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욥의 첫째 담론 ( 6 – 7장 )
6 – 7장을 전체적으로 보면, 부분적으로 대단히 정교하게 규칙적으로 구절의 구성을 이루는 것을 볼 수 있다.
§6장 : 친구에게 특별히 친구 자체에게 한 이야기
§7장 :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 4 – 5장의 엘리바즈의 이야기도 이러한 방식으로 전개되므로 4장 – 5장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다.
① 2 – 7절 : 2 – 4절과 5 – 7절이 각각 3절씩 연결되고 있다.
② 8 – 13절 : 8 – 10절과 11 – 13절이 각각 3절씩 연결되고 있다.
③ 14 – 24절 : 3절씩 연결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는 19절하고 20절이 후대에 들어간 해석이기 때문이다.
④ 25 – 30절 : 25 – 27절과 28 – 30절이 3절씩 연결되어 있다.
① 1 – 6절 : 조금 불규칙적. 1 – 3절과 4 – 6절
② 7 – 11절 : 〃 . 7 – 8절과 9 -11절
③ 12절이하 : 조금 달라진다. 형식적인 측면에서 구절이 상당이 규칙적으로 나뉘어 서로 한 면을 이루고 있음을 볼 수 있다. 12 – 15절, 16 – 19절, 20 – 21절
6, 2 – 3 : 자신의 불행을 이야기.
6, 4 : 자신의 불행을 최대화 시키기 위해 하느님을 이야기.
6, 5 – 6 : 객관적인 이야기.
6, 7 : 자신에 대한 이야기.
♧하나의 적용방식 = 과거에 대한 이야기→ 객관적인 이야기→ 하느님→ 자신
이와 유사한 것이 조금반대 방향이기는 하지만 6, 8 – 13에서도 볼 수 있다.
6, 8 – 9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 6, 11 – 12 (자기 자신에 대한 소원을 하느님과 연결시켜 이야기)→ 6, 13 (죽음 – 없어진 하느님)
앞에서는 일정한 이야기를 하다가 끝에 가서는 결코 비슷한 이야기로 이어가는 방식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욥이 말을 받아서 대답한다.
【2-3절】 4 – 5장 처럼 ‘자네~’하고 친구를 불러 이야기 하는 방식이 아니다. 물론 친구들이 듣는 것이지만 스스로 하는 독백 형식이다.
*형식면에서는 4 – 5장에서의 엘리바즈가 욥에게 ‘자네 이렇게 하게’와 같은 호칭이 여기서는 없는 것이 특징이다. 여기서는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는 형식이다.
여기서 ‘원통함’은 정신적, 영혼에 관계된 것. ‘불행’은 육신의 고통을 나타내는 것.
▶2b절: ‘저울질하고 저울판에 달아 보았으면’ 무게가 어떤가? ⇒ 이것은 측량 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기 위해서 사용. 고통의 무게 강조.
▶3a절: ‘모래’는 구약에서 무한한 ‘수’를 표현할 때 사용되며, ‘바다의 모래’는 공간적인 개념으로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를 나타내는 것으로, 감각적인 개념으로도 널리 퍼져 있다고 말함으로써 고통의 깊이를 강조한다.
▶3b절: ‘나의 말이 갈피를 못 잡는구려’는 자신이 흩어졌음과 고통이 얼마나 심한지, 심한 것을 외연상으로 또는 무게상으로 이야기 하고, 자신이 무너졌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결국 8절 이하에 가서는 죽음을 암시한다. 또한 ‘말의 갈피를 못잡는다’는 것은 하느님께 대해, 자신에 대해, 친구에 대해서 자기 자신을 세우지 못한다는 것. 즉 소통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이에 대한 욥의 생각은 인간에 의한 고통은 견딜 수 있지만, 인간의 고통이 아닌 ‘전능하신 분의 화살이 내 몸에 박혀’ 라고 말함으로서 하느님을 여기에 끌어 들인다. 따라서 여기에서 욥의 神觀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욥은 하느님을 인간을 못살게 하는, 인간의 적으로 암시하기 시작한다.
