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엘리바즈의 첫째 담론 ( 4 – 5장)
② 2 – 5절 : 문맥상 유사한 내용으로, 특별히 2절의 ‘언짢아하겠지’와 5절의 ‘기운을 잃고’는 똑같이 ‘האָꗚ(라아흐)’ 라는 히브리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또한 2절과 5절은 하나의 테두리를 이루고 있으며 서로 상응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기에 2-5절까지를 한 단락으로 볼 수 있다.
③ 6 – 9절 : 하나의 지혜 문학적 가르침으로서 기능적으로는 12절 이하를 도입, 소개하는 역할을 한다.
④ 10 – 11절 : 6-9절의 지혜 문학적 내용을 보강하는 격언.
∴이렇게 볼 때 4장에 나오는 엘리바즈의 얘기는 매우 논리적이라 할 수 있는데 그 형태를 보자면 2-5절까지 이야기를 하고 6-9절에서는 그것을 지혜 문학적으로 부연하며, 10-11절에서는 격언으로 보완을 하고 12절 이하에서는 계시체험에로까지 발전시키고 있다. 이를 통해 엘리바즈는 욥에게 우둔한 행동을 하지 말 것을 권고하며 5장에 가서는 욥 자신의 위치에서 지켜야 할 올바른 행동이 무엇인지 지적한다.
2) 5장의 구조 – 욥의 위치에서 올바른 행동이란 무엇인가?
① 1 – 7절 : 미련한 짓을 하지말것을 경고하면서(1절), 2절에서는 격언을, 그리고 3절에서는 4장과 유사한 형태로 예화를 통해 부연하고 있다.
② 8 – 16절 : 하느님 대전에서의 고소와 쟁론, 그리고 심문의 과정이 나타난다.
③ 12 – 27절 : 올바른 이들을 결국 하느님께서는 복구해 주신다는 내용.
결국 엘리바즈는 4-5장을 통해 어려움 속에서도 바른 삶을 살 것을 권고하고 있으며 또한 이 안에서는 다른 시편 등에서 볼 수 있는 부분적인 장르의 유사점을 보여주고 있다. 5, 9이하의 하느님을 찬미하는 내용에 이어 18절 이하의 회복시켜 주는 내용이 나오는데 이는 시편 94장과 91장에도 나타나며, 또한 고통을 당한 다음에 회복시켜 주는 내용이 시편 9장에도 나타난다.
4, 2-7절까지는 자기 경험에 대한 이야기로서 욥에 대한 위로인 동시에 경고라 할 수 있다. 5장 1. 8. 17. 27절은 엘리바즈가 욥에게 직접 말을 거는 형태이며 4장 8-10절에서 8절은 경험, 10절은 격언 또, 5장 2절 역시 경험, 3절 이하는 자기 체험, 6절은 다시 그 내용을 보강하고 있고, 4,17-21의 계시와 5,9-11의 하느님을 찬미하는 이야기와 5, 17이하에서는 미래의 행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5, 22은 후대에 첨가된 설명으로 보여지고, 4, 10역시 11절 때문에 첨가된 사자에 대한 하나의 설명으로 보여진다. 5, 8과 5, 9-16 ; 5, 17-26역시 후대에 첨가된 것으로 보여진다.
【1절】엘리바즈가 만난 욥은 투덜거리며, 자신의 탄생마저 저주하고 있으며 이러한 욥앞에서 엘리바즈 역시 확실한 대답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당혹해 한다. 따라서 2절과 5절을 통해 ‘האָꗚ’를 수사학적으로 반복해서 사용함으로써 욥에 대한 물음을 시작한다.
【3-4절】엘리바즈가 갖고 있는 욥관이며 1장1절과 8절에 나타나는 하느님의 욥관과 동일하다. 또한 그러한 욥의 경건하고 올바른 삶은 대인관계와 밀접한 연관을 가지며 그럼으로써 과거에 다른 사람에게 대했던 욥의 태도를 일깨움으로써 현재의 자신의 모습을 새롭게 자각하도록 욥을 이끌고 있다.
