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바즈의 셋째 담론 ( 욥기 22장 )

 

I. 엘리바즈의 셋째 담론 ( 22장 )


1. 구  조


① 1 – 11절 : 욥에 대한 단죄, 또는 잘못했던 것을 드러내는 것이 있다.


              ( 1-5절 / 6-9절 / 10-11절)


② 12 – 20절 : 인간 세계에 관여하는 하느님께 대해서 하느님과 토론을 하려고 하는 자세                 가 보인다.   ( 12-14절 / 15-20절)    


③ 21 – 30절 : 하나의 충고, 권고인데 욥으로 하여금 회개하도록 촉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맨 끝에 가서 29절에서 30절은 하나의 찬미의 뜻이 된다.


             


2. 내용적인 모티브 (주제) 및 문헌비판


생활에 토대를 둔 지혜, 그 다음에 예언자들의 영향 등이 감지, 파악된다. 그 다음에 학자에 따라 22장에서도 전파과정에서 가감이 되었다라고 하는데, 12절, 17-18절, 24-25절 여기도 가감된 것이 있다고 본다.


22장의 엘리바즈가 얘기하는 것은 21장의 욥의 답에 받아서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아까 나중에 붙은 17-18절이 21장 14-15절의 다른 형태라는 것에서 그렇고, 2절이 21,15과 연결되는 것을 봐서도 그렇다.




3. 구 성 내 용


1) 1 – 11절


【2-5절】여기서 커다란 특성은 질문으로 이루어진다는 것, 즉 수사학적 질문으로 욥에게 도전하는 것이 외적인 특징이다. 처음에 세 개 질문, 그것은 부정적인 답을 기대하는 수사학적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2절 “사람이 하느님께 유익이 될 수 있겠는가?”, ‘아닐세’, “자네가 온전한 길을 걷는다하여 무슨 득이 있겠나?”(3절) ‘아닐세’ ,“자네의 경외심 때문에 자네를 꾸짖으시겠나 자네와 함께 법정으로 가시겠나?”(4절) ‘아니지’ 5절에 가서 “자네의 악이 크지 않은가, 자네의 죄악에 끝이 없지 않는가?” 그러니까 욥으로 하여금 ‘그러네’라는 답을 유도하도록 수사학적인 질문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욥과 토론 비슷하게 하는 것이다. 욥으로 하여금 대답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속에 보면 지혜문학적인 배경, 전통을 깔고 그런 수사학적인 외형을 씌웠다라고 볼 수 있다. 우선 부정적인 답을 요구하는 질문들을 보면, “사람이 하느님께 유익이 될 수 있겠는가? 아니지, 슬기로운 자도 제 자신에게만 유익이 된다네.” 그 다음에 “자네가 의롭다하여 전능하신 분께 무슨 낙이 되며, 자네가 온전한 길을 걷는다 하여 무슨 득이 있겠나?” 그래서 2절, 3절이 하나의 같은 내용을 전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것은 욥으로 하여금 욥이 21장에서 무죄를 주장하는데, 그것이 하느님께 무슨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는가 스스로 대답할 수 있도록 묻는 것이다. 그 의도는 4절에 있다. “하느님께서 자네의 경외심 때문에 자네를 꾸짖으시겠나, 자네와 함께 법정으로 가시겠나” 하느님은 자네의 무죄함에도 영향을 받는 분이 아닌데, 그럼 자네의 지혜문학적 생각에 의하면, 지혜문학적 생각이 무엇이냐하면 인간이 사는데 필요한 기술은 자기가 전통적으로 조상으로부터 받는 것이 있고, 자기가 인생 경험하는 것이 있고 이런데서 얻는 것인데, 그런 것이 하느님께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 아무리 무지하더라도 하느님은 그런 것 가지고 움직이거나 그러시지는 않을 것이다. 반대로 잘못한 것도 없는데, 경외심을 가지고 있는데 또 그러실 수 있겠는가, 이런 경우나 저런 경우나 자네 때문에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지, 자네 행동에 따라서 하느님이 이렇게 저렇게 하시지 않는다. 원인은 자네한테 있다. 그래서 6절 이하에 그 이야기를 도입하려고 1-5절의 수사학적인 것을 유도해 내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벌하시는 데는 자네가 잘했는데도 벌하시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것을 유도해내는 것이다. 1-5절이 수사학적인 것이다. 특별히 5절에 가서 “자네의 악이 크지 않은가, 자네의 죄악이 끝이 없지 않는가?” 반성을 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는 끝에 가서 21절 이하에 가서 회개하도록 결론짓기 위해서 처음에는 수사학적인 준비를 시키고 양심성찰을 시키는 것이다.