【4절】▶4절b : ‘내 영이 그 독을 마시고~’. 이는 피할 수 없는 결정적인 성격을 나타내는 것이다. 옛날에는 ‘화살’의 개념이 상대편을 제거하기 위해서 화살에 독을 묻혀 쏘는 것이었으므로 독이 몸에 닿으면 즉시 약효를 발휘해서 죽게 된다. 이것을 하느님에 대입시켜 이야기 함으로써 하느님이 욥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욥이 스스로 고백하게 하는 것이다.
▶4절c : ‘하느님의 공포가 나를 덮치는구려’. 여기서 ‘공포’는 ‘하느님을 두려워 하는 것이 구원의 시작이다’라는 의미의 공포가 아니라, 도움을 주는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하느님이 위로, 구원을 주셔야 하는데 공포를 주는 하느님으로 나타난다. 13절에 가면 ‘의지 할 데 없고 도움은 내게서 멀리 사라져 버렸다네’와 이어진다.
【5-6절】일종의 격언. 5절과 6절은 서로 대칭을 이룬다. 7절을 언급하기 위한 준비.
5-6절은 서로 반대되는 기능을 가진 격언집 또는 지혜 문학적 바탕을 전제로 하고 7절을 언급한다고 볼 수 있다. 욥이 하느님께 외칠 수밖에 없음을 의미한다.
* 이 부분에서 고통에 대해 깊이 생각케 한다. 이렇게 고통을 당하는데 어찌 정말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하느님께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고통을 얘기 안할 수가 없다. 욥의 가르침 가운데 하나가 고통당하는 사람에게는 외칠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 고통을 면하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그런 그 대목이다. 고통당하는 이에게 제일 심한 고통은 그냥 참으라고 하는 것이다. 고통 당하는 사람에게는 외칠수 있는 권리를 주어야 한다. 이 부분은 욥기의 전체 결론 부분에 가서 다시 언급될 것이다..
【7절】여기서는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한 것인가를 이야기한다. 욥의 이야기 전개 방식은
어떤 상황 설명 → 자기 자신의 모습이나 어떤 격언적인 이야기 → 이를 바탕으로 자신에 관한 이야기, 어떤 객관적인 이야기, 하느님을 제 3 인칭으로 놓고 보는 이야기 → 자기 자신에 관한 이야기. 이러한 방식으로 전개한다. 이것은 현재의 심각한 상태를 부연하는 그런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8 – 10절】죽음에 대한 이야기, 즉 죽음에 대한 소원이다. 결정적으로 하느님이 그런 공포를 주셨고 도움을 주실리가 없다는 극심한 고통으로인해 하느님께서 죽음을 주시기를 애원하는 것이다. 이는 고통 역시 하느님께서 주신 것이기에 감당할 수가 없으므로, 이 고통을 하느님께서 끝내주셨으면 하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은 인간을 욥을 못살게 하는 敵으로 나타난다. 敵은 통상 상대편에게 죽음을 가져다 주기에 욥은 敵으로서의 하느님이 자신에게 끝까지 敵으로서의 당신 의무를 이행해 주시기를 바란다. 하지만 욥이 하느님을 敵으로 생각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敵으로 활동하시는 하느님, 즉 그분의 소원을 따라감으로 해서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처음 부분에서 보면 욥이 극심한 고통을 당하고, 하느님은 도움을 안주시고 하는 과정들 안에서 하느님께 대한 불만이 언급되고, 급기야 하느님은 인간에 대한 敵이라는 개념을 설정한다. 하지만 敵을 敵으로 안 만드는 것은 敵으로 계속 활동하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는 敵 그러면 항상 반대라는 개념을 갖는다. 하지만 욥은 여기서 敵을 선택함으로써 敵하고 같은 편이 되는 것이다. 敵의 소원이 나한테 이루어지는 것을 내가 선택하는 것이다. 따라서 역설적인 이야기이다. 하느님 주시는 이런 고통을 계속 완성하시도록 하는 그것을 내가 선택한다는 의미이다. 적이므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원을 들어주니므로 그렇게 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역설적이지만 하느님께서는 죽음이라는 소원만이라도 들어주는 분으로 바뀌는 것이다. 즉 항상 거스르는 분으로 여기고 있다가 여기서는 욥이 하느님을 인간의 소원을 들어주는 분으로 바꾸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10절에서는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어기지 않았으니, 이것이 욥에게는 위로가 되어 적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지 않은 것으로 되는 것이다. 혹은 과거에 죄를 지었는지는 모르나 적어도 현재 그 시점에 있어서는 자기에게 고통을 주는 하느님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점에 있어서는 반대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8절 : 소망, 소원을 언급한다. 여기에 ‘לאש(샤알)’(-찾고, -묻고 등의 의미)이라는 동사를 쓴다.
