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종교의 공통 도시 예루살렘
창세기에는 예루살렘의 옛 왕 멜키세덱(Melchizedek, King of salem)이 떡과 포도주를 갖고 나와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고 쓰여 있다.
ꡒ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내리소서ꡓ(창세 14, 19).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이사악을 제물로 바친 곳이 모리야(Moria) 땅이라고 했는데(창세 22, 2),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의 산성전(山聖殿, The Temple Mount of Jerusalem)의 터라고 유다인들은 믿고 있다.
한편 이슬람교에서는 위의 번제 사실을 기념해서 그들의 달력 12월 10일에 ‘제사의 축일(Id al-Adha-Festival of Sacrifice)’로 지내고 있다.
1.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
다윗 왕이 예루살렘의 원주민 여부스족(Jebusite)을 정복하여 통일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였다(2사무 6, 1-15). 그리고 그는 40년간 왕위에 있었다.
ꡒ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햇수는 40년이다. 헤브론에서 7년, 예루살렘에서 33년을 다스렸다ꡓ(2열왕 2, 12).
다윗 왕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 연도가 대략 기원전 1002년이라고 역사가들은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1995년에 예루살렘 정도 3천년(定都三千年)의 축제를 지냈다. 그것은 서력 기원의 계산에 있어 7년 내지 5년의 오차(誤差)가 있다는 학설을 인정하고 7년을 앞당겨 지낸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예루살렘 성전을 하느님 야훼의 거처로 생각하고 그를 찬미하고 존경하며 살아왔다. 시편의 순례자의 노래를 들어보자!
ꡒ야훼 집에 가자 할 때, 나는 몹시도 기뻤다…. 예루살렘아, 과연 수도답게 잘도 짜여졌구나…. 야훼 이름 기리러 그리로 올라가는구나. 재판석이 거기에 있고 다윗 가문이 앉을 자리 또한 거기에 있구나.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의 소리 외쳐라! ‘네 집안에 평화!’ ‘네 성 안에 평화!’ ‘궁궐 안에 평화!’ 내 겨레, 내 벗들을 나 사랑하거늘 ‘너에게 평화!’ 외치게 해 다오! 우리 하느님 야훼의 집을 나 사랑하거늘 너에게 복이 있으랴ꡓ(시편 122, 1-9).
그러나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Nabuchodonosor, B.C. 605-562 제위)이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성전을 파괴하고 18세 된 여호야긴(Joachin) 왕과 수많은 유다인들을 포로로 삼아 바빌론으로 데려갔다. 그것이 제1차 바빌론 유배(流配, Babylonian Captivity)로서 기원전 598-597년에 이루어졌고, 다음 기원전 587-586년에 예루살렘 성전 완전 파괴 후 제2차 유배로 많은 유다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비극은 이미 예레미야가 예언한 바 있다.
ꡒ이 일대는 끔찍한 폐허가 되고 여기에 살던 민족들은 모두 70년 동안 바빌론 왕의 종 노릇을 할 것이다ꡓ(예레 25, 11).
ꡒ너희가 바빌론에서 70년을 다 채운 다음에야 약속대로 나는 너희를 찾아가 이곳으로 다시 데려오리라ꡓ(예레 29, 10).
느부갓네살 왕조를 이은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Cyrus the Great)이 기원전 538년에 유다인들의 귀향을 허락함으로써 바빌론 유배는 끝나게 된다.
그런데 역사가들은 제2차 바빌론 유배부터 고레스 왕의 사면까지 48년밖에 안 되는데 어떻게 예레미야의 70년 유배를 설명하느냐 하며 문제삼는다. 위의 문제에 있어 바빌론 왕의 유다 침범(B.C. 608)부터 고레스 왕의 사면(B.C. 538)까지 70년과 제2차 바빌론 유배(B.C. 586)부터 예루살렘에 새 성전의 건립(B.C. 516)까지 70년을 거론하고 있다.
