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절 개관
일반적으로 얘기한다면 7절은 원래부터 본문에 들어가 것이 아니라 나중에 붙은 것이라고 짐작한다. 왜냐하면 3-8절까지 계속 질문으로 이어지는데 7절만이 그 질문에서 어긋나서 산문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우기 의문사로 시작하고 6절에 가서 강조하는 의문사를 이용하고, 그 다음에 8절에 가서는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누가’라는 의문사를 이용해서 질문을 끝마치는 것에 비해서 7절에서는 ‘이유’가 들어가기 때문이다.
예언자를 ‘야훼의 종’으로 표현하는 것들은 2열왕 17,13.23;21.10; 24,2; 예레 7,25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 시대적으로 신명기 역사가의 표현이다.
3-8절을 본다면 우선 제일 눈에 띄는 것은 질문이다. 의문사를 통해서 6절에 가서는 ‘םאּ(임)’을 써서 질문의 강조를 하고 8절에 가서는 질문을 끝맺는다. 이 전체의 성격은 이런 질문을 통해서 상대편에게 어떤 답을 전제하도록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 질문은 정말 몰라서 하는 질문이 아니라 어떤 ‘수사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3-8절의 결론을 미리 얘기한다면 아모스가 ‘하느님의 권위를 가지고 하는 얘기다’ 또는 ‘예언자로 불리었다’라는 점을 듣는 사람에게 ‘그렇지, 그렇지’하는 것을 유도하는 수사적인 질문들이다.
3-6절과 8절을 ‘떼어서 생각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로 생각할 것이냐?’하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6절까지 질문이 계속 하나의 내용을 이루고 있는 반면에 8절에 가서는 뚜렷하게 야훼께서 말씀하시는데 하는 내용이 앞의 벌을 주는 내용과 구별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떼어서 보기 보다는 이어서 보는 것이 좋겠다. 왜냐하면 야훼의 말씀을 전해야 할 아모스가 말씀의 내용을 그 앞에 계속 얘기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3-8절까지의 전반적인 내용으로 봐서 그 질문이 수사적인 질문이지만 수사적인 질문의 목적은 임박성이나 확신이다. 가르쳐 주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질문을 통해서 비교, 결단을 촉구하기 위한 질문이다. 그 질문은 내용적으로는 가르침의 목적을 띈 쟁론의 목적을 띈 수사적 질문이다. 쟝르로 보아서는 교육적인 질문이 배경으로 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3-5절
두 사람이 길을 같이 간다면, 미리 약속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사자가 잡아 먹을 것이 없는데도 숲 속에서 으르렁거리겠느냐? 사자가 움켜잡은 것이 없는데도 굴 속에서 소리를 지르겠느냐? 미끼가 없는데도 새가 창애에 내려 와 걸리겠느냐? 아무 것도 걸리지 않았는데 창애가 퉁겨 오르겠느냐?
。‘두 사람이 길을 같이 간다’ – 그 당시의 자연적인 조건, 즉 사막이라든지 광야를 염두에 두고 생각한다면, 사람이 살지 않는 곳에서 만난다는 것은 이미 약속되어 있는 것이며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3-5절을 종합적으로 본다면 1) 교육적인 목적을 가진 쟁론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에게 결론을 내리도록 생활 배경을 제3자의 요소로 삼아서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비교의 대상으로서 사자, 새, 길을 가는 것 등을 이용을 해서 우연이 아니라는 것, 확실하다는 것, 또 어떤 원인이 있다는 것, 징벌의 원인이 있다는 것, 2) 그 징벌이 임박하고 또 틀림없다는 것을 제3의 비교연설을 통해서 수사적으로 일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구성은 쟁론의 성격을 띤다. 결론을 뻔히 나타나 있는 쟁론이다.
。3-5절은 6절의 야훼의 심판을 상징적으로 가리키고 있다.
6-7절
성 안에서 비상 나팔이 울리는데 놀라지 안을 자 있겠느냐? 성 안을 휩쓰는 재앙, 야훼께서 내리시는 것이 아니겠느냐? 당신의 종 예언자들에게 속을 털어 놓지 않으시고는 주 야훼, 아무 일도 하지 않으신다.
