 따라와서 호통을 쳤다. 그런데 한분이신 야훼 하느님을 섬기는 요셉이 점을 친다는 말인가? 꿈을 풀 수 있는 능력은 오직 하느님께만 있다고 요셉 자신이 말했는데 과연 요셉은 은잔으로 점을 치는 사람이었던가? 고대 이집트의 사제들이나 귀족들은 자주 그런 점을 치곤하였다. 물이 들어 있는 그릇에다 기름을 떨어뜨리고, 그 기름이 퍼지는 모양이나 움직임을 보고, 규정에 따라 길흉을 읽었다고 한다. 하지만 점치는 잔이라는 말은 요셉의 연극이었다. 요셉은 형제들과 함께 식사 할 때, 형제들의 나이 순서에 따라 자리를 배정하였다. 이런 배려는 이집트 재상이 자신들을 잘 알고 있다는 인상을 줄 수밖에 없었다.
요셉은 자신의 집 관리인과 세밀한 작전을 구상하였다. 그래서 관리인은 요셉의 형제들을 따라 잡고, 누군가가 은잔을 훔쳐갔다는 것을, 그것도 이집트 재상이 점치는 데 사용하는 신성한 물건을 도둑질 해 갔으니 발각되면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라는 암시를 주면서 형제들이 다른 생각은 하지도 못하게 만들었다.
② 벤야민을 위하는 형제들
요셉의 형제들은 자신들은 결코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나리께서는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나리의 이 종들이 그런 짓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보십시오, 저희는 지난번 곡식 자루 부리에서 발견한 돈을 가나안 땅에서 가져다 나리께 되돌려 드렸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어찌 나리의 주인댁에서 은이나 금을 훔칠 수 있겠습니까? 나리의 이 종들 가운데 그것이 발견되는 자는 죽어 마땅합니다. 그리고 나머지도 나리의 종이 되겠습니다.”(창세기 44,7-9)
요셉의 형제들은 먼저 혐의를 강력하게 부인을 한다. 또한 맹세를 한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지난번에 자신들의 자루에서 나온 돈을 돌려줌을 상기시키면서 자신들의 정직함을 입증한다.
또한 더 나아가 엄청난 맹세를 하는데, 만일 자신들의 자루에서 은잔이 나오면 그자는 죽임을 당하고, 나머지 형제들은 종이 되겠다고 맹세한다.
그런데 이 말은 아버지 야곱이 라헬이 수호신을 훔쳐왔을 때, 라반에게 한 말과 비슷하다.
“저희 가운데 누구에게서든 어른의 신들을 발견하신다면, 그자는 죽어 마땅합니다.”(창세기 31,32)
야곱의 성급한 맹세가 사랑하는 라헬의 목숨을 위협했는데, 지금 이들의 성급한 맹세는 라헬의 둘째 아들인 벤야민의 목숨을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요셉의 형들이 은잔을 훔친 자는 죽임을 당하고 나머지는 모두 다 종이 되겠다고 맹세한 것은 그만큼 자기들이 무죄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자 그 관리인은 그들의 의견을 듣고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렇다면 좋다. 너희 말대로 하자. 그것이 발견되는 자는 나의 종이 된다. 그러나 나머지는 자유롭게 가도 좋다.”(창세기 44,10)
요셉의 지시를 받은 관리인은 요셉의 형제들의 말을 받아들이면서 은잔을 훔친 자만 종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
형제들은 서둘러 자신들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서 곡식 자루를 땅에 내려놓고 저마다 제 곡식 자루를 풀었다. 관리인이 큰아들부터 시작하여 막내아들에 이르기까지 뒤지자, 그 잔이 벤야민의 곡식 자루에서 나왔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의 옷을 찢고 저마다 나귀에 짐을 도로 실은 뒤, 그 성읍으로 되돌아갔다. 그런데 돈에 대한 언급은 관리인 편에서도 형제들 편에서도 없다. 전에도 같은 일이 있었으므로 무심히 여겼거나, 아니면 신성한 은잔을 훔쳤다는 엄청난 고발 앞에서 돈은 더 이상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간주했을 수도 있다.
그런데 막내 벤야민의 자루에서 은잔이 발견되자 형제들은 자기들의 옷을 찢고서 다시 성읍으로 돌아왔다. 괴로움으로 울부짖으며 옷을 찢는 그들의 모습 안에서 처음으로 친밀한 형제적 유대관계를 확인하게 된다. 22년 전 요셉의 장신구 달린 옷을 찢고 노예로 팔아 넘겼던 그들이 지금은 요셉의 친동생 벤야민이 노예로 끌려갈 상황이 되자 자기들의 옷을 찢는다. 그리고 벤야민 혼자 가지 않게 하고 함께 이집트 재상에게로 간다.
