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봉사하다가 냉담 하는 사람들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런 저런 사람을 봅니다. 멋진 사람, 형식적인 사람, 이기적인 사람, 그리고 냉담 하는 사람.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어떤 신앙인인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전에 본당에서 봉사하던 사람들 중에서 상당수는 성당에 안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봉사할 때만 성당 나오고, 봉사가 끝나면 냉담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1. 어떤 사람들이 냉담하게 되는가?
냉담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조용히 사라지는 경우가 있고, 탓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조용히 사라지는 이유는 너무 힘든 일이 닥치기에 아무 말 못하고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조용히 사라집니다. 하지만 탓을 하는 경우는 어떤 구실을 만들기 위함입니다. 아이들도 그렇습니다. 성당에 나오기 싫으면 뭔가 이유를 댑니다.
운동을 잘 하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운동을 잘 못할 수는 없습니다. 즉, 그동안 실력을 숨겨 왔던지, 그냥 잘 하는 척 말로만 했던지, 아니면 어디가 아프던지…, 결국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것입니다.
① 자기 마음에 들지 않기에 안나온다.
불평을 많이 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본당신부가 어쩌구 저쩌구…,” 더 나아가 배울 생각은 하지 않고, 가르치려고 합니다. “사제가 억지를 부린다.”고 합니다. 교회가 이런 저런 사람들 얘기를 모두 들어준다면 아마 산으로 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가정에서도 일어납니다. “우리 꼰대는 말이 안 통해!”집에서 아이가 부모에게 대드는 이유는 부모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부모가 권위가 없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가르치지 못해서 입니다. 부모가 누구인지를, 어떤 존재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면 아이들은 어른들 앞에서도 담배를 피우고, 더 나아가 어른들에게 불을 빌려 달라고까지 합니다. 물질만능주의와 가치관의 상실에서 오는 부작용들입니다. 가정에서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 않기에 발생하는 것들입니다. 부모가 아무리 부족해도 자녀는 부모를 모욕하지 않습니다. 해서도 안 됩니다. 신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제나 수도자가 아무리 부족하다 할지라도 그들을 모욕하거나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의견이 소수의 의견인데 마치 전체의 의견이라고 스스로 착각하고, 그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투서를 하고, 욕을 하고, 돌아섭니다.
그래서 신앙의 배움은 깊어야 합니다. 머리로만 받아들이고 마음으로는 받아들이지 않으면 “생각 따로 행동 따로”가 됩니다. 바오로 사도가 개종을 해서 복음을 전한다고 했을 때 교회 공동체는 그를 고향 타르소로 보냈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에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옷만 바꿔 입고 복음을 전했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바뀌고, 가슴이 바뀌어야 하는데 그것이 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열정을 전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도구로서의 삶이 아닙니다. 그렇게 10년을 고향에서 보낸 뒤에야 비로소 예수님께서는 그를 선교 일선으로 불러내십니다. 나는 그저 하느님 손에 들려진 닳고 닳은 호미자루라고 생각해야지, 내가 교회를 좌지우지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나의 생각도 의견 중의 하나일 뿐”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고, 공동체와 어울려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 듣고 실천하는 신앙인, 반석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이어야 합니다. 신앙이 없고 관계만 자리 잡을 때 이런 일들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신앙의 배움이 깊고, 그래서 신심이 깊다면 절대로 그런 일들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전에 어느 본당의 공소에서 공소회장님께서 공소의 방을 불쌍한 신자에게 세를 놨습니다. 그리고 본당신부님께 보고를 했습니다. “신부님! 이래저래 해서 공소방을 세를 놨습니다. 세를 받으니 공소 살림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그러자 본당 신부님께서는 호통을 치시며 “당장 내보내시오. 회장님께서 천년만년 공소 책임질 것 입니까?”이 말씀에 상처받은 공소회장은 신부님께 “신부님! 저 앞으로 이 성당에 나오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미사는 다른 본당으로 나가겠습니다.”
그렇게 돌아선 공소회장님께서 다음 주일에 고백소를 찾았습니다. “신부님! 잘못했습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리고 제가 제 본당 두고 어디를 가겠습니까? 용서해 주십시오.”
