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리엔테이션: 정화의 삶:
신앙인들이 기도하며 자신의 모습을 신앙인의 모습으로 변화시키는 것을 수덕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수덕생활의 목표는 바로 하느님과의 합일입니다. 그리고 그 길을 완덕에 이르는 길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삶, 내 마음이 하느님의 마음과 같아지는 삶,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삶, 진리 안에서 자유로운 삶. 그것이 바로 완덕에 이르는 길이고, 하느님과의 합일입니다.
하느님과의 합일에 도달하려면 모든 것에 대한 욕심을 끊어야 합니다. 세상의 맛에 길들인 나를 버려야 합니다. 피조물에 대한 모든 애착과 욕심은 하느님 앞에서는 어둠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어둠을 둘러쓴 영혼이 그 어둠을 버리지 않으면 티 없이 맑으신 하느님의 빛을 받아들일 수도 없고, 하느님처럼 그렇게 빛날 수도 없습니다.
성 십자가의 요한은 정화를 어둔 밤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수덕생활을 하는 신앙인이 격어야 하는 정화를 두 가지인데 바로 감성과 영성입니다. 그리고 이 정화는 능동적인 것과 수동적인 것이 있습니다. 능동적인 정화는 수덕생활을 하는 신앙인이 스스로 세상적인 즐거움과 맛을 끊어버려 영적으로 자신을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수동적인 정화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혼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하느님께서 그 안에서 이끌어 정화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신앙인은 하느님을 받아들일 때,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서 감성 및 영성을 스스로 정화합니다. 하지만 제아무리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자신의 허물을 온전히 알지는 못합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온전히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고, 하느님과 합일될 수 없으므로 하느님께 맡겨 드려야 합니다. 수동적인 정화를 통해서 영혼은 자신의 영혼을 수정보다 맑게 빛낼 수 있습니다.
1.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예수님을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삶이 아니라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욕심과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을 넘어설 수 있어야 합니다. 세속과 마귀와 육신이 나를 가로막지 못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영혼들이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때는 초심자의 위치에서 벗어나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께로 나아가려고 하기 시작할 때입니다. 이때 하느님께서는 어머니가 어린 아이에게서 젖을 떼기 위해서 단호함과 어려움을 주는 것과 같이 기도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어떤 기쁨도 못 느끼게 하십니다.
사실 어린 아이에게 부모가 모든 것을 다 해 주듯이 하느님께서도 신앙인들에게 맛을 느끼게 해 주시고, 신앙생활을 취미를 갖게 하십니다. 초심자들은 스스로 대견하다고 여기며 신앙생활을 하지만, 이때 교만의 싹이 터 오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는 것 이상으로 남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이때 악마는 이런 사람들을 부채질해서 되도록 이런 일들을 많이 하게 하려는 열성과 욕심을 품게 충동질합니다. 악마는 초심자들이 하는 일이나 이루어둔 덕이 모두 아무런 가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악덕이 되는 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 이렇게 유혹에 빠진 이들은 기회만 닿으면 말과 행동으로 남을 비난하거나 비방하고, 형제의 잘못을 꼬집고, 불평하게 됩니다(마태7,3;23,24). 누가 올바로 이끌어 주려 해도 귀 기울이지 않고, 자신이 잘 하고 있는 것만을 봐 주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좀 열심하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질투심이 더 많은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잘 돌볼 줄 알고,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온전히 맡길 줄 아는 신앙인들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고, 별 볼일 없는 것으로 여깁니다. 늘 겸손해서 자신을 알아주는 것도 부담스러워 하고, 아무리 부족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자신보다 훌륭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단순하고 순수하고 진실하게 하느님께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완덕의 길을 걷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또한 이런 식으로 완덕의 길을 걷게 된다면 큰 신앙의 증진이 있게 될 것입니다.
2. 초심자들의 약함.