。그 장면이 자연적인 생활, 일상적인 체험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조직, 제도상에서 생겨날 수 있는 일을 얘기하고 그런 쪽으로 장면을 바꾼다. ‘비상 나팔이 울린다.’, ‘나팔을 분다’에서 나팔은 큰 축제가 있을 때, 전쟁을 하기 위해서 군중을 모으고 전쟁의 시작을 알릴때, 또 어떤 위기를 알릴때 울린다. 이 비상나팔은 어떤 사실이 임박해 있을 때 울린다. 그래서 그 징벌의 원인과 동시에 그것이 지니고 있는 미래성을 알리고 있는 것이다.
즉 사회의 근본(특별히 그들이 믿는 사회)이 흔들리는 것을 가리킨다. 또 어떤 끝의 시작(the begin of end)이다. 그러므로 6절은 8절에서 결론이 맺어질 것을 미리 내리고 있다. 이스라엘이 믿던 그 모든 것이 서서히 무너진다, 임박해 있다, 원인이 내재해 있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안정된 사회에서 살던 사람들에게는 전혀 생소한 것이다. 일반적인 얘기를 3,1-2에서 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뒷부분을 넣은 것이다.
。6절에서 비로서 야훼가 나타난다. 이 야훼의 등장으로 아모스는 자기가 선포하는 심판이 1) 예언자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 2) 앞에 보인 자연적인 것이나 체혐에 의한 것보다 더 확실하다는 것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야훼가 나왔기 때문에 여기가 결론이 아니냐 하고 얘기하는 것이다. 그리고 6절까지만 해도 기본 텍스트(3,1-2)에서 나온 이스라엘에 대한 징벌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냐?
8절
사자가 으르렁거리는데 겁내지 않을 자 있겠느냐? 주 야훼께서 말씀하시는데, 그 말씀 전하지 않을 자 있겠느냐?
。8절을 보면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앞의 4절을 이어받는다. 여기를 직역을 하면 ‘주 야훼께서 말씀하시는데 누가 예언을 하지 않겠느냐?’ 그래서 8절을 6절에 이어서 같이 생각하는 것이다. 끝에 가서 누가 예언을 하지 않겠느냐 함으로써 3-6절로 이어지는 질문을 강조하는 것이다.
。7절의 전반부는 원인과 결과에 대한 것을 강조하고 8b절에 가서는 그 질문이 ‘내가 얘기하는 이것은 틀림없는 벌을 이야기할 뿐 아니라 내 말은 야훼로부터 위탁을 받은 것이다’라고 얘기함으로써 아모스는 ‘내가 말한 것은 틀림없을 뿐 아니라 내가 말을 할 수 있는 까닭은 야훼가 말했기 때문이다.’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3-8절의 근본적인 정점은 1절과 8절의 רꔨꕏ(dabar-야훼께서 말씀하신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야훼께서 말씀하셨다. 그래서 아모스는 예언을 한다.’는 것이 근본이다. 야훼께서 무엇을 선포하느냐는 3-6절까지의 얘기이다. 다시 세분을 한다면 3-5절은 그것을 가리키기 위한 일상적인 체험에 대한 수사적인 표현이며 6절은 정점으로서 ‘이것은 야훼의 일이다’라는 것이다. 3-8절의 전체적인 흐름은 그래서 이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려고 하는 것이다. 방법은 다 아는데 수사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질문을 하고 답을 하는 쟁론의 입장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야훼로부터 말씀을 받은 권위를 스스로 책임을 지도록 하는 데 그 뜻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앞에 ‘야훼께서 선택했다’는 곳에서 ‘알았다’는 단어를 쓰는 것이다. 일정한 목적을 주고 선택을 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 목적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다. 신명기 역사가가 7절을 넣을 때에는 정점이 8절 끝에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 텍스트가 생겨난 배경은 아모스의 말씀을 전혀 실감있게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아모스의 예언의 합법성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려주기 위해서 씌여진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생성될 때와 이것이 여기에 넣을 때를 구분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