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성인들의 통공과 죄의 사함

 

  모든 성인들의 통공과 죄의 사함




I. 성인들의 통공




1. 모든 성인들의 원천인 성체성사


사도신경은 “거룩하고 공번된 교회”를 고백한 후에 “성인들의 통공”을 고백한다. 어떤 면에서 이 구절은 앞 구절을 명확하게 해주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의 친교가 바로 교회이다. 신도들의  거룩한 사귐이 있을 때 거룩한 교회는 구체화된다. 신도들의 거룩한 사귐은 교회가 새롭게 추구하는 이상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을 드러내는 표현이다.1)


가톨릭 교회 교리서에서 ‘성인들의 통공’이라는 말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게 된다. 즉 “거룩한 것들(sancta)의 공유”와 “거룩한 사람들(sancti)간의 친교”가 그것이다.




대부분의 동방 전례에서는 집전 사제가 영성체 전에 성체를 들어올리면서 “거룩한 것을 거룩한 사람들에게(Sancta sanctis)”라고 선포한다. 신자들(sancti)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sancta)로 양육되어 성령과의 친교(Koinonia)를 이루며 성장하고 이를 세상에 더욱 널리 전하게 된다.2)




성인들의 통공(communio sanctorum)에 관한 말은 일차적으로 세계 도처에 흩어져 있는 교회들을 주님의 몸에 의하여 <하나인>교회로 묶어 주는 성찬의 공동체성(通功)을 뜻한다. 따라서 당초에는 <sanctorum>이라는 낱말이 여러 사람들을 가리켰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성스러운 膳物들, 교회가 感謝祭(성찬)의 거행에서 일치의 본격적 유대로서 하느님으로부터 선사받은 저 거룩한 것을 의미했었다.  그러나 그 후 그런 선사뿐 아니라 하늘의 유일하고 거룩한 선사로써 서로 일치되고 성화된 사람들도 같이 포함하여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자 이제는 교회를 단순히 성찬 자체의 일치로만 보지 않고 이 성찬으로 해서 서로 하나가 되는 모든 이의 공동체로 이해하기 시작했던 것이다.3)


성체성사는 일치와 사랑의 성사로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그리고 교회와 결합시키며, 이웃 사람들과 만나게 하고  나아가 미래의 영광중에 이루게 될 하느님 나라의 잔치에로 우리를 이끌어간다.4) 이 성사로 우리는 말씀과 성체를 통해 하느님과 사귀게 되며, 이러한 하느님과의 사랑의 나눔이야말로 인간의 원초적 모습이다. “성체를 받아 모시는 사람들에게 아버지께서 스스로 누리고 계시고 당신 아드님에게 주시는 그 신적 생명이 성령을 통해서 베풀어진다.”5)


성체성사는 빵을 쪼갬과 술잔을 나누는 행위에서 예수께서 자기의 제자들을 자신과 하나의 공동 운명 안에 묶어 놓으신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는 사람들과의 친교에로 당신 자신을 내어주셨다. 그분은 제자들에게 그의 영적인 면만을 나누어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생각과 사랑까지 -육체적 실재 안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나누어 주셨다.6) 이 주님과의 친교, 사랑의 나눔은 신앙 안에서 주님의 몸을 먹고 그분의 피를 마시는 사람들 사이에 이루어 지는데, 이 신앙은 바로 제2의 그리스도(alter christus)가 되는 살아있는 신앙이며, 행동하는 신앙이다.(야고 2,14-17참조)


성체성사가 이루어 주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우리에게 사랑의 실천으로 드러나는 증거를 요구한다. 이러한 사랑의 실천은 우선 공동체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친교의 행위에로, 나아가서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에 협력하여 세상을 변혁시키는 사랑의 행위에로 사람들을 이끌어간다.7)


성찬의 식탁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나누어 먹는 동안 신자들은 모두 한마음이 되고(사도 2,46), 12사도들과 함께 식사를 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현존을 체험하게 되며(사도 10,41), 그리스도의 구원 제사가 ‘선포되고’ 그분의 재림에 관한 희망이 유지 되었다.8) 그러므로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의 구원 업적의 기념이며, 재림의 희망이고, 친교의 나눔이다.