▶10절의 직역(히브리 어순에 따름) : “당신 손을 내뻗어 나를 자르신다면, 이것이(그것이) 내게 위로가 된다. 모진 고통 속에서도 기뻐 뛰어 나는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감추지 않는다.”
현재의 본문의 번역대로라면 “나는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어기지 않았으니, 이것이 내게 위로가 된되어~” 이다. 그러나 이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결심하여 나를 으스러뜨리시고 당신 손을 내뻗어 나를 자르신다면 그것이 내게 위로가 된다는 의미이다. 이런 맥락에서 고통에 대한 역설적인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견딜 수 없는 고통속에서 고통의 최대 형태인 죽음을 허락하신다면 참으로 위로가 되겠으며, 고통속에서도 기뻐뛰겠다고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 거룩하신 분의 말씀을 감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찬미,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가 하는 것을 감추지 않겠다는 뜻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하느님께 처우너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독백식으로 친구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다. 이것은 친구들이 생각하는 하느님에 대해서 반박하는 것으로, 자기가 보는 하느님, 자기가 지니고 있는 하느님께 대한 관계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11-13절】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죽음마저도 거부하신다. 그러므로 욥이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아주 좁다. 11-12절은 욥 자신의 어떤 무능, 자신에 대한 이야기이다. 13절에 가서는 하느님이 도움을 주시지 못하는 분, 의지할 수 없는 분으로 나타나며, 따라서 8 – 10절에서 나타난 하느님이 욥자신에게 소원을 들어주시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욥은 하느님에 대한 생각, 또는 어떤 자기 희망, 자기 현실 사이에서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것이다. 선택할 수 있는 가능성이 별로 없는 것이다. 따라서 그 다음의 상태는 하느님께서 해주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은 침묵하고 계시다. 그러므로 욥으로서는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11 – 12절 : 욥의 상태를 언급한다. 이제 더이상 이겨낼 힘이 없고,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있는 힘조차도 없으므로 자신의 희망인 죽음을 하느님께서 들어 주셨으면 좋겠지만, 그것 조차도 들어 주시지 않는다.
▶13절: ‘진정 난 의지할 데 없고, 도움은 내게서 멀리 사라져버렸네’ 라는 탄식에서 나타난 하느님은 욥에게 있어서 反神(Anti-Gott)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신이라면 적어도 이래야 되는데’ 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난 신의 체험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욥의 죽음보다 더 한 고통의 형태라고 할 수 있다. 신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는 因果應報에서 벗어날 뿐만 아니라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에 대해 죄의 결과라고 인정을 해도 이해할 수 없는 하느님, 즉 자신의 어떤 틀에서 벗어난 하느님을 체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견디어낸다는 것의 末路가 무엇인가 하는 것 조차도 불확실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앞에서 언급한 육신적인, 영신적인 고통을 저울에 잴때의 고통에 대한 도움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의지할데도 없는 것이다.
1 – 13절보다는 조금은 다른 형태이다. 1 – 13절에서는 친구와의 대화 방식이 직접 “자네! ~” 라는 식으로 하지 않는다. 14 – 24절에서는 직접 “자네~” 그렇게까지는 않하더라도 친구에게 직접 이야기하는 방식을 취한다. 21절에 가서는 “자네들! ~” 이라고 더욱 직접적으로 거론한다.
