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기 3장의 연구

 

I. 3장의 구성 및 주석


1) 1-2절(서론)


2) 3-10절


3) 11-19절


4) 20-26절로 구분되는데, 특히 11-19절, 20-26절은 ‘왜 이렇게 되었는가?’(הꗲꗚ : 람마) 하는 이야기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러한 문학적 구분이 가능하다.


이러한 문학적 구분과 내용적으로 살펴보았을 때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서로 같은 테마를 나선형 모양으로 이어가는 성격을 띤다. 그래서 의미의 복합체, 의미의 연속, 의미의 나사형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여하튼 여기에 나타난 큰 테마는 자기 탄생일을 저주하는 것으로서 3장 전체는 ‘LAMENTATIO'(탄원, 탄식)의 유형을 가진다.




1. 3장 1 – 2절 : 서론


욥은 하느님이 아니라 자신의 생일을 저주한다. 즉 고통이 심해 고통의 주체인 자신의 처음을 부정해 버린다(하느님을 부정하는 것이 아님). cf)예레 20,14이하와 같은 맥락의 장르이다.


▶‘드디어 욥이 입을 열어 제 생애를 저주하며 말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은 2,13에서 한 마디도 말하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는 것과 대조된다. 그래서 침묵을 깼다는 데에 의미가 있는데 그것은 단순히 말을 하지 않다가 말을 했다는 의미보다는 침묵을 깨고 말을 해야겠다는, 즉 고통을 벗어나는 방법으로서의 결심이 들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입을 여는 것의 반대는 침묵을 지키는 것으로서, 침묵을 지켰던 것도 의도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며, 말하는 것 역시 의도적인 것이다(시편 38,14에도 침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특히 1-2절에서 의도적으로 입을 열었다는 것은 저주하기 위해서 입을 열었다는 목적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무엇을 저주하는 것인가? 자기 생애에 빈, 채워지지 않은 것을 저주하기 위해 입을 열었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는 2,13에서 압도되어서 입을 열지 못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3장은 전체적으로 지혜문학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3,3-10, 11-19, 20-26의 문학적 구분이 가능하다.




2. 3장 3 – 10절


3절에 태어난 날에 대한 저주가 나오는데 그 이유는 10절에 나온다. 그러나 어떤 논리적인 것보다는 언어유희, 말장난 같은 성격을 지닌다(내 모태가 문을 닫지 않고 내 눈이 고통을 보게 되었기 때문에 태어난 날이여, 없어져라).


4-9절은 3절의 테마를 발전시키는 것으로서 병행구로 이루어져 있다. 특별히 처음에는 낮과 밤이 나오다가 나중에는 밤이 주종을 이루게 된다.


5-10절은 시상을 일으키는 motive들이 기술됨. 일관된 motive로서 흑암, 어둠, 저주되는 밤, 빛이 없는 밤 등이 나타난다. 이러한 밤도 하느님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밤이지만 하느님 이외 다른 힘에 의해서 움직여지는 시간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3절】욥은 자신의 처음을 저주한다. 이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극도의 절망감을 표현하는 것이다. 저주하는 이유는 인간이 마음대로 어떻게 해볼 수 없기 때문에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부정적 의미에서 자신의 잉태됨을 서술한다.


▶ 날과 밤을 병행시킨다. 또한 동사형(없어져 버려라)을 살펴보면, 우리의 체험에 있어서 알 수 있지만 날과 밤은 욥이 보기에 하느님이 창조하신 것으로서 하느님께서 창조하시기 전의 밤은 쓸데없고 사탄이 활동하는 영역이었지만 하느님께서 낮과 밤을 창조하심으로써 밤도 유용한 것이 된다. 여기에 근거하여 ‘태어난 날, 태어난 밤아 없어져라’는 것은 곧 창조에 역행할 정도의 고통을 암시하는 것이다.


