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하신 천주 성부

 

전능하신 천주 성부




  서 론


모든 종교는 발전 초기 과정에 있어서 구성원의 믿음의 내용을 간략한 신앙 고백문으로 요약하여 경신례를 통해 고백하는데, 그 고백문은 새로운 구성원들을 받아들이는 선발 예절에서 신앙을 고백함을 확인하기 위해 쓰이기도 한다.


오늘날 우리가 전례 안에서 사용하는 신경 역시 그리스도교 믿음의 내용을 신앙고백문 형태로 요약한 것이다. 이 신경은 신약성서가 형성되어 가는 과정에서 로마 교회가 오늘날 사도신경의 핵심이 되는 새로운 신앙 요약문을 만들어서 세례 때에 예비자들한테 묻는 일련 문답 형식으로 이루어진 신경으로 “당신은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를 믿습니까?”1)가 첫 자리를 언제나 차지하고 있었다.


계시종교인 그리스도교의 본질 물음인 이 고백은 두 가지 속성으로 형언되는 신에 대한 신앙고백인데, 여기서 하느님께서 ‘아버지’로 ‘만유의 주재자’(전능하신)라는 이름으로 규정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느냐는 물음과 이 고백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어떤 의미를 갖고 다가오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는가의 고백을 하는 신앙인들에게 언제나 다가오는 문제이다. 이 주제 자체가 방대하고 쉽지 않은 물음이지만 조심스럽게 살펴보겠다.  




Ⅰ. 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


1. 전통적인 이해


1)언어적인 의미


‘하느님께서는 전능하시다’는 것은 모든 일을 다할 수 있다는 뜻에서의 고백이 아닌 ‘모든 것을 통치하신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으로 초대 교회의 영적.물적인 하느님의 지배가 구분된다고 보는 이단을 반박하면서 영적.물적인 모든 세계를 다스리시며 보호하시고 돌보시는 분은 하느님 오직 한 분이시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 말이 信經에 쓰일 때는 그리스어였기 때문에 ‘만유의 주(Παντοκρατωρ)’로 쓰였지 ‘전능하신’(형용사)이라는 말로 쓰인 것이 아니다. 이 두 말에는 큰 차이가 있다. ‘만유의 주’는 어떤 존재 자체를 의미하지만, ‘전능하신’은 어떤 존재의 여러 속성 가운데 하나의 속성을 말하는 것이다.2)


                                            


참된 하느님께서 지니신 ‘만유의 주’는 세 가지 측면으로 볼 수 있는데 첫째, 포괄적인 의미로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음을 말한다. 둘째는 말 그대로 사랑의 섭리로 인류를 주관하시는 만유의 주관자로서 유일한 분이라는 의미 갖는다. 셋째는 구세사 안에서 능력 있는 아버지로 자녀를 행복으로 이끌고, 보호하고, 생명을 주시는 힘으로 드러난다.3)




2)이스라엘 야훼의 권능


‘만유의 주’는 구약에서 야훼 하느님의 칭호로 ‘만군의 주’로 표현되었는데,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와 관계가 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말씀과 입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이 창조 사업은 무에서 유를 부르시는 권능을 드러내셨고, 또한 지상에 개입하심으로써 당신 전능을 드러내시는데, 이스라엘 백성을 선택하시고 보호하시는, 세상에 유일한 전능하신 왕으로 당신 백성을 에집트에서 해방시키신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전능은 바로 역사의 현장에서 백성들을 해방시켜 주시는 분, 또 역사의 참된 주관자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유산을 이어받고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체화한 것을 사도신경은 ‘전능하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고백한다. 즉 해방시키는 하느님의 전능은,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내어 주시고 생명까지 바치게 하심으로써 만물을 해방시키는 사랑의 하느님으로 구체화하였으며, 당신 아들의 부활로 이를 입증하셨다.




3)실존적 의미의 전능하신 하느님


신명기6,4 「듣거라, 이스라엘아, 야훼, 너의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시다」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날마다 하던 것으로서 그리스도교적 신경의 원형이 된 신앙고백이다. 그 기원적 의미에 있어서 주변의 諸神들을 끊어 버리라는 말이었다. 즉 다신교의 본질이 사유의 신격화와의 절연이다. 이런 관점에서 이 신앙고백은 동시에 私有의 확보의 포기이며 두려운 대상을 섬김으로써 이를 달래려는 恐怖心의 포기이다. 이 신앙고백은 모든 것을 거두는 힘인 하늘의 유일한에 대한 承服이며 神的인 그 무엇을 손에 쥐지 않고서도 온 세상을 다스리는 권능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용기를 의미한다.4)