【14절】2, 9의 “당신은 ~ ”. 과 어감이 같아 그것을 따르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죽음에 대해서도 자기 부인과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지적한다. 4, 6; 5, 8을 보면 하느님을 버리지 않는 욥을 볼 수가 있습니다. 즉 친구들이 이야기하듯이 욥이 정말 하느님을 버렸다하더라도 최소한의 위로를 받을 권리는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의 현대적인 언어로 이야기 한다면 최소한도의 인권을 언급하는 것이다. 친구로부터 그런 것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 동정을 받는다 할 때에 그 유명한 헤섿(자비)이 나온다. 이것을 유대감 또는 연대감으로 보는 것이 좋다. 즉 친구에 대해 고통을 당하든 그렇지 않든 일관성있게 대해 주는 것이다. 그러한 결과로 공동체가 유지되는 것이다. 그런데 엘리바즈는 그렇지 않고 잘못했을 때 점점 더 크게 고통을 주어 욥을 오히려 점점 공동체로부터 멀리하고 지탄하고 있는 것이다.
【15절】“내 형제들은 개울처럼 (나를) 배신했다네” 여기에서 엘리바즈에 대한 욥의 어떤 마음이 드러난다. 욥의 엘리파즈에 대한 부정적인 묘사가 15절부터 여러 형태로 계속 나온다. 그렇게 20절까지 이어지고 결국 21절에 가서 “자, 이제 자네들은 무가치하게 되었버렸네.” 라고 한다.
이렇게 앞에 전제를 해놓고서 그 결론을 히브리어 ‘아타’로 나타낸다.
【21-24절】욥은 자신이 당하는 외적인 고통에 대해 유대감을 보이기 보다 오히려 거리감을 보이는 친구를 질책한다. 탄원의 기도를 보면 시작은 자신의 개인적인 병고로 시작하고, 후대에 그 시편을 재해석하고 첨가하는 것을 보게 된니다. 이 구절은 병을 얻음으로써 사회적인 고독감을 느끼고 공동체로부터 배척당하는 것으로 재해석이 된다. 욥이 하느님께 드리는 탄원에서 볼 수 있듯이 친구들에게 위험이 따르는 도움을 청하지도 않은 자신에 대해 두려워하고, 유대감을 끊는 친구들의 모습에 대해 욥은 자신이 도대체 어떤 잘못을 했느냐? 고 묻는다.
여기에서 자신의 고통에 대한 엘리바즈의 태도를 보고, 그의 우정에 대해 욥은 거짓 우정이라는 견해를 갖는다. 생명유지에 필요한 재산을 보호하고, 원수의 손에서 구해달라는 두 가지 요소는 구약에서 나오는 아주 기본적인 요소이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서로에게 최소한의 도움을 주어야 하는 의무를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엘리바즈의 태도를 지적하는 것이다.
▶24절: 이제는 욥이 거꾸로 도전을 한다. “나를 가르쳐보게나, 내가 입을 다물겠네, 내가 무얼 잘못했는지 깨우쳐보게나.” 즉 5장에 나온 엘리바즈의 이야기가 하나도 효과가 없음을 나타낸다. 굉장한 지혜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그것은 실제적인 고통에 대해서 아무런 효과를 지니지 못하는 죽은 교훈인 것이다. 앞에서 교훈이 언급되었는데, 이 교훈을 다시 언급하는 것을 보아, 현재 당하는 고통에 대해 그것은 답이 못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욥은 위로를 하러 온 엘리바즈와 거리가 더 벌어지는 것이다.
【25-27절】“너희들이 틀렸다”는 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올바른 말이 어떻게 속을 상하게 할 수 있나? 자네들은 무엇을 탓하고 있나?” 즉 옳은 말을 하지 않은 친구들을 질책하며, 25절 이하에서는 계속 질문을 몇 번 던져, 그들이 옿을 말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이야기하려 한다.
“자네들은 무엇을 탓하고 있나?” 그러므로 탓하는 대상이 틀린 것이다. ‘무엇을 탓하는 지도 모르면서, 자네들은 남의 말을 탓할 생각만 하는가?’ 그러므로 동정, 또는 유대감, 상대편에 대한 이해는 전혀 없고 자기들의 이야기만 늘어 놓는 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절망에 빠진 이의 이야기는 바람에 (날려도 좋단 말인가)?” 즉 신중한 접근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세 번의 질문을 통해서 그 앞에 나온 엘리바즈의 이야기는 전부 뜻없는 것이 되며, 그리고 27절에서 욥이 스스로 결론을 내린다. 친구를 놓고서 흥정을 한다. 이것은 친구를 어떤 이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다.