◈ ‘없어져 버려라, 사라져 버려라’


– 3절의 날과 밤은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고 활동할 수 있는 그런 날과 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주신 날과 밤이 창조 이후에 인간에게 봉사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즉 나도 태어나고 남도 태어날 수 있으며 기쁠 수 있는 봉사의 시간이 된 것인데 ‘없어져 버려라’는 말을 통해 인간이 창조 이후에 시간에 대해 활용할 수 있고 장악할 수 있으며 지배할 수 있었던 것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시간이 인간을 장악하게 된 것처럼 보이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와 다른 사람에게 시간은 도무지 가치 없는 것으로 보이게 된다. 이러한 3장의 자기 탄원(lamentatio)은 창조와 연관된 기본적이고 신학적인 LAMENTATIO 이다.


◈ ‘밤’


– 하느님께서 관여하시면 밤도 유용한 것이 된다. 그리고 빛이 밝혀 주지 않으면 ‘날’이란 것도 없게 된다. 빛이 밝혀 줄 때에만 날의 기능을 발휘할 수 있는데 ‘빛을 밝혀 주지 말아라’는 것은 날의 기능이 없어지라는 것이다. 날, 즉 대낮으로서의 기능을 지니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낮 시간이 인간에게 봉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없애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암흑이 그렇게 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이 개입을 해야 가능하다. 처음에 창조할 때에도 “암흑이 있었다. 그리고 하느님의 말씀이 있었다”. 그래서 낮과 밤을 갈라놓을 수 있었는데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드러나는 탄원은 창조에 역행하는 탄원이 들어 있다.




【4-5절】 4절 역시 3절의 밤이 계속 이어진다. 즉 날이 있을 가용성을 전혀 배제하는 것이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하느님이 암흑에 대해서 개입을 안하시면, 대신 다른 힘에 의해서 암흑은 지배를 받는다는 것이다. 다른 힘이 무엇인가? 바로 ‘어둠과 암흑’인 것이다.


또한 출애 12,23이 Pascha의 제일 원초적인 의미를 주는 구절인데 여기에는 문설주의 피를 통하여 파괴자가 못 들어오게 하시는 하느님의 역할이 나타난다. 유목민의 생각에 파괴자는 하느님과 상관없는 어떤 힘으로서 유목민들이 밤에 잘 때에 갑자기 공격을 받거나 죽게 될 때에 사람들이 그것을 설명할 수 없게 되자 어떤 괴물, 사탄, 악신 같은 것이 엄습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급살을 당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즉 유목민 시대에는 죽음이 너무 갑자기 오니까 그 죽음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으로부터 온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사탄, 악령은 문설주의 피를 보면 꼼짝을 못한다. 즉 피가 그 파괴자의 힘을 막는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의 피’가 심화된다. 동물의 피에도 약한 사탄인데 하물며 예수의 피에는 어떻겠는가? 여기서 발전하여 “아하! 예수의 피를 마시면 영원히 사는구나”.


이러한 신학적 발전은 근본적으로 그때부터 지금까지 죽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라는 인간의 문제에서 출발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출애 4,24-26 에도 나오는데 여기서는 특이하게도 밤에 갑자기 공격하는 분이 야훼로 바뀐다. 문설주의 피를 보고 야훼가 도망가신다. 이는 유목민 시대에 파괴자가 도망가는 것을 야훼께 적용하여 신학화시킨 것이다. 그리하여 문설주에 양의 피 대신에 어린이의 할손례의 피를 사용하고 이것은 왜 어린이의 할손례가 시작되었는가를 원인론적으로 말해주기 위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밤과 공격자(파괴자)가 밀접한 관계가 있고 이것은 전승적으로 아주 오래된 것이라는 점이다.


욥 3,4-5에도 마찬가지이다. 야훼가 개입하여 빛을 밝혀 주지 않으면 나의 잘못은 암흑에 의해서 공격을 당한다는 것이다.




【6절】자신이 태어난 날에 대한 전적인 부정. 이 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날로 날, 해 달수에도 끼지 못한다. 이 밤은 죽음을 초래하고 하느님과 떨어져 있는 밤이 되는 것이다. 이 밤은 죽음의 밤이며 세상에서도 저주받은 밤이다.