【6-9절】‘자네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 원인은 자네한테 있는 것이다’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다. 거기에 6절, 7절, 9절을 보면, 자네와 주위, 사회에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 그런데 8절은 “세상은 주먹 센 자에게 속하고, 특권을 누리는 자가 차지하지” 그래서 욥이 누리던 과거의 부가 욥에게 악이 될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그렇게 잘 살 때 자네가 잘못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6절, 7절, 9절은 2인칭, 그 다음에 이웃관계, 8절은 객관적 진리, 객관적 진리의 원칙에 있어서도 자네는 옛날에 떨어진 적이 있지 않았는가. 이런 식의 이야기를 한다. 그래서 “자네가 까닭없이 형제들의 담보를 강요하고 헐벗은 이들의 옷을 벗긴 때문일세” 거기에 관계되는 성서구절을 참조(신명 24,10: 에제 18,12: 31,19: 출애 22,26). 욥기에는 구약전승들로 봐서 이웃에게 해야될 일, 신명기, 출애굽기에 나오는 이웃에게 해야될 일을 욥이 그르쳤다는 얘기를 총괄적으로 하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 성조들 때부터 내려오는 것인데, 맞지 않았다. 그렇게 따지면 욥은 고전적인 의미의 슬기로운 자도 아니었다. 조상으로부터 가르쳐 준 전승과 자기 인생 경험으로부터 익숙하게되어 사는 기술을 배우는 것인데 그렇지도 못한 것이다. 그래서 욥이 그 점에 있어서 엘리바즈에게 지적을 당하는 것이다. “자네가 까닭없이 형제들에게 담보를 강요하고 헐벗은 이들의 옷을 벗긴 때문일세, 자네는 목마른 이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않았고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거절했네”(6절, 7절) “자네는 과부들을 빈손으로 내쫓고 고아들의 팔을 부러뜨렸네”(9절) 이 전체적인 의미는 결국은 생명을 증진시키는데 아무런 기여를 못한 사람이다.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삶의 지혜는 공동체적인 이웃에 대한 의무를 이행하는 것인데, 바로 그 점에 있어서 욥은 지혜문학에 있어서도 실패한 사람, 그리고 8절은 자네가 주먹센자에게 속하고 특권을 누리는 자가 차지하기 위해서 말하자면 폭력적인 이런 가난한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힘을 쓰지 않았는가. 그 무리에 들었는지 않았는가. 자네는 그런 입장인데 이제와서 무죄하다고 하니 말이 되는가. 더군다나 그런 입장에서 마치 슬기롭다고 한들 하느님께 무슨 영향을 미칠 수 있겠는가. 사실 그렇지도 못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하느님께 무슨 영향을 미치겠는가. 그러니까 끝에 가서 21절에 가서 잔소리 말고 불평말고 하느님께 화해하라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욥은 수사학적인 질문까지 포함하면 이러저러한 점에서 하느님께 영향을 미치지 못했는데 너는 무죄하니까 왜 나를 벌하느냐 상을 주어야 되지 않느냐 이렇게 얘기하는데 무죄하더라도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데 그런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이다.




【10-11절】바로 6-9절에 나온 그런 이유 때문에 자네가 공포를 느끼고, 두려움에 떨고 그런 것이다. 그런데 더한 것은 11절에 엘리바즈가 욥을 몰아치는 것은 무엇이냐면, “자네는 어둠을 보지 못하는가? 자네를 뒤덮으려는 저 큰 물을” 물이라는 것은 부정적 의미로 홍수라든지, 부정적인 심판 어떤 도구 이런 것인데, 6-9절의 잘못한 것을 왜 보지 못했느냐. 더군다나 자네가 그것 대문에 놀라고 있는데 엘리바즈의 변에 의하면 욥은 자기반성을 못하는 그런 것이다. 그 다음에 이제 한 단계 더 높아져서 사회에 대한 잘못만 한 것이 아니라 사회와 하느님과의 문제가 생긴다.




