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의 주요 내용과 지향

 


1) 도가적 무위이화


우선 그는 유학적 소양을 버리지는 못했지만 당시 세상을 유학의 가르침이나 윤리만으로는 바로잡을 수 없음을 인정하였다. 예컨대 「유도불도 누천년의 운이 역시 다했다」<교훈가>라든가 「아서라 이 세상은 堯舜之治라도 不足施요 孔孟之德이라도 不足言이라」<몽중노소문답가>라는 경전가사에서 그런 인식을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천지운행에 관련된 一動一靜, 一盛一敗가 끝없이 반복되는 순환적인 天道에 눈을 돌렸다.2) 이것은 곧 <논학문>에서 「천도로서 無往不復之理를 받았다」고 말하여 자신의 중심사상이 되었음을 인정하였으며, 이어 劒歌에서 「時乎時乎 이내시호 不再來之 시호로다 만세일지 장부로서 5만 년지 시호로다」하여 지금이 5만 년의 운수로 새로운 세상(=후천)이 열린다는 확신으로 나타났다.


그렇지만 그는 이러한 후천은 개개인이 억지로 힘써서 오는 것이 아니라 천도의 운행과 같이 無爲而化의 자연적 조화에 의해 온다고 보았다.3) 무위이화는 자연으로부터 일탈하여 많은 문제를 낳는 인간의 有爲4)를 극복하기 위하여 제시된 도가의 무위자연 순응사상에서 시사받은 것으로 사회에 대한 적극적이고 실천적인 대안을 제시하기보다는 자연(=천도)의 운행에 부합되도록 기다리는 소극적인 측면이 강하다고 생각된다.5)


뿐만 아니라 순환적인 천도에 입각한 역사관은 사회 혹은 역사가 혼란→질서→ 혼란을6) 반복한다는 일종의 정체적 관점을 벗어나지 못함에 따라 발전적인 사회・역사의식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약점이 또한 존재한다. 이에 따라 현재를 「傷害之數」7)나 「괴질운수」8)로 규정하여 극복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있으나 과거・현재・미래를 장기적이고 발전적인 관점에서 조망하여 실천적 대안을 제시하는 데는 취약할 수밖에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9)




2) 현세적 지상신선


당시 조선사회에서는 장생불사하여 세속을 떠나 거룩하게 살기를 원하는 도가적 신선사상이 있었다. <교훈가>에 보면 「입도한 세상사람 그날부터 군자되어 무위이화될 것이니 지상신선 네 아니냐」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이는 바로 도가적 신선사상을 수용한 흔적이며 다만 현세 저쪽의 신선이 아니라 입도와 동시에 誠敬을 다해 정심수도하면10) 현세에서 신선이 된다는 현실적인 신선으로 바꾸었다. 하지만 신선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정성껏 장생의 주문을 외면서 불사의 仙藥(=靈符)을 먹어야 하고, 그렇게 했을 때 仙分이 있는 사람은 <安心歌>에서 「그럭저럭 먹은 符가 수백 장이 되었더라 칠팔삭 지내나니 가는 몸이 굵어지고 검던 낯이 희어지네 어화 세상사람들아 선풍도골 내 아닌가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 신명 좋을시고 불로불사 하단 말가」하는 것처럼 지상신선이 된다고 하였다. 이는 고통스런 현실에 대한 대안으로서 바로 이 땅에서 신선세계를 구현하려는 최제우의 바람을 드러내는 것이라 하겠다.