처음에는 좋은 마음으로 공소의 방을 내 주고, 땅을 내 줍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교회의 것을 사용하는 사람이 고마움은 사라지고, 마음이 바뀌어서 자기 것처럼 하고, 죽지 않으면 결코 그곳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그 땅을 자기 자식들에게 주기도 하고, 팔아먹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의 역사 안에서 참으로 그런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본당신부는 100명의 신자 중에 90명이 원한다면 그것을 합니다. 그런데 원하지 않는 10명은 반대세력이 되는 것입니다. 이때 90명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저 사람! 또 저러네!”하고 뒤에서만 말 할 것이 아니라 “여보셔! 당신 신자 맞아! 어디서 배워먹은 버르장머리야! 나가~ 그리고 오지마~”
세례자 요한의 순교에서 “고관들과 무관들과 갈릴래아의 유지들”은 헤로데의 결정에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거수기”라고 합니다. 신앙인들은 진리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예레미야에게 당신 말씀을 담아 주시고 전하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너는 그들 앞에서 떨지 마라. 그랬다가는 내가 너를 그들 앞에서 떨게 할 것이다.”(예레미야1,17)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뒤에서 “저 사람 또 저러네…,”라고 말할 것이 아니라 그를 혼내야 합니다. 신앙인의 색으로 그를 변화시켜야지, 그냥 놔두면 또 그렇게 됩니다.
신앙이 없으면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신앙인들은 “진실과 온유와 절제”의 열매를 맺기에 “내 뜻이 아니라 공동체의 뜻”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때 “사랑과 기쁨과 평화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하지만 그 반대일 경우에는 욕하고 돌아서게 됩니다.
② 자기를 알아주지 않으면 안 나온다.
“내가 전에 무엇을 했으니 나를 알아줘야하는 것이 아니냐?”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습은 자존감이 부족해서 나오는 것들입니다. 내가 나를 존중하고 사랑하며, 내가 하느님의 사랑받는 자녀임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내가 전에 이런 봉사를 했기에 알아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전관예우(前官禮遇)라는 말이 있습니다. 장관급 이상의 고위 관직에 있었던 사람에게 퇴임 후에도 재임 때와 같은 예우를 베푸는 것을 전관예우라고 합니다. 물론 존중해 주는 것은 중요한 것입니다. 하지만 대접받으려고 하는 것은 안 됩니다. 그렇게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사회에서는 비리가 속출하는 것입니다. 성당에서는 전관예우가 없습니다. 회장을 하다가 그만두면 다시 열심한 평신도로 돌아가야 합니다. 내가 회장이었던 생각은 버리고, 내가 회장이었기에 더욱 열심히 신앙생활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매일 미사 열심히 나오고, 주일미사 기쁘게 참례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당 일에 성심껏 도와주어야 합니다. “내가 나서면 후임자들이 불편해진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나서면 안 됩니다. 뒤에서 열심히 따라 주어야 합니다. 뒤에서 열심히 따라주면 후임자들이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내가 선임자로서 존경을 받아야 만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드러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내가 시작한 일들을 공동체가 기뻐한다면 나는 행복한 것입니다. 길을 가면서 누가 길을 깔았는지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편하게 가고 있으면 그만입니다. 비록 나에게 고맙다고 하지는 않더라도 편안하게 그 길을 다닌다면 나는 행복해지는 것입니다.
성당에서의 봉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무엇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지금 공동체가 어떤 모습이냐가 더 중요합니다. 열심한 공동체를 위해서 내가 봉사했다면, 그래서 그들이 나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면 “더 없이 감사한 일”이지만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 하더라도 서운해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종처럼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은 공동체의 형제자매들이 반드시 알아줍니다.
나를 알아주기에 열심히 하고, 나를 알아주지 않기에 열심히 하지 않는 것은 성숙한 신앙인의 모습은 결코 아닙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내가 무엇을 했기에 성당에서 존경받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열심한 신앙인이기에 존경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자녀이기에 존경받는 것입니다.
③ 질투하다 넘어져서 냉담
봉사를 하다보면 열심히 최선을 다하시는 분들이 계시고, 대충 형식만 갖추는 분들이 계십니다. 그런데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기에 서로 다른 부분들이 보여집니다. 어떤 사람은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일을 처리하고, 어떤 사람은 대충, 충동적으로 일을 처리합니다. 어떤 사람은 미리 미리 그 일을 준비하고, 어떤 사람은 닥쳐야 만이 일을 합니다. 그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가 다른 것을 인정하고 한 마음이 된다면 그 공동체는 활성화 됩니다.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 하느님 사업을 하게 됩니다.