새로운 성전 건립은 바빌론 왕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ꡒ다리우스 황제는 아래와 같은 영을 내렸다….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국고금에서 그 비용을 모자라지 않게 제때 제때 지불하도록 하여라. 그 밖에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대어 주도록 하여라….’ 일이 끝난 것은 다리우스 황제 제6년 아달월 3일이었다. 사제들과 레위인들,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일반인 이렇게 온 이스라엘 백성은 기뻐하며 하느님 성전 봉헌 예배를 올렸다ꡓ(에즈 6, 6-18).
그 후 웅장한 성전은 헤로데 왕 시대에 건립되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탄생 조금 전에 이루어졌다. 그 성전이 기원후 70년에 티투스의 로마 제국 군대에 의하여 파괴되고 예루살렘 도시가 하드리아누스 황제(Hadrian, A.D. 135)에 의하여 파멸되면서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도시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터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석상을 세워 놓고 소수의 유다인들만이 예루살렘에 살게 되었고 대부분의 유다인들은 고국에서 쫓겨나 세계 여러 나라로 흩어져 유랑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외지에 살면서 조국을 그리며 ꡒ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Next year in Jerusalem!)ꡓ라는 희망을 갖고 파스카 축일을 매년 맞이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통곡의 벽(Wailing Wall)’ 앞에서 이스라엘의 재건을 위한 기도를 바쳤다.
드디어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이 국제 연합에 의하여 선포되었고, 1967년의 아랍과의 전쟁에서 예루살렘 동부가 이스라엘 통치에 재결합됨으로써 유다인들은 그들의 성지를 완전히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예루살렘 인구는 56만 명인데 그중 40만 명이 유다인들이고 14만 명이 모슬렘들이다.
2. 크리스찬의 발생지 예루살렘
예수는 다윗의 후손으로 유다 지방 베들레헴에서 났다. 다윗의 아버지의 이름이 이새(Jesse)였는데, 그의 족보를 ‘이새의 나무(Tree of Jesse)’라는 그림으로 표시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성서의 구절에 근거한 것이다.
ꡒ이새(Jesse)의 그루터기에서 첫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 야훼의 명이 그 위에 내린다ꡓ(이사 11, 1).
ꡒ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ꡓ(마태 1, 6).
중세 때(A.D. 11세기) 다윗 왕의 아버지 이새를 뿌리로 해서 예수에 이르기까지의 족보를 나무 그림으로 그렸다. 회화, 스테인드 글라스(stained glass)와 조각 등에 ‘이새의 나무’를 그렸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그림을 맨 꼭대기에 안치했으나 차차 마리아 공경이 열을 올리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마리아가 예수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을 ‘이새의 나무’에 담기 시작했다.
유다 나라가 고향인 예수에게는 갈릴래아, 사마리아, 유다의 여러 지방과 도시 그리고 예루살렘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나자렛은 소년 예수가 살던 곳이고 갈릴래아의 겐네사렛 호숫가는 그의 설교 장소였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은 그가 기도드리런 곳일 뿐만 아니라 예수와 많은 사연을 맺고 또 일화를 많이 담고 있는 곳이다.
가령 모세의 법대로 정결 예식을 치르기 위하여 예수 아기를 예루살렘 성전에 데리고 갔을 적에 시므온이 아기를 팔에 안고 다음과 같이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ꡒ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ꡓ(루가 2, 30-32).
12세의 소년 예수가 과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가 요셉과 마리아와 같이 어긋나 서로 찾아 헤매는 사건이 생겼다(루가 2, 41-50).
예수는 그의 공생활 중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면서 ꡒ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다ꡓ(마르 11, 17)라고 강조하였다.
예수 수난 시에는 게쎄마니 동산에서 잡혀 대사제 가야파의 집으로 끌려갔다(마태 26, 47-65). 다음 로마 제국의 총독 빌라도의 관저에 인도되어 사형 언도를 받고(마태 27, 1-26) 마침내 골고타(해골산) 사형장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루가 23, 33).
기원후 312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로 귀의한 다음 그의 어머니 헬레나의 열성으로 ‘예수의 무덤 성전(Church of the Holy Sepulchre)’이 건립됨으로써 그 성전은 크리스찬 순례자들의 중심과 목표가 되었다.