이 점이 내세관을 주장하는 서학과 달리 동학의 현세적이고 현실적인 특징으로 보인다. 그러나 누구도 인정할 수 있듯이 지상신선이 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는 비현실성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이렇게 살펴볼 때 동학은 양립할 수 없는 내용을 하나의 개념 속에 제시하였다. 하지만 이 점이 또한 기층 대중들과 만나서 그들을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였으니, 즉 지상신선에 대한 기층 대중들의 몰입이 가능했던 것은 그들이 논리적 판단에 따라 지상신선이 되고자 했기보다는 현실적 고통을 잠시라도 잊으려는 염원에서 가상적이고 자기 최면적인 지상신선을 꿈꾸었기 때문이었다. 이는 현실과의 일정한 거리(→現實超越, 現實離脫)를 동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지상신선은 고통과 모순에 가득찬 현실을 변혁시켜 실현되는 이른바 「해방된 민중적 세계」에서 추구되는 것은 분명 아니었다. 최제우도 1862년에 일어난 임술농민항쟁을 바라보면서 「농민봉기」의 거센 힘을 느꼈겠지만, 교인에게 「농민봉기」에의 참여를 유도한 어떠한 말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이때 만들어진 <修德文>은 가문의 몰락을 다시 환기하면서 仁義禮智를 주지시키고 수도에 정심하기를 바라는 내용으로 짜여져 있다. 또 같은 시기에 만들어진 <道德歌>에서도 최제우는 「우습다 저 사람은 지벌이 무엇이게 군자를 비유하며 문필이 무엇이게 도덕을 의논하노」라 하여 문벌과 학식을 비판하지만 뒤이은 구절에서 「수심정기 하여 내어 인의예지 지켜두고 군자말씀 본받아서 성경이자 지켜내어 선왕고례 잃찮으니 그 어찌 혐의되며 세간오륜 밝은 법은 인성지강으로서 잃지 말자」고 하여 전통적 유교 도덕질서의 회복과 수도를 강조하는 보수적 지식인의 시각을 표하고 있다. 즉 최제우는 「농민봉기」로 인해 기존의 질서가 붕괴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이런 앞뒤의 사정을 감안할 때 최제우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프로그램으로써 「해방된 민중적 세계」를 보여주거나 실현시킬 의도는 없었던 것 같고, 이런 기조는 그를 이은 2대, 3대 교주 단계에서도 동학을 보수적인 종교나 관념적 영역 속에 계속 머무르게 만든 요인 중의 하나로 생각된다.




3) 鄭鑑錄적 도참사상과 무극대도


그는 당시 기층 민중 사이에 뿌리내리고 있던 민중사상 중의 하나인 도참사상을 받아들였다.11) <몽중노소문답가>에서 이러한 도참사상적 모습을 가장 많이 보여주고 있다. 「곤륜산 일지맥의 조선국 금강산이 …. 천하승지 아닐런가 삼각산 한양도읍 사백 년 지낸 후에 하원갑 이 세상」으로 시작되는 그 첫 부분은 이심, 이연 형제가 정감과 함께 금강산에 올라 조선의 미래를 예언하는 정감록 감결의 첫 부분과 흡사하다. 이어 임진왜란 때 살아남는 비결은 「利在松松」이며 가산 정주 서적(西賊:관서농민전쟁) 때는 「利在家家」였지만 지금 혼란한 시기에 살아남는 비결은 「利在弓弓」뿐이라 하였다. 이재궁궁은 정감록적 예언적 비기로서 기층 대중의 피란의식과 이상세계에의 동경을 담고 있다.


수운은 『정감록』에 나타난 피란사상과 眞人사상, 왕조교체사상 등을 자연스럽게 흡수하여 병화가 없는 새로운 시대, 즉 다시 개벽되는 새 시대가 곧 도래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빈하고 천한 사람 오는 시절 부귀로세」12)라고 하여 다가오는 새 시대에는 「빈천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이 되리라고 예언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최제우는 이러한 도참사상이 일시적 방편이 될 뿐이라고 비판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즉 「매관매작 세도자도 일심은 궁궁이요 전곡 쌓인 부첨지도 일심은 궁궁이요 유리걸식 패가자도 일심은 궁궁이라 풍편에 뜨인 자도 혹은 궁궁촌 찾아가고 혹은 만첩산중 들어가고 혹은 서학에 입도해서 各自爲心하는 말이 내 옳고 네 그르지 시비분분 하는 말이 日日時時 그뿐일세」라고 하여 궁궁을 찾는 뜻이 모두가 제 마음대로 하려는 「各自爲心」의 이기심을 충족하려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최제우가 제시한 것은 그러한 「各自爲心」의 상태가 아닌 무극대도의 후천개벽이 곧 열려 모든 것이 일시에 해결된다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하원갑 지내거든 상원갑(1864년, 甲子) 호시절에 만고없는 무극대도 이 세상에 날 것이니 너는 또한 연천해서 억조창생 많은 백성 태평곡을 불구에 볼 것이니 이 세상 무극대도 전지무궁 아닐는가」<몽중노소문답가>라고 하여 무극대도가 실현될 시기까지 제시하였고, 교인에게는 「조갈은 잠시로다 생각코 생각하소」<흥비가>라고 하여 태평곡을 볼 날이 멀지 않았으니 초조하거나 동요하지 말고 수도에만 열중하게 하였다. 일종의 「최후의 심판의 날」을 예언한 셈이었다.13)


그러나 동학에 입도한 기층 대중들은 하루빨리 그런 날이 오기를 바랐을 것이니, 최제우와 이들간에는 일종의 갈등이 나타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고, 이는 최제우가 계속하여 교인들의 조급함을 경계하는 내용의 경전가사를 지을 수밖에 없었던 사실에서 입증된다. 여기서 최제우의 동학은 사상적인 측면에서 2)항에서 지적하였듯이 현실과의 거리가 존재하는(→현실초월적, 현실이탈적) 현실부정성을 지니고 있는 한편, 행위적 지향의 측면에서도 최제우의 의도와 일반 교인의 바람이 서로 괴리를 보임으로써 최제우와 일반 교인간에는 쉽게 허물 수 없는 벽이 존재하였던 것 같다.




