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형제들과의 화해(창세기 45,1-28)
요셉은 형제들을 시험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벤야민의 자루에 은잔을 넣어놓고, 형제들이 어떻게 나오는가를 보았다. 형제들은 벤야민 만을 남겨 놓고서 가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벤야민을 위해서 유다가 대신 종이 되겠다고 탄원을 하고 있다. 요셉은 유다의 탄원에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한다. 그리고 자신이 바로 요셉임을 밝힌다.
1) 형제들과 화해하는 요셉
① 자신이 누구인지를 형제들에게 밝히는 요셉(창세기 45,1-3)
요셉은 자기 곁에 서 있는 모든 이들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모두들 물러가게 하여라.” 하고 외쳤다. 그래서 요셉이 형제들에게 자신을 밝힐 때, 그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요셉이 목 놓아 울자, 그 소리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들리고 파라오의 궁궐에도 들렸다.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직 살아 계십니까?” 그러나 형제들은 요셉 앞에서 너무나 놀라, 그에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창세기 54,1-3)
요셉은 유다의 탄원을 통해 형들의 변화된 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애절한 탄원을 듣고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다. 지난번에는 안방으로 들어가서 울었지만 이번에는 형들 앞에서 목 놓아 운다. 파라오의 궁궐에도 들릴 정도로…,
요셉은 울기 전에 주위의 시종들을 모두 물러가게 한다. 그것은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라기보다는 형들과 해결해야 할 중요한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요셉이 우는 것은 모든 사람이 알게 되었다. 하지만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다른 이들이 알게 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요셉은 지금까지 자신의 형들에 대해서 이야기 하지 않았다. 오래전 감옥에서 때 파라오의 고관에게 자신의 무죄를 주장하면서 출옥하게 해 달라고 청했을 때, 그때에도 형들에 대한 말은 하지 않았다. 요셉은 형들이 자기를 이집트에 노예로 팔아 넘겼는데도 그 사실은 감추고 유괴되어 이집트까지 끌려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사람들이 알면 형들을 그냥 놔둘 리가 없다. 파라오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런 짐승만도 못한 이들을 이집트에 정착시키려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요셉이 얼마나 앞을 내다보면서 행동하는지, 형들을 위하고, 가족을 위하는지 알 수 있다.
요셉은 형들에게 자신을 밝힌 후에 아버지의 안부를 묻는다. 그런데 이것은 요셉이 아버지의 생존 여부를 확인하고 싶어서 던진 질문이 아니다. 요셉은 꿈에도 그리던 아버지와의 상봉을 생각하면서 가슴이 벅차올라 환호성을 지른 것이다. 아버지를 만나기 전에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하나 하는 염려와 조바심에서 한 말인 것이다.
그런데 형제들은 너무도 놀라 아무 말 하지 못한다. 얼마나 당황했을까? 이집트 재상의 처분만을 바라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가 요셉이라고 말을 하고 있으니…, 그런데 또 얼마나 두려웠을까? 자신들이 죽이려고 하다가 은전 20냥 받고 이방인들에게 팔아버린 그 요셉이 자신들 앞에 있으니…,
② 형들을 용서하는 요셉(45,3-15)
형들은 놀랬을 것이다. 당황했고, 더욱 두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요셉은 형제들에게 가까이 오라고 말하면서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라고 말한다. 지금까지는 이집트인 행세를 해서 형들이 몰라 볼 수 있겠지만 가까이 와서 보면 자신이 바로 요셉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 사실 때문에 괴로워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기 45,5)
비록 형제들이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렸지만 하느님께서는 요셉을 통하여 구원을 주시기로 작정하였다는 것을 요셉은 알린다. 이곳으로 자신을 보낸 것은 형제들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러니 괴로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요셉이 형제들의 범죄 사실을 이야기 한 것은 이미 요셉이 형들을 용서1)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요셉이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형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진실로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은 아니다. 요셉의 기구한 인생에 숨겨진 하느님의 섭리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로 보낸 것이 형들이 아니라 하느님이시라고 네 번이나 말한다(45,4-5.7;50,20). 즉 요셉의 용서는 하느님 섭리에 대한 인식 때문에 가능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깊은 뜻으로 요셉의 삶에 개입하셨다는 것을 알게 된 요셉은 형들에 대한 복수심과 증오감에 시달리지 않았다. 오히려 형들을 용서하고 하느님께는 깊은 감사와 찬미의 마음을 갖게 된 것이다.