3. 모슬렘의 성지 예루살렘
아랍어로 예루살렘을 쿠드(al-Qud, al-Kud)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성전(Temple of Salomon)을 뜻한다. 일찍이 마호메트가 메카를 향하여 기도드리기 전에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드린 곳이며 또 그가 환상 중에 7층 하늘에 올라가서 다른 예언자들을 만난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었다.
코란에는 마호메트의 영적 승천(靈的昇天, Miraj)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ꡒ하느님의 종을 성스러운 모스크로부터 내가 인간에게 징표를 보여주기 위하여 축복한 곳인 먼 곳의 모스크까지 밤을 도와 보내시는 하느님께 영광 있으라ꡓ(코란 17, 2).
위의 ‘먼 곳의 모스크(al-Aqsa)’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곳을 ’축복한 곳‘이라고 부르고 있다.
‘영적 승천’의 낱말 Miraj는 본시 사다리(ladder)를 뜻하는 말이었는데 그것을 승천(ascent)으로 알아듣게 되었다. 마호메트는 그곳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ꡒ그는 뚜렷한 지평선에서 하느님을 보았느니라ꡓ(코란 81, 24).
역사적으로 기원후 638년 제2대 칼리프(caliph: 回敎王) 우마르(Umar, 634-644 재위)가 예루살렘을 군사적으로 점령하면서 그곳은 이슬람과 크리스찬이 서로 자주 만나는 도시가 되었다. 우마르는 당시 예루살렘의 가톨릭 총주교 소프로니우스(Sophronius, A.D. 560-638)에게 교회를 종전대로 사용할 것과 종교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약속해 주었다. 우마르는 총주교와 같이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처음에 이슬람은 상당히 조심스럽게 크리스찬들과 접촉하여 크리스찬의 성전을 빼앗아 모스크(회당)로 쓰지 않고 빈터에 따로 지었다. 메카에 있는 카바(Kaaba)의 ‘검은 방형전(方形塼)’을 본받아 예루살렘에 ‘반석의 회당(Dome of the Holy Rock)’을 건립하였는데 그것은 우마르 칼리프가 도시를 점령한 다음 54년 후에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 때 비로소 완공되었다. 모슬렘들은 말하기를 카바의 석전이 ’거룩한 신부(新婦, Holy Bride)’라면 예루살렘의 반석의 회당은 ‘거룩한 신랑(新郞, Holy Bridegroom)’이 된다는 것이다. 새로 건립된 반석의 회당은 크리스찬의 ’예수의 무덤 성전(Church of the Holy Sepulchre)‘보다 더 크고 더 웅장한 모습으로 세워졌다.
위와 같이 이슬람의 회당이 예루살렘에 새로이 건설됨으로써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종교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두 종교는 처음부터 반목하고 투쟁한 것이 아니었다. 십자군이 11세기에 성지에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이슬람의 교세가 우세했지만 그런대로 두 종교는 공존하고 있었다.
가령 9세기에 아바스 왕조의 회교왕 하룬 라시드(Harun al-Rashid Abbasid Caliph)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 샤를마뉴 대왕(Charlemagne, A.D. 742-814)의 대관식에(A.D. 800) 예루살렘 성지를 마음대로 순례할 수 있도록 ‘예루살렘 시의 열쇠(Keys to the City of Jerusalem)’를 선물로 보냈다. 그런데 1009년에 이집트의 파티마 칼리프 하킴(Fatimid Caliph al-Hakim)이 예수의 무덤 성전을 철거함으로써(demolition) 크리스찬의 감정을 크게 상하게 했고 그것이 꼬투리가 되어 십자군이란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유다교인 동방 크리스찬 모슬렘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대학살을 자행했고 그 후 이슬람의 살라딘 장군(Saladin, 1138-1193)이 1187년 예루살렘을 재탈환해서 십자군이 건설해 놓은 크리스찬의 건설을 모두 이슬람 색채로 바꾸어 놓았다.
