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계명에 근거한 양심성찰

 

10계명에 근거한 양심성찰

 성찰이란 예수님의 눈으로 나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나를 보고,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볼 때, 나는 예수님을 닮아갈 수 있습니다.



 나는 늘 변화무쌍한 상황 속에서 수많은 유혹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많은 상황을 바뀌게 만들고, 유혹하며 살아갑니다. 주님께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갈 때는 더 많은 죄를 짓고, 더 많은 유혹을 접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주님께 마음을 열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려 하면 유혹의 기회를 피하려 하고, 나약한 자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며 기도하려 합니다.

 자신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 그가 바로 주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고, 예수님의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통해서 어떻게 자신을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습니다. 바리사이는 꼿꼿이 서서 혼잣말로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제가 다른 사람들, 강도짓을 하는 자나 불의를 저지르는 자나 간음을 하는 자와 같지 않고 저 세리와도 같지 않으니,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저는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모든 소득의 십일조를 바칩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찍이 서서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 엄두도 내지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하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누가 더 올바른 기도를 했을까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마음은 어떤 이의 마음일까요?



 바리사이는 스스로 올바른 사람임을 자처했습니다. “꼿꼿이 서서”라는 표현은 그가 얼마나 교만에 차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서 기도하고 있는 세리를 돌아다보면서 자신은 세리와 같은 죄인이 아님을 강조하는 그의 얼굴에는 교만과 멸시가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느님께 시위하는 것이고, 하느님께 무례를 범하는 것이고, 자기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입니다.

“저는 죄가 없는데 주일 한 번 빠졌습니다.”라고 성사를 보는 사람과 다를 바가 무엇일까요?

 바리사이는 자신이 하고 있는 선행들을 꼿꼿이 서서 나팔 불기 시작했습니다.

“하느님,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사실 에~ 나는 강탈하는 자나 불의한 자나 간음하는 자 따위의 다른 인간들과는 같지 않을 뿐더러 이 세리와도 같지 않습니다. 에~ 나는 한 주간에 두 번이나 단식하고 내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칩니다.”

 매주 두 번 단식, 율법에 따라 가축과 땅의 수확에서 거둔 이익의 십 분지 일을 바치면 되었으나 그는 모든 수입의 십분의 일을 바쳤습니다. 하지만 그가 자랑하는 것은 외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는 내적 의무, 즉 사랑과 자비와 용서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바리사이는 우리보다 좀 낫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소득의 10분의 1을 바쳤기 때문입니다. 정성껏 바치시는 분들은 정성껏 하시지만, 늘 천 원짜리를 봉헌함에 당당하게 넣는 내 모습과 비교해 볼만 합니다.

 물질적인 것을 봉헌하지도 않고, 입으로만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니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리고 “나는 늘 열심한 신자다.”라고 착각을 하니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예수님께서는 “나더러 주님, 주님 한다고 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멸시를 받고 있던 세리. 그는 멀리 서서 감히 얼굴도 쳐들지 못하고 통회의 표시로 가슴을 칩니다. 이는 그의 마음속에 얼마나 값진 겸손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며, 하느님의 자비가 얼마나 필요한 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의 입에서는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라는 탄식이 흘러나옵니다. 하느님 앞에서 이 탄식 외에 또 어떤 말이 나올 수 있을까요?



 내가 나를 알면 알수록, 내가 내 자신을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자신의 가슴을 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어떻게 기도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성사를 보고 있습니까? 혹시 기도한다고 하면서, 성사 본다고 하면서 죄를 짓고 있지는 않습니까? 미사 중 고백의 기도를 하며 가슴을 칠 때 이 세리의 마음이 되어 가슴을 치며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십계명에 근거하여 나의 모습을 돌아 봅시다. 형식적인 성찰을 통하여 교만한 바리사이처럼 그렇게 죄인으로 자처하지 말고,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주님께 자비를 청하는 세리의 마음으로 나를 돌아 봅시다.



십계명1)

일.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

이.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

삼.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사.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오. 사람을 죽이지 마라.                     

육. 간음하지 마라.

칠. 도둑질을 하지 마라.                     

팔. 거짓 증언을 하지마라.

구.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십.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하느님께서는 당신 백성이 사랑의 질서를 지키며, 평화를 누리면서 살아가도록 10가지 계명을 주셨습니다. 출애굽 한 백성들에게 10계명은 커다란 자부심이었을 것이며, 공동체의 질서와 평화를 유지하고,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합당한 자격을 부여하는 의무를 구체적으로 명시한 것이었습니다.

