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절 개관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하여)

 

4-6절 개관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하여)


   유다와 이스라엘은 아모스가 볼 때 특별히 이스라엘은 아모스의 활동의 고유 영역이다.  그 비판이 굉장히 길다.  그래서 어떤 형태로 이루어졌는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유다는 인간끼리의 문제나 사회문제 보다는 야훼께 대해서 충성을 했느냐 안했느냐를 다룬다.  2,3까지의 다른 민족에 대한 얘기는 주로 사회적인 문제가 많이 나온다.


   6b부터 8절까지를 보면 이스라엘에 대한 단죄의 이유가 유다의 단죄와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다른 민족에게서도 볼 수 있는 인간끼리의 문제이며 또한 죄의 종류가 다양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10.11.12절 이것은 하나의 산문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다.  13부터 16절은 야훼의 명령을 어떤 시적으로 표현하여 산문적인 요소와 대조를 이룬다.  반면 유다에 대한 얘기는 내용상으로는 하느님에 대한 얘기이지만 이스라엘과는 달리 간단하며 다른 민족에 대한 것과 더 비슷하게 구성되어 있다. 물론 이스라엘의 단죄에서도 신탁양식의 다섯가지 요소를 볼 수 있으나 유다와 비교할 때, 대조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유다에 대해서는 ‘나 야훼가 선고한다’고 하는데 다른 데에서는 ‘야훼가 선고한다’고 말하면서 야훼를 3인칭으로 얘기한다. 이것도 유다에 대한 단죄가 후대에 씌여졌다고 하는 문헌비판적인 이유가 된다.


   1) 일반적인 결점에 대하여 ; ‘야훼의 법을 거부하고 그 규정을 지키지 않은 죄 때문이다’는 후대에 붙었을 가능성이 있다.  ‘나는 유대를 벌하고야 말리라.  선조들이 따르던 거짓 신들에게 미혹된 죄 때문이다’, 2) ‘유다에 불을 지르고’ 할 때의 불이라는 개념은 전쟁에서 상대편에게 벌을 줄 때 나오는 개념이다.  ‘가자성에 불을 질러…’는 후대에 붙인 것이라고 보는데 유다의 단죄에 대한 저자의 신학적인 의도는 하느님과의 관계를 얘기하려는 것이다.  바로 그 점에 있어서 다른 민족에 대한 단죄와 다르다.  그 죄는 야훼의 법을 거부하고 그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3) 보통 신명기에는 ‘ט꘱ꚉꗬ(mishpat)’와 ‘םיꙎꕝ(hukim)’이 같이 나온다. 그런데 아모스에서는 ‘הꙜוֹתּ(torah)’와 ‘םיꙎꕝ(hukim)’이 나온다(그래서 이것이 신명기와는 다를지라도).  ‘םיꙎꕝ(hukim)’과 병행시키는 것으로 보아서는 ‘הꙜוֹתּ(torah)’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이 ‘םיꙎꕝ(hukim)’이며 이는 ‘ט꘱ꚉꗬ(mishpat)’와 같은 어의를 지니고 있다.  ‘הꙜוֹתּ(torah)’는 야훼가 이스라엘에게 시나이에서 알려준 것이고 ‘םיꙎꕝ(hukim)’과  ‘ט꘱ꚉꗬ(mishpat)’는 신명기에 와서 이 ‘הꙜוֹתּ(torah)’를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야훼의 법을 거부하고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고 할때 저자의 의도는 이 구절이 후대에 붙었기 때문에 단순히 십계명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회를 규정하는 이러한 전체적인 법(계약의 법전 출애 22장, 신명기 이전의 원 신명기 12-26장에 해당하는 것들을 포함해서)을 생각했을 것이라고 본다.  4) ‘선조들이 따르던 거짓 신들에게 미혹된 죄 때문이다’라는 것을 보아서는 ‘םיꙎꕝ(후킴)’과     ‘ט꘱ꚉꗬ(mishpat)’는 상세한 이스라엘의 사회법을 망라하는데 ‘선조들의 미혹된 거짓 신들을 따르는 죄다’라고 신관에 대한 얘기로 유다의 죄를 축소시키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여기에는 이미 계약의 법전 시대에 있었던 유일신이라는 개념이라기 보다는 이미 신학화된 유일신의 개념이 들어 있다. 