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절
그래서 나는 곳곳마다, 성읍마다 양식이 떨어져 너희를 굶주리게 하였다. 그래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 오지 않았다. – 야훼의 말씀이시다.
§원문 – ‘너희에게 씹을 것이 없는 치아(이빨)을 주었다’
。기근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회개를 하도록 한다는 것은 구약 다른 데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테마들이다. 예레 14,12; 룻기 1,1; 창세 12,10; 37장 이하를 보면 기근이란 야훼가 이스라엘에게 시험이나 심판을 할 때 쓰는 도구로 나타난다. 기근이 실제로 있었느냐 없었느냐 보다는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스타일로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예를 들면 요셉이야기에서 기근이 정말 있었느냐 또는 없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기근 이야기는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서 쓰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할 때 유난히 회개에 대해서 방향이 어디인가를 드러내는 것이 특징이다. 야훼 자신에 대해서. 호세 2,9; 3,4; 24,2; 이사 9,15 이런데에는 회개와 심판이 연결이 되는것을 볼 수 있다. 신명기에서는 어떤 충고와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나에게’ 이런 것을 본다면 호세 14,2을 볼 수 있는데, 이런 야훼를 강조하는 것을 본다면 ‘야훼만이 최고의 하느님’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회개의 방향을 명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 문맥에서는 기근이 일어났을 때 ‘야훼께로 오지 않는다’는 것은 기근이 다른 잡신에 의해서 된다고 생각할 때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그 의도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의 주인이 야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다른 신에게로 돌리려고 하는 이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자연의 현상을 통해서 들려주는 것이다.
。‘곳곳마다, 성읍마다’ – 성읍이라면 그 당시의 사회의 중심, 어려움이 있을 때 도움이 나오는 장소, 왕이나 지배자들이 있는 장소, 사회를 유지하는 보루인데 거기에도 양식이 떨어졌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모든 도시에서 떨어졌다’라는 표현을 쓴다.
7-8절
나는 추수 석 달 전에 내릴 비를 내리지 않았다. – 야훼의 말씀이시다. 나는 추수 석 달 전에 내릴 비를 내리지 않았다. 어떤 성읍에는 비를 내리고 어떤 성읍에는 비를 내리지 않았다. 어떤 밭에는 비를 내리고 어떤 밭에서 비를 내리지 않아 곡식이 말랐다. 이 성읍 저 성읍에서 어느 한 성읍으로 물을 얻으러 비틀거리며 몰려 들었어도 누구 하나 목을 축이지 못하였다. 그래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 오지 않았다.
。7절은 ‘한재’에 관한 문제이다. 7-8절을 보면 야훼께서 벌을 내리시되 ‘어떤 성읍에는 내리시고 어떤데는 안내리고’한 표현은 편견을 가지고 이런 행동을 했다기 보다는 ‘하느님이 모습’을 가리키는 그런 대목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하느님의 모습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절대권’을 말하는 것인데 특별히 더 참혹한 것은 비를 내린 그 성읍으로 가도 ‘누구 하나 목을 축이지 못했다’는 대목이다. 여기서 자연적인 한재가 인간의 힘으로 해결될 수 없다는 것, 그래서 하느님께 돌아갈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것을 등한시 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그런 얘기가 나오는 것이다.
