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장까지의 신학적 재손질
Wolff는 호세아서의 저자를 거의 모두 재손질의 저자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반면 Ruprecht는 여러 명의 저자들과 여러 집성 시기를 거쳐서 호세아서가 지금의 모습을 갖춘 것으로 본다. 여기서 말하는 재손질이란, 재손질된 텍스트는 의도적으로 영감을 받은 다른 텍스트를 전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면 어떤 저자는 자신이 저술한 고유의 텍스트를 숙고하면서 신학적인 주석들을 첨가할 수 있다. 십자가의 성 요한이 자기 고유의 시에, 해석에 도움이 되도록 자신의 주석을 첨가한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예언 텍스트에 관한 한 이와 유사한 과정 안에서 우리가 수용하는 예언의 일반적인 개념에서부터 부분적으로 독립된 다른 입장들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보다 카리스마적인 개념 혹은 보다 신학적인 개념에서부터 부분적으로 독립된 다른 입장들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 대목에서 주요하게 생각되는 재손질부분 호세 2,16~25까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될 것이다. 호세 2,1~3; 1,7; 3,5b에서는 유다와 관련된 재손질 흔적이 발견되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그 의미가 분명하기 때문에 생략할 것이다.
앞에서 지적한 바 대로 호세 2,4~15에서 추출할 수 있는 2개의 가치(이 2개의 가치가 16~24에서도 발견되고 있다)라는 것은 ‘여인과 땅’ 또는 ‘여인과 백성’이라는 개념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런데 16~24에서 ‘여인’에 대한 주제는 결혼식에 대한 주제로 발전되며, ‘땅’에 대한 주제는 풍요와 풍산에 관련된 테마로 발전되고 있다.
혼인에 관계되는 테마를 표현하고 있는 2,16~18.21~22을 살펴보겠다.
땅의 풍요와 관계된 것은
“그러나 이제 나는 그를 꾀어 내어 빈들로 나가 사랑을 속삭여 주리라. 거기에 포도원을 마련해 주고 아골 골짜기를 희망의 문으로 바꾸어 주리라. 그제야 내 사랑이 그 마음에 메아리치리라. 에집트에서 나오던 때, 한창 피어나던 시절같이. 그 날이 오면 너는 나를 주인이라 부르지 아니하고 낭군이라고 부르리라. 야훼의 말씀이시다.”(2,16~18)
“너와 나는 약혼한 사이. 우리 사이는 영원히 변할 수 없다. 나의 약혼 선물은 정의와 공평, 한결같은 사랑과 뜨거운 애정이다. 진실도 나의 약혼 선물이다. 이것을 받고 나 야훼의 마음을 알아다오.”(2,21~22)
이 주제에 대한 일반적인 경향은 이 텍스트, 특히 16절이 이론적으로 여인 또는 이스라엘과 관련된다고 계속 생각하게 한다. 이 부분이 결혼식 또는 혼인 테마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들에 의하면 이 두 경우 모두 유혹 내지는 사랑에 빠짐에 대한 표상을 다룬다고 주장한다. 나누어 준 마지막 스케마에도 유혹이라는 제목을 붙였다. Wolff에 의하면 여기서 사용된 התכ(katah) 동사를 거친 표상, 조합한 표상으로 해석하고자 한다. 이 단어와 함게 야훼께서는 자신을 친히 많은 정부들 가운데서 잘난 채 하는 아가씨를 매료시키려고 하는 유혹자로 소개하며, 동사 בל־לע רבד(diber al leb, 마음에 말하다)은 완전하게 여인에 대한 남자의 사랑의 언어에 속하는 표현으로 Wolff는 해석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 우선 위에 나오는 התכ는 תכ(keti, 단순함, 어리석음, 신중하지 못함, 경솔함)에서 나온 것으로 주장한다. התכ 동사는 성서에서 28번 나온다. 호세 7,11에서는 qal형으로 등장한다.
에브라임은 철이 없고 비둘기처럼 어수룩하구나.