신학화된 유일신의 개념은 처음부터 생긴 것이 아니고 신명기 역사학파 시대에 이론화된 개념들이다.  (하나의 하느님, 하나의 백성… )유다에 대한 단죄는 문학적으로 보아서도 다른 민족에 대한 단죄와 같이 구성되어 있지 않고 내용으로 보아서도 야훼를 3인칭으로 쓰거나 아니면 법에 대한 이해나 유다에 대한 죄는 하느님께 대한 관계로 해석을 한 것이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 구별된다.  5) 그것에 대한 하느님의 벌을 ‘불을 지르겠다…’,‘예루살렘 궁궐들을 살라 버리겠다’라고 하면서 유다에 대한 죄의 원천을 유일신 관계로 축소시키고 있으며, ‘유일신에 대해서 잘못한 것’이라는 표현은, ‘궁궐’이란 표현으로 집정자들에 대한 사회비판을, 다른 민족의 단죄에 있어서는 인간문제를 비판하는데 반해서 유다에게 있어서는 신문제로 신학화되는 것이 특징이다.  6) 신 문제로 신학화시키고 불을 통해서 벌을 한다고 할 때 하느님이 전쟁을 하는 적군의 대장으로 나타난다.  이런 표현은 전승사적으로 보아서 야훼가 에집트하고 싸울 때, 야훼는 이스라엘을 좋아하는 신이고 파라오는 싸우는 야훼의 적에 해당하는 표현이다. 그때의 야훼의 개념은 군대의 하느님(Yawhe sabaoth)이다.  따라서 ‘유다에 불을 지르고’라는 간단한 표현 뒤에는 큰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야훼’ 즉 이스라엘을 돕던 야훼, 그 전에는 계약의 궤에 관계된 신개념(군대의 하느님),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도와주던 하느님으로 형성된 개념이 유다의 단죄에도 적용이 되었다 할 때에는 유다는 잘못된 신관 때문에 하느님의 적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잘못된 신관의 주체가 예루살렘의 궁궐이라고 얘기함으로써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이스라엘에게 목자라고 자처하던 집정자들이나 상층계급이 가짜신을 퍼뜨리는 주인공이 되고 있다는 것을 폭로하는 것이다.  7) 그렇게 함으로써 인간 상호간의 문제는 다른 민족을 통해서 얘기한 인간끼리의 문제와 연관을 가지며 결국 신관의 문제로 환원되는 것이다.  다른 민족에 대한 단죄에 있어서는 야훼가 벌을 줄때 심판자로 나타날 지언정 그들의 신은 아니다.  유다의 죄는 인간끼리의 문제의 원인을 나타낸 것이다. 달리 말하면 문제를 해결할 때 근원적으로 어디서부터 차이가 나느냐를 얘기한 것이다.  8) ‘미혹된다’, ‘유혹을 받는다’ 등의 표현은 신명기 시대에 끊임없이 나타나는 이스라엘에 대한 경고이다(신명 12-26장 참조 – 이민족과 결혼하지 말며 그렇게 되면 우상숭배를 하기 때문이다).  유일신관으로 정착이 될 때에는 ‘야훼는 하나뿐이다’(신명 6,4)로부터 이론적으로 정착이 되었는데 개념으로는 야훼 하나뿐인데 막상 생활할 때에는 다른 신의 존재를 인정하며 살았다. 그렇기에 바알신, 엘신을 야훼 신개념으로 수용되거나 구분이 되고 있다.  그러다가 신명기에 와서 ‘야훼 한분뿐’이 된 것이다.  ‘ט꘱ꚉꗬ(mishpat)’와 ‘םיꙎꕝ(hukim)’과 ‘הꙜוֹתּ(torah)’와 ‘םיꙎꕝ(hukim)’이라는 어의의 공통된 배경은 십계명의 서문(출애 10장, 신명 5장) – 나는 야훼다.  나 이외에는 아무도 섬기지 못한다.  나는 질투하는 신이다.  다른 신을 만들지 말라 등 신개념 규정의 서문 -에 기원을 둔다. 