▶ 5절을 이어간다. ‘한 해의 나날에 끼이지도 말고 다달의 계수에도 들지 말아라’는 것은 하느님의 창조 사업에 들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 자기가 태어난 날은 하느님의 창조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잘못된 날이 된다.




【7절】3절을 계속 발전시킨 것으로서 암흑이란 것이 점령한 시간은 생명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하느님이 개입하셔야 축복이 되고 창조가 되는 것인데 그렇지 않기에 축복이나 생명이 없는 날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장악 하에 있는 날과 밤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 즉 밤도 한 생명에 이용되는 것을 막아달라는 것이다. 3b절을 상기시킨다.




【8절】레비아탄 – 바다 괴물. 악의 세력을 상징한다.


▶ 여기서는 밤, 어둠의 세력이 인격을 지닌 마술사로 나타난다. 또한 밤이란 인간에 적이라는 것이다. 축복과는 관련이 없고 저주와 관련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명이 태어난 날을 기뻐한다. 따라서 그 밤을 저주하기 위해서는 힘있는(특별한 힘이 있는, 즉 술법을 부리고 레비아탄을 깨울 수 있는 자들) 사람이 필요하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밤이 없어지게 해주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낮과 밤을 창조하시어 밤도 쓸 수 있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법사들에게 밤을 저주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다.


그런데 레비아탄은 밤, 저주, 신화와 관련되는 바다의 동물이기 때문에 문맥상 ‘날’은 어울리지 않는다. ‘날’-םוֹי(욤), ‘바다’-םꖷ(얌) 즉 ‘바다를 저주하는 자들아’라고 했어야 맞는데 해석을 잘못한 것이라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 레비아탄


– 신화적인 바다의 괴물. 레비아탄의 어의(語義) 가운데는 ‘동반한다’는 뜻이 있다. 고래 같은 어떤 특정한 동물로 보는 것은 곤란하다.


레비아탄과 관련하여 창세 1,21-‘바다의 괴물’, 시편 148,7; 이사 27,1; 시편 74,14에 나오는 ‘바다의 뱀’, ‘바다의 용’과 연결되며, 출애 7,9; 신명 32,33의 신화적인 ‘바다의 용’과 연결된다.


또한 이러한 것은 Ugarite 문헌에도 등장하는데 이는 레비아탄이 신화적인 바다의 괴물로서 그것을 의인화시켜서 혼돈을 야기시키는 힘의 주인공으로 만든 것이다. 또한 창조주에 대항하는 것으로 혼돈을 일으키는 것, 신화적인 힘을 지닌 것으로 묘사된다. 그러나 창조주에 의해서 극복되는 존재이다.


그래서 가나안에서는 레비아탄이 혼돈을 야기하는 신화적 존재로, 바빌론에서는 마르둑(최고 신)이 싸우는 최초의 혼돈스러운 홍수, 즉 티아맛과 싸우는 이야기에 나오는 것이다.


왜 욥이 이것을 사용하였는가? 이는 자신이 태어난 날이 창조 반열에 들지 않고 암흑이 비치는, 하느님이 개입하지 않는 날로 그런 악신이 활동하는 밤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 즉 창조와 상관없는 자신이 태어난 날과 반대되는 밤이 되달라는 것으로서 근본적으로 최초의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와 연결시켜 말하는 것이다.




【9-10절】밤은 지나가는 것인데 이것이 멈추는 것으로 묘사된다. 지나갈 수 없음은 혼돈의 극치를 표현하는 것이다.  


▶ 9절 – 밤이 지닌 기계적인 속성, 즉 새벽을 향해 가고 사람들이 새벽을 기다리는 것에 반대되는 것으로서 밤의 자연적 기능을 거부하는 것이다.


▶ 10절 – 빛이 자신의 모태의 문을 닫지 않고 눈에서 고통을 감추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이 태어났음을 탄원한다. 자기 고통이 하느님이 없는 밤에서 기인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으로서 밤마저, 자기가 태어난 날마저 없어졌으면 하는 것이다.