▶3절
여기서는 רמי(야사르) 동사가 사용되고 있고 이는 일반적으로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 일체를 가리키는데 이는 어떤 의미에서 도움을 주는 이야기와 더 나아가 육신적 매나 재판을 통해서라도 고쳐 주고, 일깨우는 교육적 의미를 지니다.
▶4절
3절과 병행하는 구절로서 이와 유사한 내용이 시편31,1과 호세아 14,2에 나타나며 3절b와 4절b가 병행함으로써 약한 이들과 함께 했던 욥이라는 엘리바즈의 욥관이 제시된다.
【5절】5절b “자네에게 (불운이) 부딪치자 자네는 질겁을 하는군” 에 사용된 표현은 להב(바할) 로서 5절a의 “기운을 잃는 것”과 유사성을 가진다. 이러한 과거와의 대조를 통해 엘리바즈는 욥의 어리석음을 일깨우면서 그러한 과거의 올바른 모습과 배치되는 행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6절】다음 구절을 도입하는 과도기의 성격을 지니며 경외(ארי ‘야레’)는 내적으로 응답, 순명하는 것이며 이러한 하느님 경외와 온전한 삶은 동일한 성격을 지닌다. 또한 믿음과 바람 역시 병행함으로써 같은 맥락을 이룬다. 두려움이라는 주제 역시 잠언집과 지혜 문학에 많이 등장하는데 즉 하느님을 두려워함이 지혜의 시작이라고 보는 것은 결국 신앙에로 환원되어 이해될 수 있다.
6절이 지닌 기능은 과거의 올바른 모습을 상기시킴으로써 과거에 살았던 대로하면 될텐데 불행이 닥치니까 그것을 버리고 있다는 것을 일깨우면서 은근히 욥에게 잘못이 있음을 암시한다.
【7절】‘생각해 보게나’ 여기서 רכז(‘자칼’)이라는 동사는 ‘기억하다’라는 의미이며 욥 자신이 과거를 돌이켜 볼 것을 권고하고 있고, 또한 ‘올바른 이’는 רשׁי(‘야샤르’)라는 단어가 쓰이고 있는데 이는 קידצ(‘차딕’) 과 달리 pietas(열심)와 연결되며 여기서 던져지는 질문은 욥이 과거와는 달리 올바르지 않음을 깨우치도록 유도하는 기능을 갖는다. 즉 다른 사람들을 타이르고 격려하면서 왜 너 스스로에게는 그렇지 못한지를 묻고 있다.
【8절】하나의 인과응보론적인 격언이며 갈라디아서 6,7에도 나타난다. 이를 통해 욥 스스로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결론을 내리도록 유도한다.
【9절】입김은 הור(‘루아흐’)로 표현되고 있고 그것은 하느님에 의한 것이기에 아무도 피할 수 없는 것임을 지적한다. 이러한 생각은 신학적으로 매우 잘 짜여져 있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 하느님을 하나의 신관이라는 틀 안에 제한하는 오류를 낳고 있다.
【10-11절】사자는 보통 시편에서 폭력을 쓰는, 하느님을 모르는, 힘있는 존재의 상징으로 나타나며, 11절에서 “사냥 거리 없이 스러져 가고”의 ‘스러지다’에 쓰인 דבא는 7절의 멸망하다와 동일한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를 통해 엘리바즈는 지혜 문학적 차원에서 주어진 고통이 인간의 한계나 하느님의 교육적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수용할 것을 권고하지만 그것은 또다른 면에서 하느님을 어떤 일정한 양식의 틀에 짜맞추는 오류를 낳는다.
【12절】“남몰래 다다랐고” – 13절과 연관해서, 그 속삭임이 인간 자신의 노력, 능력을 뛰어넘어 인간에게 주어진 것임을 의미한다.
“그 속삭임이 내 귓가에 들렸네” – 예언자들이 일반적으로 visio(환시)를 통해서 계시를 받는 것과는 달리 듣는 것을 통해 계시를 받는다는 다소 독특한 형태를 보인다.
【13절】“밤의 환상으로 생각에 잠겼을 때” – 창세기 2장에서 야훼께서 아담을 잠재운 후 하와를 창조했을 때 아담이 하와의 창조에 기여한 바가 없음같이 인간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 상태에서, 마치 깊은 잠에 들었을 때와 같은 시간에 갑자기 왔음을 가리킨다.
