욥의 일곱째 담론 ( 욥기 23 – 24장 )

 

욥의 일곱째 담론 ( 23 – 24장 )



1. 23장 : 하느님의 부재와 현존



1) 구조


  ① 1-7절 : 욥이 자신의 사건을 하느님 대전에 가져가서, 하느님께서 올바른 판단을                     해주셨으면 하는 바램, 원의가 주된 내용.


  ② 8-12절 : 욥은 하느님을 숨어 계신 분, 보이지 않는 분으로 고백하면서도 하느님                     께 대한 신뢰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이 주된 내용.


  ③ 13-17절 : 하느님께 대한 욥의 두려움을 보여주고 있다.




2) 특징


22장의 엘리바즈의 말을 이어받고 있다기 보다는 그 결과로 오히려 더 큰 고통을 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즉 하느님께 대한 새로운 원망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22장 21절 이하의 “화해하고, 회개하고, 말씀을 받아라”와는 동떨어진 응답으로 볼 수 있다. 그래서 엘리바즈의 말이 얼마큼 설득력이 없었는지, 무가치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부분이다.


∴ 22장에서 23장의 큰 흐름은 욥의 고통의 현실이, 친구를 통해 하느님을 더 이해하지 못하는 것, 더 방황하게 되는 것, 또 친구로부터 아무런 위로도 받지 못하는 것으로 전개되고 있다. 따라서 23장은 하느님께 대한 새로운 탄원이라고 할 수 있다.



3) 주석


【2절】 “오늘도 나의 탄식은 쓰디 쓰고, 신음을 막는 내 손은 무겁기만 하구려” : 고통에 대한 욥의 무능, 엄청난 고통의 강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3-7절】그래서 나도 이 고통을 하느님께 맡기고 싶다는 욥의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8절에서 볼 수 있듯이 하느님이 어디 계신지 알 수 없다. 그래서 하느님은 이해할 수 없는 분이다. 즉 욥은 하느님 대전에 나아가서 자신의 심정을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도, 하느님은 욥을 만나주시지 않는다.


▶6절 : 구약 성서 전체의 흐름을 보면, 하느님께 대한 가장 큰 유혹은 계산할 수 있는 하느님, 틀에 들어갈 수 있는 하느님, 감지할 수 있는 하느님으로 자꾸 환원시키려고 하는 것이 신관에 있어서의 가장 큰 유혹이다. 이에 대해 대항할 수 있는 가장 큰 무기는 하느님께 대한 신뢰이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통해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실제적인 대안은, 모든 사건이나, 모든 관계는 어떤 일정한 틀로 환원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일정한 틀로 환원되면, 그때부터는 어렵게 된다. 따라서 이것을 극복할 수 있는 최고의 길은 하느님께 대한 신뢰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7절 : 하느님과 대립적인, 적대적인 관계에 있으면서도 동시에 하느님은 해방시키시는 분으로 고백하고 있다. 즉 인간의 지혜의 틀 속에는 안 들어가는 사건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고, 하느님은 이해할 수 없는 분이시지만, 하느님만이 이 일을 해결해 주실 수 있다는 것이다.




【8-10】하느님은 모든 곳에 계시는 분이시지만, 단 한군데, 욥 자신에게는 없다. 욥이 생각할 때, 고통을 당하는 자기 속에는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신관에 대한 무의식적인 도전이며 신관의 교정 과정이다.




【11-12절】그러나 욥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하느님은 욥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길’은 크게 하느님의 가르침, 말씀을 다 통괄하는 것이다. 신명기 신학에서 하느님의 길을 벗어났느냐, 벗어나지 않았느냐가 왕을 평가하는데 쓰인 신학적인 기술이었다.




【13-17절】 


▶13절 : 여기서 유일한 하느님은 자기가 고통을 당하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을 알 수가 없는 것, 지금까지 체험한 하느님의 모습과는 전혀 다른 것도 모두 다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라는 신앙고백이다. 신명기 6장의 ‘하느님은 한 분뿐이시다’에 연결되는 것이다.


또한 하느님의 자유, 초월성을 인정하는 것이다.