만일 요셉의 형제들이 예전과 같았다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벤야민을 꾸짖고, 자신들과는 아무 관계없다고 말했을 수도 있다. “그 에미의 그 자식놈, 네 에미가 외삼촌 집에서 우상을 훔쳐 달아나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들을 큰 곤경에 빠지게 하더니, 이제는 네놈이 그런 짓을 하는구나!”하면서 분노했을지도 모른다. 더 나아가 벤야민을 조롱하면서 “행운을 빈다. 이 도둑아! 혹시 누가 알겠냐?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겨서 자비를 베푸실지…,”
하지만 요셉의 형제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체험을 통해서 변화된 것이다. 요셉을 잃고서 상심해서 눈물로 세월을 보낸 아버지가 벤야민을 잃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요셉의 형제들은 아버지를 걱정하는 효심 깊은 아들들로 변화되고 있는 것이다.
③ 평화를 회복해 가는 형제들
유다와 그 형제들이 요셉의 집에 이르러 보니, 그는 아직도 그곳에 있었다. 그들이 그 앞에서 땅에 엎드리자, 요셉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는 어찌하여 이런 짓을 저질렀느냐? 나 같은 사람이 점을 치는 줄을 너희는 알지 못하였더냐?”(창세기44,15)
사실 요셉은 형들이 벤야민만을 남겨 두고 자기들끼리만 떠났으면 어떻게 하나하며 가슴조이며 기다렸을 것이다. 그런데 고맙게도 형들이 벤야민과 함께 돌아온 것이다. 즉 형들은 요셉의 마지막 시험을 통과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형제들을 이끄는 사람은 맏아들인 르우벤이 아니라 넷째 아들 유다에게 있게 된다. 벤야민을 데리고 올 수 있는 것도 유다 때문이었다. 유다는 형제들을 대신해서 요셉에게 간절한 탄원을 드린다.
“저희가 나리께 무어라 아뢰겠습니까? 무어라 여쭙겠습니까? 또 무어라 변명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이 종들의 죄를 밝혀내셨습니다. 이제 저희는 나리의 종입니다. 저희도, 잔이 나온 아이도 그러합니다.”(창세기 44,16)
유다는 세 번의 의문문을 써서 사죄를 표시한다. “저희가 나리께 무어라 아뢰겠습니까?” “무어라 여쭙겠습니까?” “무어라 변명하겠습니까?” 이렇게 삼중의 의문문으로 시작된 유다의 사죄는 유다는 물론 형제들의 깊은 통회를 드러내게 된다. 이어서 유다는 자신들의 범죄를 들추어내신 분이 이집트 재상이 아니라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시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신들의 죄는 은잔을 훔친 죄가 아니라 요셉을 미워하고 노예로 팔아넘긴 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유다는 자신들과 벤야민 모두가 요셉의 종임을 고백한다. 하지만 요셉은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잔이 나온 사람만 내 종이 되고, 나머지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에게 올라가거라.”(창세기 44,17)
요셉은 형들에 대한 시험을 끝내지 않고 조금 더 지켜본다. 요셉은 지금의 형제들이 예전에 자신을 노예로 팔아 버린 형제들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다. 형제들은 지금 벤야민이 겪고 있는 불행이 지난날 자신들이 저질렀던 범죄 때문이니까 다같이 공동책임을 지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정말로 많이 변화된 것이다.
하지만 요셉은 잔이 나온 사람만 종이 되고 나머지는 평안히 너희 아버지께 올라가라고 말한다. 여기서 “평안히 올라가거라”는 히브리어로 “샬롬” 안에서 올라가란 뜻이다. 샬롬은 평화, 온전함을 의미한다. 하지만 벤야민만을 남겨두고 다른 형제들만 아버지께 돌아갔을 때 과연 이스라엘 집안에 평화가 있겠는가? 가정의 평화를 깨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벤야민이 없다는 것은 아버지의 죽음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집안은 “샬롬”이 온전히 깨진 공동체였다. 형들이 질투와 이기심에 사로잡혀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리면서 가족 공동체의 샬롬은 깨진 것이다. 그래서 요셉이 이렇게 까지 하는 이유는 바로 “샬롬”을 온전히 회복하기 위한 필수적인 것이었다. 그러니 샬롬을 깨뜨린 형제들만이 다시금 그 공동체를 일치시킬 수 있는 장본인이다.