4) 치병구복


기층 대중에게 어쩌면 가장 두려운 존재는 언제 오는지 모르게 와서는 고통 속에서 생명을 앗아가는 질병의 마수가 아니었을까. 당시 전염병은 한번 돌면 엄청난 희생자를 내고 한 마을을 텅 비게 만들었다. 그래서 기층 민중은 언제나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빌고 빌었다. 최제우는 이런 치병염원도 놓치지 않고 자신의 체계 속으로 끌어들였다. 수운이 보여준 치병의 능력에 대해 당시의 민중들이 깊은 관심을 가졌던 배경에는 조선후기에 1만 명 이상 10만 명 이하의 사망자를 낸 전염병이 17세기부터 19세기까지 200여 년 동안 9회에 걸쳐 유행하고, 1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경우도 6회에 달했다14)는 역사적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당시 조정에서도 속수무책이었던 무서운 전염벙에 대한 대비책을 得道體驗을 통하여 독특한 방식으로 제시하고 있는 수운의 가르침은 그가 당시 일반 민중들의 처지에 대해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치병사상은 동학사상의 주목할만한 특징이라 간주해도 좋을 것이다.15) 즉 「나에게 靈符가 있으니 그 이름은 선약이오 ….그 형태는 궁궁이니 ….사람들의 질병을 구하고 나의 주문을 받아 나를 위해 다른 사람을 가르치면」<포덕문>에서 부적 즉, 선약으로써 질병을 고친다고 하는 전형적인 치병구복의 민간신앙의 한 모습을 이어받고 있음이 확인된다. 천주교에서도 신도를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시약소를 설치하였는데, 최제우도 이와 유사하게 부적을 통해 기층 대중들의 질병을 치료해주곤 했던 것이다.


여기에다 「8도 불전에 시주하고 지성으로 山祭해서 백배축원 앙천하며 주소간 비는 날이 지성감천 아닐는가」<몽중노소문답가>하여 불교와 어우러진 기복신앙까지도 최제우는 놓치지 않았다.


물론 이런 비현실적이고 신비적인 내용은 기층 대중들에게 다가가는 하나의 단순한 방편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동학이 종교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한 핵심적인 한 영역을 차지할 수밖에 없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이런 단순한 사유형태와 염원으로서의 치병구복이야말로 어쩌면 기층 대중들과의 일체감을 형성시켜줄 가장 확실한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이를 확대시켜 洋學을 물리치고 東學을 수호하는 데까지 연장시키고 있었다는 점에 있다. 경상감사 서헌순의 보고에 의하면 「최제우가 ….敬天順天의 마음으로써 「爲天主顧我情 永世不忘萬事宜」란 13자 주문을 짓고 동학이라 이름한 것은 동국의 뜻을 딴 것이데, 洋學은 陰이고 東學은 陽이라. 양으로써 음을 제압하려면 동학의 주문을 늘 외면된다」16)라고 하였다. 서양세력과 서학에 대응하는 방안으로서 주문 외는 행위를 제시하였다는 것은 지극히 초보적이거나 환상적인 동학의 대사회적 실천프로그램을 보여준다. 이 점은 역시 종교로서의 동학과 사회운동을 추진할 수 있는 집단으로서의 동학과는 서로 거리가 있었음을 의미한다. 




5) 「侍天主」와 「修心正氣」에 나타난 평등사상


수운은 ꡔ동경대전ꡕ <論學文>에서 「吾心卽汝心」, 「天心卽人心」이라는 표현을 통하여, 그리고 ꡔ용담유사ꡕ <敎訓歌>에서 「나는 도시 믿지 말고 한울님만 믿었어라 네 몸에 모셨으니 사근취원 하단말가」라는 표현을 통하여 종래 우리 민족이 경건하게 모셔오던 「한울님」과 인간이 둘이 아님을 천명하였다. 즉 수운이 오랜 수련 끝에 체험한 「한울님」은 어떤 초월성을 가지고 천상에 존재하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한울님」이 아니라 바로 자기 안에 모셔져 있는 「한울님」을 의미하였다. 