【14-15절】격언이나 일상적 체험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으로서 자신의 능력, 노력과는 무관하게 인간에게 닥침으로서 공포에 빠지게 되고, 인간은 수동적인 입장에 서게 됨을 말하는데 이러한 계시 체험은 사무엘서 11장과 예언자 아모스의 경우에서도 나타난다.
【16절】visio가 아닌 들음의 내용은 17절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이 하느님보다 의로울 수 없다는 사실이다.
【17절】의로움은 죄없고, 탓할 것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며 이로써 엘리바즈는 욥 자신도 하느님 앞에 결백할 수 없음을 시인하도록 유도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창조주보다 결백할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을 통해 욥이 처한 상황과 그러한 상황을 야기한 인간 세상의 질서가 결백하신 하느님에 의한 것이기에 하느님에 의해 만들어진 질서에 대해서 아무런 불만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움에 있다.
【18절】‘누가 하느님보다 의로운가’ 라는 질문에 대한 하나의 증명으로서 하느님과 가까이 있는 이들만도 못한 인간이 하느님 앞에 의로울 수 없음을 말하고 있다. (요한 2, 23-25 인간을 사랑하셨지만 결코 믿지는 않으셨던 예수님의 모습)
* 천사는 하느님을 보좌하는 봉사자,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계시의 중재자로서 이해되며 어떠한 신적인 개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19절】창세기 2장에도 나오는 내용으로, 인간을 과소 · 과대평가 해서는 안됨을 말하면서 결국 인간이 하느님 가까이 있는 천사들만도 못한 존재임을 지적한다.
【20절】영원히 스러지는 이유는 아무도 인간에게 주목하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은 인간을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는 분이 아무도 없음을 말한다.
【21절】천막끈은 그들이 사는 집을 의미하며 그것을 지탱하는 것이 끊어졌기에 살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혜 (המכה ‘호크마’)는 살아가는데 필요한 기술을 의미하며, 이사야 11장에서 메시아가 오면 여러 가지 능력이 오는데 슬기, 지식, 지혜 등이 바로 그것이다.
¶12-16, 17-21을 통해 계시 체험은 인간의 노력 없이 주어지는 것이며 그 내용은 인간이 하느님께 감히 도전할 수 없고 인간은 천사들보다 못하며 자신의 보존을 위해 관심을 기울이는 존재도 아니다.
엘리바즈는 4장을 통해 전제를 한 다음 욥에게 경고를 한다. 즉 하느님을 원망, 의심하거나 자신의 나날을 저주하는 등의 미련한 행위를 중지할 것을 권고한다.
【1절】‘거룩한 이들’은 하느님께 시중드는 존재를 가리키며, 아무도 인간을 보존하는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역정내거나 흥분하는 것은 결국 4, 21에서와 같이 지혜없이 죽어 가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1절은 하나의 뼈대 구실을 하는데 3장에서의 욥의 흥분, 한탄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은 하느님의 창조 때부터의 계획하에 있는 것으로서 욥의 미련한 행동의 어리석음을 질책하고 그것을 증명하는 논증이 3절에 나타난다.
【2절】미련한 자의 외적인 일시적 성공이 결국 아무것도 아니듯이 욥의 흥분, 불만이 일리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아무것도 아님을 지적한다.
【3절】자식은 집안에서 생명을 잇는 존재를 의미하는데 이러한 자식들이 구원에서 멀리 떨어져 있음은 뿌리뽑힘의 구체적 이유에서 나타나며 이는 곧 뿌리를 내렸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을 의미한다. 출애굽 당시 에집트의 맏배들에 내린 재앙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4절】한 마을의 구조상 성문은 사람이 제일 많이 모이는 곳이고, 옳고 그름을 재판하는, 가르치고, 지혜를 일깨우는 곳인데, 그 곳에서도 자신의 고통을 도와줄 이가 없다는 것이다.
*구원은 히브리어로 עשׁי(‘야샤’)인데 예수, 여호수아등의 이름의 어원이기도 하다.