사도행전의 제2장은 신자들의 일치의 근거가 사도들의 가르침과 빵과 포도주의 나눔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빵의 나눔안에서 친교를 체험해 왔다. 그러무로 성체성사적 집회는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정체성과 친교의 체험을 위한 가장 일반적인 장소가 되었다. 성체성사 안에서 나누는 그리스도의 몸과 피는 생명을 주는 음식으로 살아있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원천이 된다. 초기 신자들은 성체성사를 통해 그들의 일치가 계속되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그 원천을 바로 구세주 그리스도의 사랑의 생활에 대한 믿음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성체성사의 체험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신비체의 지체임을 자각한다.(1고린 10,16-17) 사람들은 세례를 받아(1고린 12,13.17) 성체성사에 참여함으로써(1고린 10,17) 서로 결합되지만 이들을 한 몸의 여러 지체로 일치시키는 것은 그리스도 자신의 몸이다. 인류는 그리스도의 몸에 결합되도록 불리웠으며, 이 몸을 중심으로하여 일치가 실현된다. 즉 우리는 역사적 그리스도의 몸과 성찬 예식의 바탕 위에서 교회의 신비가 갖는 온갖 풍요로움을 체험할 수 있게 된다.9)


“성체에 의해 얻어진 그리스도와의 일치는 신자들을 서로서로 하나가 되게 한다. 성찬례에 참여하기 위하여 모이는 사람들은 서로 적의를 가져서는 안된다. 일치가 없으면 성찬례에 참여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친교는 그리스도가 제정한 성체에 참여하기 위한 전제 조건이다. 또 동시에 신자들의 친교는 성찬례의 성과이기도 한다. 같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신자는 마음을 하나로 해야 할 것이고 또 해야 한다.(사도 4,32) 따라서 그리스도와의 일치의 결과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같은 사랑을 가지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특징이어야 한다.”10)


제단에 나아가기 전에 먼저 이웃과 화해하라는 말씀은(마태 5,23-24) 성체성사를 위한 준비로 이웃과의 화해와 친교를 요구하는 것이며,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성체성사를 통한 사랑의 나눔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찬이 교회를 이루는 원천임을 잘 지적하고 있다. 공의회는 성체를 통해 그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자기 봉헌에 동참하며, 전교회에서 일치된 성사의 거행을 통해 그리스도 신비체의 지체로서의 역할과 사명을 하나의 성체 안에서 수행하고 있음을 가르친다.11)


경신례에서는 빵이 하느님과 백성 사이의 친교를 상징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빵을 통하여 당신의 몸을 현존케 하시며, 그것으로 신자들을 일치시킨다.(1고린 10,16-22 : 11,23-26) 그리스도의 성체에의 참여는 신자 공동체를 교회로, 일치와 사랑의 표지로 만들며 그 사랑을 실천할 의무를 부여한다. 즉 이웃에 대한 사랑은 우리가 스스로의 생활을 이웃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세상에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그리스도의 뜻대로 성체신비를 날로 더욱 완전하게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 기구해야 하며,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으로써 한 몸이 되기 위하여 이를 거행해야 하는 것이다. 초기 교회는 제자들의 헌신적인 봉사가 예수의 봉사와 관련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루가 22,26-28) 성찬에서의 빵과 포도주의 나눔은 인간과 고난받는 종과의 통교를 나타내며, 이것은 이웃을 위한 몸이라는 종의 운명과 관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체성사 제정의 행위는 모든 이를 위한 종이라는 그리스도의 종의 신분과 그의 사랑을 우리가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기에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같은 빵과 같은 잔을 우리가 나눈다면 왜 우리가 이 안에서 그분과 같이 되어 같은 사랑을 보일 수 없겠읍니까?”라는 질문을 던진 것이다.12) 우리는 성체성사가 가져다 주는 ‘종말적 구원의 잔치에 대한 선참’이라는 기쁨은 그가 일치해 있는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사랑의 봉사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교회는 사랑과 봉사라는 소명을 수행함으로써 인간의 다양성을 모두 모아 하나의 일치를 이루기 때문에(사도 10,13) 어떤 문명에도 적응할 수 있고(1고린 9,20-22), 또한 전 우주를  그 안에 받아들일 수 있다.(마태 28,19)13) 성체를 중심으로 모인 하느님 백성은 사랑과 봉사의 정신으로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애와 업적을 기억하고 재현해야 하며, 특히 성체를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와 일치된 신자들은 자신을 개조하고 세상을 변혁시켜야 한다.14)