④ 유다의 탄원
유다는 요셉에게 나아가 탄원한다. 이 탄원문은 요셉 이야기는 물론이요, 창세기 전체에서 가장 긴 연설문이다. 이 유다의 타원은 인류의 문학작품 중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 중의 하나라고 한다. 유다의 타원은 한 인간의 간절한청원과 사랑하는 자식을 잃게 될 늙은 아버지의 마음을 구구절절 감동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성서 안에서 한 인간의 진실한 뉘우침과 회개에 대한 가장 감동적인 대목은 루가 복음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를 제외하고는 이것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1)
“나리, 이 종이 감히 나리께 한 말씀 아뢰겠습니다…늘그막에 얻은 막내가 있는데…앙버지가 그 애를 사랑합니다…그 아이가 없는 것을 보게 되면, 아버지는 죽고 말 것입니다…그러니 이제 이 종이 저 아이 대신 나리의 종으로 여기에 머무르고, 저 아이는 형들과 함께 올라가게 해 주십시오…”(창세기44,18-34)
유다의 탄원 구조
1. 유다는 요셉에게 한 말씀 드릴 기회를 달라고 청한다(창세기44,18).
2. 요셉이 알고 있는 사실들을 회상시킨다(창세기44,19-23).
3. 요셉이 모르는 사실, 가나안에서 벤야민을 데려가기 위한 과정 등을 설명한다(창세기44,24-29).
4. 벤야민만을 남겨둔 채 그들끼리만 고향에 돌아갔을 때, 아버지에게 일어날 비극을 설명한다(창세기44,30-31).
5. 벤야민 대신 자신을 노예로 삼아 달라고 청한다(창세기 44,32-34).
유다가 이 긴 탄원문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은 정의가 아니라 자비이다. 그의 호소는 벤야민의 무죄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벤야민을 노예로 이집트에 두고 감으로써 늙으신 아버지가 겪게 될 비참함을 구구절절 설명함으로써 이집트 재상의 마음을 움직여 보려는 것이다. 그의 호소문에서 아버지란 단어가 무려 열네 번이나 언급된다.
지금 요셉의 형제들은 엄청난 변화가 온 것이다. 22년 전 아버지의 편애를 받은 요셉을 미워하여 노예로 팔아버리는 데 앞장섰던 유다가 이제는 반대로 벤야민을 위해서 대신 노예가 되겠다고 말하면서 벤야민을 풀어달라고 청하고 있는 것이다. 22년 전 요셉의 찢어진 옷을 보고 통곡하시던 아버지를 매정하게 바라보던 유다가 지금은 아버지가 벤야민을 잃고 상심할 것만을 생각하면서 가슴 아파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유다가 어떻게 이렇게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었을까? 결혼해서 아이를 낳아봐야 부모의 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유다는 결혼해서 아들 셋을 두었는데 오난과 에르가 결국 죽게 되어, 셀라만이라도 살리려고 며느리 다말을 내보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그런 체험을 하면서 유다는 아버지 야곱을 이해했던 것이다.
아버지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목숨까지도 바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런 아들을 잃었을 때는 그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존재 또한 아버지이다. 유다는 그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유다가 이렇게 벤야민을 위해서 탄원할 때, 벤야민은 유다에게 감사하고, 어떻게 보답해야 할지 모를 정도였을 것이다. 그래서 훗날 벤야민 지파는 유다 지파에게 충성을 다한다. 벤야민 지파의 요나단이 유다 지파의 다윗을 자기 목숨처럼 사랑해 주고 지켜주게 된다.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졌을 때도 벤야민 지파만이 유다 지파 곁에 남는 유일한 지파가 된다. 그리고 벤야민 지파의 바오로가 유다 지파에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께 목숨을 바쳐서 충성한다. 즉 과거에 있었던 은혜가 후대를 통해서 계속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군가에게 은덕을 베풀면, 훗날 우리 후손들이 덕을 본다는 것이다. 베푸는 것은 결국 씨를 심는 것이다. 언젠가는 그 씨가 싹을 내고, 열매를 내어 수십 배, 수백 배의 결실을 맺게 되기 때문이다.
어느날, 수녀님들과 등산을 갔다 오는데, 수녀님 한분이 계속해서 지나가는 차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는 것이었다.
“수녀님! 왜 그러시는거예요? 부끄럽지도 않으세요?”
라고 물었더니 그 수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제가 이렇게 손을 흔들어 주면, 저 사람들은 기분이 좋아질 것이고, 저 사람들도 기회가 되면 다른 이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겠지요. 그러면 다른 이들이 또 기분이 좋아질 것이고, 또 그 사람들이…,”
내가 베풀면서 살아갈 때, 언젠가는 더 많은 축복으로 다가올 것이다. 더 큰 축복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