【5절】거둔 것은 자기 노력의 결과이며 미래의 보장인데 그것을 빼앗기는데도 도와줄 이가 없음은 뿌리내리지 못한, 미련한 자의 모습이며 이는 곧 자기가 심고 거둔 것이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미련한 자의 한 특징이며 이와 관련해서 전도서는 “내가 심은 것 누가 가져갈지 모르기에··· 젊어서 먹고 즐기세”라고 말한다. 또한 5장 1-2절과 연결시켜서 미련한 자의 결말을 지적하면서 욥을 질책한다.
【6-7절】고통에 대한 격언집적인 성격을 지니며, 흙과 땅은 고통과 대조되는 하느님의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은혜의 상징이기에 이 땅에서는 환난과 재앙이 나올 수 없으며 그것은 오직 미련함의 결과로서 나타난다. 즉 환난과 재앙은 하느님께서 내리신 흙과 땅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하느님께서는 진정 선하신 분이시기에 그렇지 않다는 것이며 한편으로 인간 자체가 재앙에 휘둘리는 존재이며 인간으로부터 재앙이 비롯됨을 지적하고 있다.
【8절】후대에 첨가되었다는 견해가 있으며, 여기서 ‘호소’의 히브리 표현은 שׁרד(‘다라쉬’),לאשׁ(‘샤알’) 이며 이는 예언서에서도 나타나듯이 ‘하느님의 뜻을 찾고 묻는다’는 의미이다.
내 일 (רבד ‘다바르’) 즉 말로 인해 생기는, 말 자체가 금방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 자체가 하나의 사건을 이루는 것을 의미하여 역사도 하나의 רבד 로 이해된다.
【9절】9-11절을 통해 나타나듯이 하느님은 헤아릴 수 없는 위업과 기적을 이루시는 분이기에 인간은 하느님께 호소하고 맡겨 드릴 수밖에 없음을 말해 준다. 여기서 위업, 기적이라는 표현은 출애굽때의 사건들 안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되고 있지만 굳이 출애굽 사건에 제한되는 것은 아니며 창조주 하느님의 크신 능력을 지칭한다.
【10-11절】야훼의 이름이 아닌 ‘엘’, ‘엘로힘’ 이라는 이름이 나오며 하느님의 두 가지 측면 즉 10절의 창조적 측면과 11절의 억눌린 이들을 보살피시는 하느님의 모습이 나타나며 여기서는 전통적인 신관에 대한 교정이 집약되어 나타난다.
【12-14절】지혜 문학적 요소가 나타나며 교활한 자, 슬기로운 자, 똑똑하다는 자들이 정반대 되는 결과에 이른다는 내용의 반대 병행구를 통해 하느님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15절】11절과 유사한 내용으로 하느님의 힘을 필요로 한다고 고백하는 이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말하고 있다.
【16-17절】9-11절에 나오듯이 미천한 이들이 높이 올려지고, 슬퍼하는 이들이 행복을 얻음을 이야기하면서 17절을 통해 그러기에 하느님께서 꾸짖으시는 것은 행복한 것이며 그 분의 훈계를 물리치지 말라고 권고한다. 즉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하느님께서 너를 교육시킨다’고 생각하라는 것이다.