이스라엘의 신앙에서 유래하는 이런 기점들에는 초기 그리스도교 신경에서도 근본적 변화가 없었고 중대한 귀결을 함축한 실존의 결단이었다. 이 신경에 들어서는 자는 동시에 자기가 속해 있는 세계의 법칙과 인연을 끊었던 것이다. 후기 로마제국의 기반이 되었던 당시 정권의 숭배를 거부하고, 愛情의 崇拜 및 세상을 지배하던 恐怖心과 미신의 숭배에 대항하여 이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신경은 하느님에게서 비롯되는 절대성을 개개인에게 부여하고, 모든 정치 집단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포괄적 단일성 안에서 이들을 상대화함으로써 신앙고백만이 전체주의 체제의 힘으로부터 인간 옹호가 되며, 동시에 인류의 그 어느 절대 주장도 근본적으로 폐기한다.5)




2. 현대 안에서 새로운 이해


1)문제 제기


그리스도 교회가 유다 문화권을 벗어나면서, 서방세계의 문화와 정신과 해후하게 되면서 희랍적 세계관에 입각한 神觀이 형성된다. 희랍적 세계관은 하나의 완전하며 불변하고 위계질서적인 지구중심적 우주론적 세계관이었다. 그러나 이 고대 중세적 세계관은 소위 ‘코페르니쿠스의 전환’ 이래 철저하게 붕괴되었다. 근세 이전까지 인간들은 자연에서 오는 혜택과 재앙을 하느님 신앙 안에서 모든 조물을 지배하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객관화, 의인화하여 절대적인 지배권을 행사한다 믿었다. 그러나 현대 과학은 세계의 근거로서의 하느님의 존재를 도외시하고 대상을 직접 탐구하는 방법론적 무신론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과학이 세계 안에서 발견되는 사물들의 인과관계를 탐구해 갈수록 그만큼 신앙은 점점 더 퇴각 당하는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다.


사실 현대인은 이 우주 속에서 조화와 질서 뿐 만 아니라 갖가지 부조화와 혼돈을 체험하고 있다. 처절하기 이를 데 없는 천재지변(기근, 홍수, 지진, 화산 폭발..), 온갖 역사적 재난(전쟁, 질병, 억압, 착취..) 그리고 형이상학적 악(고독, 증오, 죽음…)을 현대인은 체험하고 있다. 무고하게 겪어야 하는 고통과 악의 체험에 직면해서 인간들은 유신론적 신에 대해 반기를 든다. 오늘날 하느님의 존재를 거부하는 ‘저항적 무신론자’들은 유한한 우주세계로부터 이들을 존재케 한 절대자의 존재를 추론하는 것이 불가능해서가 아니라, 유한한 세계를 창조하였을 절대자가 악으로 말미암아 초래된 고통을 방치하는 사실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6)


악과 고통이 역사 안에 그대로 진행되는 현상을 목격한 인간들이 신은 죽었다고 절규하게 된다. “그분이 전선하시고 전능하시다면 여기 개입해서 이 사실을 변화시켜야 하는데 그는 방관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전선한 분이 아니거나, 아니면 전능한 분이 아니라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이고 죽은 존재다” 하는 선언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 세상의 무력한 신을 신이라고 믿는 이는 감소되고 이 세계는 신이란 존재 없이도 설명될 수 있다 믿는 사람들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7)


“역사 속에는 질서와 조화뿐만이 아니라 무질서와 부조리, 그리고 갖가지 재난도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적이고 양극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세계 안에서 하느님은 어떤 의미로 창조주요 구원자요 완성자로서 인격체일 수 있는가? 그리고 사랑이신 하느님이 이 모순적 사건들과 존재론적으로 어떤 관련을 맺고 있는가?”




2)두 가지 방향 모색


(1) 함께-고통 당하는 하느님(Mit-leidender Gott)


예수의 십자가 죽음이 보편적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한스 큉은 인간의 삶, 인간 역사 안에서 피할 수 없이 다가오는 고통의 문제와 하느님에 대한 질문을 연결짓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즉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의미를 알 수 없는 고통을 이론적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신뢰하면서 극복하는 실천적인 길이 인간에게 열렸다. 하느님은 예수를 공개적으로 파멸하도록 내버려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를 죽음 속에서 지탱해 주었다는 것이다. 예수는 세상의 누구보다도 하느님께 버림을 받은 듯 보였지만 하느님은 그를 버리지 않았다. 공개적인 하느님의 不在 속에서도 하느님은 가려진 채 현존하였다. 큉은 예수의 십자가를 부활의 빛 속에서 이렇게 해석하면서, 하느님은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고통 속에서도, 바로 고통 속에서 숨겨진 채로 현존하는 분, 극도의 위협, 무의미, 허무함, 버림받음, 외로움과 공허 속에서도 인간을 지탱하고 붙잡아 주는 분, 즉 인간의 곁에서 함께-아파하는 분, 인간과 연대를 취하는 분”으로 자신을 드러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예수의 고통 속에서 하느님은 “함께-고통 당하는 신”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바로 예수가 선포한 하느님, 즉 잃어버린 자들의 아버지이다.: 하느님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바로 십자가에서” 약하고 병들고 가난하고 억눌리고 죄지은 자들 편에 계신 분으로 드러난다.8)


이와같이 우리의 고통에 참여하며 우리의 비참함과 온갖 불의를 같이 당하는 분으로서 보이지 않게 함께-고통받는 분으로, 그러나 바로 이런 방식으로 궁극적으로는 무한히 선하고 전능한 神으로 나타난다.