   십계명 서문의 특성은, 법이란 전승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הꙜוֹתּ(torah)’로서 이것의 특성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 속에는 하느님이 유일한 왕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것이다.  ‘나는 왕이다’라는 명백한 언표가 나오지는 않지만 (그 시나이에서 준 법이 출애굽의 결론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출애굽의 얘기는) 늘 야훼가 파라오를 대적해서 싸우는 것으로, 시나이에 와서는 야훼가 진짜 왕이다.  왜냐하면 파라오는 무력한 왕라는 것이 증명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 민족을 보호하지 못하는 왕이다.  그러나 ‘나는 너희를 구하였고 광야에서 보호하였기 때문에 나 야훼가 진짜 왕이다’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왕국의 헌법에 해당하는 것이 ‘הꙜוֹתּ’이다.  ‘הꙜוֹתּ’의 서문적인 개념은 ‘나는 너희를 에집트에서 구하였다’는 것에 있다. 


   파라오와는 반대로 야훼의 경우에는 당신의 법을 드러내고 있다.  야훼의 개념이 ‘나는 너희들이 필요한 곳에 있다’라는 개념을 따라서 이번에는 출애굽에 상응하는 법을 줌으로써 당신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일회적인 구원의 역사를 통하여 자신을 드러냈고 그 다음에는 법을 선포함으로써 일회적인 사실을 끊임없이 실천할 수 있고 재생할 수 있는 기능으로서의 ‘הꙜוֹתּ’를 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הꙜוֹתּ’는 계시적인 의미가 있다.  이런 개념을 십계명 서문에 연결시킴으로서 하느님의 계시는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실천할 수 있는 영원한 것으로 드러난다.  즉 야훼가 참된 목자 또는 참된 왕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4절의 거짓 신은 그러한 ‘הꙜוֹתּ’나 계시나 이런 것들을 줄 수 없는 신이다.  거짓신이 역사적으로 보아서 이러한 야훼의 활동과 반대되는 활동을 하는 신이다.  따라서 거짓신은 파라오와 같이 자기 민족을 보호할 수 없고 계시를 할 수 없다.  그래서 끊임없이 무엇을 감춘다. 감추는 과정에서 인간에게 야훼같이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상을 망라해서 야훼의 법을 거부하고 거짓 신을 따르는 것을 비교한다.  그 다음에 규정이 나오는데 그 ‘규정’은 사회적인 것이다.  그래서 ‘선조들이 따르던 거짓신들’에서 선조들은 아브라함이 아니라 귀양 이전에 귀양을 야기시킨 선조들을 말한다.  왜냐하면 아모스서가 귀양 후에 사회재건을 위해 강력한 설득력을 가졌다고 보기 때문이다.  간단한 유다의 죄이지만 그 사회가 무너진 것에 대한 해설이 된다.


   우리가 할 작업은 ‘왜 선조들이 야훼를 따르는 것보다 다른 신들을 따르는 것이 더 편하다고 생각을 했느냐’를 밝히는 것이다.


   이 죄에 대해서는 6a가 일반적으로 그 벌이 결정적이고 돌이킬 수 없다는 선포를 하고 6b부터 구체적으로 나온다.  6b-8까지 죄의 종류가 다양하다.  시편이나 예언서에 병행구를 잘 보면 된다 : 죄없는 사람, 가난한 사람은 종과 팔아넘기는 것과 대조된다.  그 당시의 경제적인 문제가 대두된다.


   7절에서는 힘없는 자가 나온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 힘없는 사람, 죄없는 사람에 대해서 기를 못피는 사람. 아비와 아들이….  6b부터 7절까지 한 단락으로 볼 수 있다.  2) 8절에서는 제단을 옆에 펴놓고 뒹굴다… 죄에 대해서는 하나를 가지고 죄에 대한 동기라든지 이유라든지 이런 것을 첨가해서 발전시킨다기 보다는 이스라엘에 대한 죄를 총망라한다고 할 수 있다.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은 사회적인 죄이다.  사회적인 죄의 특징은 병행구에 나오는 그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사회에서 이들을 억압하는 자들의 눈으로 볼 때 이들을 계급적으로 나눈것을 볼 수 있다.  이들을 아모스의 비판적인 시각으로 볼 때 계급을 나누는데 부채질하는 사람들이다.  반대로 억압받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으로 성조시대 부터 알려진 사람들이다.  아모스시대부터 죄없는 사람들이 가진자들이나 집정자들에 대해 비판을 할 때 대조적으로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사회적인 불의는 이기심이라고 볼 수 있는데 윤리.도덕적 측면으로 아니라 경제적으로, 구체적으로 보아야 한다.  단순히 윤리적인 내적인 것으로 보기 보다도 경제적 이득이 인간에 대한 시각을 어떻게 마비시키는가를 보아야 한다.  경제적으로 보지 않고 윤리 도덕적으로 본다면 거룩하게는 보이겠지만 실제로 사회나 인간을 현실적으로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을 이중 구조로 만드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께서 일러 주시지도 않은 것을 덧붙여서 하느님께 대한 선포를 하는 것이다.  3) ‘아비와 아들이…’은 여기서는 한가지 유념할 것은 윤리적으로 보지 말고 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힌다는 여기에 중점을 두고 보아야 한다.  결코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문제가 아닌 신관에 대한 문제이다.  창세기 10장(참조 : 이는 창세기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죄중 인간 질서에 대한 예로 나오는 부분이다)과 전승적으로 연장되고 있다.  ‘제단들 옆에…’는 단순히 그냥 경신례에 대한 것으로 보지 말고 경제적인 이득을 억지로 취했을 때 그것을 정당화시키는 과정이 어떻게 발전되어 가는지를 보아야 한다.  경제적으로 이득을 취득한 자들은 그것을 오히려 경신례적인 것으로 끌어간다(거짓 예배에 관한 이사야서 1,10을 참고).


   9-12절은 산문적인 요소가 있다.  제2이사야서의 거짓신과 참신의 쟁론과 연결된다.


   ‘13절 보아라…’를 이용해서 두 가지를 시도한다.  문학적인 의미의 하나는 역사의 전환이며 또 하나는 야훼의 결정적인 개입에 대해서 주목시키는 것이다.  ‘아무리 용감한 장사라도 맨몸으로 도망치리라.’로 보아서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야훼가 접근을 할 때 적을 무찌르는 개념이 개입된 것이며 그 뒤에는 하느님의 벌이 결정적이라는 것, 돌이킬 수 없다는 것, 마치 옛날의 왕이 포로를 삼는 것을 상기시키는 야훼의 벌의 결정성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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