2) 12 – 20절


【12-14절】 지금까지 자네 악은 6-9절, 욥이 하느님께 잘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일방적으로 단죄하는 쪽으로 계속 나아간다. 잘못이 무엇이냐. 하느님이 높이 계시기 때문에 별들의 끝을 보게, 얼마나 높은지, 그런데 그렇게 높이 계시는 하느님께서 무엇을 아시리요, 먹구름을 꿰뚫어 심판하시겠는가? 구름은 하느님께서 나타나실 때에도 주변 상황을 설명하는 것이지만, 여기서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거리를 담을 쌓는 그런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욥의 잘못은 무엇이냐, 그렇게 구름에 가리워 있으니까 하느님이 우리를 보시지 못하신다. 이렇게 얘기하는 것이다. 이것은 21장에 나오는 악인들이 취하는 태도와 같은 것이다. 다른 악인들과 다를 바가 없네하고 단죄하는 것이다. 신관이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인간을 다스리는데 영향을 미친다고 이런 얘기를 함으로써, 네가 잘못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원인은 너한테 있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에서 나오는 일반적인 테마로 본다면 악인들이 그러는 것은 시편에서 주로 나오는 것인데, 인간 세상에 대해서 관심이 없는 분, 신관이 아주 잘못, 또는 인간의 일을 못 본다고 생각하는 분, 그런 다음에는 우리 힘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것들이다. 21, 15을 보면, 14절, 15절, 우리들 앞에서 악인들의 성공이 잘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께 한다는 소리가 “우리 앞에서 비키소서, 당신의 길을 안다는 것이 우리 마음에는 내키지 않나이다. 전능하신 분이 뭐길래 우리가 그를 섬기면, 무슨 이득이 있다고 그에게 매달리리요?” 이렇게 악인들이 하느님께 하는 소리인데, 엘리바즈의 생각은 욥 너도 그런 것이다. 12절은 10절, 11절과 연결시켜서 본다면 자네가 잘못하고도 보지 못하지 않느냐 그것이다. 이것을 일러주고 15절에 가서는 그것이 사악한 자들이 걸어가는 그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기가 닥치는 것도 보지못하는, 그러니까 네가 얘기한 것을 너의 마음을 일깨워주고, 네가 하느님께 대해 잘못된 신관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일깨워주고, 그것이야말로 사악한 인간이 하는 짓이다. 이렇게해서 욥에게 뒤집어씌우는 것이다.




【15-20절】사악한 인간들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Commentary를 보면 17-18절은 후대에 붙은 것이라고 보는데, 12-14절에 자네와 하느님 사이의 관계나 15-16절의 사악한 사람과 하느님과의 관계, 17-18절까지 나누어서 하느님과 사악한 사람과의 관계에 어떤 병행성을 볼 수 있다. “자네는 그 옛길을 따라 가려는가? 사악한 인간들이 걸어간 그길을?”(15절) 13절, 14절에 나오는 얘기이다. 하느님은 인간과 상관없다는 생각, 그리고 16절은 그런 사악한 자들의 말로가 어떤 것이냐, 하느님으로부터 단죄를 받는 사람들인데, 그 길을 가려고 하는가, 17-18절이 후대에 붙었다고 하는 것은 15절, 16절을 설명하는 의미도 있고, 12-14절에 대해서 다시 설명하는 의미도 있다. “우리 앞에서 비키소서, 전능하신 분이라고 우리에게 무엇을 할 수 있으리요? 하지만”(17절) 21,14과 비슷한 것이다. 사실은 저들의 집을 좋은 것으로 채워주신 분이 하느님이시고, 그런데도 불구하고 17절에 그런 이야기를 한다. 그러니까 욥이 너도 그렇다. 너도 비슷한 길을 걷는 것이다. 하느님은 높이 계시고 우리 인간하고는 아주 상관이 없다. 그런 얘기하는 것은 바로 17절에 나오는 사악한 사람들이 하는 얘기고 다른 것은 없다. 그들의 사악함은 특별히 모든 것을 채워주시고 그랬는데, 그런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악인들의 뜻은 나와는 거리가 멀다네”(18절) 이제 엘리바즈가 어떤 경계를 두는 것이다. 욥도 악인들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고, 나는 악인들과는 다르다. 그래서 그것이 16절, 19절 이하를 연결시키는데 동떨어진 Commentary가 드러나 있다. 19절, 20절은 16절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악인들이 그렇게 되면 “의인들은 보고 즐거워하며, 무죄한 이는 저들을 비웃네 : 정녕, 우리의 적은 전멸되고 그들에게 남은 것은 불이 삼켜버렸다네.”(19-20절) 물이니 불이니 하는 것은 심판의 얘기이고, 악인들이 그렇게 하느님은 아무 상관 없다고 하고, 하느님은 멀리 계시다고 하고 하늘에 계시고 우리와 상관없다고 해서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단죄를 받는다. 15절, 16절에 그리고 의인들은 손해를 보는 것같고 오히려 뒤떨어진 것같고 하지만 사실은 마지막에 가서는 승리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욥 너는 이 setting에 안들어간다. 하느님에 대한 태도도 틀렸고 이웃에 대한 것도 틀렸다. 옛날에 넌 힘센 자였고, 권력이 있었고, 그때 이러이러한 사회적인 잘못, 전통적인 선조들이 얘기한 잘못을 했을 텐데도 불구하고 이런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욥에 대한 단죄는 욥으로 하여금 잘못을 인정하도록,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인정하도록 그래서 지금 받는 벌은 당연한 결과라고 인정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따라서 엘리바즈는 욥에게 자신의 신학을 따르도록, 또 자기의 생각을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3) 21 – 30절