<18절 이하>
미래에 대한 희망적 전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엘리바즈는 고통받는 동료에게 가서 오히려 그 고통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얘기한다. 즉 고통은 잘못했기에 받을 수 있는 것이고 잘못하지 않더라도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고통받게 되어 있으며 그렇지 않다면 교육적 측면에서도 고통은 주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18절 이하의 미래에 대한 희망적 전망은 고통에 대한 잘못된 지배 이데올로기를 신학적으로 근거 지우고 있는데, 이것은 달리 말하면 저승에서의 보상을 위해 이승의 고통을 감수하라는 것이다. 엘리바즈는 욥에게 고통은 정당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고통에 대한 잘못된 시각이라고 할 수 있으며 예수님의 삶과 출애굽 직전의 10가지 재앙에서 나타나는 고통의 의미는 고통이라는 것이 이러저러한 것을 통해서 생기는 것이니까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고통을 면할 수 있음을, 쉽게 말해서 예수님께서 “내가 십자가를 통해 고통이 무엇인지 드러내었으니 앞으로 이러저러하게 하지 않으면 세상은 고통 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예수님께서 당하셨으니까 너도 고통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기에 결국 하느님을 따르는데 수반되는 고통을 피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십자가를 통해서 발견할 때 그 의미가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18절】① 신명기 32, 39의 ‘죽이는 것도 나고 살리는 것도 나다. 찌르는 것도 나고, 고쳐 주는 것도 나다. 나 외에는 아무 신이 없다.’ 처럼 성경에 나오는 하느님에 대한 생각, 즉 하느님이 모든 人間事에 대해 절대적인 권위가 있다는 것을 드러낸다. 대표적인 例로 출애굽에서 10가지 재앙때 파라오에게 완고한 마음을 계속 일으키시는 야훼의 행위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이와 기능은 다르지만 惡도 하느님의 영향하에 있다는 것이 확실한 것이다. 이는 철학적 언급이 아니라, 하느님이 악을 이길 수 있는 분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며, 또한 二元論的인 생각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② 그 이하에 나오는 이야기를 준비시킨다. 하느님이 욥에게 고통, 시련만이 아닌 위로, 치유도 주시므로, 결국 현재는 고통스럽지만 미래에는 잘될 것이라는 언급이 19절과 그 이하에서 계속된다.
【19절】‘여섯 가지 곤경에서 자네를 건져내시고, 일곱 번째에는 악이 자네를 건드리지도 못할 것이네’ 여기서 ‘여섯 가지’ ‘일곱 번째’는 지혜 문학의 관점인, 숫자를 통한 일종의 가르침에서 본 따온 이야기이다.
例) ‘세 가지 미련한 일이 있네’
【20절】‘기근, 전쟁’은 예언서 등에서 사회적 혹은 백성을 심판할 때 나타나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이것의 문맥상 기능은 기근, 전쟁이 생기는 배경은 개인적인 것도 있지만, 보통 사회적, 종합적, 공동체적 차원의 경우이다.
【21절】‘혀의 채찍~’은 어떤 공동체로부터 받는 모함이다. 구약에서는 고통이 처음에 병적, 개인적, 신체적 고통이 나아가 사회적, 공동체적으로 제거되어 지탄을 받고, 공동체에 참여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는 고통으로 발전된다는 것이다(시편에서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고통을 이해한다). 고통에 대한 묘사에서는 이처럼 처음에는 개인적이었다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는 고통에까지 이르게 됨으로써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이해하게 된다.
【22절】멸망과 기아 언급. 후대에 붙은 것. 그 이유는 22절에 ‘멸망’이 나오는 데 21b 에서도 ‘멸망’이 또 나온다. 여기서 멸망은 앞에 나온 것 즉 고통을 종합하는 것. (후대에 붙으면서 멸망과 기아를 한데 붙였기 때문이다)
※20. 21. 23절: 여섯 가지 곤경을 언급하기 위해 20절의 ‘기근, 전쟁’, 21절의 ‘채찍, 멸망’을 6개로 맞추려고 22절에 ‘멸망, 야수’를 넣었으나, ‘야수’는 23절에 ‘들짐승’으로 다시 나온다. 그래서 22절이 후대에 붙은 것이고 원래의 6개는 23절의 ‘들판의 돌멩이’, ‘들짐승’이 그 다섯째 여섯째이다. 그래서 19절의 6가지 공경이 다 언급되게 된 것이다. 따라서 22절은 후대에 붙은 것이기에 빼면 20, 21, 23절에 6가지 재앙이 나온다. ‘일곱 번째에는 악이 자네를 건드리지도 못할 것이네 ’가 24절 이하에 계속 이어지며, 반전이 되어 행복하게 산다는 내용이다. 5,18-27에는 이러한 지혜 문학적 요소가 발견된다. 例) 집회서 26, 5
【23절】‘자네는 들판의 돌멩이들과 계약을 (맺고),’ – 2열왕 3, 19. 25에서 전쟁을 일으키거나 백성을 공동체 차원에서 못살게 구는 상태, 또는 비옥한 들을 돌로 바꾸어 비옥한 것을 없애서 살기 힘들게 하고, 수확을 못하게 하는 것을 가리키는 상징적인 언어이다.