① 영적 탐욕
초심자들 중에는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내리시는 은총에 감사하지 않고 더더욱 많은 것을 요구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위로받기를 원하고, 그 위로가 없으면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지적인 호기심에는 관심이 많아서 이런 저런 강좌나 피정에는 빠지지 않고 다니려고 합니다. 하지만 자신의 욕심을 다스리거나 영의 청빈과 같은 덕목을 닦을 겨를이 없기에 항구함은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이들은 아름다운 묵주나 성상에는 관심이 많지만 실제로 묵주를 가지고 묵상기도를 하는데는 상당히 부족합니다. 마음의 집착을 버려야 하는데 초심자들이 버리지 못하는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신심이란 마음속에서 우러나와야 하고,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에 마음을 써야 합니다. 이 밖의 모든 것은 집착이요 허욕일 뿐, 완덕의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이러한 헛된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처음부터 올바른 길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 마음을 빼앗기거나 필요 없는 것들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받들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데에만 온통 눈이 쏠릴 뿐 그 밖의 욕심이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한껏 너그럽게 베풀고 영성적인 것이든 현세적인 것이든 하느님과 이웃 사랑을 위해서라면 영적인 가난을 멋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 완덕으로 나아가는 이의 영혼을 정화시켜 주시지 않는다면, 영혼이 제 아무리 힘을 쓴다할지라도 완전한 사랑에 의한 하느님과의 합일을 조금도 마련하지 못합니다.
② 헛된 생각들
완덕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올바로 잡지 않으면 수많은 헛된 생각들이 자신을 사로잡게 되고, “주의와 신심”을 망각하게 됩니다. 성사를 보고 있어도, 미사에 참례하고 있어도,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게 되면 가로막을 수 없습니다. 또 은근히 그것을 즐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완덕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보는 것, 듣는 것, 만지는 것 등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합니다. 오감을 통해 흡수된 정보들은 내 안에서 재조합되어 나를 영적으로 타락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혼이 어둔 밤으로 들어가면 하느님 사랑으로 이 모든 것들을 정화하고, 아주 끊어 없애게 됩니다.
③ 분노
완덕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영성생활 안에서 맛과 관심을 잃게 되면 자연스럽게 짜증을 내게 되고, 분노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자신의 불완전함을 보았을 때 겸손해지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 성을 내게 됩니다. 완덕의 길은 속성과정이 없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루 만에 성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결심을 한다 할지라도 인간의 나약함은 온전한 실천으로 옮기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완덕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은 단순해져야 합니다.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지금 하고 있는 것을 충실하게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부족하다면 하느님의 자비를 청해야 합니다. 그래야 분노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망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④ 영적 탐식
기도하는 이들에게 성령께서는 더욱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맛을 주십니다. 그런데 그 맛에만 집착하여 조용히 하느님께로 나아가지 않고, 그 맛만을 찾으려고 합니다. 초심자들은 영성 수행에서 발견하는 맛과 재미에 빠져 맛만을 얻으려고 합니다. 묵상기도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고, 또 묵상기도를 하다가도 이 묵상, 저 묵상 옮겨 다니며 마치 마음에 드는 상품을 고르려는 구매자와도 같습니다.
어떤 이는 그 맛에 이끌려 극심한 고행을 하고, 또 어떤 이는 무리한 단식을 하다가 몸을 망치기도 합니다. 모든 극단은 덕이 아니라 악입니다. 또 어떤 신심운동에 치우친 사람은 제 뜻대로만 움직이려하기에 교회에 순명하지 않습니다. 맛에 끌리는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중대한 결점은 십자가의 험한 길을 가는 데에 더디고 게으르다는 것입니다. 완덕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하지만 입으로만 살아왔기에 막상 어려움이 닥치면 온갖 불평을 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없다면 나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하느님의 이끄심이 없다면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통해서 하시는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⑤ 영적 질투와 나태
자존감이 떨어지는 신앙인들은 하느님께서 자신에게도 한 탈란트를 주셨음을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영성생활을 질투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다른 이들과 비교를 합니다. 또 다른 이들을 위해주거나 높이 평가하는 것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로만 향해야 합니다.
완덕의 길이란 하느님을 위해서 내 뜻과 내 재미를 없애는 길입니다. 내 생각을 접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것 또한 온전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주님께서 나를 변화시킬 수 있도록 맡겨 드려야 합니다.“25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16,25) 하느님의 비추임이 없다면 나는 이런 나약함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3. 감성의 밤, 영성의 밤: 관상
초심자들은 완덕에로 나아가는 길에 있어 유치하고 아집과 열정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기에 하느님께서는 보다 높은 방법으로 완덕에로 이끌어 주십니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사람들은 기도와 묵상을 꾸준히 하면서 거기서 맛본 기쁨과 재미로 세상 것의 맛을 잃고, 하느님 안에서 영의 힘을 길렀으니 그 힘으로 피조물에 대한 욕구를 제법 눌러놓았습니다. 이들의 수덕생활 안에서 맛과 기쁨을 한창 누릴 때, 하느님께서 은혜의 태양으로 자신들을 눈부시게 비친다고 느끼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 빛을 몽땅 어둠으로 바꾸시고, 맛을 닫아 버리십니다. 이제는 어둠 속에 버려져 상상과 추리의 감성을 가지고는 어디로 갈 바를 모르게 됩니다. 이제는 그전처럼 묵상이 되지 않습니다.