‘내 모태의 문을 닫지 않고’는 기원적인 이야기이며 ‘내 눈에서 고통을 감추지 않았기…’는 태어난 이후에 당하는 고통을 밤이 닫아 주었으면, 밤이 없애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질 않았다. 그래서 욥은 그 고통이 밤에서 오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 밤이 모태의 문을 닫았으면 그 고통은 오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욥이 그 밤이 없어져 달라고 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렇게 하질 않아 내가 이렇게 고통을 당하게 되었으니 “밤이여 너까지 없어져라”고 욥이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굉장한 고통에 대한 절규이다.




◈ 소결론


– 욥기 3,1-10은 창조 신학에 나오는 창조, 축복, 생명 등을 배경으로 깔고, 욥이 자기의 고통을 근원적으로 규명하려는 것이다. 자기가 태어난 날이 생명과 관련된 창조에 연결되어 있기에 아예 창조에 도전, 대항하는 것이다.


* 3,3-10절은 욥의 좌절감을 시적인 여러 요소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①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하느님에게 버림받음(3,4)


② 창조 질서의 차원에서


③ 사회적인 질서의 차원에서


④ 이교적인 표현을 통해서


⑤ 미래에 대한 희망조차 없는 것으로서


여기선 고통을 벗어나는 상식적인 길이 처음부터 보이지 않고 봉쇄되어 있다. 욥은 자신의 시작을 저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고통을 당한다. 극도의 좌절감은 ‘밤’ ‘어둠’으로 표현되는데 어떤 세력도 이를 이겨낼 수 없다.


1장 2장의 서론과 연결시키면 사탄, 부인, 친구를 통해서 나타난 평가를 이 곳에서 상기시켜 준다고 할 수 있다.




3. 3장 11 – 19절


11절은 12절과 함께 13절을 향해서 준비하는 기능이 있으며 14-15절은 죽은 사람의 상태를 이야기하는 의미에 앞부분과 연관이 있다. 그러나 16절은 앞뒤와 맞질 않는다. 그래서 문헌 비판적으로 16절은 후에 첨가되었다고 생각하고 학자에 따라서 12절 혹은 13절 뒤에 놓기도 한다. 이런 의견은 ‘태중’, ‘모태’ 등의 이야기가 16절의 ‘파묻힌 유산아’ 등의 언급과 관련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16절은 문헌 비판적으로 후대에 첨가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한 것이다. 그리고 17-19절은 죽음, 쉬고 있을 때의 상태를 이야기해 주는 것이다. 죽었으면 만사가 해결되었을 텐데 그렇질 않았으니 “밤이여 없어져 다오”를 계속 풀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한탄하는 자체가 3,1에서와 같이 저주하기 위해서 입을 여는 것이 이어지는 것이다.




【11절】‘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내가 왜 태어났는가?” 에 대한 한탄의 내용이다.


*. ‘왜’라는 의미의 הꗲꗚ는 구약에서 부정적의미로 사용되며 헤쳐 나갈 길 없는 고통을 나타낼때 사용된다.


הꗲꗚ로 인한 문학적 구분이 가능하게 된다.


▶ 어찌하여 내가 태중에서 죽지 않았던가? 내가 모태에서 나올 때 숨지지 않았던가?




【12절】 : 어째서 양 무릎은 나를 받아 냈던가? 젖은 왜 있어서 내가 빨았던가?


11절은 처음 태어날 때 자기 생애에 대한 저주뿐이 아니라 자기의 탄생 자체가 생명을 거스르는 사건이었다. 전통적인 생각은 사람의 탄생은 생명이며, 창조이고, 축복이라는 것이데 자기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11절의 ‘어찌하여’(람마)와 12절의 ‘어째서’(마두아)는 서로 다른 의문사이다. 질문을 통해서 한탄을 하고 반대하면서 탄원하는 기능에 있어서는 같은 말이다. 12절은 11절과 다른 점은 11절은 태어날 때의 문제이고 12절은 나를 어머니가 돌보지 않았으며 자연히 어렸을 때 사망하였을 텐데 태어났더라도 왜 돌보아서 이렇게 고통을 받는냐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원망에 대한 상승 작용을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차이점은 11절이 태중과 모태에서의 이야기로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그 무엇이라면 12절의 나를 받아 내고 젖을 먹이고는 보존의 차원, 인간의 많은 협력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 ‘무릎으로 받아 냄’