* ‘돌멩이들과 계약을 맺음’ – 못살게 구는 상태까지도 뛰어 넘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 ‘들짐승’ – 구약 시대에는 사람을 못살게 구는 것으로 묘사되었다. 그래서 제관기에 해당하는 창세 9장에서 볼 수 있듯이, 창세기 1장에서는 동물을 먹지 못한다고 했다가, 9장에서는 홍수가 끝난 후에 동물에 대해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피는 안된다고 한다. 이는 동물에 대해 관리 할 수 있는 힘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의 배경에는 당시에 동물이 사람을 못 살게 구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담겨 있으며, 나아가 신화적인 차원에서 동물도 인간을 못살게 구는 데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 ‘인간 사회를 어지럽게 하는 것과도 화평을 이룰 것이네’ – 화평(샬롬)은 다음에 나오는 평화와 같은 의미이다. 오히려 곤경에도 불구하고 더 융성하게 된다는 의미. 샬롬의 뜻이 원상태로 돌아가는 것도 있지만 더 나아가서 융성하게 되고 흥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19절 – 23절은 이처럼 여러 가지 측면에서 조명되었다. 이러한 것을 다 이루시는 분은 야훼임을 강조한다. 이는 18절에서 테제를 넣고 설명한 것이다. 아프게 한 것이 기근, 전쟁 …. 등이지만 싸매 주고, 치유해 준다는 것이다. 치유해 주는 것은 구하는 것, 보호받는 것, 두려워할 필요 없는 것, 계약을 맺는 것, 화평을 이루는 것이다. 이는 곤경에서 사회적 측면이 있는 것처럼, 반대로 개인적 차원뿐만이 아니라 욥이 이웃과 사는 데 있어서도 점점 더 흥하게 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이다.
* 계약과 평화의 관계 – 여기서 평화는 원칙이고, 계약은 평화를 일으킬 수 있는 실제적인 힘을 부여하는 제도적인 틀이다.
* 동물과의 화평 – 호세 2, 20; 이사 11, 6-9 (메시아 시대가 오면 동물들과 함께 살 수 있다는 것)
* 富의 편재 – 富益富 貧益貧 현상은 나아가 위험의 편재를 통해 잘사는 사람과 못사는 사람을 구분하는 경향이 있다고 사회를 분석.(위험, 병의 편향성)
【24 – 26절】19절 후반부의 ‘일곱 번째에는 악이 자네를 건드리지도 못할 것이네’를 이어간다. 내용상으로는 모든 것이 다 회복된다는 이야기이다.
행복에 있어 점진적인 발전을 보여준다. 개인적인 차원의 재앙→공동체적 차원의 평화
▶24절: 여기서 반전이 이루어진다. 장막, 목장 등은 삶의 터를 지칭한다.
재산에 관한 이야기
▶25절 : 자손에 관한 이야기.
▶26절 : 수명을 다하고 무덤에 들어간다는 개인적인 이야기.
【27절】‘여보게, 이것이 우리가 탐구한 것으로 사실이 그러하니, 자네는 귀담아듣고 알아두게나’. 이 배경에는 엘리바즈가 옳고, 욥이 틀렸다는 것을 전제로 출발한다. 그 다음에 바라는 바는 너와 나는 의견이 틀리더라도, 이것을 받아들이면 너와 나는 일치할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돌멩이와 계약을 맺고 들짐승과 화평을 이루지만, 너와 나는 일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돌멩이, 들짐승과는 화평이 되어도 친구와는 안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혜 문학적 특성이 드러난다. 지혜 문학은 창조 때부터 감추어진 하느님의 지혜로부터 귀납적으로 사는 데 필요한 것을 찾아내는 것에서 출발한다.
¶5, 18 – 27에서는 하느님을 늘 3인칭으로 이야기한다. 그것은 ‘하느님은 어떤 분이냐? → 이런 분이다.’ 라는 도식으로 신원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이다. 또한 친구가 하는 이야기의 역설이 드러난다. 즉 4, 7에서 인과응보, 즉 잘못하면 벌을 내린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했다면 5, 18 – 27에서는 친구가 하느님이 어떻게 잘 해주실 것이라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며, 자신의 말을 들을 것을 언급한다. 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