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에 대해서(3-4절)


3-4절 개관


   1.3절이하부터는 아모스가 전 주변민족에 대해서 단죄하는 내용이다.  이것은 아모스가 살아 있을 때 선포한 말씀이지만 7장은 산문 형태로 나타나고 있고 아마지아와의 대결 부분은 아모스 자신에 대한 갈등을 산문으로 표시한 것으로 보아 아모스가 얘기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문학적인 차원에서 보면 1,3이하와 3.6.7장이 집성단계에서 하나로 이어진 것이라고 본다.


참고) 드고아의 위치 – 예루살렘에서 직선거리 17킬로미터.  목장하기에 좋은 장소.


   ※ 대개 신판, 단죄의 얘기들은 지명만 다를 뿐 서로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다.


1. 신탁의 관용구(야훼가 이렇게 말씀하셨다)가 나온다.


2. 이 결정성(야훼의 결정)이 취소될 수 없다는 이유를 선포한다.


3. 그 사람들이 단죄 받아야 할 잘못을 전부 폭로한다.


4. 그 벌을 특별히 집행하는 것이 나온다.


5. ‘야훼의 말씀이시다’로서 야훼 신탁의 결론을 짓는 야훼 신탁의 관용구가 다시 한번 나온다.


   。야훼 신탁의 관용구


                           הꕱהꖾ    רꗫאָ    הꗔ


                          Yawhe   amar   koh


   。야훼 신탁의 관용구의 前詞는 왕이나 어느 국가의 대표가 왕의 칙사로서 왕의 의견을 다른 나라에 가서 얘기할 때 나타나는 관용구이다.  ‘우리 대왕 누구가 말씀하셨다’라고 하며 그런 칙사를 통해서 왕이 직접 다른 나라에 나타나는 것처럼 서술을 하는 방법의 전사가 있다.  이러한 전사를 수용해서 예언자가 전할 때에 예언자의 말씀의 무게, 예언자의 위치가 관용구속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이스라엘 주변 국가에서 볼 수 있는 공통된 표현이다.  국가적이고 정치적인 표현을 신학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다마스커스, 가자, 띠로, 에돔, 암몬 등의 민족들은 그대로 이스라엘을 괴롭힌 이유보다는 공통적인 죄로 인하여 벌을 받는 것이다. 그 민족들의 죄의 공통점은 어떤 황제에 대한 억압이나, 사회적인 관계의 악화 또는 공존하기 힘든 생활의 조건 등 이런 기본적인 것에 죄의 이유가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죄들은 이스라엘에게 직접 정치적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모스가 볼 때 이스라엘이나 유다에게도 해당되는 죄의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 까닭은 아모스에게 체험되고, 체험된 있는 이스라엘의 상태를 야훼의 말씀으로 변화해서 나타낼 뿐 아니라 더 나아가서는 실제로 그 주변국가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죄로 나타냄으로써 그 죄의 깊이를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것이다.  나중에 이스라엘에 대한 죄가 길게 고발되지만 그 이전에 다른 민족들을 통해서 표현함으로써 어떤 해석의 시도를 광범위하게 하고 있다.  그 다음에 또 하나는 전반적으로 그러한 죄의 결과가 유다나 이스라엘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전 민족에 해당된다고 얘기함으로써 그 단죄나 징벌의 전체성, 결정성, 보편성을 나타내고 있다.  또 다른 표현으로는 이런 요소들을 보면 잘못되가는 역사에 대해서 하느님의 심판이 그 보편성을 띄고 있다는 것을 얘기함으로써 역사적 결과가 야훼의 역사(役事)의 모습이라는 것을 나타내려고 한다.




3-4절


   나 야훼가 말한다.  다마스커스가 지은 죄, 그 쌓이고 쌓인 죄 때문에 나는 다마스커스를 벌하고 말리라.  쇠꼬챙이 박힌 타작기를 돌리며 길르앗 주민을 짓바순 죄 때문이다.  하자엘의 대궐에 불을 질러 벤하닷의 궁궐들을 살라 버리리라.


   。다마스커스 : 아라메아의 수도. 이 다마스커스는 역사적으로 굉장히 오래되어서 기원전 4000부터 유목민들의 관문으로 휴식할 수 있는 오아시스가 있는 곳이었다. 자연적인 조건 때문에 다윗 시대부터 여러민족이 서로 갈등을 일으키는 곳이었으며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아라메아 민족에 의해서 점령된 곳이다.  1열왕 11장 이하를 보면 솔로몬 시대에 와서는 독립하는 내용도 있다.  이사야 시대에 와서는 나중에 시로 아라메아 전쟁이라고 해서 주로 이스라엘과 유다가 갈등을 일으키는 전쟁의 주인공으로 나타난다.  기원전 9세기부터 여로보암 2세 시대(아모스의 시대)부터 이스라엘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강한 나라가 되었다(이사 7장 참조).  아모스시대에 아라메아민족이 이스라엘이 위협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다마스커스가 지은 죄’ – 이 죄는 결코 그대로 버릴 수 없는 죄이다.  그 죄의 이유는 폭력이 근저에 깔려 있다.  그들의 생활에 귀한 타작기를 돌리면서 짖밟은 죄 그래서 농경민에게 중요한 추수때 사용하는 타작기를 때려 부수고 그로 말미암아 못살게 구는 죄를 심판하신다. 아라메아 민족이 강하기 때문에 그 폭력의 정도가 이웃 민족의 삶의 조건을 말살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쌓이고 쌓인 죄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삶의 조건을 박탈하는  것이다.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그런 뒤에는 전쟁이 전제된다.  길리앗하면 지금 요단강 서쪽의 야곱강 근처에 있던 주민들을 생각할 수 있는데 아라매아가 강하기 때문에 그 주민들까지 못살게 굴었다.  4.5절에는 야훼 자신이 벌을 어떻게 내릴 것인가가 나온다.