– 여기에는 많은 의견이 있는데 젖을 먹임과 함께 무릎으로 받아내는 것은 태어나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고대 다른 나라의 문헌에 보면 ‘왕이 여신의 무릎에 앉아 있다’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것이 태어나는 것을 가리키는 묘사라는 의견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렇게 보는 것보다는 어머니가 아기를 낳을 때 남편이 무릎을 꿇고 받아 냈기 때문에 그것을 표현한 것과 또 하나는 법적으로 창세기 48,12을 보면 아기를 양자로 받아들일 때 무릎을 꿇고 받는다는 테마가 나온다. 여기서는 이 두 가지 중 어떤 것이던 간에 아기를 돌본다는 것을 나타내는 테마와 연결시킨 것으로 보면 된다.  젖을 먹임은 법적이거나 전통적인 어떤 것이 있는 것은 아니다.




【13절】 나 지금 누워 쉬고 있을 터인데, 잠들어 안식을 누리고 있을 터인데.


13절에서부터는 새로운 테마가 시작된다. 11절과 12절 같이만 안되었더라면 나는 죽었을 터인데 그리고 죽었으면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잠’을 죽음과 연결시키는 것은 바빌론보다는 그리스의 호메로스의 작품 이후에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다. 욥기가 헬레니즘의 영향이 있은 후에 씌어진 것이므로 이런 생각은 가능하다고 본다. 그리고 여기서 ‘잠들고 누워 있고’ 즉 죽음은 앞의 생명에 대한 저주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잠이라는 것은 사람의 활동, 능동적인 협력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시편에서도 살아서 구원해 달라는 것이지 죽으면 내가 하느님을 찬미할 수 있겠냐는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죽음 다음의 생명에 대해서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살아 있을 때 삶이라는 것이 생명이라는 것이 하느님과 얼마나 밀접한 관계에 있는가를 깊이 깨달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한다고 보는 것이 더 옳다. 그런데 여기서 특이한 것은 죽으면 밤이고 저주받은 것인데 그것을 안식으로 이야기하는 점이다. 오히려 생명, 축복, 창조를 고된 것으로 생각을 한다.




【14절】 임금들과 나라의 고관들과 함께, 폐허를 제 집으로 지은 자들과 함께.



【15절】 또 금을 소유한 제후들과 함께, 제 집을 은으로 가득 채운 자들과 함께.


14절 전반부의 ‘고관들’은 누구인가 하면 구약에서는 고관들이 자문하는 사람들을 일컫는데 열왕기 등을 보면 국가 기관의 벼슬로 왕과 함께 나오는 경우가 없다. 이것은 오히려 페르시아 지방에 있었던 국가 기관의 벼슬로써 왕과 함께 일컬어지는 일정한 벼슬의 이름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욥기의 저술 시기가 페르시아가 있은 다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4절 후반부의 집을 짓는 이야기는 당시의 왕과 고관들이 즐겨 하던 것이 내 시대에 무엇인가를 지었다는 것을 자랑하는 것과 관련된다. 그런 사람들(세상에서 거들먹거리는 사람들)과 함께 그리고 15절의 돈 많은 사람들(재물로 거들먹거리는 사람들)과 함께 죽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16절】 : 파묻힌 유산아처럼 나 존재하지 않을 터인데, 빛을 보지 못한 아기들처럼.


이 절은 ‘빛을 보지 못한 아기들처럼 죽었으면 존재하지 않았을 터인데’ 즉 앞의 11절, 12절과 연결시키는 것이 좋다. 자기의 태어남에 대해 또 한 번 나오는 테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3,3에 나온 것을 다시 한 번 이어받은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붙인 해석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왜 이곳에 첨가했는가? 14절,15절이 세상의 힘있는 사람들, 잘난 사람들, 누리고 사는 사람들 이것에 대조해서 나는 처음부터 그렇게 안되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는 것을 대조시키기 위해서 이곳에 넣었다고 본다. 이것은 곧 지금 잘살고 큰 소리 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것이다. 나는 지금 태어난 것조차도 싫은 사람인데 말이다.