   1 그때 하느님께서 이 모든 말씀을 하셨다. 2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3 너에게는 나 말고 다른 신이 있어서는 안 된다. 4 너는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든, 아래로 땅 위에 있는 것이든, 땅 아래로 물속에 있는 것이든 그 모습을 본뜬 어떤 신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 5 너는 그것들에게 경배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6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7 주 너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당하게 불러서는 안 된다. 주님은 자기 이름을 부당하게 부르는 자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 않는다.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라. 9 엿새 동안 일하면서 네 할 일을 다 하여라. 10 그러나 이렛날은 주 너의 하느님을 위한 안식일이다. 그날 너와 너의 아들과 딸, 너의 남종과 여종, 그리고 너의 집짐승과 네 동네에 사는 이방인은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 11 이는 주님이 엿새 동안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이렛날에는 쉬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안식일에 강복하고 그날을 거룩하게 한 것이다. 12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는 주 너의 하느님이 너에게 주는 땅에서 오래 살 것이다. 13 살인해서는 안 된다. 14 간음해서는 안 된다. 15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16 이웃에게 불리한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17 이웃의 집을 탐내서는 안 된다. 이웃의 아내나 남종이나 여종, 소나 나귀 할 것 없이 이웃의 소유는 무엇이든 탐내서는 안 된다.”(탈출기20,1-17)



 한 처음 하느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에는 인간들에게 어떠한 규정도 공포하지 않으시고 자연법을 따라 살도록 이끄셨습니다. 자연법은 양심에 따라 살아가며, 자연의 질서를 사회 질서의 근본 원리로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 마음의 가장 중요한 곳에 양심을 주셨고, 그래서 사람들은 양심에 따라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무딘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양심에 거스른 죄를 짓고도 태연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생기면서 결국 실정법들이 하나 둘 씩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출애굽 한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계약을 맺으시며 10계명을 주십니다. 이 계명을 지키게 되면 그들은 하느님 백성이 되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출애굽 한 백성들을 억압하고, 구속하시기 위해 10계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잘 살게 하시기 위해 십계명을 주신 것입니다. 또한 출애굽 한 백성들은 계명을 통하여 어느 민족에게도 없는 계명을 받음으로써 자긍심과 감사를 느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10계명을 형식적으로 지키려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고, 생명을 주는 계명을 무거운 짐으로 만들어 놓는 사람들(바리사이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계명을 완성하시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 짐이 아니라 사랑이요 생명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상삼계와 하칠계

 십계명은 첫 3계명을 “상삼계”라고 하고, 나중 7계명을 “하칠계”라고도 합니다. 제1계명, 제2계명, 제3계명을 상삼계라고 하며 하느님과 인간과의 수직관계를 규율하고 있습니다.

 제 4계명부터 10계명 까지 일곱 계명을 하칠계라고 합니다. 하칠계는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백성 상호간의 수평관계를 규율하는 계명으로, 인간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규정함으로써 함께 어울려 살아가는데 있어서 서로 배려하고, 신의를 지키며, 최소한 지켜야 할 것들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 형제가 십계명을 공부한 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십계명을 잘 지키고 있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의미를 알고 나니까 제가 계명에서 너무도 많이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십계명은 문자 그대로만 한다면 어느 것도 벗어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의미를 살펴보고 나면 내가 해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이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적 또는 인간적 성숙도에 따라 지키는 내용은 달라질 것입니다.











제 1계명

한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여라.2)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십니다. 한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해야 합니다. 흠숭이라는 것은 하느님께만 드리는 흠모와 공경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3) 하지만 신앙생활을 하면서 어디 두 주인 뿐이겠습니까? 세주인, 네 주인까지도 섬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나의 선택은 어떻게 될까요? 저는 입으로는 하느님을 선택한다고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손은 재물에 가 있겠지요. 하느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재물, 건강, 인간관계 등”에 더욱 마음을 두고 있는 이유는 하느님을 제대로 섬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①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

 한 사람이 두 마음을 품으면 삶이 어렵게 됩니다. 성향이 다른 두 주인을 섬기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한 쪽 주인은 다른 편 주인이 요구하는 것을 금하고, 또 다른 편 주인은 저 쪽 주인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요구합니다. 하지만 종은 어느 쪽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참으로 어려운 삶입니다. 즉,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요구하시는 것과 재물이 요구하는 것이 다르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은 더 큰 집착으로 이어지고4),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기, 부정, 도둑질, 오만, 이기심 등이 생겨나게 됩니다. 즉,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고, 하느님을 거부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상숭배인 것입니다.5)



② 현대의 우상숭배.

 개신교 신자들은 천주교 신자들이 우상숭배를 한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모습을 어떤 형상으로도 만들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우상숭배에 빠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육신을 취하신 다음에는 구약의 백성들에게 하신 말씀이 신약의 백성들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우상숭배에 대해서 말씀하시지 않고,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천주교 신자들은 우상숭배를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예수님의 고상이 달려 있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나를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기억하기 위함이고, 그 수난에 감사하기 위함이고, 그 십자가의 길을 나 또한 걸으려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고 십자가에 달려있는 고상을 예수님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③ 건강 숭배

 미사 중에 한 회장님이 성체를 모시지 않는 것을 본당 신부님께서 보셨습니다. 그래서 미사 후에 “회장님! 무슨 일 있으세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형제가 하는 말은 신부님을 놀라게 했습니다. “한의사가 약 먹는 동안에는 ‘밀 것’을 먹지 말라고 해서요.”자신의 건강을 위해서라면 안 하는 것 빼고는 다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썩어 없어진 육신을 위해서 그 정도 신경을 쓴다면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영혼을 위해서는 더욱 갚진 투자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④ 하느님을 어떻게 섬길 것인가?

