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티나와 그 주변 지역에 살던 민족들
기원전 이천년기 중반까지만 해도 팔레스티나와 그 주변 지역에는 거주민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단지 여러 유목민 무리가 이 지역을 떠돌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무리의 흔적과 기억이 신명 2장에 남아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탈출하던 시기에는 이 지역에 거주민들의 수와 종류가 많아지고, 자연히 그들 사이에 생존과 영토권 확보를 위한 전쟁도 자주 일어난다. 이런 상황에 휘말리거나 뛰어든 민족들을 살펴보자.
‘가나안’이라는 이름은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헌에 골고루 나온다. 이집트 문헌에서 가나안 언제나 동쪽 아시아 지방을 가리키는 말로 통하였다. 성서에서 가나안은 요르단강 서쪽의 팔레스티나 전체, 곧 히브리인들의 약속받은 땅을 가리킨다. 그러나 가나안은 좀더 제한된 지역, 특히 팔레스티나의 지중해 연안 지역을 뜻할 수 도 있다. 성서 저자들은 팔레스티나의 토착민들을 ‘가나안인들’이라고도 하고, 때때로 ‘아모리인들’과 동일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팔레스티나를 차지한 종족들을 언급하는 자리에서 창세기 저자는 가나안인들과 아모리인들을 따로 구별한다(창세 12,5-6;15,18-21).
‘불레셋인들’은 팔레스티나 남쪽 해안 평야(오늘날 텔-아비브의 남쪽)을 차지하였다. 그들은 보래 에게해에서 떠돌던 해양민족이었는데, 청동기 시대 말엽에 이 지역에 들어와 정착하였다. 그들의 주요 성읍은 아스독, 아스클론, 에크론, 갓, 가자였고, 이스라엘과 싸울 때에 이 다섯 성읍의 통치자들은 서로 동맹을 맺었다. 이스라엘과 불레셋인들 사이의 갈등은 판관기와 사무엘서에 잘 그려져 있다. 이 둘은 한동안 평화롭게 지내다가, 판관기 말엽인 기원전 1050년경 해안 평야에만 머물러 살던 불레셋인들이 유다인들이 장악한 산악지대로 영토 확장을 꾀하면서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다. 이스라엘은 계약 귀를 빼앗긴 에벤-에젤 전투를 비롯하여 여러 곳에서 이들이게 패배하였다. 불레셋인들은 에스드렐론 골짜기의 농경지대와 유다의 산악지대로 진출하였다. 숫적으로 열세인 불레셋인들이 전쟁에서 이렇게 성공을 거둔 것은, 그들이 철을 잘 다루어 가나안에 정착한 다른 민족들이 사용하는, 상대적으로 부드러운 구리 창과 구리 칼보다 더 강한 무기를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14세기부터 철제 무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히타이트인들에게서 무기 제작 기술을 배웠다. 게다가 이 기술에 대한 보안을 철저히 유지하여 다른 미족들과의 전쟁에서 언제나 우위를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이 기술이 이스라엘에 알려지면서 더 이상 유리한 입장을 차지할 수 있게 된다. 불레셋인들과의 전쟁은 이스라엘에 왕정 제도가 생겨나는 계기가 되었고, 실제로 이스라엘의 처음 두 임금, 사울과 다윗은 이들과의 전투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아야 했다. 성서의 주 무대인 ‘팔레스티나’는 ‘불레셋인들이 차지하던 땅’이라는 뜻이다. 로마 시대에는이 지역을 ‘시리아-팔레스티나’라고 불렀다.
‘페니키아’는 ‘자주색’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포이닉스에서 유래한다. 호머에 따르면 이 색깔르 발견하고 염색에 이용한 사람들이 바로 페니키아인들이었다. 이들은 그리스-로마의 고전 시대에 팔레스티나 북쪽 지중해 해변가에 자리잡았다. 띠로와 시돈과 비를로스 같은 항구에 정착한 페니키아인들은 무역업에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다. 그들은 레바논 산맥 때문에 내륙의 아람(시리아) 성읍들과 단절되어 일찍부터 바다로 진출할 수밖에 없었다.