21절 이하에서는 특별히 욥이 자기의 고통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으니까, 탈출하고 싶은 욕망을 이용해서 ‘탈출하고 싶으면 그 길밖에 없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욥은 탈출하고 싶고, 하느님과 함께 있고 싶고, 하느님과 화해하고 싶은데, 방법에 있어서는 엘리바즈와 서로 다른 것이다. 진퇴양난. 엘리바즈의 이야기가 욥에게는 굉장한 유혹이다. 문제를 회피할 수 있고 미룰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이다. 욥이 자기의 현실을 모른다고 하며 지나칠 수 있는 것이다. 엘리바즈의 ‘독소’는 현실과 다른 어떤 ‘이론’이라는 데에 있다.


“자 이제 그분과 화해하여 평화를 되찾게” 이 “평화”는 정말 “샬롬”, 말대로 “완전한 온전한 평화를 되찾게”하는 것이다(과거의 파손되지 않은 형태를 복구하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여긴 다시 12절 처음에 나온, 하느님과 욥 사이에서 욥이 생각하는 잘못된 그것을 이제 복구하는 기능도 있다.




【22절】“그분 입에서 나오는 가르치심을 받아들이고, 그분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두게”


부정적인 욥의 태도에 반대되는 것들, 조상들이 이야기한 것들…, 즉 자기가 이야기한 것이 옳다는 이야기이다. 하느님의 이름을 걸고 욥을 단죄한 다음에는, 자기의 말이 하느님의 진리에 가깝다는 식으로 풀어 나가는 것이다. 특히 22절의 ‘가르치심’을 ‘토라’,  ‘말씀’을  ‘다바르(רבד)’라고 표현한다. ‘토라’는 ‘하느님의 길’,  또는 ‘계시’와 통하는 이야기이다. 즉, 이 문장을 달리 이야기하면, ‘가르치심을 받아들이고’, 즉, ‘지금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토라를 거부하는 욥’ 단죄의 최고의 형태가 된다.  ‘아마르’는 “다바르(רבד)”와 조금 달리 “그냥 말하는 것”이다. 즉, ‘하느님과의 대화가 단절되었던 욥’ 앞에서. “자네가 슬기롭다고 했는데, 하느님께 무슨 유익이 되겠는가. 이제는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받아들여야지, 안 그러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다. 더구나 “이 모든 죄악, 이모든 것들은, 하느님께 대한 잘못, 사회적인 잘못, 이모든것들…..자네모습이 바로 이런 것일세, 그러니 고치게”라고 하는 것이다.


▶“마음에 새겨두게”(22b)라는 표현은 지혜문학적인 표현이다. “마음”은 일반적인 의미의 감정적인 것을 말하지 않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이성’, ‘의지’, ‘감정’  이것을 다 포함하는 말이다. 생명의 기초, 원리가 나오는 기원이 나오는 전부를 의미한다. 특히 지혜문학에서는 그렇다. 즉, 여기에서 엘리바즈는 “지금까지 살지 못했으니, 이제 그 말씀에 따라 살게”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신관(神觀)을 바꾸라’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신관이 잘못되었다하는 것은 다음 이야기이다. 여기서는 어쨌든 ‘신관의 차이’를 이야기할 수 있다.




【23절】“자네가 전능하신 분께 돌아오면 회복될 걸세”(23a) – 평화를 되찾는 것이다


여기서 ‘되돌아온다’는 것, ‘탸슈브’, ‘슈브(בושׁ)’라는 동사가 쓰인다. 이 단어는 구약에서 자주 쓰이는 ‘회개’하고 관계되는 단어이다. 특별히 신명기 역사신학에서 나타나는 말이다.