여기서는 에집트와 아시리아와의 동맹에 의해 야기된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어리석음에 대한 견책 안에서 나온다. 다른 구절인 신명 11,16; 욥 5,2; 31,27; 잠언 20,19은 자동사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즉 단순하다, 어리석다, 경솔하다는 의미로 번역할 수 있다.
진정 미련한 자는 역정내다 죽고(욥 5,2)
pill 또는 pual 형태는 어떤 사람이 고통을 당하는 행동의 의미를 제공해 주고 있다. 즉 pill형태는 목적어로서, pual 형태는 주어로서.
바로 그러한 행동 때문에 어리석음을 드러내는 것으로 고려될 수 있다. 이 התכ 동사에 의해 제공된 행동은 상당히 교활함, 지력, 전망, 설득에 기초한 어떤 영향을 수용함을 암시하고 있다. 그 예로서 1열왕 22,20~22; 에제 14,9; 예레 20,7.10 참조.
만일 예언자가 꾐에 빠져 그런 말을 한다면, 바로 내가 그 예언자를 유혹한 것이다. 나는 내 백성 이스라엘 가운데서 그런 자를 내 손으로 없애 버리리라(에제 14,9)
התכ에 의해서 제공된 행동은 꾐에 기초한 어떤 영향을 수용함을 암시하고 있으며, 어떤 윤리적인 가치도 그리고 그 가치와 연결된 것을 주장하는 어떤 선한 목적 또는 나쁜 목적도 암시하지 않은 것 같다. 어리석음의 영향으로 뒤따르게 될 손해나 혜택 그리고 התכ 동사의 행위자의 선함과 악함은 콘텍스트의 다른 요소들에 의해서 암시될 것이며 동사 자체에 의해서 암시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התכ가 사용된 2,16을 살펴보기 위해서 התכ에 관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다.
התכ 개념은 이 단어가 나타나는 모든 곳에서 항상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자주 התכ의 행동을 체험한 사람의 죽음을 그대로 직시하게 한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그런데 이 부정적인 의미의 유일한 예는 호세 2,16의 경우이다. 반대자를 제거하거나 전멸시키려는 의도는 התכ 동사의 행동이 궁극적으로는 삼손, 아합 그리고 무죄한 사람을 죽음으로 인도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판관 16,5; 1열왕 22,22; 잠언 1,10~11에서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블레셋 추장들이 그 여자를 찾아 와서 부탁하였다. “그를 꾀어 내어 그 큰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알아 보아라. 어떻게 하면 그를 잡아 묶어서 맥을 못 쓰게 할 수 있을는지 알아 보아라. 그것만 알아 내면 그 댓가로 우리 모두가 너에게 은 천 백 세겔 씩을 주겠다.”(판관 16,5)
그러므로 התכ 동사는 죽음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책략을 말한다. 그리고 주로 말과 거짓말을 통해서 실행된다는 사실을 앞에서 인용한 텍스트, 그리고 판관 16,16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밖에 잠언 24,28; 25,15; 시편 78,36을 참조할 수 있다. התכ 동사가 자체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부정적인 의미 혹은 콘텍스트 상 부정적인 의미에 관한 문제를 잠시 다음과 같이 언급할 수 있다.
자체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התכ의 의미에 대한 문제는 언어학적으로 볼 때 상당히 복잡한 편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에서든지 의심없이 התכ가 어떤 방법으로 사랑을 표현한다든가, 연애라든가, 애정 내지는 육체관계에 대한 암시를 포함하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출애 22,15에 התכ가 나오는데,
어떤 사람이 아직 약혼하지 않은 처녀를 꾀어 범했을 경우에는 납폐금을 모두 지불하고, 그 처녀를 아내로 맞아 들여야 한다.