2. 성인 공경


한편 한스 큉은 ‘성인의 통공’이 단순히 ‘믿는 이들의 공동체’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 교회를 묘사하는 또 다른 방법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성인’들은 현양된 이상적 인물들일 뿐이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후광 없는 성도들, 즉 여전히 결점과 죄를 안고 살아가는,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는님의 부르심을 받아 죄로 가득한 세상을 거부하고 매일의 삶에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을 따르려 하는 신자들을 뜻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단지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 자신으로부터 신자들의 공동체로 친히 무르심을 받았다는 사실과 교회가 봉사하는 존재이며, 하느님의 해방하시고자 하는 원의에 의해 진부한 세상의 흐름을 넘어선다는 사실에 입각해서만 ‘거룩하다’로 불리울 수 있다. 이제 사도신경에서 ‘성인들의 통공’이 단순히 ‘거룩한 가톨릭 교회’와 동격이 아니고 부가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 공식은 400년 경에야 비로소 신경에 추가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또한 5세기 중에 로마신경돠 사도신경에 추가된다. 그러나 큉은 ‘신도들의 공동체’로서의 ‘성인들의 통공’이상을 의미하는 두 가지의 가능한 해석에 이르게 된다.


첫째, 라틴어 구절 communio sanctorum의 두 번째 단어(sanctorum)가 중성으로도 이해될 수 있기 때문에, 그 구절은 지상교회 안에서의, 즉(전례생활의 중심으로서의 성체성사에 대해 특별히 고려해 볼 때) 성사들 안에서의 거룩한 것들(sancta)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둘째, ‘성인들의 통공’은 또한 천상의 성인들(sancti), 즉 우리가 하느님과의 일치 상태에 있다고 믿고 있는 순교자들 그리고 모든 세대의 의인들과의 친교(communio)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성인들의 통공’을 이 두 번째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라고 큉은  설명한다.


큉은 종교 개혁자들과 20세기 사람들이 성인 공경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20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보수적인 로마 가톨릭의 정신에 따라 성인들에 대해 중세 시대처럼 공경을 드려야 하는가? 성인들을 공경하고 특별히 마리아를 공경해야만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인가?-를 보이는 것에 대해서 간단히 대답한다. – 16세기의 트렌트 공의회에서 조차도 성인들에 대해서 공경을 ‘해야만 하는’ 것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거기서는 단지 성인들에 대한 그러한 공경이 좋고 유용한 것이라고 주장할 뿐이다. 어디에도 성인들에 대한 공경이 의무이거나 구원을 위한 필수 조건이라고 말하는 곳은 없다. 그리고 동방 교회에서 우상 숭배를 거부했던 성상 파괴 주의자들에 반대하여, 이미 787년 제2차 Nicaea 공의회에서는 성인들에 대한 공경과 하느님 한 분께만 해당하는 흠숭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는 견해가 성립되었었다. 더구나 그러한 공경과 흠숭 사이의 구별이 서방 교회에서 지속적으로 유지되었다.15)