비슷한 유형의 사람은 있어도 똑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게 많은 이들이 함께 어울리기에 봉사를 하면서 가장 먼저 생각해야 하는 것은 상대방을 존중해 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와 함께 있음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상대방과 경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상대방과 경쟁을 하다보면 끊임없이 그와 비교를 하게 됩니다. 나보다 잘 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에게 배우고, 그를 존경해주고, 그와 함께 하면 됩니다. 그리고 나보다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끌어주고, 그가 더욱 성숙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함께 하면 됩니다. 모두가 다 회장일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여러 사람이 모여서 봉사를 할 때, 어떤 사람은 이끌고, 어떤 사람은 따라주고 그렇게 하나 되는 것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함께 봉사하면 기뻐집니다. 하지만 한 마음이 되지 못했을 경우에는 불편해 집니다. 그래서 질투가 일어나고, 그 질투는 말이 말을 만들고, 또 그 말이 말을 만들어 버립니다. 말 이라는 것은 쌍방의 말을 다 들어야 정확하게 판결이 납니다. 그런데 보통 자신과 친한 쪽의 말만 듣고서 판단해 버립니다. 그리고 그렇게 교구를 한 바퀴 돌아서 다시 귀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 다음에 그 진실이 드러나면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만들어진 말을 통해서 그가 봉사를 그만둔다면 공동체로서는 많은 손실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선교는 더더욱 어렵게 됩니다. 그 소식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비신자들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질투와 시기를 하면서 내가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비신자들은 신자들을 향해서는 “경계”를 하게 되고, “성당 안다녀도 누구만큼은 살아요!”라고 말하게 됩니다.
주방에서 일을 할 때 한 자매에게 “음식을 너무 잘 만드시네요.”라고 인사할 수 있습니다. 그 뒤에 있는 자매에게는 아무 말을 안했다면, 그리고 그 자매가 만일 자존감이 낮았다면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 “저게 뭘 잘 한다구,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인데…,” 그리고 말이 이어집니다. “누구는 누구만 좋아한데…,”
전체 안에서 부분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야곱과 요셉 이야기를 읽어보면 “지나친 편애”라는 것을 느낍니다. 하지만 구원 역사 안에서 바라본다면 “아! 이것은 선택이었구나!”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편애와 선택 사이에서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전체 안에서 부분을 볼 수 있는 내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방이 미워서 성당 안 나오거나, 봉사 그만두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 편 갈라서 싸우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사제가 문제라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래서 본당을 거치면서 냉정해 지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신자들에게 다가가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무슨 일을 했을 때 말 들을 것을 뻔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내가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니 남과 나를 비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비교하면서 자신을 초라하게 만들고 그렇게 멀어지는 것입니다.
남을 칭찬한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남을 칭찬한다는 것은 능력 있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칭찬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면 그는 결코 칭찬을 할 수 없습니다. 신앙인들은 내가 누구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해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명심할 때,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낄 때, 나는 옆 사람과 비교하지 않을 수 있고, 옆 사람을 비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를 사랑할 수 있고, 그와 함께 할 수 있습니다.
④ 자기에게 이익이 되지 않으면 안 나온다.
본당 주보에 많은 분들이 광고를 내십니다. 물론 자신의 사업을 홍보하는 목적도 있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광고를 통한 본당 후원입니다. 그런데 본당주보에 이익이 되지 않으면 광고를 내지 않으시는 분들도 계시고, 본당이랑 상관없이 광고를 내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1년 주보 인쇄비는 많이 지출됩니다. 그것을 광고를 통해서 본당에 후원을 합니다. 이익을 목적으로 광고를 내기 보다는 후원을 목적으로 광고를 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본당이 갈라지는 이유가 여럿 있습니다. 특히 다단계가 들어오면 본당이 엉망이 됩니다. 경쟁하는 업체, 신자들을 돈으로 바라보는 직종에 있는 사람들, 이런 저런 이유로 관계를 형성하여 도움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 그런 업종에 있는 사람들이 신자들에게 영업을 하면 신자들은 거절하기도 어렵고, 문제가 생겨도 보상을 요구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렇게 신자들을 상대로 이익을 챙기다보면 신앙에는 관심이 없고, 자기 이익에만 관심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신자들이 자신에게 관심 가져 주지 않으면 등을 돌리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은 교회의 역사 안에서 잘 드러납니다.