【28절】결론으로 욥은 말한다. “자, 이제 제발 나를 좀 돌아보게나.” 이것은 자신에 대해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는가를 주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4장, 5장의 이야기를 돌려 놓는다. 이것은 기능적으로 보아, 그때까지 한 이야기를 모두 틀린 것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반대로 엘리바즈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촉구한다.
욥이 올바른 말을 하는 데 있어 그 근거는 “나를 좀 봐라” 여기에 있는 것이다. 여기 즉 욥자신이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은 바로 엘리바즈가 생각하는 또는 배워왔던 그 하느님을 실제로 만나는 場이 욥인 것이다. 그래서 욥이 ‘나를 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물론 엘리바즈도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곳에서 배워 온 하느님 말고, 여기 고통속에 있는 하느님을 봐야한다는 것이다. 고통은 늘 하느님과 멀리 있는 것, 잘못했으므로 당하는 것이라 관념이 그 때까지는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28절은 바로 여기가 하느님이 계신 곳임을 지적하고 있으며, 이것은 앞에서 나온 엘리바즈의 神學을 반박하는 것이 된다. 엘리바즈의 神學은 현실과는 동떨어진 신학, 하느님을 하느님이 안계신 곳에서 찾는 神學이다. 그러나 욥은 이 현재의 현실적 고통을 통해서 출발하는 신학을 말한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不義가 없다고 주장한다.
【29-30절】이러한 엘리바즈에 대한 도전때문에 엘리바즈는 15장, 22장에 가서 화를 막낸다. 이것은 엘리바즈가 아직도 고통에 대해 이해를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고통에 대한 관점이 엘리바즈와 욥의 관계를 설정하는 기준이 된다.
7장은 크게보면 두 부분( 1-11 ; 12-21 )으로 나누어진다. 여기서 7, 1 – 6은 객관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학자에 따라서 이것을 후대에 붙은 것으로 보기도 하며, 또한 하느님께 대한 것이 아니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또한 이 구절들은 다음에 나오는 7절 이하의 탄원의 기도를 준비시켜 주는 좋은 서론의 구실을 하며, 7장은 3장을 연상시킨다.
전체적으로 보면 엘리바즈가 자신이 보고 깨달은 것을 상대방에게 듣게하는 식으로 똑같이 욥도 인생에 대해서 배우고 깨달은 것들을 대칭적으로 놓았다는 것을 볼 수 있다.
7장의 특성은 일반적으로 욥이 친구들한테 하느님께 직접 불만을 토로하는, 즉 하느님을 비난하고, 원망하는 내용이 들어있다. 3장에서는 자기의 불행한 운명에 대한 비관적인 논평이라면 7장에서는 하느님께 대해서 직접 불만을 토로하고, 또 더 나아가서는 불만을 토로하면서 사는게 의미가 없으니 차라리 죽게 해달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생명의 하느님인데 거기에 반하여 죽게해달라고 하는 기도 자체가 하느님께 대한 비뚤어진 관계가 나타나는 것이다.
§1 – 11절 : 인간의 삶의 덧없음과 한계성이 드러나는 데, 이는 지혜문학적 특성이다.
§12 – 21절 : 하느님을 인간의 적으로 생각하는 내용이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하느님을 늘 좋게만 생각하는데 여기서는 반대로 굉장히 인간을 괴롭게 하는 분으로 나타낸다.
♧ 6장과의 관계 : 병고에 시달리고, 괴로운 밤이 계속된다. 하느님의 분노의 화살이 결국은 욥에게 향하여 있는 데, 자기는 죄가 없다는 식의 논증이 7장의 끝에 가서 나온다. 6장에서는 하느님께 옳지 않습니까라는 것을 깔고 있다며는 7장에서는 죄가 있을지라도 그럴 수가 있습니까 그런 식의 이야기를 함으로서 인간에게 동정심이 없는 하느님을 보여 서로 대조를 이루고 있다.