(2) 존재와 無로서의 하느님 현존 양식


하느님을 존재라고 볼 때에 사람이나, 나무나, 하늘이나, 새나, 산 같은 존재자들과 달리 존재자들을 있게 하는 근거이고, 이들 존재자들 속에서 자신을 나타나게 하는 창조의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유한한 존재자로서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고, 앞으로 내가 존재하지 않을 때가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다. 이렇게 나는 내가 태어나기 전에 속했던 無의 세계로부터 와서 無로 둘러싸여 결국은 無의 심연으로 빠지게 된다는 엄연한 사실을 바로 신의 현존 양식과 관련시켜 생각해야 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신이 참으로 만물을 규정하는 실재라면, 나의 존재와 직결되고 있는 이 무와도 존재론적으로 관련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어느 곳에서나 존재한다는 그 하느님은 바로 이 무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통찰을 하게 됩니다. 역사를 통해 이 세계 안에서 무수히 발견되는 무죄한 고통의 발생을 지켜보면서 신은 거기서 이를 개선하고 변혁하는 전능한 분으로서가 아니라 무력하기 그지없는 무로서 존재할 수밖에 없다는 통찰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을 그대로 직접 대하지는 못하지만, 우리의 삶을 둘렀고 있는 무의 현존을 체험하는 순간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 무가 허무로 끝나지 않고 완성의 상태로 나아간다는 것을 동적인 신의 계시인 육화된 신의 모습을 통해서만 오로지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렇게 하느님의 현존이 인간의 삶의 조건에 상응해서 동적인 양식으로, 그리고 정적인 양식으로 발생한다고 보고 있으며, 동적인 현존 양식으로는 구체적인 사랑의 행위를 제시할 수 있고, 정적인 현존 양식으로는 이 무의 형태로 나타난 신의 현존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로 통합될 수 있는가는 제시할 수 없다. 여기서 인간을 사랑하고 인간을 위해서 현존하다가 죽었으나 부활한 그리스도를 통해서 존재와 무로서 나타나는 하느님을 우리의 희망의 대상으로 말한다면, 하느님은 우리 앞에 계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신이라는 작업 가설 없이 생활하도록 내버려두면서 바로 그러한 가운데 우리 앞에서 현존하는 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독일의 신학자였던 본훼퍼(D. Bonhoeffer, 1906-1945)의 표현처럼 “우리의 삶 한가운데에서 바로 피안자로 머무는 그러한 분”이라고 이야기할 수 있겠다. 바로 ‘우리의 삶 한가운데서 피안자로 머무는 분’ – 이분이 우리를 존재케 하였고 우리들을 무의 상태로 방치시키면서 죽음과 부활의 도정을 거쳤던 그리스도와 함께 완성으로 이끄시는 하느님이라고 생각한다.9)




Ⅱ. 하느님 아버지


1. 구약성서적인 의미


셈족에 있어서 그들의 신을 아버지라 부르는 관습은 퍽 오래된 것이고,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이유는 그분이 인간을 보호하시고, 인간에게 주권을 행사하시며 또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아버지이시라는 개념은, 초기에는 민족적이고 구세사적 측면에서 이해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에집트에서 탈출할 때, 당신 백성을 보호하시고 먹이시며 지도하심으로서 당신 자신을 아버지로 계시하셨다. 여기에 표현된 기본 사상은, 그 분께서는 주권자이시며 순명과 신뢰를 요구하시는 섭리자이시라는 것이다. 다윗 왕 시대 때부터 야훼께서는 특히 임금의 아버지로 여겨졌다. 임금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성서 구절들은 예수께서 유일한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미리 드러내고 있다.