3.1. 감성 정화의 길로 나아감을 알 수 있는 표징들: 관상의 단계에 들어선 사람들
① 피조물에게서 아무런 낙을 얻지 못함
하느님의 일들에서 맛과 위로를 얻지 못하는 것처럼 피조물에게서도 아무런 낙을 얻지 못합니다. 하느님께서 감성욕을 씻어 닦게 하시므로 완덕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어느 것에든 빠지거나 맛들이지 못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이 메마름과 맛없음이 새로 지은 죄나 결점에서 오지는 않습니다.
② 하느님을 애타게 찾음
하느님의 일에서 맛을 못 느끼더라도 자기가 하느님을 섬기지 않아서 퇴보함이라 믿고 행여 하느님을 잊을세라 애타게 찾게 됩니다. 이때 하느님을 섬기지 못함에 대한 걱정 및 시름이 열심히 따르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이는 하느님께 소홀함이 없도록 조심하고, 그전보다 훨씬 더 빈틈없이 열심하게 됩니다. 그는 감성을 비우고 메마르게 하는 동시에, 고요히 혼자 있으려 하고, 완덕의 길에 있기를 좋아하게 됩니다.
묵상기도를 지나 관상기도에 들어서면 나를 이끄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영혼의 내적 능력을 묶으시어 이성에 기댐도, 의지 안의 감미도, 기억 속의 추리도 다 불가능하게 만드십니다. 이때 영혼이 자신의 힘으로 무엇을 한다는 것은 쓸데없는 행동이고, 오히려 내적 평화를 깨트리는 행위이며, 하느님의 이끄심을 방해하는 행위입니다.
③ 묵상이나 추리를 할 수 없음
묵상의 기도 단계에서는 추리작용이 중심을 이루는데 관상으로 들어서면 추리가 멈추게 되고 관상을 하게 됩니다. 따라서 상상이나 환상 따위는 이 단계에서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주의할 점은 이 단계에 들어서게 되면 항상 정신 능력을 가지고 추리할 수가 없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기도자를 이 단계에 들게 하심은 오직 그를 단련시키고, 겸손을 가르치시려고 하심이고, 완덕의 길에서 지나친 욕심을 부릴세라 그 욕심을 바로잡아 주시려 하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두를 관상가로 이끌려 하심은 아닙니다. 모든 성인이 관상가는 아니었습니다. 관상은 오직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3.2. 감성 정화의 길에 들어선 사람의 자세: 관상의 단계에 들어선 사람들의 기도 자세.
하느님께서 영혼을 이 감성의 밤에 두심으로써 감각을 낮은 부분에서 정화시키시어 영에 맞추고 순종하고 일치하도록 하시고, 하느님과의 합일을 위하여 영을 순화시키고자 감성을 어둡게 하시고, 추리의 길을 막아서 영성의 밤에다 두시면 영혼은 대단한 이득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성 십자가의 요한은 “좋을씨고 행운이여”라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서는 꾸준히 기도하면서 참아야 하고, 자연스럽게 사랑의 타오름이 생기게 됩니다.
① 꾸준히 기도하면서 참는 것.
하느님께서 영혼을 감성의 생활에서 영성의 생활로, 즉 묵상에서 관상으로 옮겨주셔서 영혼은 제 능력으로 하느님 일을 추리할 수조차 없게 될 때 기도자는 큰 고생을 하게 마련입니다. 메마름만이 아니라 길을 잃은 듯한 걱정 때문에 그들은 좋은 일에 맛이나 멋을 느끼지 못하는 데서 “하느님께서 나를 버리셨구나, 내 영혼도 복이 다했구나.”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게으름과 죄 탓으로 이 꼴이 되었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 단계에 있는 기도자는 걱정할 것이 없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이 좋습니다. 순박한 마음을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을 하느님께서는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애써 묵상이나 추리를 하지 말고, 영혼을 정적 속에다 버려 두어야 합니다. 표면상으로는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시간만 낭비하는 것만 같고, 자신이 게으른 탓으로 아무것도 생각할 마음이 없는 양 여길지 몰라도, 기도자는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아니할망정 꾸준히 기도하면서 참는 것만도 큰 일을 하는 것입니다.