이제 특별한 순교자들에 대한 공경(2세기부터 시작된), 그리고 순교자가 아닌 위대한 증거자들(4세기 말엽에 시작된 시작된)에 대한 공경은 원래 교회 근저의 풀뿌리로부터 시작 되었다. 즉 신자들 자체 내에서 자발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시간이 흐른 뒤에 주교들이 이에 동조했고 결국 로마에서 시복, 시성을 채택하게 되었다. 단지 ‘제단의 영예’가 주어진 사람, 즉 공적인 전례 구조 안에서 공경을 받고 그 이름을 빌어 기도할 수 있게 지명된 이들이 ‘성인’으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중세 시대에 오면서 성인들에 대한 공경의 남용이 하느님 혹은 그리스도를 대체시키는 잘못된 신앙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이러한 과거의 잘못된 신앙을 바탕으로 현대에 있어서 성인들의 공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하다. 성인들의 공경으로 신앙의 탈중심화는 수용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의 중심은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communio sanctorum’에 관한 숙고와 초대 교회에서 이해된 ‘성도들의 친교’에 관한 숙고에 있어서 이제 신학적이고 교회적인 관심의 중심에 서 있는 오늘날에는 시성된 성인들에 대하여 간구하고 모방하는 것이 더 이상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성도들의 친교’와 교회의 ‘성인’에 대한 주제는 각 개별 인간의 ‘거룩함’과 ‘죄스러움’ 사이의 관계에 대해 묻지 않고서는 논의 될 수 없다. 많은 현대인들이 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주저하거나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러나 신경은 최소한 죄책감을 만들어내고 영속시키려는데 중심을 두고 있지 않다. 오히려 죄의 사함에 대해 말하고 있다.16)




II. 죄의 사함




1. ‘죄의 사함’ 의 의미


죄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배신하여 그분과 친분을 끊어 버리는 것이고, 이웃과 사랑의 관계를 파괴해 버리는 것이다. 또한 자신만을 생각한 나머지 상대방을 저버리는 배신행위로서 사랑을 파괴시켜 버린다. 그러므로 파괴된 하느님과의 관계, 이웃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선 회개와 화해가 필요하다.


사도신경에 나오는 ‘죄의 사함’은 세례성사와 관계된다. 니케아 신경은 분명하게 “죄를 사하는 하나의 성세를 믿으며”라고 그 관계를 밝히고 있다. 세례와 죄의 용서는 그리스도교 초기부터 강하게 부각된 주제이다.17)


처음에는 세례가 무엇보다도 사죄의 대성사로, 개심의 일대 계기로 의식되었었다. 그러다가 쓰라린 체험을 통해 비로소 그리스도교인이 이미 세례를 받은 자로서도 역시 죄의 사함을 받을 필요가 있음을 차츰 깨닫게 되었고, 또 그렇기 때문에 참회성사의 사죄가 갈수록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더구나 유년에 세례를 베풀게 되자 세례는 능동적 회심의 표현으로서의 구실을 하지 않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사람이 출생을 통해서가 아니라 재생을 통해서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여전하였다.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역시 인간이 그저 되는대로 살아 나가는 생활의 자만심에서 돌아서서 <회두>함으로써만, 자신의 존재를 돌이킴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세례는 일평생 계속되는 회두의 시초로서 <죄의 사함>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상기시키려는 그리스도인 실존의 기본적 前兆가 된다.18)


‘죄의 사함’이 의미하는 바는 죄를 영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죄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적 죄의 극복 목적은 비난이 아니라 죄인에 대한 수용, 죄에 대한 치유이다.’ 신경은 악에 대한 일반적인 이론에 관해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지 않으며, 그 기원에 대해서도 만족스럽게 설명되지 않고 있다. 또한 죄의 인간학적 내지는 사회학적 설명을 하지도 않는다. 악의 문제는 명백히 신앙에 있어 중심 주제가 되지 않고 있다 신경은 즉각적으로 긍정적인 강조를 하는데, 즉 인간 존재의 죄스러움을 전제하지만 동시에 그 죄의 용서가 가능함을 이야기한다.