3장과 연결시켜서 보면 7, 1-6은 과거에 즐거웠던 것들을 정반대로 여긴다. 과거에는 희희낙낙하였으나, 여기서는 인생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따라서 여기서는 욥의 어떠한 變身을 볼 수 있다. 이 변신의 이유는 하느님께 있다고 본다. 그래서 저자는 욥을 통해 잘 될때와 마찬가지로 고통을 당할때에도 하느님께 호소하는 인간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하느님께 드리는 탄원이 원망이 아니라, 오히려 잘될 때와 마찬가지로 그분을 주권이 있으신 분으로 인정하는 욥의 어떤 神觀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그 다음에 나오는 욥의 탄원의 기도를 보면, 욥이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 여기서 욥이 하느님께 다가가는 모습과는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즉 하느님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한다. 하느님을 저버렸다해도 위로를 받거나, 적어도 동정을 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던 욥이 하느님께 가서 그런 위로를 꼭 받는다는 보장은 못하지만, 그래도 욥이 탄원을 통해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모습은 엘리바즈와는 다른 모습이다.
1-3절을 보면 외형적으로 1절은 자기하고는 상관없이 욥이 일반적인 이야기를 합니다. 그 다음에 2절은 1절하고 연결된 것이다. 3절은 1절, 2절을 전제로 해서 나타나는 결론이다. 히브리어를 보면, 2절이 비교하는 대상이고 3절이 이 비교에 대한 결론이다.
그 다음에 4절 이하를 보면 외형적으로 봐서 고통의 밤이야기가 나온다. 4절이 고통에 밤에 대한 이야기이고, 5절은 ‘내 살은 구더기와 흙먼지로 덮이고’ 이런 식의 얘기는 종, 고통을 많이 당하는 그 종, 일을 많이 하는 종이며, 2절을 암시하고 있다. 6절을 외형적으로 보면 3절의 ‘허망한 날들을 물려 받고’ 더 나아가서는 1절을 또 이어받는다고 이야기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1-6절까지는 처음에 던진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의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하는 것에 대한 전체적으로 그것을 하나 내 던져 놓고 나머지는 그것을 풀어가는 것이라고 정말 ‘인생은 그렇다’ 이렇게 대답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생은 정말 고역이고, 그의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이렇게 딱 던지면은 대답은 ‘그렇다’, ‘그거 왜 그러냐’ ‘이러니까’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거기에 여러가지 모티브를 사용하고 있다.
【1절】자기하고는 상관없이 욥이 일반적인 이야기를 한다. 여기서 깨달았다는 것은 바로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임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여기 고역은 ‘אבצ(사바)’라고 한다. 즉 군인이 군대에 가서 죽도록 사역하는 것, 경신례 혹은 다른 나라에 가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고통, 例를 들면 에집트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했던 고통등이 이런 의미이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고역이라는 것은 출애굽때 3장 그런데서 나오는 것인데 אבצ라는 것이다. 고역 여기는 군대 생활하기 때문에 생기는 고역, 경신례에서 봉사하는 이런 것도 אבצ라고 쓸 때가 있습니다. 종이 일을 하는 것도 포함할 수 있다. 일급을 받고 하루하루 돈을 받고 하는 것은 이사야 40장2절, 욥기에서는 10장17절; 14장14절을 참고해 볼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게 군대에서 당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어떤 사람은 날품팔이 정말 일당을 받고 일하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데, 여기서는 후자로 생각하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날품팔이 이야기가 히브리어는 다르지만 품팔이꾼 그다음에 그 ‘내 살은 구더기와 흙먼지로 덮이고’ 하는 그것이 품팔이꾼에 대한 상징적인 표현이지 전쟁의 나갔다는 병사에 대한 표현은 아니다. 그 뿐 아니라 그늘을 갈구하는 종이 지니고 있는 위상을 보아서도 그렇다. 전체적인 것은 품팔이꾼에 관한 것이다.
▶‘날품팔이’ 이것도 사카르라고 하는데 매일매일 일당을 받는 그런 사람들을 말한다. 날품팔이의 특성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 경제적으로 종속되어 있다는 것, 힘이나 권력에 대해서 재량권이 없다는 것이 특징이다.
▶“사람이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구태여 덧붙여 부연해서 생각한다면 땅(ץרא)이라는 것, 인생(שׁנע)은 사람하고 땅하고의 관계는 이 성경에서는 본시가 인간하고 친한 것이다. 땅이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고, 구원이 나타나는 장(場)이다. 그런데 인생이 사람에게 땅에서 오히려 불행을 맛보는 것으로 실제하고 다르지 않느냐 하고 묻는 것이다. 욥이 얘기하는 것은 ‘봐라, 내가 그 시조이지 않느냐, 모범이 아니냐’ 하는 이런 식의 얘기를 하는 것이다.
