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의 텍스트 유형(1)
이제 호세아 1-3장에 나타난 예언적 언어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텍스트의 유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호세아서 1,2b-9; 2,4-15; 3,1-5는 예언자의 삶에 관한 여러 가지 종류의 이야기를 소개한 것처럼 보인다.
1,2b-9는 어떤 한 제자가 스승의 극적인 체험에 대하여 말하는 듯한 3인칭 필체로 쓰여진 예언자의 전기적 이야기이다. 적어도 3년에 걸친 예언자의 생애에 대한 이 이야기는 아마도 설교를 하던 시기는 아니었던 것 같다. 3년이라는 것은 3명의 자녀를 얻기 위한 기간이다.
호세아는 단순히 자기 아내와 그녀의 자식들 – 이 자식들은 호세아와의 관계에서 낳은 자식인지 그렇지 않고 얻은 자식인지, 여하튼 그녀의 자식들 – 을 받아들였다. 야훼께서 강하게 요청한 이름들을 그들에게 부여하였고, 아마도 사랑하지 않던 부인과 친교를 맺는 모욕을 참아 내었을 것이다. 적어도 객관적으로 볼 때에 호세아가 고멜을 사랑해서 결혼한 것은 아니었다.
호세아의 자식들과 그들의 이름은 동시대인들을 위한 하나의 표징일 수 있다. 나의 백성이 아님 ימע־אל (로 암미), 사랑 받지 못한 여자 (러후야마)등의 표징의 의미는 즉시 분명해 진다. 여기에 ‘이즈르엘’은 적어도 막연하게 이스라엘의 삶의 사건들 특별히 ‘이제벨’과 ‘나봇’의 이야기를 회상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이즈르엘이라는 이름의 정확한 의미 그리고 고멜 이야기의 정확한 의미는 오직 이제벨과 예후의 이야기와 함께 (מינונז, jenunim) 간음녀, 매음녀를 어느 누구와 결합시키느냐에 따라 분명해질 수 있다. 또한 ‘예후’가 ‘아합’의 가문을 처벌하였듯이 야훼께서 똑같은 방법으로 똑같은 이유 때문에 예후의 가문을 처벌하겠다고 결론 내릴 수 있다. 매음녀가 누구였는가 한참동안 앞부분에서 얘기한 내용이다. 이 두 이야기를 주의깊게 읽을 수 있는 사람만이 텍스트의 저자처럼 결론에 도달 가능하다.
여기에는 텍스트가 고정된 형태로 될 때 갖게 되는 예언적 메세지의 단계가 있음을 제시한 것 같다. 우리는 호세아 1,2b-9는 이러한 2개의 단계의 의미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1) 자녀들의 이름에 의해 표현된 첫 번째 의미는 상대적으로 동시대인들, 호세아 자신과 백성들에게 적용되는 의미일 것이다.
2) 두 번째 의미는 편집된 텍스트의 저자만이 이해할 수 있는 매음사건과 연결된 의미일 것이다.
자녀들과 딸 관계 즉 호세아서 1장에 나오는 아들들과 딸의 관계와 그들이 지닌 이름들에 대하여 이사야 7-8장에 나오는 자녀들의 관계를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사야 7,8장에 나오는 개념과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
여기서 아들과 딸의 관련, 그리고 그들의 부모에 대한 의존적인 특성을 천부적으로 나의 아들, 나의 딸로 느끼고 부르도록 하고 있다. 또 그가 누구의 자식이라면 그 자식을 나의 딸, 나의 아들로 부르는 것은 당연할 것이고 마찬 가지로 아들도 나의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아들과 딸은 동정을 일으키는 대상이다. 모성·부성과 실재로 자기 자녀들에 대한 아버지의 고유한 감성인 연민과 동정 사이의 엄격한 결합은 이사 49,15에서 드러나게 표현된다.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부성과 모성, 그리고 연민과 동정 사이에 연결된 결합을 볼 수 있다.
실재적인 아들과 딸과, 그들의 이름인 ‘사랑 받지 못함’‘나의 백성이 아님’ 등은 실재로 아들 및 딸에 내포된 속성에 대한 격렬한 부정에서만 가능하다. 바로 이러한 부성·모성 그리고 연민·동정을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즈르엘 및 아들 사이의 관계는 덜 직접적인 표현이다. 아마도 70명의 자녀들 그리고 아합 및 요람의 후손들의 살인 및 암살이 여기에 해당되는 것 같다. 예후가 많은 아합의 후손들을 죽인다. 이즈르엘 및 아들들은 이즈르엘의 매음의 자식들을 학살한 처벌의 상징이 된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 관계는 양쪽 텍스트를 연관해야만 한다.