⑤ 복잡한 가정 문제로 안 나온다.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정이 화목해야 만이 모든 것이 잘 됩니다. 격렬하게 싸우고서 성당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사실 외짝교우들은 성당에 나오기 위해 얼마나 배우자의 눈치를 보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배우자는 그 약점을 잡아 교묘하고, 지속적으로 괴롭힙니다. 하지만 성당에 나오고 싶은 마음이 너무 크기에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 냅니다. 그러다가 지치게 되면 한판 멋지게 싸우게 되고,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성당에 멀어집니다.
그리고 두 부부가 사이가 안 좋은 경우, 한쪽이 성당 나가면 다른 한 쪽은 다른 곳으로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집에서도 지겨운데 성당에서까지 만나기는 싫은 것이고, 그럴 정도라면 신앙은 사라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봉사자들은 자신의 가정을 잘 돌보아야 합니다. 남의 가정이 아니라 자신의 가정을 돌보고, 남 가정 일에는 관심 끊어야 합니다. “어머! 저 사람, 집안일은 하고 다니는 거야!” “아니래. 본당 신부님께 잘 보이려구 집은 완전 난장판이래.”……,
또한 성당 핑계로 자신의 사적인 일을 해서도 안 됩니다. 아이들이 그렇듯이 성당 간다고 하고 다른 쪽으로 빠져 버리면 “주일만 가라.”고 말하게 됩니다.
⑥ 관계 안에서(금전 문제, 모함)
한 본당에서 어느 자매가 하소연을 했습니다. “성당에 다니기 싫어요. 돈을 빌려가고 안 갚는 사람이 독서하고 주송하는 모습을 보면 괴롭습니다.”그래서 신자끼리는 돈 거래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계”를 하면 장점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단점도 더 많다는 것을 알기에 교회에서는 서로 계를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비신자들에게도 얼마나 안 좋은 영향을 미칩니까?
그런데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럼 누가 어려울 때 나를 도와줍니까? 혼인이나 장례 때 누가 나를 도와줍니까?”그런데 주고받는 것은 비신자들도 잘 하는 것들이고, 그들이 우리보다 더 잘하는 부분입니다. 혼인 때 미사에 참례해서 축의금을 넣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연도 가서 부조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물론 아는 사람에게는 합니다만 모르는 사람에게는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내가 혼인 때나 장례 때, 그에게 성의를 표시하다보면 그도 나에게 성의를 표시합니다. 그렇게 되면 전신자와 관계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야 몇몇이 모여서 “계”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한 모함을 받으면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작정을 하고 흔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넘어가면 성당 못나오게 됩니다. 흔들지 맙시다. 상대방의 경제상태, 학력, 직업 등을 가지고 상대방을 파악해서는 안 됩니다. 신앙인은 신앙으로 보아야지 세상 잣대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⑦ 공동체로부터 상처를 받아서
억지로 흔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열심히 봉사하던 사람이 뒤로 물러나면 그를 흔드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당 나오면 “나 같았으면 냉담했을 텐데…,”하고 말합니다. 그리고 온통 관심은 “그가 나오나 안나오나”에 있습니다. 또 그를 경쟁상대로 여긴 사람들은 그를 모함하여 새로 부임하신 사제나 수도자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알려 줍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런 여과 없이 받아들이게 되면 큰 상처를 받게 됩니다. 그런데 그 상처를 주는 이가 사제나 수도자라면 봉사자는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됩니다.
2. 봉사 후 기쁘게 신앙생활 하기 위해서는?
본당에서 봉사직무를 맡은 후 뒤로 물러났을 때 냉담하거나 방관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어떻게 해야 내가 봉사직무를 성실하게 끝마치고 뒤로 물러나서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존경받으며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가? 더욱 기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① 권위보다는 겸손을
단체장을 맡다가 그만두면 성당에 안나오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자신을 알아주지 않으니까 안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것은 혼자만의 생각입니다. 성당은 누가 알아주고, 안 알아주고를 떠나서 믿음 때문에 나오는 것이고, 주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나오는 것입니다.