십자군 시대에 있어 서로마 제국의 황제 프레데릭 2세(Frederick Ⅱ, 1220-1250 재위)가 예루살렘을 15년간(1229-1244) 지배할 때에는 모슬렘과 유다교인들은 예루살렘 도시에 살 수 없도록 금지시켰다. 그 후 1516-1517년에 터키의 오토만 왕조(Ottoman Dynasty)의 술탄 셀림 1세(Selim Ⅰ)가 예루살렘과 이집트를 점령함으로써 성지는 4백 년간 터키 왕국의 지배를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까지 받게 되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민족은 예루살렘 없이 그들의 신앙은 건립될 수 없다고 생각해서 ‘하느님의 도시(The City of God)’라고 불렀고, 모슬렘은 마호메트가 예루살렘을 통하여 천국에 올라갔다는 신앙을 갖고 ’축복된 회당‘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이 천국에 들어가는 문이며 또한 그곳을 통하여 하느님이 최후의 심판을 하러 내려오실 곳으로 믿고 있다. 크리스찬의 여러 교파들은 각자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여서 에큐메니컬 공동체(The Ecumenical Community of Christians)를 이루고 평화 공생(共生)하고 있다. 오늘의 예루살렘은 세 종교가 어떻게 해서 세계 평화를 실현시키느냐 하는 어려운 과제를 보여주는 동시에 또한 그 평화의 실현을 기다리는 장소가 되고 있다. 따라서 세 종교의 유다인 크리스찬 모슬렘들은 다 같이 평화의 길을 모색할 의무감이 그들 어깨에 지워져 있음을 명심해야 마땅하다.

세 종교의 공통 도시 예루살렘
창세기에는 예루살렘의 옛 왕 멜키세덱(Melchizedek, King of salem)이 떡과 포도주를 갖고 나와 아브라함에게 복을 빌어 주었다고 쓰여 있다.
ꡒ하늘과 땅을 만드시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내리소서ꡓ(창세 14, 19).
그리고 아브라함이 하느님께 이사악을 제물로 바친 곳이 모리야(Moria) 땅이라고 했는데(창세 22, 2), 그곳이 바로 예루살렘의 산성전(山聖殿, The Temple Mount of Jerusalem)의 터라고 유다인들은 믿고 있다.
한편 이슬람교에서는 위의 번제 사실을 기념해서 그들의 달력 12월 10일에 ‘제사의 축일(Id al-Adha-Festival of Sacrifice)’로 지내고 있다.
1. 이스라엘의 수도 예루살렘
다윗 왕이 예루살렘의 원주민 여부스족(Jebusite)을 정복하여 통일 이스라엘 국가를 세우고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하였다(2사무 6, 1-15). 그리고 그는 40년간 왕위에 있었다.
ꡒ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햇수는 40년이다. 헤브론에서 7년, 예루살렘에서 33년을 다스렸다ꡓ(2열왕 2, 12).
다윗 왕이 예루살렘을 수도로 정한 연도가 대략 기원전 1002년이라고 역사가들은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1995년에 예루살렘 정도 3천년(定都三千年)의 축제를 지냈다. 그것은 서력 기원의 계산에 있어 7년 내지 5년의 오차(誤差)가 있다는 학설을 인정하고 7년을 앞당겨 지낸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예루살렘 성전을 하느님 야훼의 거처로 생각하고 그를 찬미하고 존경하며 살아왔다. 시편의 순례자의 노래를 들어보자!
ꡒ야훼 집에 가자 할 때, 나는 몹시도 기뻤다…. 예루살렘아, 과연 수도답게 잘도 짜여졌구나…. 야훼 이름 기리러 그리로 올라가는구나. 재판석이 거기에 있고 다윗 가문이 앉을 자리 또한 거기에 있구나.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화의 소리 외쳐라! ‘네 집안에 평화!’ ‘네 성 안에 평화!’ ‘궁궐 안에 평화!’ 내 겨레, 내 벗들을 나 사랑하거늘 ‘너에게 평화!’ 외치게 해 다오! 우리 하느님 야훼의 집을 나 사랑하거늘 너에게 복이 있으랴ꡓ(시편 122, 1-9).