용서는 하느님의 섭리를 깨달을 때 가능하게 된다.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을 대는 상처 준 사람을 용서하기 어렵지만 그것을 깨닫게 되면 용서가 쉬워진다. 그러므로 용서하기 위해서는 내 삶 안에서 함께 하시는 하느님의 섭리를 인식해야 한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그것을 깨닫게 되는 것은 아니다. 조금씩, 조금씩 신앙의 눈으로 바라볼 때 “아하! 하느님께서 나를 이런 식으로 인도하시는구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전에 “하느님! 어째서 저에게는 이런 고통과 시련을 주시는 것입니까?”하면서 하늘을 향해 울부짖는 시간이 있기 마련이다.
③ 형제들을 끌어안는 요셉
요셉은 형제들에게 아버지를 모셔올 것임을 말한다. 앞으로 기근이 다섯 해는 더 계속될 것이기에 요셉은 아버지를 부양할 것임을,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계획이심을 알린다.
“내가 이집트에서 누리는 이 영화와 그 밖에 무엇이든 본 대로 다 아버지께 말씀드리십시오. 서둘러 아버지를 모시고 이곳으로 내려오십시오.”(창세기 45,13)
요셉은 형제들의 당황스러운 마음과 두려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서 형제들의 마음을 풀어준다. 요셉은 먼저 벤야민의 목을 껴안고 울었다. 그리고 형제들과도 하나하나 입을 맞추고 그들을 붙잡고 울었다. 그제야 형들은 요셉과 이야기할 수 있었다. 어릴 적 요셉이 미워서 다정한 말 한마디 안 건넸던 그들이 이제 요셉과 얘기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요셉은 깨어진 형제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자신의 지위와 권력을 창조적으로 이용했는데, 그러한 권력과 지위도 없는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은 어떻게 화해를 주도해 나갈 것인가?
2.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자기가 잘못했다는 생각도 안하고 있는데, 알고 있다 해도 용서를 청할 마음이 전혀 없는데 어떻게 요셉처럼 화해를 주도해 나갈까?
화해는 관계 회복이 주목적이다. 상대방이 관계 회복을 하고 싶은 의도가 전혀 없다면, 내가 노력해도 안 된다면, 애써 노력할 필요는 없다. 그것 때문에 고민할 필요는 없다.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행하고(용서), 나머지는 그에게 맡겨 두면 된다. 하지만 같이 사는 사람일 경우는 문제가 된다. 그렇다고 이혼이 최선일까?
2) 파라오의 초청(창세기 45,16-20)
요셉의 형제들이 왔다는 소식이 파라오의 궁궐에 전해지자,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이 좋아하였다. 자기 일들처럼 기뻐하였다. 파라오는 요셉의 형제들이 좋은 곳에 머물도록 초대한다. 나아가 파라오는 요셉의 늙은 아버지와 어린 아이들, 그리고 여자들을 위해서 수레까지 제공한다. 이로써 파라오가 요셉에게 얼마나 깊이 고마워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파라오는 자기 민족을 대흉년에서 구제해 주고 자신의 통치권을 더 강화시켜 준 요셉에게 깊이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그대의 형제들에게 이르시오. ‘너희는 이렇게 하여라. 너희의 짐승들에 짐을 싣고 가나안 땅으로 가서, 너희 아버지와 집안 식구들을 데리고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이집트에서 가장 좋은 땅을 주고, 이 땅의 기름진 것을 먹게 해 주겠다.’ 그대는 또 이렇게 내 말을 전하시오. ‘너희는 이렇게 하여라. 너희의 어린것들과 아내들을 생각하여, 이집트 땅에서 수레들도 끌고 가거라. 거기에다 너희 아버지를 태워 오너라. 너희 세간들을 아까워하지 마라. 이집트 온 땅의 가장 좋은 것들이 너희 차지가 될 것이다.’”(창세기 45,17-20)
파라오와 그의 신하들이 기뻐한 것은 당시의 파라오가 이집트 사람이 아니라, 요셉과 그의 형제들과 같은 나라 출신인 힉소스라고 하는 주장이 있다.“요셉의 사적을 모르고,”이스라엘 사람을 괴롭힌 탈출기 1장 8절의‘새 왕’은 권력을 잃은 마지막 힉소스가 이집트를 쫓겨난 뒤에 정권을 잡은 이집트 출신의 어느 파라오일 것이라는 것이다.
