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에 대해서(9절~11절)

 

9절


  아모리인들은 그 키가 잣나무 같았고 힘이 상수리나무 같았으나, 나는 그 열매를 가지째 땄고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 버렸다. 


  。9절에 가서는 이스라엘과 야훼의 대조가 나온다.  대개 역사의 흐름을 심판의 대상으로 들추어 낸 다음에 야훼가 당신의 올바른 대조로 나타나는 것은 쟁론사화에 많이 나온다.  제2이사야와 시편 107,7이하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 당시의 부패상과 야훼가 관계한 역사와 대조함으로서 왜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아모리인들은 그 키가 잣나무 같았고…” – 아모리족을 너희 앞에서 멸해 버렸다에 쓰인 단어는 ‘דיꗬꚉ(shemid)’이라는 단어인데 전쟁이라든지 재난이라든지 이것을 통해서 완전히, 근본적으로 없애는 것을 가리킨다. 이사 11,20; 17,12참조하라.  ‘דיꗬꚉ(shemid)’이라는 단어는 전쟁의 콘텍스트에서 나오는 단어이다.  상대편을 완전히 제압하는 것,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다.  여러 민족에 대해서 심판이 나오는데 왜 아모리족이냐 하는 것은 창세 15,11이하; 48,22이하; 민수 21,21이하를 보면(주로 엘로이스트 텍스트인데) 거기에는 아모리족이 굉장한 힘을 가진 민족으로 나타난다.  아모리족이 어디서 왔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는데 어쨋든 이스라엘이 가난안에 갈때 거기 정착하고 있었던 강한 민족(민족구성은 여러 부족)이며 아모리족을 등장시키는 것은 기능의 차원에서 필리스틴인들이 해변에 거주하려던 이스라엘을 못살게 굴던 대표적인  민족이었는데 그와는 반대되는 의미에서 내륙의 거창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을 못살게 굴던 강한민족이었다(민수기 13,38참조).  하느님이 약속한 땅에 대해서 신뢰하지 못하는 것이 큰 죄이다.  백성의 지도자가 하느님께 대해서 신뢰를 가지지 않는 것도 제관계가 보는 죄가 되는 것이다.


   。야훼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전쟁을 대신해서 멸해버렸다.  이 뒤에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힘에 의해서 된 것이 아니라는 것과 그만큼 야훼께 대한 신뢰해야 된다는 것과 태평성대시에 나타나는 국가적인 힘에 의존해서 이웃을 무찌른다는 것이 안된다는 것을 얘기한다.  그런데 태평성대시에 나타는 것은 이런 것(자기 이웃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잣나무 같고” – 그 당시의 이스라엘에는 잣나무들이 번창했다고 한다.  적어도 제관계가 홍수 이야기를 쓸때(기원전 5백년 경)에는 자연적인 조건이 험해서 그 당시의 야생동물이 인간에게 커다란 위험으로 등장한다.  그런 것을 배경으로 제관계가 저술한다.


   。“열매를 가지에서 땃고…” – 이사야 37,31에도 나오는데 약간 관용구적인 표현이다.  달리 말하면 전혀 소생할 가능성이 없도록 자연적인 형상 언어를 이용해서 얘기하는 것이다.  야훼가 이스라엘에 대해서 무엇을 했는지를 강력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아모리족이 강했다는 것을 형상언어를 통해서 표현하는 까닭은 야훼가 이스라엘을 위해서 한 것이 얼마나 큰 것이었느냐와 따라서 이스라엘이 야훼에 대해서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느냐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10절


   누가 너희를 에집트에서 구해 내었느냐?  내가 아니었더냐?  나는 너희를 사십 년 동안 광에서 이끌어 주었고 아모리족을 너희 앞에서 멸해 버렸다.