。회개의 문제에 대해서 얘기한다면 호세아나 신명기는 항상 하느님께 대한 회개를 얘기하는데 아모스서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규정을 적어도 이스라엘에 대한 역사를 상기시키지 않는다는 것이 특징이다. 호세아나 신명기에서는 이스라엘에게 야훼께서 하신 업적을 상기시키면서 ‘회개’란 것을 강조한다면 아모스서는 그렇지 않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면 회개란 것은 과거에 대한 집착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방향설정, 계획의 수립에 절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야훼께 돌아온다’는 대목은 그렇기 때문에 기근이나 한재의 테마를 통해서 앞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상징적인, 이미 문체로 뿌리를 내린 테마들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이 시대에도 과거에 대한 정립이 결코 원점으로 돌아가 혼란을 야기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를 제대로 설계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다음에 성서에서 회개에 대해 얘기를 할 때에는 하느님이 ‘이스라엘에게 내신, 보여주신 길’, ‘창조의 질서’를 표본으로 하고 요구하는 회개이다. 그 회개는 결코 자기 절재를 한다든지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이끌어온 역사라든지 질서에 입각한 그 잘못을, 길을 벗어난 것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질서나 또는 십계명에 나은 길은 회개라는 것을 미래의 계획 수립으로 볼 대에는 적어도 추상적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이런 것들이 지니고 있는 문맥을 생각할 수 있다. 문맥이란 곧 창조나 십계명이 선포되었던 상황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회개는 바로 개인의 행복에 관한 얘기가 아니라 하느님을 하느님답게 드러내는 그런 행위가 되는 것이다. 단순히 죄의 사함을 받는다든지 이런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야훼 찬미’와 ‘고백’이 나오는 것이다.
9절
– 야훼의 말씀이시다. 이삭은 그 속이 비거나 아니면 깜부기가 되지 않더냐? 너희의 동산과 포도원은 황폐해지고 무화과, 감람나무는 메뚜기가 갉아 먹었다. 그래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 오지 않았다. – 야훼의 말씀이시다.
。출애 9,3-7을 보면 가축을 멸망시켜서 에집트 사람들에게 어려움을 준 내용이 있다. 또한 염병이 와서 인간을 못살게 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다음에 레위 26,25; 출애 5,3; 에제 5,17를 보면 염병과 칼이 주는 재앙이 같이 병행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이미 문학적인 스타일로 정제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천적인 따져서 이유를 볼 때 칼이란 인위적인 전쟁, 재앙을 가리키며, 페스트는 하느님께서 자연적으로 주시는 것으로 나타난다. 9-10절을 보면 9절은 자연적인 것이고, 10절은 이스라엘의 체험에 토대를 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11절에서의 ‘소돔과 고모라’는 주색잡기등이 횡횡했던 곳이라기 보다는 인간이 야훼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계획대로 건설한 공동체의 장소’를 대표격으로 가리킨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얘기와 경신례를 이행할 때 사람이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한다는 것과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는데 소돔과 고모라의 상징성은 나중에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는 대표적인 것이 된다. 중요한 것은 소돔과 고모라를 통해서 무엇을 얘기했는가이다. 이는 12절에 잘 나타나 있다.
。베델과 길갈에 대한 심판을 이미 본 청중에게 6-12절을 넣어서 베텔과 길갈이 ‘왜 이렇게 되었는가’하는 것을 얘기하려고 하는 것이다. 아모스서의 예언을 앞에다 놓고 6절 이하의 전승을 넣어서 결국은 베델과 길갈이 경신례를 하면서 나중에는 생명을 얻기 보다는 심판하는 하느님을 하느님을 만났으며 그런 하느님을 만나게 된 원인은 다른 신을 공경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국 ‘베텔과 길갈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될 것이다’라고 하지만 이미 소돔과 고모라를 보았기 때문에 대명사로 얘기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그것을 아모스의 권위를 빌려서 얘기한 것이다. 그렇게 얘기할 때 청중은 베델을 부순것을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청중이었다. 즉 요시아 때이다. 2열왕 23,16이하를 참조.
。베텔과 길갈에 이런 예언을 하면서 아모스 예언서가 시도한 것은 ‘회개를 하지 않으면 이러한 일을 당할 것이다’라고 미래로 바꾸어 놓았다. 실제로는 베델이 망한 것을 보고 그것을 근거로 해서 이것이 하느님께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라고 해석을 했다. 회개하지 않은 것을 아모스의 입을 통해서 미래로 바꾸어 놓는 의도는 내용적으로는 이스라엘이 회개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외형적으로는 이스라엘 전체에 대한 것이다. 북 이스라엘이 왜 망했는가가 신학적으로 정리한다면 망한 이유는 결국은 야훼를 제일신으로 공경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10-11절
나는 에집트에 내린 염병을 너희에게도 내렸다. 젊은 용사들을 군마와 함게 칼로 쳐죽여 진지마다 악취가 코를 들 수 없이 풍겼건만 너희는 나에게 돌아 오지 않았다. – 야훼의 말씀이시다. 나는 에집트에 내린 염병을 너희에게도 내렸다. 젊은 용사들을 군마와 함깨 칼로 쳐죽여 진지마다 악취가 코를 들 수 없이 풍겼건만 너희는 나에게 돌아 오지 않았다. – 야훼의 말씀이시다. 나는 소돔과 고모라를 뒤엎어 버리듯, 너희를 불 속에서 끄집어 낸 부지깽이처럼 만들리라. 그래도 너희는 나에게 돌아 오지 않을 것이다. – 야훼의 말씀이시다.