2. 회개와 용서


예수님이 죄의 사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때에 그의 기쁨이 넘치고 해방하는 메시지를 구체화한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는 것을 즐기는 그러한 암울한 처벌의 설교자가 아니었다. 모든 ‘회개’, 모든 ‘참회’, 모든 ‘회심’은 새롭고 긍정적인 가능성으로서 사람들에게 제시되고 있다. 신약성서 전체를 볼 때,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보속의 노력에 의해서만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던 시대의 후대 교회가 보속 고행의 행위를 자주 제안하던 것처럼 그렇게, 신약성서는 그것에 관하여 암울하고 부정적인 태도를 지니지 않는다. 신약성서에 관한 결정적인 요소는 회심이 이미 하느님의 은총을 관통했고 하느님의 은총을 전제한다는 것이다.19)


탕자의 비유(루가 15,11-32)에서 우리가 죄를 짓는다는 것은 바로 아버지를 떠나 먼 고장으로 가는 것이다. 그래서 떠나 있는 중에는 어떻든 용서받지 못하는 죄의 상태라고 볼 수 있다. 이 죄의 상태에서 용서받기 위해서는 되돌아가야 한다. 다시 아버지께 가야 하는 것이다. 즉 하느님을 등지고는 용서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하느님을 등지고 떠나서 조물에게 얼굴을 대고 있는 한 구제의 길은 없다. 유일하게 구원을 받고 싶으면 하느님을 향해서, 조물을 등지고 되돌아서야 한다. 마치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집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하고 실제로 아버지께 되돌아갔던 것처럼 되돌아가야 한다. 이것이 회개이고 자기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는 행위다. 이것은 하느님께 대한 존속관계이고 신앙을 뜻한다. 그러면 이런 아들의 태도, 즉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는 겸손과 아버지의 자비를 불러일으킬 만한 태도, 아버지라 부를 자격조차 없다는 마음가짐, 그러나 아버지는 용서할 것이라는 아버지의 자비에 대한 믿음, 이런 것들로 둘째 아들은 용서를 받은 것이다. 인간의 죄가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하느님의 인자함이 용서 못할 만큼 큰 죄는 없는 것이다. 하느님은 그만큼 인자하시다. 죄의 용서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우리의 회개에 의해서만 이루어진다. 끊임없는 우리의 회개는 하느님의 자비를 불러일으킨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해야 한다.20)


신약성서의 견지에서, 회개가 특별한 보속 행위의 수행으로 제한되어서는 안된다. 세례는 근본적인 것이다. 세례는 ‘죄의 사함’을 위하여 있는 것이고 새로운 시작을 실제로 가능하게 해 준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세례하는 행위 자체가 어떠한 마술적인 죄사함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이 아님 또한 명백하다. 유혹과 시련은 남아 있다. 우리는 항상 악에서 구하여 주시기를 청해야 하고 항상 죄의 사함을 청해야 한다. 죄의 사함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래서 복음의 견지에서 볼 때, 다양한 죄사함의 역사적 형태들이 관련을 맺고 있다.21)


예수님은 사람들 사이의 화해와 용서 없이는 하느님과의 화해 혹은 하느님의 용서가 있을 수 없다는 조건을 매우 중요시하며 내 놓는다. 신적인 영역의 용서는 인간들 사이의 용서와 하나로 묶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주의 기도에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에 대한 청원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청원 다음에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우리가 용서하듯이 우리 죄를 용서하소서’(마태 6,12)라는 청원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점은 마태오 복음에서 더욱 강조된다. 즉 ‘만일 네가 사람들의 죄를 용서해 준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를 용서해 주실 것이다. 그러나 네가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을 것이다’.(6,14) 인간은 이웃에게 작은 용서를 베푸는 일을 거부하고서는 하느님의 크나큰 용서를 받을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이 받은 용서를 다른 사람에게도 베풀어야만 한다. 이것이 무자비한 종의 비유(마태 18,23-35)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마태 18,22)는 말씀의 의미이다.22)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요구는 인간의 관대함과 따뜻한 마음 그리고 개별적인 사람들에 대한 용서하고 용서하기를 그치지 말라는 도덕적 호소이다. 이는 가족 구성원들 사이에서, 배우자 사이에서, 친구들 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간의 대화에 있어서도 극도로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일 것이다. 만일 세상 사람들이 ‘죄의 사함’의 정신으로 서로를 대하는 것을 배운다면 세상은 다르게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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