그러나 바빌론의 왕 느부갓네살(Nabuchodonosor, B.C. 605-562 제위)이 예루살렘에 쳐들어와 성전을 파괴하고 18세 된 여호야긴(Joachin) 왕과 수많은 유다인들을 포로로 삼아 바빌론으로 데려갔다. 그것이 제1차 바빌론 유배(流配, Babylonian Captivity)로서 기원전 598-597년에 이루어졌고, 다음 기원전 587-586년에 예루살렘 성전 완전 파괴 후 제2차 유배로 많은 유다인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비극은 이미 예레미야가 예언한 바 있다.
ꡒ이 일대는 끔찍한 폐허가 되고 여기에 살던 민족들은 모두 70년 동안 바빌론 왕의 종 노릇을 할 것이다ꡓ(예레 25, 11).
ꡒ너희가 바빌론에서 70년을 다 채운 다음에야 약속대로 나는 너희를 찾아가 이곳으로 다시 데려오리라ꡓ(예레 29, 10).
느부갓네살 왕조를 이은 페르시아의 고레스 대왕(Cyrus the Great)이 기원전 538년에 유다인들의 귀향을 허락함으로써 바빌론 유배는 끝나게 된다.
그런데 역사가들은 제2차 바빌론 유배부터 고레스 왕의 사면까지 48년밖에 안 되는데 어떻게 예레미야의 70년 유배를 설명하느냐 하며 문제삼는다. 위의 문제에 있어 바빌론 왕의 유다 침범(B.C. 608)부터 고레스 왕의 사면(B.C. 538)까지 70년과 제2차 바빌론 유배(B.C. 586)부터 예루살렘에 새 성전의 건립(B.C. 516)까지 70년을 거론하고 있다.
새로운 성전 건립은 바빌론 왕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ꡒ다리우스 황제는 아래와 같은 영을 내렸다…. ‘유프라테스 서부 지방에서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국고금에서 그 비용을 모자라지 않게 제때 제때 지불하도록 하여라. 그 밖에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대어 주도록 하여라….’ 일이 끝난 것은 다리우스 황제 제6년 아달월 3일이었다. 사제들과 레위인들, 사로잡혀 갔다가 돌아온 일반인 이렇게 온 이스라엘 백성은 기뻐하며 하느님 성전 봉헌 예배를 올렸다ꡓ(에즈 6, 6-18).
그 후 웅장한 성전은 헤로데 왕 시대에 건립되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 탄생 조금 전에 이루어졌다. 그 성전이 기원후 70년에 티투스의 로마 제국 군대에 의하여 파괴되고 예루살렘 도시가 하드리아누스 황제(Hadrian, A.D. 135)에 의하여 파멸되면서 유다인들이 예루살렘 도시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시켰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 터에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석상을 세워 놓고 소수의 유다인들만이 예루살렘에 살게 되었고 대부분의 유다인들은 고국에서 쫓겨나 세계 여러 나라로 흩어져 유랑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들은 외지에 살면서 조국을 그리며 ꡒ내년에는 예루살렘에서(Next year in Jerusalem!)ꡓ라는 희망을 갖고 파스카 축일을 매년 맞이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통곡의 벽(Wailing Wall)’ 앞에서 이스라엘의 재건을 위한 기도를 바쳤다.
드디어 1948년 이스라엘의 독립이 국제 연합에 의하여 선포되었고, 1967년의 아랍과의 전쟁에서 예루살렘 동부가 이스라엘 통치에 재결합됨으로써 유다인들은 그들의 성지를 완전히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예루살렘 인구는 56만 명인데 그중 40만 명이 유다인들이고 14만 명이 모슬렘들이다.
2. 크리스찬의 발생지 예루살렘
예수는 다윗의 후손으로 유다 지방 베들레헴에서 났다. 다윗의 아버지의 이름이 이새(Jesse)였는데, 그의 족보를 ‘이새의 나무(Tree of Jesse)’라는 그림으로 표시한 사실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성서의 구절에 근거한 것이다.
ꡒ이새(Jesse)의 그루터기에서 첫순이 나오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돋아난다. 야훼의 명이 그 위에 내린다ꡓ(이사 11, 1).
ꡒ이새는 다윗 왕을 낳았다ꡓ(마태 1, 6).