봉사자는 “그저 해야 될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겸손하게 살아야 한다. 그리고 현세에서 상을 받으려 하지 말고 내세에서 상을 받으려고 사람들이 주는 모든 영광을 물리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의 참된 정신이다. 하지만 인간인지라 칭찬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자랑하고 싶은 마음을 온전히 버리기는 어렵습니다. 늘 하늘에 보화를 쌓는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거절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자신이 그런 그릇이 되지 않을 경우에는 정중하게 거절할 수 있어야 하고, 자신이 하지 못하는 것은 못한다고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직책을 한번 맡으면 “영원히 회장”이라는 사고방식을 없애야 합니다. 누구나 돌아가며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며, “형제님, 자매님!”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공동체는 그의 수고에 감사하며 따뜻하게 대해 주어야 합니다.
② 끊임없는 자아 성찰
봉사자는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정말 성당을 지저분하게 만들면서 자신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직책은 있지만 활동은 전혀 안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말만 하고 행동으로는 옮기지 않고, 일할 때는 반드시 빠지고, 생색낼 때는 반드시 참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형제자매들이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속으로는 “그만 뒀으면~”하는 마음이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봉사자는 말과 행동을 삼가야 합니다.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지 못하고, 타인을 모함하거나, 타인의 단점을 들춰내어 말을 퍼트리는 사람은 결국 그 꾀에 자신이 당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는 갈 곳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진실은 언젠가는 반드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전임 봉사자는 후임 봉사자를 격려하고, 존중해 주어야지 비방해서는 안 됩니다. 후임이 너무 잘하고 있으면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데 감사하기 보다는 오히려 이런 저런 말을 만들어서 사람들이 오해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자신은 전혀 그렇지 않은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주님께서는 알고 계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③ 교회의 신중한 선택
봉사자를 뽑을 때 잘 뽑아야 합니다. 돈이 있는 사람을 중심으로 뽑을 것이 아니라 신앙이 있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뽑아야 하고, 사회에서 명예를 얻으려고 하는 사람들을 뽑지 말고 하늘에 이름을 올리려 하는 사람을 뽑아야 합니다.
그리고 타의 모범이 되는 사람이 봉사직을 수행해야 합니다. 또한 봉사직무를 맡은 사람은 모범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봉사자들이 자녀들을 혼인시키면서 예식장에서 사회혼을 시키면 누가 그를 “우리 회장님! 열심한 분이셔~”이라고 말하겠습니까?
④ 적절한 인사정책
직책을 맡은 사람에게 또 다른 직책을 주는 것은 장점도 있습니다. 그가 계속 활동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그 사람이 또 그 사람”이 되면 결국 돌아가면서 활동을 할 수 없고, 하는 사람만 하게 됩니다. 한 사람에게 일을 계속 맡겨서는 안 됩니다. 그도 직책에서 벗어나 뒤에서 열심히 밀어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하고, 직책을 맡아보지 못한 사람들도 직책을 맡아서 이 기회에 더 열심해 질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본당에서의 인재 관리, 봉사자 관리가 중요합니다. 지속적이 교육을 통해 신앙성숙을 도와주어야지, 이런 저런 관계를 통해서 붙들어 놓아서는 안 됩니다.
또한 본당 신부님의 인사이동 후 즉시 임원교체를 하는 것에는 장점도 있고 단점도 있습니다. 장점은 새롭게 출발 할 수 있고, 뒤로 쳐져서 지켜보는 사람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점은 새로 부임하신 신부님께서 신자들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에 그가 신자들한테 존경을 받는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몇몇 다가오는 신자의 이야기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그렇게 할 경우에는 열심히 봉사하시던 분들이 실망하여 뒤로 물러나는 경우도 생깁니다. 또 전임 신부님께서 추진하시던 사목방향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도 문제가 됩니다. 그렇게 될 때 신자들은 “뭐! 또 바뀔 텐데…,”하면서 미지근한 태도를 보이게 됩니다.
⑤ 체계적인 신앙교육
봉사자들이 옷만 바꿔 입은 사람들이 되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오로 사도를 부르시어 즉시 선교일선으로 부르지 않으시고 10년을 기다려 주시는 것처럼, 철저한 교육과 신앙생활의 변화를 통해서 삶의 가치관이 바뀔 수 있도록 공동체가 다각적으로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특히 주일학교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주일학교에서 신앙의 가치관을 형성해 주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서 올바로 봉사하지 못하게 됨을 공동체가 기억해야 합니다.
