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쇄 교황 선거 Konklave

봉쇄 교황 선거  封鎖敎皇選擧 Konklave


  초대 교회의 경우 성직자나 백성 그리고 나중에는 추기경들에 의해 교황 선출을 위한 선거가 치러졌다. 하지만 이에 대한 법적인 규정이나 규범이 없었다. 이러한 사실은 여러 차례에 걸쳐 교황과 대립 교황을 동시에 선출하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하였다. 아울러 세속의 제후들로부터 압력을 받은 추기경들이 교황 후보자에 대한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해 공위 기간이 길어지는 경우도 발생하였다.


  1241년 8월 21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가 서거하였다. 교황 선거를 위한 추기경단은 12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었다. 그중 2명의 추기경들이 황제에 의해 구금 상태에 있었다. 독일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의 정책과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2/3 이상의 찬성을 요구하는 교황 선거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래서 교회 역사상 최초로 이른바 봉쇄 교황 선거가 시도되었다. 추기경들은 궁정의 남동쪽 모퉁이이에 위치한 방에 감금되었다. 그 이유는 가장 빠른 시간 내에 교황 선출을 위한 합의에 도달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기경단 내부에서 발생한 의견의 불일치를 조정하기 모한 경우도 있었다.


  1241년 10월 25일 잔인한 협박 끝에 교황 선거가 개최되었고, 첼레스티노(Coelestin) 4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리옹에서 개최되었던 공의회는 1274년 동방 교회와의 연합과 새로운 십자군의 소집에 관한 의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세 번째 의제는 교회의 개혁이었다. 리옹의 공의회는 일련의 개혁 지침을 반포하였고, 그 중요한 내용은 헌장 Ubi Periculum에 요약되어 있다. 이 헌장은 교황 선거에 대해 규정하고 있으며, 이 규정은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재위 중인 교황이 서거할 경우 교황청 내에 머물고 있는 추기경들은 국외의 추기경들이 교황청에 도착할 때까지 10일 이상을 기다려서는 안 되었다. 그리고 추기경들은 외부 세계로부터 격리된 한 공간에서 교황 선거에 임해야 했다. 이 격리된 공간에 머무는 동안 외부 세계와의 연락은 차단되었다. 교황 선거 기간이 길어질수록 격리된 공간 안에서의 생활 조건은 점점 더 열악해졌다. 동시에 추기경들은 선거가 진행되는 동안 모든 수입을 포기해야만 했다. 국가의 관리들은 이러한 규정의 준수 여부를 감시해야 했다.


  리옹의 공의회에 참석하였던 추기경들이 이러한 엄격한 규정에 이의를 제기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황 선거를 위한 규정을 포함하고 있던 헌장은 공의회에 참석한 교부들의 찬성에 의해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다. 교황 선출을 위한 이러한 규정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본질적인 부분은 여전히 유효하게 남아 있다.


  교황 선출 기간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는 것도 유익하리라 생각한다. 가장 긴 기간은 1316년의 교황 요한 22세가 교황으로 선출될 때였다(2년 3개월 소요). 교황 클레멘스 5세의 경우는 11개월이 걸렸고, 교황 니콜라오 4세의 경우 역시 11개월이 걸렸고, 교황 빅토리오 3세의 경우 거의 12개월이 걸렸으며, 베네딕토 14세와 니콜라오 3세의 경우는 각각 6개월이 걸렸다.      


이 글은 카테고리: 가톨릭교리자료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유주소를 북마크하세요.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