중세 때(A.D. 11세기) 다윗 왕의 아버지 이새를 뿌리로 해서 예수에 이르기까지의 족보를 나무 그림으로 그렸다. 회화, 스테인드 글라스(stained glass)와 조각 등에 ‘이새의 나무’를 그렸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그림을 맨 꼭대기에 안치했으나 차차 마리아 공경이 열을 올리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마리아가 예수 아기를 안고 있는 모습을 ‘이새의 나무’에 담기 시작했다.
유다 나라가 고향인 예수에게는 갈릴래아, 사마리아, 유다의 여러 지방과 도시 그리고 예루살렘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나자렛은 소년 예수가 살던 곳이고 갈릴래아의 겐네사렛 호숫가는 그의 설교 장소였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은 그가 기도드리런 곳일 뿐만 아니라 예수와 많은 사연을 맺고 또 일화를 많이 담고 있는 곳이다.
가령 모세의 법대로 정결 예식을 치르기 위하여 예수 아기를 예루살렘 성전에 데리고 갔을 적에 시므온이 아기를 팔에 안고 다음과 같이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ꡒ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이 구원은 이방인들에게는 주의 길을 밝히는 빛이 되고 주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이 됩니다ꡓ(루가 2, 30-32).
12세의 소년 예수가 과월절에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갔다가 요셉과 마리아와 같이 어긋나 서로 찾아 헤매는 사건이 생겼다(루가 2, 41-50).
예수는 그의 공생활 중 성전에서 장사꾼들을 쫓아내면서 ꡒ성전은 기도하는 집이다ꡓ(마르 11, 17)라고 강조하였다.
예수 수난 시에는 게쎄마니 동산에서 잡혀 대사제 가야파의 집으로 끌려갔다(마태 26, 47-65). 다음 로마 제국의 총독 빌라도의 관저에 인도되어 사형 언도를 받고(마태 27, 1-26) 마침내 골고타(해골산) 사형장에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루가 23, 33).
기원후 312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그리스도교로 귀의한 다음 그의 어머니 헬레나의 열성으로 ‘예수의 무덤 성전(Church of the Holy Sepulchre)’이 건립됨으로써 그 성전은 크리스찬 순례자들의 중심과 목표가 되었다.
3. 모슬렘의 성지 예루살렘
아랍어로 예루살렘을 쿠드(al-Qud, al-Kud)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성전(Temple of Salomon)을 뜻한다. 일찍이 마호메트가 메카를 향하여 기도드리기 전에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기도드린 곳이며 또 그가 환상 중에 7층 하늘에 올라가서 다른 예언자들을 만난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었다.
코란에는 마호메트의 영적 승천(靈的昇天, Miraj)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ꡒ하느님의 종을 성스러운 모스크로부터 내가 인간에게 징표를 보여주기 위하여 축복한 곳인 먼 곳의 모스크까지 밤을 도와 보내시는 하느님께 영광 있으라ꡓ(코란 17, 2).
위의 ‘먼 곳의 모스크(al-Aqsa)’는 예루살렘을 가리키는 것이고 그곳을 ’축복한 곳‘이라고 부르고 있다.
‘영적 승천’의 낱말 Miraj는 본시 사다리(ladder)를 뜻하는 말이었는데 그것을 승천(ascent)으로 알아듣게 되었다. 마호메트는 그곳에서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ꡒ그는 뚜렷한 지평선에서 하느님을 보았느니라ꡓ(코란 81, 24).
역사적으로 기원후 638년 제2대 칼리프(caliph: 回敎王) 우마르(Umar, 634-644 재위)가 예루살렘을 군사적으로 점령하면서 그곳은 이슬람과 크리스찬이 서로 자주 만나는 도시가 되었다. 우마르는 당시 예루살렘의 가톨릭 총주교 소프로니우스(Sophronius, A.D. 560-638)에게 교회를 종전대로 사용할 것과 종교 활동을 계속할 수 있도록 약속해 주었다. 우마르는 총주교와 같이 성전에 들어가서 기도를 드렸다고 한다.