두 번째 부분 호세아 2,4-15에 나오는 예언적 언어에 대한 문제점은 텍스트를 寓意로 볼 지 象徵으로 볼 지에 따라 다르다. (allegoria)
텍스트의 의미론을 살펴볼 때에 그리고 텍스트의 구성체계에서 이 부분에 대한 1차적인 주석을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등장 인물들 사이의 관계 안에서 텍스트와 각별하게 관련된 이름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을 지적하였다. 이런 구조에 대한 분석은 대부분의 경우 이 텍스트의 내용을 땅에 대해 적용시킬 수 있었던 만큼 어떤 여인에게도 적용이 가능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백성이라든가 땅이라든가 여인 등. 이처럼 우리는 이 텍스트가 그 여인과 관련된다 혹은 그 여인을 언급하고 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이 아님을 지적하고 있다. 우리의 이런 확신은 텍스트의 유형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뒷받침될 것이다. 이 텍스트가 이스라엘 땅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고 평하는 사람들은 이 텍스트를 하나의 우의로 보고자 한다. 겉으로는 한 여인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실재로는 땅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호세아 2,4-15을 하나의 우의로 이해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을 제기해야 될 것이다.
여기서는 첫번 어려움이 우의를 어떻게 정의하는가하는 문제이다.
W.Stählin는 우의에 대한 정의를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우의의 본질은 비유적인 것 Uneigentlichkeit의 요소에 의해서 특징 지워진다고 그는 이야기한다. 우의는 어떤 것을 말하고 지적하고 드러내지만 다른 것을 의미하기를 원한다. 따라서 우의는 직접적으로 눈에 보이고 제시하는 것을 보려 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비롯되는 다른 것을 숙고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음을 그는 언급하고 있다. 마치 우의는 투명하게만 하는 창문의 유리와 같다. 우의는 다른 것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창문은 다른 것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우의는 자체적으로 가치를 지닌 한 순간을 생각케하지만 독자는 우의 뒤에 있는 중요한 것을 즉시 고려하게 된다고 그는 주장한다. 그렇기에 언어라든가 조형미술의 정해진 어떤 표현이 하나의 우의라는 무언의 동의를 전개하게 된다. 우의 안에서는 우의가 전하려고 하는 개념만이 중요하다. 그리고 그는 서양에 있어서 우의의 예를 들고 있다. 서양에서 저울을 들고 있는 여인은 정의를 의미한다고 한다. 그리고 서양에서 활과 화살을 지닌 사내아이는 사랑을 의미한다고 한다. 이런 우의의 내용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우의의 내용은 우의를 인식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다.
그의 주장은 D.O.Via가 좀 더 정리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Via에 의하면 우의는 다음과 같다.“우의를 이해하기 위하여 독자는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이나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상황과 친숙해야 하기에 어떤 특정 얘기가 우의로 간주되는지는 독자의 관점과 관련된 어떤 것에 좌우된다고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독자가 우의를 구성하고 있는 역사적인 것이 아닌 상황을 깨닫지 못한다면 – 역사적이 아닌 것을 역사적인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지적이다. 반대로 역사적인 이야기는 그것과 친숙하거나 혹은 잘 알려진 상황과 부합되기에 우의로 오해(?)될 수 있다.”라고 그는 주장한다.
우의에 대해서 H.Weder가 보충 설명을 한다.
그는 신약성서의 비유와 우의를 비교하면서 우의에 대한 개념을 발전시킨다.
비유 안에서 개별적인 요소들은 서로 관련된다. 비유에 대한 그의 주장은 다음 스케마로 요약할 수 있다.
요소1 요소2 요소3 ——> 의미
즉, 비유의 요소들과 특성들은 어떤 ‘요소1’이 지닌 고유한 함축적인 의미를 갖는 것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서로 관련된다. 이것이 비유다. 비유에 대한 설명은 이 도표 해설로 충분할 것이다.
그 대신 우의에는 모든 요소는 부분적인 의미와 관련되며, 서로에 대해서는 직접적으로 관련되지 않는다. 우의는 모든 요소들은 부분적인 의미와 관련되지만 서로에 대해서는 관련되지 않는다는 것을 도표로 그리면 다음과 같다.
요소1 요소2 요소3
ꠐ ꠐ ꠐ
부분적의미1 부분적의미2 부분적의미3 <—–> 전체적의미
모든 요소들은 부분적인 의미와 관련된다는 것, 그러나 서로에 대해서는 관련되지 않는다고 그는 보고 있다. 이 스케마와 함께 전체적인 의미는 다른 부분적인 의미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분적인 의미를 전제하거나 강조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부분적인 의미는 단지 이 전체적인 의미의 특성들을 명백하게 할뿐이다.
하지만 이 설명들은 중요한 문제들을 애매하게 남겨 놓는다고 할 수 있다. 우의가 이미 잘 알고 있는 현실을 지적하고 나서 즉시 배제되어야 하는 하나의 도구에 불과하다면 그러한 우의를 구성하지 않는 의도와 그 우의를 구성하도록 장려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또한 우의도 비유처럼 대표하는 현실과 관련을 어떤 맺고 있다는 것을 필연적으로 인정해야 할 것 같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