【17-19절】11-15절의 왜 죽지 않았는가에 대한 부연 설명이다.


세상에서 고통 받는 이들과 대조되는 인물이 나열되고 있으며, 3절부터 나타난 욥의 고통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세력에서 오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 17절 : 그 곳은 악인들이 소란을 멈추는 곳, 힘 다한 이들이 안식을 누리는 곳.


▶ 18절 : 포로들이 함께 평온히 지내며 감독관의 호령도 들리지 않는 곳.


▶ 19절 : 소인도 대인도 그 곳에선 똑같고, 종은 제 주인에게서 풀려나는 곳.


17절은 ‘악인들’과 ‘힘다한 이들’, ‘소란’과 ‘안식’이 대조를 이룬다. 18절의 ‘포로’, 그 당시의 포로는 가장 버림을 받은 자들, 아무도 돌보지 않는 자들, 죽음밖에는 기다리지 않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런 사람들이 편안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은 죽어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감독관의 호령도 들리지 않는 곳’은 억압이 없는 것을 이야기한다.



(참고)- 평등에 대한 신부님의 견해를 불교, 아마존강의 예로 말씀하시고 그것을 우리의 성소와 연결 지어 설명하심. 즉 우리가 말해야 하는 평등은 그런 물량적인 평등이 아니고 각자가 받은 성소를 발휘할 수 있는 그런 평등이다. 따라서 각자가 갖고 있는 성소를 일생 동안 발전시키도록 교회는 배려해야 한다. 유대계인 칼 포퍼는 ‘세상을 천당처럼 만들려고 하면 세상은 그때부터 지옥이다’라고 했다. 우리는 부활이라는 것을 죽은 사람에 대조시켜서 이야기해야 한다. 죽은 자가 부활을 해야지 죽기는 ‘갑’이 죽고 부활은 ‘을’이 하면 얘기가 안된다. 이것은 우리가 모두 인정하는데, 부활을 죽은 다음에 부활하는 것이니까 부활은 다음 세상에 가서 하는 것으로 당연히 생각한다. 볼 수 있는 교회와 볼 수 없는 교회가 있다. 이 둘이 따로 있으면 안된다. 볼 수 있는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그것이 이어져서 볼 수 없는 교회에 가서 완성된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하느님을 선택한 사람이 그 선택이 무엇인가가 완성되는 것이 볼 수 없는 교회에 가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도 볼 수 있는 교회에서 죽은 사람이 다시 부활해야 한다. 볼 수 있는 교회에서 죽은 사람 다르고 부활한 사람 다르면 그것은 대전제에 어긋난다. 볼 수 있는 교회에서도 죽는 것만 이야기할 것이 아니라 부활의 요소도 그 죽은 사람에게 돌려질 수 있어야 한다. 억압의 구조를 신학적으로 보면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4. 3장 20 – 26절


1) 20 – 22절 : 일반적인 자신의 고통과 고됨이 서술되고 있으며, 그는 죽음을 바라고 있다.


24절 : 후대에 첨부된 것으로 여겨짐(히브리어 리듬이 달라지고 있음). 개인의 탄식을 다루고 있지만, 앞뒤의 내용과는 달리 부연하는 성격을 갖는다.


2) 25 – 26절 : 자신을 ‘나’로 이야기하다가 한 사내로 바뀌고 있다. 두려움, 무서워 함, 쉬지 못함 등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 욥은 고통의 연속은 죽음인데 왜 고통도 없어지지 않고 빛을 비추어 주어 살도록 해 주는가에 대한 답을 요청하고 있다. – 생명은 고통으로 환원되고 있고, 또한 생명은 자신이 생각하던 전통적인 것이 아니다. 욥은 이러한 경험을 통해 이전의 신 개념과 반대되는 개념의 신을 체험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21-22절】 자신은 죽었으면 하는데 그것을 반대하는 하느님과의 싸움으로 바뀌고 있다.