【2-3】6장에 나타난 욥의 하느님께 대한 소원과 여기에 나타나는 욥의 관찰등을 살펴 보면, 욥은 삶에 대해서 또는 하느님께 대해서 희망을 지니고 있다기 보다는 죽음을 더 선호하는 사람으로 나타난다.
▶2절 ‘그늘을 갈구하는 종처럼,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처럼’ 이는 1절을 부연하는 것이라고 보면 된다. 날품팔이의 처지는 종들같은,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으로 장기적인 자기계획이 있을 수 없다. ‘그늘을 갈구하는 종이’ 아무리 일을 해도 결국은 밤엔 자야하는 건데 자는 것도 고통이다.
▶3절에 가서 자기 얘기를 한다.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에서 허망이라는 것 אꔧꚉ(셔바?) 이것은 가치가 없다는 것, 지혜문학에서 모든 것이 허망하다든지, 저기하다든지 그런 맥락에서 저기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구원이 없는 그런 얘기예요.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달들을 구태여 얘기한다면 종이 일정기간에 일을 하도록 한다든지 어떤 기한을 두고 작업을 한다든지 하는 것인데 그것까지도 고통스럽다, 그것까지도 무가치한 것이다. 그것까지도 말하자면 조금도 위로가 안 되는 것이다. 달들하고 연결된 것이 밤들인데 기한으로 봐도 그렇고, 지내는 매일매일로 해서도 그렇고, 그것은 늘 고통 아니면 허망한 것이다.
2-3절은 어떤 면에서 조금 상승하는 모습이 있다 말할 수 있다.
【4절】‘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가고 나는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여기서는 전혀 자질 못한다. 노동자는 잠을 자야만 하는 것인데 잠을 자는 것도 여기서는 가능하지 않다. 고통의 밤을 나누어 받았다는 것이 4절에 가서 더 상승되는 것이다.
【5절】‘내 살은 구더기와 흙먼지로 덮이고 내 살갗은 갈라지고 곪아 흐르는 구려’
이것은 2절에 나오는 종의 모습이 육신의 측면에서 묘사된 것이다. 4절에 잠을 자지 못하여 육신이 회복될 수 있는 가능성도 없다는 것에서 4절의 연속이고 그 종이란 2절하고 연결되는 것이라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구더기와 흙먼지, 고름만 흐르고’ – 여기에서도 보면 더 발전한 것을 볼 수 있다. 구더기와 흙먼지 등등은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하는 그것을 또 기억시켜 주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2절은 어떤 사회 관계 차원에서의 부족, 이런 이야기라면 5절은 개인의 육신차원으로 이야기 한다.
【6절】‘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 간다네’ – ‘희망도 없이’ 그 희망이 일반적으로 הꔧꙓꚕ(띠크바)인데 베틀의 북하고 연결되는 의미에서 베틀의 실도 띠크바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베틀의 실이 다 없어지는 것같이 사라져 간다는 이런 식의 상징적인 표현한 것이라고 해석도 한다. 베틀의 북하고 희망하고 사실은 띠크바라는 단어를 통해서 상징적인 병행적인 언어이다. 띠크바가 사실은 희망이란 뜻도 있다. 1-6절은 대개 반복되는 이런 병행되는 이런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데 여기서 베틀하고 희망하고 어떤 저기가 흩어진 것 같은데, 사실은 그런 의미에서 희망이다 이렇게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는 일반적인 얘기를 하고, 욥이 자신의 신세를 거기에 비추어 결론을 짓는 것이다. 결론의 내용은 자기 인생이 허망하다는 것, 빨리 지나간다는 것이다. 처음에 살 때에는 그래도 품삯을 받고 이런 종같아 보이지만, 그런 것도 나중에는 잠도 잘 수 없고, 잠잘 수 없는 밤이나마 없어지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희망이 없는 것이다. 살고 있어야지만 언제고 그 고통이 끝나더라도 값있는 생을 누려볼 것인데 고통으로 가득찬 생활이 빨리 없어지는 것이다. 회복될 수 있고 반전될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안 보이는 이야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