따라서 신분과 남녀의 차별, 노소의 구별이 엄격했던 당시 사회에서 신분의 고하나 남녀노소에 관계없이 그 어떤 사람이라 할지라도 동학의 가르침을 통하여 수련하게 되면 「시천주」, 즉 「한울님」과 일체화가 될 수 있고, 자기 안에 모셔진 「한울님」을 체험할 수 있다는 시천주사상이야말로 조선왕조 신분제를 타파하고 근대적 평등사상을 확립하게 하는 논리적 근거가 된다는 점에 역사적 의의가 크다 할 것이다.


수운이 천명한 「시천주」를 근거로 하여 확립된 동학의 평등사상은 수운의 사후 海月 崔侍亨(1827∼1898)을 통해 「베짜는 며느리가 바로 한울님이다」, 「어린이를 때리는 것은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다」라는 범천론적 동학사상으로 확대되어 민중들 속에서 실천됨으로써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동학조직이 민중들을 광범위하게 결속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그렇다면 동학의 가르침 속에는 모든 사람들이 평등하다는 근거가 되는 「侍天主」, 즉 「한울님」과 일체화를 이루고, 내가 바로 「한울님」이 되는 구체적 실천 방법이 어떻게 제시되고 있는가. 수운은 자기 안에 모셔져 있는 한울님을 체험하는 구체적 수행 방법론으로 「수심정기」라는 수행의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17) 마음을 닦고 기운을 바르게 함으로써 侍天主, 즉 「한울님」과의 일체화를 이룰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또한 수운은 수심정기를 보다 구체적으로 이루어가는 방법으로서 「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造化定 永世不忘萬事知」라는 21자 주문18)을 열심히 독송하는 방법과 함께 誠敬信19)을 통한 수행법을 제시하고 있다.




6) 동학사상의 양대 체계


이처럼 동학은 유교적 세계관에서 출발하여 서학의 충격 아래 민중사상의 여러 요소가 복합적으로 수용되어 하나의 체계를 이룬 종교이며 사회사상이었다. 이러한 동학의 사상적 구조는 두 개의 큰 골격으로 체계화된다.


첫째는 氣一元論的 우주관 속에서 한울님을 바로 자기와 일체화시킨 인간관 제시이다. 이때 氣는 성리학에서 말하는 理氣관계의 사변적이고 철학적인 기 개념이 아니다. 인간의 생활공간에서는 虛靈蒼蒼하여 그 본질을 쉽게 알기 힘드나 한편으로는 형태가 있는 듯하고 들을 수 있는 듯하여 인간과 교호할 수 있는 至氣의 상태로서 비인격적 인간화의 전단계로 파악되는 기이다. 이런 기론에 바탕한 인간관은 그 지극한 기를 자신의 정성에 따라 내 몸속에 영원히 모실 수 있는(=시천주), 그리하여 한울님과 하나가 되는 자연・인간 합일사상(→天人一如, 天人合一)으로서 이른바 事人如天을 거쳐 人乃天사상으로 발전할 수 있는 초기의 모습이었다.


둘째는 무위이화의 조화 속에서 천도운행에 따른 선후천 순환운동론 확립이다. 무위이화는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그리하여 그 조화가 이미 천도로써 정해져 있는 부분이다(=조화정). 천도는 인간이 바꿀 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 천도에 순응할 때 가장 조화롭고 정의로운 인간사회가 구현된다. 즉 天時(=節候)와 인간의 행위가 서로 일치될 때 가장 풍족한 결실을 이룩할 수있다는 농경사회의 전통적 자연순응사상에 뿌리를 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동학은 동양적 사유체계가 분화되기 이전의 상태를 철학적 전제로 삼은 것 같고, 이에 따라 당시 조선사회에 전파된 儒・佛・仙을 합일하려는 사상적 지향이 발견된다.20)


그런데 이러한 양대 골격은 별개의 내용이 아니라 서로 표리를 이루는 것으로서,최제우는 이를 하나의 呪文 속에서 통일적으로 제시하였다. 곧 「至氣今至 願爲大 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라는 21자의 주문 속에 일원적으로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최제우는 누구나 동학에 입도하여 誠・敬・信을 다해 이 주문만 외운다면 자연・인간의 합일을 통해 투쟁과 갈등이 없는 조화로운 무극대도의 후천이 어느덧 찾아와 지상선경을 체험하고 향락할 수 있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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