② 사랑의 타오름
이 단계에서 기도자는 모든 지식과 사색에서 영혼을 해방시켜 자유롭게 주님께서 이끌 수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관상이란 사랑의 영 안에서 영혼이 불타오르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밀하고 평화롭고 사랑겨운 손길은 기도자의 영혼을 온통 하느님께로 불타오르게 합니다.
이 사랑의 타오름은 하느님께 대한 그리움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 그리움이 커가면 커갈수록 하느님 사랑에 대한 정은 더욱 커지고 불이 붙게 됩니다. 그래서 성 십자가의 요한은 “어느 어두운 밤에 사랑에 타 할딱이며”라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을 그리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사랑 때문에 괴로워하고 걱정하는 영혼을 보시는 하느님께는 큰 기쁨이 됩니다. 그래서 영혼은 하느님 사랑에 맞갖게 되고자 갖가지 불완전을 다스리고 갖가지 덕에 힘써 나아가게 됩니다.
3.3. 감성의 밤의 이익
영혼이 순수한 믿음으로 하느님께 가려면 이 밤에 들어가야 하고 저 순수한 믿음이 바로 영혼이 하느님과 합일하는 기틀이 됩니다. 그리고 이 밤과 욕의 정화가 비록 영혼에게는 빼앗기는 것처럼 느껴질지 몰라도 실상은 행운이어서 많은 보배와 이익을 줍니다. 래서 성 십자가의 요한은 “좋을씨고 행운이여”라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됨
이 메마르고 어둔 관상의 밤이 빚어내는 첫 번째 중요한 이익은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알게 되고, 보게 되는 것입니다. 스스로의 무능함과 비참함을 깨닫게 된 영혼은 자신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게 됩니다. 초심자 때는 마치 자신이 완덕에 이른 것처럼 기쁨 속에서 살아갔지만 그 기쁨이 어둠 속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제서야 “아하! 내가 별것 아니었구나! 오직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구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정성과 공경을 다하게 됩니다. 그래서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을 공경하게 되고, 분별을 가지고 하느님을 섬겨야 함을 알게 됩니다.
또한 하느님께서는 기도자 자신을 알게 해 주실 뿐만 아니라(자아 인식)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절대자이심을 알게 해 줍니다.
② 영성적 겸손
자아인식을 통하여 영혼은 겸손을 얻게 됩니다. 이 겸손으로 말미암아 영혼은 저 불완전하고 교만했던 악습을 떨쳐버리게 됩니다. 그는 메마르고 비참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이 남보다 낫다든가 뛰어나다든가 하는 생각을 완전히 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자신보다 나음을 인정하게 됩니다. 이런데서 이웃 사랑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다른 이들이 자신의 길잡이가 되어 주길 바라게 됩니다. 이렇게 할 때 감성의 오만은 사라지고, 교만의 악습들이 자취를 감추게 되는 것입니다.
③ 탐욕을 몰아냄
어둡고 메마른 이 밤을 통하여 영혼은 영적 탐욕으로 지니던 불완전을 씻어내게 됩니다. 그 탐욕이란 영성적인 것을 이것저것 욕심내는 것으로서 호기심과 맛에 끌려 이런 저런 공부를 해보아도 만족할 수가 없다가 이제는 그것이 모두 가시게 됩니다. 하느님만을 위해 살아가기 때문에 다른 것들에는 모두 맛을 잃게 되어도 하느님을 향해 살아가게 됩니다. 욕망의 불길이 꺼지고 나면 영혼은 영의 평화와 고요 속에 살게 되고, 욕정의 지배가 없는 곳에는 혼란이 없고 다만 하느님의 평화와 위로가 있습니다.
④ 하느님께 대한 꾸준한 기억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억입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하고 계신지를 기억하고, 하느님께서 나를 이끌고 계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얼마나 하느님께로 향하고 있는지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완덕의 길에 들어선 영혼은 자신의 영성의 진보가 퇴보할까봐 걱정을 합니다. 그래서 기도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맛이 주어지지 않는다 할지라도 주님께로 향하게 됩니다.
⑤ 갖가지 덕이 고루 닦여짐
맛에 끌려 기도생활을 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을 위해 살아가다보니 인내와 관용이 생겨납니다. 분노와 질투와 나태에서 벗어나 영혼은 부드러워지고 겸손하게 되어 하느님과 자신과 그리고 이웃에게 유순하게 다가가게 됩니다. 이렇게 됨으로써 다시는 자신의 결점 때문에 자신에게 성내지 않고, 남의 결점 때문에 이웃에게 분노하지 않으며, 하느님께 대해서도 기도할 때 협박하거나 원망하거나 무엄하게 기도하지 않게 됩니다.