‘처녀를 꾀다’에 사용된 동사는 התכ다. 이것을 유혹하다로 번역하는 것은 콘텍스트상 정당하다. 그러나 강간이라든가 성폭행을 자동적으로 암시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가 어떤 처녀를 유혹하면 그 다음에 유혹하는 형태인 המע בכשׁ(sakab imah, 그녀와 함께 잠자리에 든다면)이 나오기 때문에 ‘유혹하다’로 번역할 수 있겠다.
두번째 בל־לע רבד 동사는 구약성서에서 10번 나타난다. 1사무 1,13에는 독백으로 나타난다. לא(el) 대신에 לע(al)이 사용된 것처럼 보려는 경향이 있다. 또한 창세 24,45을 참조할 수 있다. בל־לע רבד 동사는 창세 50,21; 2사무 19,8; 2역대 30,22; 32,6에도 나타난다. 여기서는 분명히 사랑을 주고 받는 상황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용기를 북돋아준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예를 들어 창세 50,21을 보면,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형들과 형들의 어린 것들을 돌봐 드리리다.” 이렇게 위로하는 요셉의 말을 들으며 그들은 가슴이 터지는 듯하였다.
여기서 ‘위로하는’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여기서 사랑을 주고 받는다든가 하는 표현이 아니다. 그밖에 다른 5개의 텍스트에도 בל־לע רבד 동사가 나온다. 이 중에서 다음 4개, 즉 창세 34,3; 판관 19,3; 호세 2,16; 룻 2,13에 나오는 이 동사의 수취인은 여인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 한개의 텍스트인 이사 40,2에서는 수취인이 예루살렘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창세 34,3에 보면,
세겜은 야곱의 딸 디나에게 애타게 애정을 호소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사랑을 애타게 호소했다기 보다는 세겜이 디나를 겁탈한 다음에 그럴싸한 말로서 그녀를 설득한다는 말로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결혼의 약속과 함께 디나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려고 한 것 같다. 여기서 번역은 설득하다로 하는 것이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룻기 2,9,
추수하고 있는 밭에서 한눈 팔지 말고 이 아낙네들의 뒤를 따르며 이삭을 주워라. 머슴들이 너를 성가시게 못하도록 분명히 일러 두마.
보아즈가 룻에게 한 말은 사랑의 선언이 아니다. 구체적으로 사랑에 관계된 것은 3장에서 표현되고 있지만, 이는 사랑의 표현이기 보다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 또는 마음에 드는 사람에 대해서 표현한 섬세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룻은 보아즈의 섬세함을 깨닫는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어찌하여 저를 이렇게까지 귀엽게 보아 주시고 마음을 써 주십니까? 저는 한낱 이국 여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서도 사랑의 선언이라기 보다는 다정스럽게 말하는 위로의 차원에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판관 19,3에는,
이스라엘에 아직 왕이 없던 때에, 레위인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에브라임 산 깊숙이 들어 가 몸붙여 살고 있었다. 그에게는 유다 베들레헴에서 데려 온 첩이 하나 있었다. 그 첩은 화 나는 일이 있어서 그를 버리고 베들레헴 성내에 있는 친정으로 돌아 가 거기에서 넉 달 가량 머물러 있었다.
‘화 나는 일이 있다’에서는 הנזתו(watiznah, זנה 동사의 qal형 미완료 여성 단수 3인칭)가 사용되었다. 직역을 하면 ‘그녀는 매음을 하였다’(마쏘라 텍스트)로 보아야 한다. 그런가 하면 LXX에는 ωργισθη로 οργιζμαι 동사의 aorist 단수 3인칭으로 사용되었는데 ‘그녀가 화를 냈다’가 된다. Vulgata에서는 quae reliquit eum(그녀는 그를 남겨 두었다)로 표현하고 있다. 텍스트 비판상 어려움을 제공해 주고 있다. 19,3에서 레위인은 아내가 집에 돌아오도록 설득하려고 간 것 같다. 이 2절은 남자측 혹은 여자측에 죄가 있는지, 죄가 남자측에 있는지 없는지 여자에게 죄가 없는지에 대해서는 애매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녀를 찾으러 갔다는 사실은 그 남자에게 탓이 있었다고 생각케 한다. 만약 그렇다면 בל־לע רבד 동사는 창세 34,3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사 40,2에 בל־לע רבד 동사와 함께 מהנ 동사가 사용되었다. 요셉이 자기 형제들을 위로하는 것처럼 여기서도 이사 40,2에서 사용된 בל־לע רבד 동사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지적했듯이 ‘용기를 북돋아 주다’, ‘독려하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루살렘 시민에게 다정스레 일러라. 이제 복역기간이 끝났다고 그만하면 벌을 받을 만큼 받았다고, 야훼의 손에서 죄벌을 곱절이나 받았다고 외쳐라.