처음에 이슬람은 상당히 조심스럽게 크리스찬들과 접촉하여 크리스찬의 성전을 빼앗아 모스크(회당)로 쓰지 않고 빈터에 따로 지었다. 메카에 있는 카바(Kaaba)의 ‘검은 방형전(方形塼)’을 본받아 예루살렘에 ‘반석의 회당(Dome of the Holy Rock)’을 건립하였는데 그것은 우마르 칼리프가 도시를 점령한 다음 54년 후에 우마이야 왕조(Umayyad Dynasty) 때 비로소 완공되었다. 모슬렘들은 말하기를 카바의 석전이 ’거룩한 신부(新婦, Holy Bride)’라면 예루살렘의 반석의 회당은 ‘거룩한 신랑(新郞, Holy Bridegroom)’이 된다는 것이다. 새로 건립된 반석의 회당은 크리스찬의 ’예수의 무덤 성전(Church of the Holy Sepulchre)‘보다 더 크고 더 웅장한 모습으로 세워졌다.
위와 같이 이슬람의 회당이 예루살렘에 새로이 건설됨으로써 그리스도교와 이슬람 종교의 차이가 분명히 드러나게 되었다. 두 종교는 처음부터 반목하고 투쟁한 것이 아니었다. 십자군이 11세기에 성지에 쳐들어오기 전까지는 이슬람의 교세가 우세했지만 그런대로 두 종교는 공존하고 있었다.
가령 9세기에 아바스 왕조의 회교왕 하룬 라시드(Harun al-Rashid Abbasid Caliph)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 샤를마뉴 대왕(Charlemagne, A.D. 742-814)의 대관식에(A.D. 800) 예루살렘 성지를 마음대로 순례할 수 있도록 ‘예루살렘 시의 열쇠(Keys to the City of Jerusalem)’를 선물로 보냈다. 그런데 1009년에 이집트의 파티마 칼리프 하킴(Fatimid Caliph al-Hakim)이 예수의 무덤 성전을 철거함으로써(demolition) 크리스찬의 감정을 크게 상하게 했고 그것이 꼬투리가 되어 십자군이란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다.
1099년 제1차 십자군이 예루살렘을 점령하면서 유다교인 동방 크리스찬 모슬렘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대학살을 자행했고 그 후 이슬람의 살라딘 장군(Saladin, 1138-1193)이 1187년 예루살렘을 재탈환해서 십자군이 건설해 놓은 크리스찬의 건설을 모두 이슬람 색채로 바꾸어 놓았다.
십자군 시대에 있어 서로마 제국의 황제 프레데릭 2세(Frederick Ⅱ, 1220-1250 재위)가 예루살렘을 15년간(1229-1244) 지배할 때에는 모슬렘과 유다교인들은 예루살렘 도시에 살 수 없도록 금지시켰다. 그 후 1516-1517년에 터키의 오토만 왕조(Ottoman Dynasty)의 술탄 셀림 1세(Selim Ⅰ)가 예루살렘과 이집트를 점령함으로써 성지는 4백 년간 터키 왕국의 지배를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까지 받게 되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 민족은 예루살렘 없이 그들의 신앙은 건립될 수 없다고 생각해서 ‘하느님의 도시(The City of God)’라고 불렀고, 모슬렘은 마호메트가 예루살렘을 통하여 천국에 올라갔다는 신앙을 갖고 ’축복된 회당‘이라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예루살렘이 천국에 들어가는 문이며 또한 그곳을 통하여 하느님이 최후의 심판을 하러 내려오실 곳으로 믿고 있다. 크리스찬의 여러 교파들은 각자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을 기념하여서 에큐메니컬 공동체(The Ecumenical Community of Christians)를 이루고 평화 공생(共生)하고 있다. 오늘의 예루살렘은 세 종교가 어떻게 해서 세계 평화를 실현시키느냐 하는 어려운 과제를 보여주는 동시에 또한 그 평화의 실현을 기다리는 장소가 되고 있다. 따라서 세 종교의 유다인 크리스찬 모슬렘들은 다 같이 평화의 길을 모색할 의무감이 그들 어깨에 지워져 있음을 명심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