【23절】 20절과 병행하는 구절로써 나선형으로 발전되고 있다. 왜 생명을 주었는가? 생명을 주셨으면 막지 말아야 하며, 막았으면 죽여야만 하는데 상황이 그렇지가 못하다. 즉 생명을 주셨으면 보존할 가능성을 열어 주어야 하는데, 여기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만이 주어져 있다.




【24절】 탄식, 신음 – 사자가 포효하는 것과 연결되는 것으로, 고통 때문에 온 몸으로 부르짖는 탄식과 신음을 나타내고 있다.




【25절】 두려움, 무서움 – 하느님이 생명을 막았기에 이러 지도 저러 지도 못하는 꼼짝 못하는 상태의 두려움을 뜻한다.




【26절】 ‘혼란하다’는 말로 앞의 내용을 종합하고 있다.


◈ 욥은 왜 사는지,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한편, 고통을 이해함에 있어서 자신이 욥과 같은 고통을 당하지 않더라도 ‘고통의 신비’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과정이 있어야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의 신비를 이해하고 동참하게 된다. 3장의 욥의 탄식과 신음(lamentatio)은 여기에 의미를 갖는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의 신비 이전에 욥의 고통에 대한 깨달음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서 고통 가운데 함께 계시며,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 깨닫게 된다. 욥기 3장은 고통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는 guide book이라 하겠다.




* 3장 전체 정리


욥이 이러 지도 저러 지도 못하는 것을 첫 편에 정해놓고 선택할 수 있는 사회적 봉쇄를 나타낸다. 욥의 고통은 자신의 능력으로 어떻게 하지 못하는 극한 상황이며, 1, 2장의 건강, 재물 뿐 아니라 자기가 쌓은 모든 것이 다 무너지는 고통이다. 3장은 고통에 대한 주관적인 고백이다. 욥은 선택가능성이 없는 사람이다. 어떤 체계에 의해 끌려 다니는 사람이다. 그러나 욥은 무너지지 않는다. 욥의 온전성이 자신의 고백을 통하여 나타난다.




5. 3장이 쓰여진 목적 (1-2장과 연결시켜 반성)


1) 3장은 행복하던 때와는 정반대 되는 내용을 보여주고 있으며 스타일도 다르다. 절망, 탄식 때문에 자기의 태어난 날, 시작을 근본적으로 저주하고 있다. 1-2장의 산문에서는 태어난 날이야말로 정말 행복하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매일 매일 얼마나 행복한가를 말함으로써 3장과 시간적인 대조를 보이고 있다. 즉 행복하던 때는 시간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지만 고통을 받을 때는 태어난 순간부터 건드리고 있다.


2) 잘 될 때에는 자기의 형제들을 초대하고 있지만 고통을 당할 때 욥은 무능하기만 하다. 이 내용은 결국 하느님께 대한 원망과 탄원으로 바뀌고 있다.


3) 1-3편에서의 내용은 욥의 경우가 창조 때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온 축복, 생명과는 정반대 되는 것이기에 욥이 하느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함을 드러내고 있다. 욥은 거기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 바로 이점이 탄식의 깊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느님이 생명을 이어 주신다면 생명에 걸맞은 하느님의 모습이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가 못하다. 따라서 생명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하지만 생명을 이어가는 타개책을 찾지 못하였다. 따라서 욥은 무서움, 두려움, 혼란을 느낀 것이다.


2,9에서 부인이 “하느님을 저주하고 죽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는 자기의 태어난 날을 저주하고 죽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죽음에 가는 것도 하느님이 막아 놓았기 때문이다. 사는 것뿐만 아니라 죽는 것도 하느님이 막아 놓았다. 3장을 읽는 사람들은 이 탄원을 통해서 욥이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기대를 하게 된다. 욥은 하느님께 대한 어떠한 태도를 취할 것인가?


이미 1-2장에서 부인과 사탄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그리고 2장 끝에 친구들이 어떻게 할 지 몰라 하는 장면도 보여졌다. 이제 3장에서 욥이 입을 열고 있다. 이 부분은 ‘욥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서론적인 구실을 하고 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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