   。죄는 히브리어로 보면 צꚃ꘵(pesha‘)이다.  즉 인간답게 살 수 없게 하는 것과 연결되었을 때 여기에 관계되는 다른 죄의 개념으로서 אꖧꖎ(hata’), ןוֹꘝ(‘aon)이 있다.  צꚃ꘵라는 개념은 다른 것보다도 포괄적이며 전체적이며 개인적, 소유에 관계된 것의 중심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여기의 전사는 본시 유목민 부족사회에서 볼 수 있는 법적인 해결, 갈등 가운데에서 생긴 개념이다.  예를 들면 야곱과 라반, 요셉과 형제들 이런 인척관계에서 서로 갈등을 일으키고 싸우는 가운데 나타난다.  그런 전사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민족의 차원이나 개인의 차원이나 인간을 살 수 없게 만드는 그런 죄로서 상대편이 소유하고 있는 것, 재물 뿐이 아니라 상대편이 삶, 존재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것들에 대해서 쓰는 폭력을 지칭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צꚃ꘵는 단순히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내면적인 차원의 결핍 부족만이 아니라 더 포괄적으로 인간끼리의 삶, 공존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도 이 죄에 포함된다고 봐야 한다.  다른 민족을 통해서 이런 죄를 찾고 조명할 때의 그 의도는 그 죄의 특성을 구체적으로 알아듣게 하려는 데 있다.  구체적으로 알아듣게 한다는 것은 달리 말한다면 하느님에 대해서 자주 구체적이고 경험적으로 역사에 나타나는 사실을 부인하고 추상화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차원의 죄에 대해서도 인간은 자꾸 추상화시키려고 하고 죽은 다음의 그 무엇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을 거부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다.  죄의 개념은 자주 추상화 시키면 안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벌의 공통성을 본다면 그들이 믿고있는 힘의 근거를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빗장을 부순다든지 등등의 얘기는 억압을 주도하는 그 어떤 심볼로서의 궁궐을 무너뜨림으로써 그들이 지니고 있는 힘의 정체가 야훼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부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다른 옛날 전사나 다른 예언서에서는 다른 민족에게 대해서 그들의 신이 틀렸다라고 하지만 아모스에서는 야훼가 다른 민족에게도 마치 그들의 신인양 나타나는 것이다.  잘했을 때 상을 주기도 하고 못했을 때 벌을 주기도 하는 이스라엘의 하느님이 다른 민족에게도 신으로 나타난다.  아모스서에서는 야훼만이 홀로 신이다라는 유일신 사상이 나타난다.  무력화시킨다고 했을 때, 텍스트가 의도하는 바는 폭력의 주체뿐 아니라 그 결과에 대해서도 얘기하는 것이다.  그것을 부순다는 것은 달리 말한다면 과거의 잘못에 대한 벌이로되 결과는 미래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이 벌은 벌을 받게 된 이유가 다시 회복되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야훼의 벌로 말미암아 생존권이 박탈당했던 이것이 앞으로는 가능하게 된다.  그 이유는 그들의 폭력의 주체는 신으로부터 부호를 받지 못하고 야훼를 통해서 결국 다 망했다. 그래서 공존을 하기 위해서, 제대로 살기 위해서 단순히 폭력을 제거한다는 것 뿐 아니라 야훼가 지니고 있는 의미를 벌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일러준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일러주느냐?  이스라엘을 볼 때에는 야훼가 절대적인 보편적인 힘을 가졌다는 것을 알려주며 다른 민족에 대해서도 지배권이 있다는 것과 그들이 절대적으로 믿던 그 세력을 부순다는 것에서도 나타난다.  더 중요한 것은 절대강자는 절대적으로 군림한다는 그런 조직 자체가 희망을 주지 못했는데 이제는 그것도 언젠가는 분쇄되는구나하는 것에 대한 미래가 나온다.  그래서 아라매아하고 야훼하고의 대칭이 이제는 억압에 반대하고 상호공존하는 미래로 바뀌는 것이다.  그런 가운데에서 절대적인 힘을 행사하는 분은 야훼다.  이스라엘 백성이 믿고 있던 여로보암 시대의 조직 체계가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알리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죄의 폭로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현실 뒤에 있는 그 의미를 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지니고 있는 미래성을 보게 하는 것이다.  벤하닷은 역사적으로 증명이 되는 이름이다.  열왕 상 15,18.20참조 열왕 하 8,15을 보면 하자엘에 대한 얘기도 나온다.  하자엘은 왕권을 찬탈한 사람이다.  그리고 벤하닷이니 하자엘은 이스라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이스라엘에게 고통을 준 왕으로 나타난다.  이 두 왕을 다 지칭함으로써 야훼의 벌이 공간적으로 뿐 아니라 시간적으로 끊임없이 역사적으로 이어져 내려온다는 것을 말한다.




이 글은 카테고리: 구약성경이야기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