▶15절 : 욥이 감당할 수 없는 어떤 힘, 체험을 말하는 것이며, 이것은 유일한 하느님이시기 때문에 이것은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다라는 것이다.


▶13-17절 요약


물리적인 고통보다는 하느님 때문에 당하는 고통이 더 크다. 이것은 하느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하느님과의 거리가 얼만큼 큰가를 깨닫게되는 것이다. 따라서 욥의 고통의 기능은 바로 이 거리를 깨닫게 하는 도구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고통이란 하느님이 함께 하시면 나타나는 것으로서, 하느님과 인간이 얼만큼 거리가 먼가를 알려주시는 하느님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깊이를 알려준다. 역설적인 고통이다. 따라서 고통도 하느님이 주시는 것으로 신앙 안에서 재생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본주의적 고통관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2. 24장 : 하느님의 부재와 악인의 운명




1) 주석


【1-12절】사회의 불의 역사를 주재하시는 하느님, 인간과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 악인에 대해서만큼은 속수무책이시다. 욥 당시까지의 하느님께 대한 신관이 모두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1절 : 창조주로서의 자질이 결여된 하느님이시다.


▶2-4절 : 신명기 신학이 많이 반영된 구절로서 욥에 대한 단죄와 비슷하다.(공동체를 파괴하고 생명을 뺏음)


¶신명기 신학의 특징


첫째, 이스라엘은 모두 한 백성, 한 형제이다. 그런데 한 형제를 부정하는 행위가 판을 치고 있다.


둘째,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 왕다운 사제군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의 다른 민족에 대해서 통치력을 갖거나, 지배하거나 억압하거나 하지 말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 불의가 일어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5-11절 : 의식주가 결핍된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12절 : 따라서 하느님은 하느님으로서의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13-17절】빛의 적들 : 빛의 적들이 사회 파괴를 조장하고 있다는 것이며 사회를 파괴한다는 것은 바로 공동체를 파괴한다는 것으로서 인간으로서의 생존능력이 박탈당한 상태를 묘사한 것이다. 여기서 빛의 적들은 바로 진리를 막고, 진리를 독점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고아, 과부, 떠돌이 등은 욥과 같이 고통의 모델들로서 진리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의 모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욥이 볼 때는 하느님의 편파적인 행동이라는 것이다.


【18-25절】악인의 운명 : 악인의 운명에 대해서 묘사하고 있다. 악인이 번창하는 것 같지만 악인은 자신의 행동으로 말미암아 결국 망하고 만다는 것이다.


▶23-24장 : 22장을 반박, 더 큰 고통의 실체, 즉 새로운 하느님 체험을 드러내고 있다.


엘리바즈는 고통의 실체를 지혜문학적인 신관의 원리로 판단, 환원시키려고 한다. 재래식의 하느님만 알고 따르면서 하느님을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고통을 통해 전혀 낯 선 하느님을 체험하고 있다. 하느님의 부재는 하소연할 수 있는 탄원마저 좌절케 하기에 무자비하신 하느님으로 나타나지만 하느님은 어떤 고정된 틀 속에 갇혀있는 분이 아니라 언제나 열려있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욥은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듯한 암담한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만이 구원하실 수 있다는 희망을 갖는다.   


 



♣엘리바즈 담론의 특징


지혜문학적 요소 도입. 엘리바즈 당시까지의 체험을 통해서 볼 때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지혜의 원칙은 오류가 없기에 교정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욥의 고통에는 아무런 설득력도 없고 오히려 고통만 더했다. 따라서 엘리바즈의 교조주의적 태도는 새로운 하느님을 보는데 무능하며 볼 수 없도록 차단시키고 있다. 왜냐하면 새로운 하느님의 모습을 보는 것 자체가 고통이기 때문이다.


욥을 통해 익숙해진, 습관에 의해 알고 있는 하느님이 아닌 해결되지 않은 새로운 하느님의 모습과 하느님 상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욥의 고통은 일회적이다. 그러나 야훼스트 저자는 이 고통을 말함으로서 다른 이들이 이 고통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가능성을 열어놓는 것이 고통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고통은 새로운 하느님을 알게 하는 장소요 삶이다. 따라서 고통당하는 사람의 외침은 우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신앙을 돈독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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