본당에서 사목위원들은 말 그대로 신부님을 도와서 신부님께서 사목하시는데 도와 드리면서 봉사하는 자리인 것을 명확하게 인식시킬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합니다. 봉사직을 마치 무슨 성당의 감투인양 여기고, 수십 년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명예로 생각하기에 봉사직을 물러난 후 교만으로 가득 찬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신부님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저 신부님 바뀌실 때 까지 성당 안나가!”하면서 냉담을 합니다. 그럼 다음 신부님은 한 영혼이라도 구하가 위해서 그를 찾아가 달래서 성당에 데리고 나옵니다. 그러면 마치 자신이 뭐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합니다. 공동체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단지 예수님 때문에 그냥 봐 주는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봉사직의 본질을 명확히 파악하고, 착한 신앙인의 기본자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또 이유 없이 냉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성당이 덥다고 안나오고, 추우면 춥다고 안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본이 신앙이 될 수 있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한 형제님이 영성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께서 그를 부르셔서 “형제님! 왜 영성체 하지 않으세요?”하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어제 한의원에 가서 약을 지었는데 밀가루 음식을 먹지 말라고 해서…,”기본은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봉사자들은 자존감이 높아지는 방법을 배워야 하고, 자존감을 높여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을 사랑할 수 있고, 그래야 공동체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말씀의 힘이 봉사자 안에 넘칠 때, 자존감은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⑥ 사제와 수도자를 존경할 수 있도록
봉사자들은 사제와 수도자를 존경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윗이 자신을 죽이려하는 사울을 죽이지 않은 이유는 하느님께서 성별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제와 수도자를 존경하지 않으면 사실 성당에 나올 가치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부족하다 할지라도,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무리 잘못을 한다 할지라도 사제는 사제입니다. 주님과 적이 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의 사제를 존경해야 합니다. 주님의 사제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⑦ 내 생각은 하나의 의견일 뿐임을 기억
일을 하다보면 별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싸우게 되고, 등지게 되고, 또 냉담까지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 생각만이 옳은 것은 아닙니다. “신부님이 내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냉담 한다.”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냉담 할만한 사람이었고, 성당에 다니고 있었지만 사실은 전혀 신앙적이지 않았습니다. 그걸 알고 있기에 그가 아무리 신자들에게 이런 저런 얘기를 한다 할지라도 “웃을 뿐”입니다. 그 속사정을 어떻게 이야기해 주겠습니까? 그러면 그 사람은 공동체에서 살지 못할 텐데…,
공동체가 중심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 방식대로 일을 추진하는 사람은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공동체를 욕하고, 말을 만들고, 결국에는 냉담함니다.내가 제안한 것은 하나의 의견이라는 것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그리고 결정하시는 분은 신부님이시고, 또 그것을 책임지고 있는 사람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3. 성숙한 인격의 봉사자가 되기 위해서는?
냉담을 하다가 다시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반가운 사람도 있고, 불안한 사람도 있습니다. 어려움이 있어서 냉담했던 사람과 자신의 뜻이 안 맞아서 냉담했던 사람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당에 다시 나오신 분들을 보면 기쁘고 반갑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이 들고, 그가 장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에게 더욱 친절하게 대하고 싶어집니다. 하지만 자신의 뜻이 안 맞아서 냉담했다가 다시 나오는 사람을 보면 불안합니다(무슨 이유가 있어서 나왔나?). 그리고 “또 언제까지나 나올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또 사라질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서 기도하게 됩니다.
그런데 냉담을 하게 되는 경우는 결국, 누구 때문이 아니라 신앙이 없어서 안나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이 없다면 자신에게 닥친 내적 어려움을 극복하기가 어렵습니다. 봉사하면서 기도하지 않기에, 기도하는 사람이 봉사자로 뽑히지 않기에 결국 봉사가 끝나면 냉담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인사하고, 솔선수범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들 배려한다고 뒤로 물러나서 “콩 나라 팥 나라”하면 결국 그의 신앙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 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봉사자들은 반드시 한달에 한번 고백성사를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새로 날 수 있습니다. 그래야 힘을 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미사에 열심히 참례해야 합니다. 성체로 힘을 얻지 않으면 참된 봉사를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다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을 보지 않고 예수님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봉사자들 서로에게 힘과 용기를 주고, 늘 격려하는 자세를 가지고, 서로를 스승으로 섬겨야 합니다. 그래야 봉사자들과 일치할 수 있습니다. 또한 나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저 하느님 손에 들려 있는 닳고 닳은 호미자루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고, 감사하면서 봉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지금 쓰이고 있다는 그 자체만을 가지고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