2. 신약성서적인 의미


구약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나 ‘압바’라고 명시적으로 부른 적은 없다.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른 것은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역사와 관계가 있다. 예수님은 세례 받으실 때와 거룩한 변모 때에 ‘하느님의 아들’로 불리고 여기서 하느님은 ‘아버지’로 선포된다(마르 1,11; 9,7). 다시 말해 성서에서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른 것은 무엇보다도 지상에 계신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이러한 하느님과 자신의 깊은 관계, 하느님께 전권을 받은 관계를 드러내실 때 하느님을 압바. 아버지라고 하였다(마르 14,36; 마태 11,25 이하; 루가 23,34; 요한 11,41; 14,9; 17,1 이하 등). 예수님은 그렇게 부르면서 무슨 일을 하셨는가?  당연히 전권자의 임무를 수행하셨다. 다시 말해 당신의 전생애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보여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은 가부장적인 권위를 내세우는 분이 아니다. 이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도 잘 드러난다. 돌아오는 방탕한 아들을 맞이하는 아버지를 보라. 온갖 변명의 말을 찾으면서 어슬렁어슬렁 걸어오는 아들을 향하여 아버지는 ‘무조건’ 달려나간다. 하느님은 바로 그러한 아버지이시다. 아버지가 보여준 사랑에서 ‘무조건’ 이란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그분의 사랑은 똑똑하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의 판단이나 논리를 무색하게 하신다. 바로 이분이 예수께서 압바. 아버지라 부른신 하느님 아버지이시다. 물론 불의와 악에 대해 진노하시고 정의로운 심판관인 하느님이시지만, 우리한테 하느님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하신 것에서, 하느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일에 얼마나 적극적이신 가를 엿볼 수 있다.10)




3. 삶의 문제


사람을 극진히 사랑하시는 아버지의 모습을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증거 하셨고, 아버지는 아들의 부활을 통해 당신과 아들의 전권의 관계를 증거해 주셨다. 동시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특권(마태 6,9; 루까 11,2; 로마 8,15 참조)을 지녔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예수께서 하느님을 압바.아버지라 하면서 사신 그 삶을, 당신의 생애를 통하여 아버지를 보여 주신 그 삶을 따라 우리도 살아야 한다. 그 길은 우리한테 생활 속의 십자가로 드러나며, 십자가의 길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 내 삶을 통하여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이나 하느님을 목말라 하는 사람한테 하느님 아버지를 보여줄 수가 있는 진정한 신앙고백이 될 것이다.




4. 하느님 어머니


인도네시아의 신학자 카톱포(Marianne Katoppo)는 지금까지의 신이해를 여성해방의 관점에서 다시 조명해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신의 이미지를 아버지, 주, 왕, 통치자로 봄과 동시에 어머니, 위로해 주는 자, 생명을 주는 자 등으로 볼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알을 품어서 새 생명을 낳고 새 생명을 보호해 주는 암탉의 이미지를 비유로 들어 자궁의 신학(the theology of the womb)을 발전시키고 있다.11)


그러면 여기서 성서 속에 기록되어 있었으나 별로 읽혀지지도 해석되지도 못했던 하느님의 어머니적인 모습을 살펴본다. “당신은 나를 모태에서 나게 하시고 어머니 젖가슴에 안겨 주신 분”(시편22,9), “여인이 자기의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않으리라”(이사야 49,15) 우리는 여기서 하느님을 산파와 같으신 분, 젖먹이를 애지중지하며 못 잊어 하는 하느님 어머니를 느낄 수 있다. “걸음마를 가르쳐 주고, 팔에 안아 키워 주고 … 젖먹이처럼 들어올려 비비기도 하며, 허리 굽혀 입에 먹을 것을 넣어 주었지만”(호세아 11,3-4), 우리는 여기서 어머니의 사랑을 물씬 느끼게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보게 된다. “너희가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나는 너희를 업고 다녔다. 모태에서 떨어질 때부터 안고 다녔다. 너희는 늙어 가도 나는 한결같다. 너희가 비록 백발이 성성해도 나는 여전히 너희를 업고 다니리라. 너희를 업어 살려내리라”(이사야 46,3b-4). 우리를 안거나 업고 다니는 어머니를 연상한다.12)


이상과 같이 성서안에 어머니로서 풍부한 의미들이 많이 드러난다. 그래서 신경에서 고백하는 하느님 아버지라는 말은 하느님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며 또한 여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남성에 의해서 대표된다는 것을 의미하도록 문자 그대로 받아들여져서는 잘못된 이해라 할 수 있다.    




   결 론


역사 속에는 질서와 조화뿐만 아니라 무질서와 부조리 그리고 갖가지 재난이 발생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적이고 양극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세계 안에서 하느님이 어떤 의미로 주재자며 인격적인 아버지일 수 있는가? 를 부족하게 나마 살펴보았다. 그러나 여기에 제기된 문제는 믿음의 선조들이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통해 체험한 삶의 고백을 지금 이 시점에서 현재화해야 하는 사명을 갖는 신학도로서 또한 신앙고백의 한가운데 서 있는 고백 자체가 실존의 문제로 받아 드릴 수밖에 없는 구도자로 이 질문은 끊임없이 제기 되는 여정의 물음이다. 계속되는 순례의 여정 속에서 보다 분명히 답을 찾고 드러나길 기도하는 마음으로 우리 자세를 개방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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