‘아라비아’는 ‘유목민’이라는 셈족어에서 나왔는데 이미 페르시아 문헌에 언급되었다. 성서에서 아라비아는 오늘날의 아라비아 반도 전체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티나 남동쪽의 사막 지역을 뜻한다. 사막을 횡단하면서 장사와 무역을 하던 나바테아인들이 바로 아라비아 출신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을 정복하고 난 직후에 기록된 문헌을 보면, 나바테아인들은 페트라를 주요 거점으로 삼고 아라비아 반도 남부에서 진귀한 향료와 조미료를 가져다 팔았다.
‘에돔’은 아라비아인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에돔의 영토는 사해 남쪽에서 홍해까지 이어졌다. 창세기 저자는 야곱과 에사오의 이야기에서 에돔인들을 에사오의 후손들로 밝힌다. 따라서 에돔은 이스라엘과 같은 혈통을 이어받은 부족이다. 그런데도 에사오와 야곱 사이의 갈등이 시사하듯 에돔은 왕정 시대에 자수 이스라엘과 싸움을 벌였다. 사무엘서와 열왕기와 역대기에는 사울, 다윗, 솔로몬, 아마지야, 아자리야 임금들이 모두 에돔과 싸워 그들을 굴복시킨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일부 예언서들(예레 49장과 에제 35장, 그리고 오바디야서)에는 때때로 그 반대의 상황도 벌어졌음을 시사한다. 에돔인들에 대한 미움을 드러내는 시편 137편은 에돔이 이스라엘의 주요 적국이었음을 증언한다.
‘모압’은 사해 건너편 에돔의 북쪽 경계에서 아르논강에 이르는 지역을 차지하였다. 모압인들은 그모스 신을 섬기는 셈족으로서 에돔인들과 같은 시기에 이 곳에 정착하였다. 모압은 다윗 임금의 통치 초기에 이스라엘에 정복당한 바 있고 솔로몬 임금 시대에는 이스라엘의영토가 되었다. 솔로몬 임금 이래 백여 년 간 모압은 북왕국 이스라엘인들에게 지배를 받가가, 메사 임금 때 이스라엘에서 독립을 쟁취하였다. 메사가 남긴 ‘모압 돌기둥’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모압은 아르논강 북쪽의 길르앗 땅과 헤스본을 줄곧 자기네 영토라고 주장하였다. 성서에는 이 지역이 이스라엘 부족들에게 속한 땅으로 되어 있다. 영토 분쟁은 물론, 영아 제사를 포함한 모압인들의 그모스 신 숭배 예식들은 이스라엘과 피랗 수 없느 갈들을 일으킨 원인이었다(참조: 2열왕 3,4-27). 모압에 대한 이스라엘의 혐오감은 예언자들의 신탁에서 확인된다(이사 15장; 예레 48장; 아모 2장).
‘암몬’은 모압 북쪽 아르논강과 야뽁강 사이의 영역을 차지하였다. 암몬의 수도는 라밧-암몬으로 오늘날 요르단의 수도 암만과 같다. 암몬인들은 본디 아람족에 속하는데, 주변의 다른 종족들처럼 기원전 12세기에 이 곳에 정착하였다. 그들은 요르단강을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인들과 오랫동안 전쟁을 벌였다. 판관기 저자는 에훗이 모압 임금 에글론과 동맹을 맺은 암몬인들의 손에서 어떻게 이스라엘 지파들을 구하였는지 전해 준다(판관 3,12-30). 사울은 야베스-길르앗에서 암몬인들을 쳐 죽였고(1사무 11,1-11), 다윗은 자기가 보낸 사신들을 모욕하였다 해서 암몬의 영토를 초토화하였다(2사무 10장; 12,26-31). 나중에 암몬을 비롯하여 ‘요르단강 동부’(transjordan)에 살던 에돔과 모압은 북왕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아시리아의 속국이 되었다. 기원전 598년 유다가 바빌로니아의 공격을 받아 허약해지자, 암몬인들은 이 틈을 타 이스라엘의 영토에 침입하는 지략을 보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