이때 생겨나는 질투(일반 질투나 시기가 아니라 본받으려고 하는 덕)가 있는데 이것은 사랑 때문에 나오는 질투입니다.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되면 형제자매들의 나음이 보이게 되고, 남을 본받고 싶은 질투가 생겨나게 됩니다. 누가 기도하면 나는 더 기도하고 싶고, 누가 말없이 봉사하면 나 또한 보이지 않게 더욱 봉사하고 싶고, 누가 겸손하면 나 또한 더욱 겸손하게 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⑥ 영의 자유
완덕의 길로 들어서 관상의 기도의 단계에 들어선 사람들은 일체에 대한 감성의 맛과 기쁨이 가셔지므로 악마와 세속도 감성적인 것도 나를 구속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들에 관심이 없고, 그것들이 나에게는 유혹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열망만이 남아 있기에 그런 것들에게서 자유로워지는 것입니다. 맛과 욕심이 없으면 악마는 영혼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 십자가의 요한은 “좋을씨고 행운이여 알 이 없이 나왔노라. 내 집은 이미 고요해지고”라고 노래했던 것입니다. 이제 영혼은 자유롭게 하느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이제 때로는 죽기보다 더한 고생을 치르게 될 것입니다. 고생과 유혹을 거쳐서 시련과 단련과 시험을 치르지 않는 영혼의 감성은 지혜로 도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지혜로 들어가기 위한 가장 효과 있는 닦달질(마음고생)을 당하게 되는데, 이 마음 고생만이 나약한 본성의 감성을 정화하여 완덕의 길로 나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견디어낼 자질과 힘이 더욱 강한 사람들이라면 하느님께서 더욱 호되게 정화하시고, 보다 약한 사람들에게는 관용을 베푸시고 시련도 가볍게 해주시기도 합니다. 사랑의 합일이라는 복되고 아득히 높은 자리로 올라갈 영혼들은 제아무리 하느님의 빠르신 인도를 받는다 할지라도 상당한 기간을 이 메마름과 시련 속에 있는 것이 보통임을 경험을 통해서 증명해 주었습니다.
어 이 밤의 기간이
4. 영의 어둔 밤.
하느님께서 앞으로 이끄실 영혼은 감각의 첫 번째 정화와 밤의 메마름과 고생을 벗어나자 즉시 이 영의 밤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오랜 기간이 걸리기가 일쑤이며, 그 동안 영혼은 초심자의 영역을 벗어난 위치에서 하느님께 나아가게 됩니다. 이 위치에서의 영혼은 마치 옹색한 감옥을 나온 사람처럼 자유와 만족을 가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됩니다. 그는 기도할 때, 아주 쉽게 고요해지고, 사랑겨운 관상과 영의 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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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는 성 십자가의 요한의 “어둔 밤”을 정리했습니다. 다음에는 “깔멜의 산길”과 “영혼의 성”등을 중심으로 보다 깊은 기도의 단계에 이른 이들에 대해서 이야기 해 드리겠습니다.
5. 새롭게 시작하는 말
이제 순수한 믿음을 가지고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티아 2,20)라고 고백하기 위해서 기나긴 완덕의 길을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합니다. 내 안에 유혹을 불러일으키는 작은 요소도 없애버리며 한 단계 한 단계 성덕으로 나아갑니다. 그 길을 시작하는 이들이 초심자입니다.
이 초심자는 세례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 받은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이 어떻게 묵상기도를 알 수 있고, 어떻게 성경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말씀 안에서 살아온 이들이 묵상기도에서 관상기도로 넘어가는 과정, 또 깊은 묵상기도를 하는 이들의 과정, 그리고 완덕의 길로 나아가는 과정에 있는 이들을 초심자라고 표현해 봅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상태에 있는 신앙인입니까? 나의 기도의 단계는 어디입니까? 내가 기도할 때, 내가 봉사할 때, 내가 살아갈 때, 나를 움직이는 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고, 버릴 것은 버리고, 움켜 잡을 것은 움켜 잡는 삶. 그것이 바로 가톨릭 리더에서 지향하는 삶입니다. 신앙인들은 주님 안에서 단순해져야 합니다. 그렇게 살아갈 때 나를 통해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일을 하시고, 나를 통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 일을 바로 우리가 해야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