여기서 나타나는 회개는 ‘인식의 차원에서의 신관’뿐 아니라  위에 나타난(1-5, 6-11, 12절 이하) 그 모두가 생활에 토대를 둔 인식인데, “전능하신 분께 돌아오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고치라는 이야기이다.


▶“자네 장막에서 불의를 치워버린다면 말일세”(23b)-생활에 있어서 전부 고치라는 말이다.


그 다음, 이것에 대한 부연이 24절이다. 즉  어떻게 회개하는가하고 말한다.




【24절】“먼지 위로 금을 내던져 버리게”(24a) 


        “오빌의 순금까지도 개울의 돌들 사이로 말이네”(24b)


가장 귀중한 것을 버리라는 것, 즉 네가 생각했던 삶의 원칙을 바꾸라는 것, 엘리바즈는 욥의 현실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자신에게 삶의 원칙을 맞추라는 것이다.




【25-28절】에서, 자네가 정말 그렇게 하면, 하느님으로부터 기쁨을 되돌려 받고, 즐거워지고, 모든 것이 광명으로 바뀔 것이다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에는 인간이 자기의 생활, 경험에 토대를 둔  지혜문학과는 다른, 하느님의 ‘토라’를 받아들이면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하는 점에서 다른 점이 있다. ‘욥은 하느님의 토라를 거부한 사람’으로서 실제로 검증하지 않고서, 단정해 놓고는 이제 이렇게 말한대로 해야지만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29-30절】“사람들이 내리눌렸으면 ‘일어서게’라고 자네는 말하고, 기가꺾인 이들은 그분께서 구해주시리”(29절) – 그 앞에 사회적인 악· 욥이 잘못한 것들을 회복하는 것을 요약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29-30절은 ‘야훼 하느님의 주도권에 의거한 구원’을 뭉뚱그려서 전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4. 전체적 내용 – 22장 전체는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우선 출발점은 욥이 무죄함을 굽히지 않는 데에 있다. 방향에 있어서는 엘리바즈가 무죄함을 굽히지 않음을 설득시키려 한다는 면에서 옳다. 그런데 방법은 틀렸다. 왜?


현재 고통을 당하는 것은 분명히 잘못했기 때문이라는 역추정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욥의 신관이 틀렸다고 하면서도 엘리바즈의 신관도 틀리는 것이다. 욥은 고통을 통해서 회개를 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서 고민을 한다고 하면, 엘리바즈는 확고부동한 자기의 신학을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래서 욥을 단죄하는 것이다. 그것이 22자의 전체적인 특징이다. 단죄하는 내용은 ‘6-9’절이다.   ……선조들로부터 받은 가르침, 하느님의 토라, 하느님과의 대화의 부재, 자기힘만으로만 될 수 있다는 모티브를 가지고, ‘그건 옳지 않다’라고 이야기 한다.


엘리바즈는 하느님의 특전 명예 위치를 고수한다고 하면서, 욥을 단죄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어떻게 단죄하는가?


‘욥은 실제적인 무신론자다’라고 하면서, ‘하느님께로 돌아가야 할 여백이 많은 사람’ ‘신관 인생관, 사회관등이 다 부족한 사람’ 이런 식으로 단죄하고 있다. 그런데 하느님을 옹호하기 위하여 인간을 단죄하는 것도 잘못이려니와 단죄하는 방법에서도 틀린 것이다. 욥의 고통에 대해서는 전혀 참여하지 않고 단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느님을 옹호하지만 욥과는 벌어지는 결과가 나온다. 따라서 그의 권고도(하느님과 화해하라는) 욥에게는 설득력이 없다. 더 정확히 욥이 토라를 받지 않고 욥의 고통의 현실에 참여하지 않는다. 고통 속에 나타난 하느님의 주도권을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 엘리바즈가 하느님으로부터 멀리 있는 것이다. 오히려 엘리바즈가 같이 참여하며 대신 고통을 받는다든지 욥과는 거리 유지하는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욥은 삶의 태도에 거리를 둔다. 엘리바즈는 어느 시대·장소나 적용되는 이야기로 생명력없는 가르침이다. 엘리바즈의 권고 자체는 원칙에 불과하며 욥의 고통에 참여함으로써 욥의 고통을 더 심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엘리바즈의 신관은 욥의 고통을 통해서 교정되어야 할 신관으로 나타난다. 엘리바즈가 보는 욥과 당사자인 욥과의 괴리감이 생긴 것이 사실이다. 이것이 특성이다. 하느님으로 오히려 인간 사이의 거리가 멀어지고, 고통이 더해지는 것. 교조적인 신학이 지니고 있는 신학의 비현실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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