崔濟愚는 1824년(순조 24년, 甲申) 10월 28일 지금의 경상북도 월성군 현곡면 가정리에서 태어났다. 이 濟愚라는 이름은 그가 35세 때 어리석은 세상 사람을 구제하겠다는 결심을 굳게 다지기 위해 스스로 고친 이름이다. 이렇게 고치기 이전의 이름은 濟宣이었다. 그의 本貫은 慶州이고 字는 性黙이며 號는 水雲이다. 官邊記錄에는 그의 아명이 福述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아버지는 近菴公 최옥으로서 경주 일대에서 학덕있는 유생이었고 어머니는 淸州 韓氏였다. 최옥에게는 본처가 있었으나 자식이 없어 인근 金尺里의 청상과부인 한씨를 소실로 맞아 그가 63세때 濟愚를 얻었다. 그러나 근암은 이미 그의 대를 이을 양자를 맞이하였기 때문에 수운은 庶子라는 불행한 운명을 타고 태어나게 되었다. 그후 수운이 6세 되던 해에 모친이 죽고, 수운은 어느덧 과거를 볼 수 없는 서자의 신분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고 양자를 맞이한 집안의 사정도 알아낼 수 있었다. 이렇게 우울한 아들의 장래를 걱정하는 한편 이미 70세가 지난 자신의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낀 근암은 서둘러 13세의 어린 아들을 결혼시켰다. 신부 박씨는 울산 출신이었다. 그로부터 4년 뒤인 1840년 근암은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는데 이는 水雲에게 매우 충격적인 사실이었다. 이 아픔은 그의 경전에서 이렇게 표현되고 있다.
「슬프게도 갑자기 부친이 돌아가시니 외로이 홀로 남은 나 자신은 이때 나이 열 여섯에 무엇을 알았으랴. 어린아이와 다름이 없었다. 선친의 일생 사업이 불에 타 흔적조차 없으니 不肖한 자식의 餘恨이 世間事에 낙심만 일으킨다. 어찌 애닯지 않으며 어찌 애석하지 않으랴! 집안일에 뜻이 있으나 어찌 농사일을 알 수 있으며, 글공부가 독실하지 못하니 靑雲의 뜻마저 꺾이었다. 家産은 점차로 기울고 앞날이 어찌 될 지 알 수 없다. 나이는 점점 늘어가 신세가 장차 어려워질 것이 한탄스럽고, 팔자를 헤아릴 수 없으니 헐벗고 굶주릴 것도 염려스럽다…..하는 일마다 어긋나니 일신을 둘 곳이 없음을 스스로 슬퍼한다.」1)
아버지의 3년상을 치른 후 끝내 가출을 했는데 그의 나이 19세(1843) 전후였을 것으로 보인다. 1년여 동안 세상을 돌아보면서 그는 말로만 듣던 서학도 직접 목격할 수 있었고, 장사를 하면서 숙식을 해결할 수는 있었으나 그 길로 자신이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20세(1844)가 되던 해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수운은 세상을 돌아보면서 안으로는 나쁜 질병・천재・지변・정치적 문란 등으로 말미암아 민중이 시달림을 받고, 밖으로는 서양의 놀라운 무력이 이 나라를 위협하고 있는 것을 깨닫고 이 세상이 뿌리로부터 무너져간다고 느꼈다.
「八道 江山 다 밟아서
人心 風俗 살펴보니
무가내라 할 길 없네
우습다 世上 사람
不顧天命 아닐런가」 <몽중노소문답가>
인심 풍속을 살펴보니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無可奈)」는 것은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절망의 심경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이 세상이 왜 이렇게 절망적으로 되었을까? 수운은 세상 사람이 「한울님의 뜻(天命)」을 돌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깨닫게 되었다. 이리하여 수운은 무엇보다 한울님의 뜻을 알아내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이제 求道의 뜻을 두고 다시 가출하게 되는데 이때 그가 주로 周遊한 곳은 佛寺였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의 경전에 잘 나타나고 있다.
