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절
저당물로 잡은 겉옷을 제단들 옆에 펴 놓고 그 위에 딩굴며, 벌금으로 받은 술을 저희의 신당에서 마신다.
。“저당물로 잡은 겉옷을 제단들 옆에 펴 놓고 그 위에 딩굴며”, “벌금으로 받은 술”(저당에 대해서는 잠언 13,13; 20,16; 17,13을 참조하라. 벌금에 대한 것은 잠언 17,26; 19,9, 출애 22,25을 참조하라.) – 일반적으로 저당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 신명 24,6에 ‘생업에 직접 관계가 되는 것은 저당으로 할 수 없다’ 출애 22,25, 신명 24,6에는 가난한 사람의 외투는 저당을 잡혀도 밤을 지샐 수 없게 되어 있다. 또 신명24,17절을 보면 과부의 옷은 뺏지 못하게 되어 있다. 여기에 나오는 옷은 그래서 과부나 또는 밤을 새울 때까지의 그 옷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어떤 옷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제단들 옆에 펴놓고… 저희들 신당에서 마신다’고 할때 이 뒤에는 자기들의 행동을 정당화 시킨다고 믿는 근거는 하나는 자기의 권력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과, 하느님과 자기들 나름대로 정당화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대전에서도 결코 책잡힐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전승에 의하면 불가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느님 앞에서 책잡힐 것이 없다고 여기니 이들이 얼마나 부패가 되었는가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부패의 심각성은 단순히 억압하는 차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신의 대전에서도 자기가 그 억압에 대해서 떳떳하다고 믿는 차원에 있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로 극도로 부패할 때에는 악을 범해도 그 악까지도 하느님의 이름으로 정당화 시킨다는 데 바로 사회의 근본이 뒤흔들리는 요지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는데, 하나는 이 시대의 메시아로 군림하려고 하는 사람이 나타났고, 또 하나는 신관의 차이로 가톨릭 교회의 사목적인 매력이 없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이런 근본적인 잘못에 대해서 파악을 못하는 것과 그 파악을 못하는 그 자체를 하느님 대전에 떳떳한 것으로 포장해서 얘기하기 때문이다.
6-8절을 내용적으로 본다면 이렇다. 근본적으로 한 사회는 서로서로 도움을 준다든지 또는 관계를 맺는다든지 특별히 여기에서는 어떤 부류가 이스라엘이 야훼에게 종속된 것 같이 어떤 부류가 다른 사람에게 종속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종속관계를 악용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근본 잘못이다. 이 종속관계는 결코 신분상의 종속 관계가 아니라 그 사회를 구성하는 주어진 조건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가정일 경우는 아버지와 아들 그 사회의 경우에는 결혼한 처녀, 가난한 사람들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런 종속관계가 해결되어야 하는데 그런 해결될 수밖에 없는 종속 관계를 악용하는 것이 근본적인 이스라엘의 죄이다. 9절 이하의 야훼의 행동을 보면 이스라엘이 야훼에게 종속되도록 했고 그 종속된 것을 야훼는 악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스라엘을 위해서 전쟁을 통해서도 보호하는 식으로 거기에 관여하는 식으로 되는 것이다. 때문에 여기에서 대조가 되는 것은 단순히 억압한 것이 아니라 종속 관계를 악용을 함으로써 계속 그 종속관계를 유지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것을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하느님 대전에서까지도 자기의 옳은 것을 고집하는 것이 악의 근본이다(신약의 바리사이의 자기정당화와 연관시켜 볼 수 있다). 인간 역사의 흐름 속에 자기 정당화에 대한 욕구는 개인적으로 영원한 행복을 요구하는 것 못지않게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자기정당화의 욕구를 종속관계를 유지하려는 데 사용을 할 때에는 신의 이름을 도용한 것 뿐이 아니라 신까지도, 경신례 차원에 까지 남용을 해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은 상태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스라엘의 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