힉소스족은 아라비아, 가나안, 시리아 등 중동 지방에서 살던 셈족의 연합이었다고 한다. 기원전 1720년경에 말이 끄는 병거 등 최신 군사 무기를 가진 힉소스족이 북부 이집트에서 권력을 잡고, 나일 강 삼각주에 있던 모든 군소 국가들을 병합하여 새로운 왕조를 수립하였다. 그리고 나일 강 삼각주의 북동 지역, 즉 아시아와 이집트와 국경 지역의 아바리스 성을 구축하고 왕도로 삼아 이집트를 약 150년 동안 통치하였다. 즉 제14왕조부터 제16왕조(기원전 1720-1570년)까지의 왕들은 힉소스족이었다고 한다.
이집트 문헌에 보면 이집트인들은 그들을 외부에서 침입한 약탈자(Shasou)라고 하였고, 그 약탈자의 두목(Hik~Shasou)이라는 말에서 힉소스(Hyksos), 즉 “외국에서 온 통치자”라는 부족 명칭이 생겨났다고 한다.
힉소스족이 이집트의 통치자가 됨에 따라 같은 셈족인 요셉이 왕의 호의로 재상이 되었고, 그 덕분에 야곱의 후손들이 나일 강 삼각주의 동부 비옥한 땅인 고센지역에 정착하게 되었고, 그때가 기원전 1710년경 또는 1680년경이라고 한다.
3) 요셉의 형제들이 가나안으로 돌아가다(창세기 45,21-28)
이스라엘의 아들들은 파라오가 하라는 대로 하였다. 요셉은 파라오의 명령대로 그들에게 수레들을 내주고 여행 양식도 마련해 주었다. 야곱의 아들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이스라엘의 아들들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야곱 가문의 이집트로의 이주가 개인적인 이사가 아니라 하느님 백성의 이주이기 때문이다. 요셉은 형제들에게 예복을 한 벌씩 주고, 벤야민에게는 은전 삼백 닢과 예복 다섯 벌을 주었다. 또한 아버지에게는 이집트의 특산물을 실은 나귀 열 마리와, 아버지가 여행길에 먹을 곡식과 빵과 음식을 실은 암나귀 열 마리를 보냈다.
요셉은 형들에게 가나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길에서 너무 흥분하지들 마십시오2).”(창세기 45,23)라고 당부한다. 그동안 겪은 일들은 그들이 흥분하기에 충분하다. 또한 더 중요한 것은 요셉의 일을 아버지 야곱에게 해 드려야 하는데 어떻게 해 드려야 할지 고민해야 한다. 형제들은 요셉이 살아 있으며 그가 이집트 재상이라는 것과 온 가족이 대기근 동안 이집트에서 살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놓고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야 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을 말하기 위해서는 예전에 요셉이 짐승에게 찢겨 죽었다는 것이 거짓말이며, 자신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았다는 것을 이야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누가 말하느냐?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냉정을 찾아야 만이 아버지가 다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요셉의 형제들은 이집트에서 올라와 가나안 땅에 있는 아버지 야곱에게 다다랐다. 그들이 야곱에게 “요셉이 살아 있습니다. 그는 온 이집트 땅의 통치자입니다.” 하고 말하였지만, 야곱의 마음은 무덤덤하기만 하였다. 그들의 말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흥분하지 않고 요셉에게 말했던 것 같다. 벤야민이 무사히 돌아왔고, 이집트에 붙잡혀 있었던 시메온까지 돌아왔지만 야곱은 어느 정도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아니면 아들들이 말하는 재주가 없었던지…,
그러나 야곱은, 요셉이 자기를 데려오라고 보낸 수레들을 보자 정신이 들었다. 야곱은 22년 동안이나 죽었다고 생각했던 요셉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이제 삶의 희망을 가지게 된다. 야곱은 기쁨에 넘쳐서 이렇게 말한다.
“내 아들 요셉이 살아 있다니, 이제 여한이 없구나!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 아이를 봐야겠다.”(창세기 45,28)
그런데 요셉의 형제들이 가나안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에게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씀드렸는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만일 형들이 솔직하게 자기들의 죄악을 고백했다면, 야곱 편에서 어떤 식으로든 언급이 있어야 하는데 그러한 언급이 전혀 없다.
좌우지간 이제 야곱의 삶은 달라질 것이다. 죽어있던 상태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 사랑하는 아들 요셉을 잃은 다음 삶의 희망이 꺾여 버렸던 야곱. 하지만 이제 자신을 절망에 빠뜨린 아들이 다시금 야곱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