「路柳閑談 無事客이
팔도강산 다 밟아서
全羅道 隱寂庵에
換歲次 消日하니
무정한 이 세월에
놀고보고 먹고보세」2)
그는 금강산을 거쳐 귀가한 후로 다시 명상과 고행의 시간을 갖는다. 이때 그는 신비체험을 겪는다. 그는 금강산 楡岾寺에서 온 異僧의 顯身을 보고 그에게서 異書를 받아 得道하게 된다. 異僧으로부터 받은 異書를 터득한 수운은 梁山 通度寺로 들어가 49일의 기도를 마친다. 기도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수운은 집안에 龍潭亭을 짓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건지겠다」는 뜻으로 이름을 「濟愚」라 고치고 다시 고뇌에 찬 명상의 시대로 들어간다. 그러던 중 哲宗 11년(庚申, 1860년) 4월, 그가 36세에 이르던 해에 大覺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그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뜻밖에 4월 초닷새 날 마음이 선듯하고 몸이 떨려 질병이라 하기에는 증세를 모르겠고 말로써도 표현하기 어려운 즈음에 어디에서인지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오더라. 깜짝 놀라 일어나서 캐어 물으니 “두려워 말고 겁내지 말라. 세상사람들이 나를 일러 上帝라고 부르는데 너는 상제를 알지 못하느냐” 하였다. 그 까닭을 물으니 “나 또한 아무런 功이 없으므로 너를 세상에 내어 보내 이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도록 하는 것이니 의심하지 말라” 하였다. “그러면 西道(서학)로써 사람을 가르치오리까”하고 물으니 (상제가) “아니다. 나에게 靈符가 있으니 그 이름은 仙藥이요 그 모양은 太極이요 또 모양은 弓弓이니 나의 영부를 받아 질병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을 구하고 나의 주문을 받아 나를 위해 사람들을 가르치면 너는 長生하여 덕을 온 천하에 퍼뜨리리라” 하였다.」3)
목소리의 주인공은 자신을 上帝라고 소개한다. 이 상제라는 표현은 수운 자신의 목소리이다. 西敎로써 세상을 구제할 수 없다는 것도 바로 水雲 자신의 평소 외침을 다짐하는 것이었다.
절대자가 제시한 상징이 신령한 「부적」이었다는 말은 水雲 자신이 한국적 샤머니즘의 유민임을 의미한다. 그가 동학의 儀式 중에서 劒舞, 念誦, 부적, 그리고 그 밖의 주술적인 방법을 도입한 것은 대중의 생활 속에 접근하기 위하여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불가피한 현상이었다. 부적의 형태가 태극 같고 이름이 仙藥이었다든가 장생을 약속한 것은 동학의 도교적 성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弓弓을 제시한 것은 수운이 「정감록」에 접한 사실이 있음을 의미한다.
水雲의 大覺 장면은 俗人들의 눈에는 정신병적인 것이었다. 이는 부인 朴氏가 남편의 실성함을 낙담하여 세 번씩이나 물에 빠져 죽으려 했다는 사실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득도현상은 한민족의 토속신앙에서 볼 수 있는 신비주의적 요소를 띤 것임을 부인할 수가 없다. 애당초 水雲의 창도가 세간사에 전혀 뜻을 두지 아니한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국민들의 퇴폐적이고도 타락된 의식생활을 개혁하여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시키기 위하여 水雲이 창제한 여러 가지의 修道文이라든가 儀式이 급기야 신앙생활로 승화된 것이라고 볼 수가 있다. 따라서 수운의 창도는 결과적으로는 신앙생활로 비약하게 되었으나 水雲이 애당초에서부터 순수한 신앙생활만을 근본목적으로 삼고 출발한 것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수운이 대중에게 제시한 천도란 순수한 신앙생활의 지표로서가 아니라 廣濟蒼生을 위한 수단에서 비롯된 것이다.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