   。10절 “누가 너희를 에집트에서 구해 내었느냐?…” – 이 뒤에는 출애굽의 전승과 광야의 전승이 한데 들어있다.  10절에서는 관용구적인 표현인데 여기에는 ‘הꗚꘝ(‘alah)’가 쓰였다.  출애굽에서 야훼가 주어가 되고 ‘הꗚꘝ(‘alah)’가 동사(사역형) 그리고 이스라엘이 목적어로 된다.  그렇게 될 때에는 출애굽의 역사를 가리키는 관용구라고 보면 된다.  여기서는 단순히 이끌어 냈다는 것이 아니라 야훼의 역사적인 간섭 특별히 자유나 해방을 가리키는 간섭이 된다.  에집트로부터의 해방은 추상적인 명사로는 모세오경에 나오지 않는다.  늘 이렇게 관용구를 통해서 나온다.  일반적으로 알라라는 사역형이 나올때는 문맥은 단순히 나오는 것 뿐 아니라 약속한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문맥이 나올 때 이러한 표현이 많이 나온다.  신명 20,1; 1사무  10,18을 보면 적과 싸워서, 이스라엘이 이겨서 결국은 탈출을 하고 약속의 땅을 점령을 하게 된다는 이러한 문맥이 나올 때 알라의 사역형이 나온다.  ‘הꗚꘝ(‘alah)’는 약속된 땅을 점령하도록 할 때, 적과 싸워서 땅을 점령할 때 사용된다.




   9-10절은 아모리와 이스라엘에 대한 것인데, 아모리족은 이미 가나안에 정착해 있던 민족이다.  그 정착했다는 사실을 상수리나무, 잣나무를 통해서 이미 농경민으로서 상당한 수준의 생활을 한 민족이었다고 이야기하며 이스라엘은 떠돌이 민족으로 있었고 그 떠돌이 민족으로서 그나마 자유를 얻게 된 것은 야훼의 힘에 의한 것이었다.  아모리족과 대조할 때 야훼의 힘이 없었다면 이스라엘을 아무것도 아닌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자연적인 조건으로서는 살 수 없는 곳인 광야는 이스라엘에게는 자비를 체험하던 곳이며, 그런 대조를 통해서 야훼의 관여가 보통이 아님을 일러주고 있다.




11절


   너희 자손들을 예언자로 세웠고 젊은이들은 나지르인으로 삼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아, 사실이 그렇지 아니하냐?  – 야훼의 말씀이시다. 


   。‘예언자를 세웠다’할 때에 거기에는 ‘םוּק(kum:일으켰다, 세웠다)’이란 동사가 나온다.  신명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표현이다.  이 뒤에는 이스라엘에 대해서 신명기가 어떻게 생각하는가가 엿보이는 부분이다.  나지르인의 대표는 삼손이다. 나지르인의 특징은 하느님께 대해서 충성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타락한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술도 먹지 않고, 욕심을 멀리하는)인데 그것을 야훼가 해준것이라고 얘기한다. 그러므로 11절 뒤에는 백성을 만드신 것 뿐 아니라 백성을 이끌어 오신 분이 야훼다. 따라서 아모스시대의 이스라엘의 위상이란 하느님의 역사가 이어져온 그런 주체였다.  그뿐 아니라 하느님의 역사는, 그 위의 잘못한 것을 죽 나열하면서 그 자체가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보여준 길이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 잘못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윤리적인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보여준 길로서의 역사를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부정하는 것은 야훼를 거부하는 것이다.  또 이것을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2인칭으로 얘기할 때에는 결단을 내리도록 반성을 촉구하는 것이다. 즉 ‘하느님이 옳다’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것을 이스라엘에 접속시킬 때는 결국은 선포의 차원에서는 이스라엘에게 ‘너희 자신들을 거부하는 것이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 멸망으로 이끄느냐 할 때에는 바로 너희 자신을 부정하는 것, 지금까지의 역사를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얘기하는 것이다.  이것을 현대인에게 적용한다면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준 길, 역사를 지키는 것인데 이것을 윤리적인 차원으로 축소시킬 때는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윤리적으로 잘하고 역사를 거부한다는 이분법을 사회에 적용한다면 그 윤리까지도 사회를 거부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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