호세 2,16이 전제하는 상황은 창세 34,3과 판관 19,3의 상황과 유사하다고 보아야 한다. 한 여인 또는 이스라엘이 집으로 돌아오도록 설득하고 있다.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의 관점에서 볼 때 호세 2장이 디나를 범한 세켐과 또는 판관기의 레위인과 다른 점이 있다면 호세 2장에서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 안에서 야훼에게는 탓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만약 저자가 동시에 호세아를 생각하고 있다면 남자에게도 탓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가능하다. 세켐이 디나에게 탓이 있었듯이, 레위인이 그 여인에게 탓이 있었듯이, 호세아도 바로 사랑이 없는 덤덤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호세아에게도 탓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거의 모든 텍스트 안에서 2역대 30,22은 예로 나타나고 있지만, בל־לע רבד 동사가 사용되어서 실현되는 상황은 어떤 불안하고 무엇인가 모자라는 상황, 그러한 위험 또는 그러한 죄나 위반의 상황이었을 것이다. 이 בל־לע רבד 동사는 이러한 상황에서 화해의 제스츄어를 통하여 한 인물을 구출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호세 2,16에서 בל־לע רבד의 의미는 만남과 화해와 설득하는 것, 용서하는 것을 암시한다. 이어 나오는 사막에 대한 언급이 바로 이 사실을 뒷바침하고 있다.
보라, 그러므로 나는 그 여인을 유혹하여 그 여인의 마음에다 속삭이리라.(서 인석 신부 번역)
아가 3,6; 8,5에서 사막은 사랑하는 여인이 떠나오는 장소이다. 사막에서부터 여인이 떠나오고 있다. 그곳을 향해 떠나가는 것이 아니다.
연기 기둥처럼 광야에서 올라오는 저 여인은 누구인가? 몰약과 유향, 상인의 온갖 향료로 향기를 풍기며 오는 저 여인은(아가 3,6)
사막은 사랑하는 여인이 떠나 오는 장소이지 사랑의 장소는 아니다. 사랑의 장소는 집이거나 정원이었다. 그러므로 스케마에서 괄호를 쳐서 제시한 유혹의 주제는 사랑으로 흥분된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보다는 야훼의 차가운 결정을 표현한다고 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도 번역을 유혹으로 했기 때문에 유혹이라 번역했다. 따라서 사막에서 그녀를 나는 설득할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주제는 땅에 적용시킬 수 없고 여인이나 백성에게만 적용시킬 수 있다. 반면 2,4~15은 땅에도 적용시킬 수 있고 백성이나 여인에게도 적용시킬 수 있다. 그렇다면 16절에서 언급하는 이 텍스트가 여인을 직접 언급하고 있는지 아니면 그녀의 암시하에 백성을 언급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이 의문은 17절 부터 점진적으로 명백해진다.
거기서 나는 그에게 제 포도밭을 되돌려 주고 아골의 골짜기를 희망의 문으로 만들어 주리니, 그가 에집트 땅에서 올라오던 젊었던 때와 같이 그곳에서 응답할 것이다.
여기서는 Y ל X תא ןתנ(natan et x le y, y에게 무엇을 주다)라는 표현이 17a에 나타나고 있다. 이것보다 더 자주 사용되는 동사는 y ל x היה(y의 무엇이 되다)이지만 전자가 사용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