12절
그런즉 이스라엘아, 나는 너에게 이렇게 하기로 하였다. 내가 기어이 그리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느님과 만날 채비를 하여라.
。11절까지를 전제로 하고 청중들에게 얘기하는 사람이 대명사로 지칭하는 것이다. 얘기하는 사람이 대명사로 지칭할 만큼 다 같이 알고 있었던 사건이 무엇이냐 하면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하듯이 이렇게 멸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승된 여러 테마들, 기근이나 칼이나, 페스트, 그 다음에 여러 재앙의 연결을 했다고 하지만 아모스서는 6절부터 12절까지 넣으면서 어떤 실제적인 자기 나름대로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이 장르를 이용을 했다. 전승된 요소를 가지고 설명하기 때문에 청중이 알아듣기 쉬웠지만 그것을 단순히 반복한 것이 아니고 청중이 꼭 알아 들어야 할 것을 지칭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다.
13절
아, 천둥을 빚어 내시고 바람을 불러 일으키시며 당신의 뜻을 사람들에게 알리시는 이, 새벽을 깜감하게 하시고 산등성이를 밟고 나가시는 이, 그 이름 야훼, 만군의 하느님이시라.
。아모스서에서 몇 번 안나오는 야훼의 찬미(Doxologia)이다. 하느님과 만날 차비를 하여라하고 그 하느님이 어떤 하느님이냐 하면 13절에 부연이 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는, 찬미하면서 동시에 고백하는 얘기가 된다. 1열왕 8장에도 그런 심판, 징벌, 회개, 야훼의 찬미가 같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특별히 여호 7,19을 보면 찬미와 고백이 한 데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재앙의 연속, 회개, 찬미를 연결시키고 있다.
。잠정적인 결론을 내린다면 이 전체의 형태로 보아서 이 부분(아모스의 권위를 빌려서 후대에 붙인 것)은 여러 전승된 요소를, 공통된 장르를 이용해서 재앙을 통한 심판, 위협을 얘기했다. 그러나 1열왕 8장과 비슷한 대목을 본다면 그것은 회개와 찬미가 연결될 수 있다. 또 찬미 뿐 아니라, 고백과도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고백/찬미의 대상은 야훼이다. 여기 제시하는 야훼는 물론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전승된 요소를 다시 집약하고 있다. 그러면서 실제적인 상황에 처한 청중들에게 회개를 위한 심판을 선포하면서 13절에 가서는 그런 회개와 심판이 어떤 차원의 것인가를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창조하신 분, 이 세상을 주재하시는 분, 만군의 하느님에 관한 것이라고 신학적으로 크게 확장해서 끝맺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4-5절로 시작한 경신례의 얘기가 처음에는 그냥 개인의 욕심 또는 자기의 잘못을 보도하는 기능을 가진 경신례로 전락시킨 것 같지만, 아모스서에 의하면 이것이 전 우주에 관한 잘못이라고 얘기한다. 이러한 생각은 아모스서 전체에 흐르는 ‘야훼가 유일한 절대적인 하느님’이라는 이 신학과 일치하는 것이고 그런 신학적인 결론을 내리는데 토대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사회적인 잘못은 사회적인 문제 뿐 아니라 창조에 관한 얘기이며 더 나아가서는 하느님의 본질에 관한 얘기로 되는 것이다. 회개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따라서 하느님과 대면할 수 밖에 없는 상태에 처하게 되는 것이며 그것이 곧 심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