 한 분이신 하느님을 흠숭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요? 그리고 신앙의 스승들은 어떻게 했을까요? 신앙인들이 하느님을 흠숭하는 방법은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 드릴 것을 고민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릴 것을 고민하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합니다. 그것이 바로 의로운 신앙생활이고, 그 삶은 하느님께 영광이 됩니다. 많은 말을 하기 보다는 조용히 움직이고 “그저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임을 겸손하게 고백하는 것”, 늘 깨어서 살아가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섬기는 삶입니다.



 어느 조그마한 마을에 작은 성당이 있었습니다. 그 성당의 본당신부는 늘 열심히 기도하고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어느 날, 기도 중에 그는 하느님께 이렇게 여쭈었습니다.

“하느님! 이 마을에서 주님을 제일 기쁘게 해 드리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혹시 저 입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이 마을에서 나를 가장 기쁘게 해 주는 사람은 저 산 너머의 나무꾼 요한이란다.”

“하느님! 요한 형제는 성무일도를 바칠 줄도 모르고, 글도 읽을 줄 모르는데요.”

“그래도 나를 제일 기쁘게 하는 사람은 요한이란다. 그 이유를 오늘 저녁에 말 해 줄 테니 너는 이 그릇에 기름을 가득 부어서 마을을 한 바퀴만 돌고 오너라.”

그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릇에 기름을 가득 부어 마을을 한 바퀴 돌았습니다. 그리고 그날 저녁기도 시간에 하느님께 다시 여쭈었습니다.

“하느님! 말씀하신 대로 한 바퀴 돌았습니다. 이제 요한 형제가 주님을 제일 기쁘게 해 드리는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는 오늘 그릇에 기름을 가득 부어서 마을을 한 바퀴 돌 때 나를 몇 번이나 생각했니?”

“저는 기름이 쏟아질까봐 그것에만 정신이 없어서 주님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요한이는 매일 아침 일찍부터 나무를 해다 팔아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지만 나무를 하다가 적어도 하루에 세 번은 멈추고 기도를 한단다. 그리고 지친 몸을 이끌고 저녁미사에 나오는 요한이의 마음이 나를 기쁘게 한단다. 그래서 요한이가 나를 가장 기쁘게 한다고 말했던 것이란다.“



 바쁜 일상 속에서도 내가 하느님의 자녀임을 잊지 않고 기도하는 삶. 감사하는 삶. 그것이 바로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는 삶입니다.


제 1 계명에 비추어 성찰하면서

나는 하느님을 어떻게 흠숭하였는가?

하느님을 내 삶의 첫 자리에 모시고 살아왔는가?

나는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살아왔는가?

비신자들이 하는 것과 같이 미신 행위나, 사주나 관상, 점 등을 본 적은 없는가?

나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어떻게 읽고 있는가?

나는 교회를 비방하거나 성직자 수도자들을 모욕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이들을 무시하지는 않았는가?

나는 성실하게 기도하고 있는가?

나는 성체조배나 묵상기도를 바치고 있는가?

나는 주님의 수난을 생각하며 자주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있는가?





제 2계명: 하느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마라.6)

탈출기 6장 3절에서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이렇게 계시하십니다.

  2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셨다. “나는 야훼다. 3 나는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에게 ‘전능한 하느님’으로 나타났으나, ‘야훼’라는 내 이름으로 나를 그들에게 알리지는 않았다. (탈출기6,3)

 히브리어 “야훼”를 우리말로 옮기면 “나는 곧 나다” 또는 “나는 있는 나다” 또는 “나다.” 입니다. 하느님의 이름이 하느님의 본성을 드러내기 때문에 권위와 능력을 나타내는 “야훼”라는 이름은 존경의 대상입니다. 예언자들은 야훼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할 때(예언할 때-말씀을 전할 때) 신적 권위를 부여받았습니다(신명18,19). 그래서 야훼 하느님의 이름을 헛되이 부르면 안 되고(탈출20,7),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주님의 기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을 모세를 통하여 모든 사람에게 알려주심으로써 하느님은 멀리 계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인간과 인격적으로 항상 함께 현존하시는 분이심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또한 이름에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담겨 있습니다. “앙드레 김”하면 그 이름에 자신의 모든 노하우와 전통과 권위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 있게 상품과 음식을 팔고 있음을 알리기 위해 자신의 이름을 걸어 놓는 경우가 많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아버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습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있지만 아버지, 아버님 등 호칭을 쓰고 남에게 알릴 때는 “무슨 자 무슨 자” 쓰십니다. 라고 말합니다. 이렇듯 어른의 이름은 함부로 부르지 않고, 장인의 이름은 그 자체로 상품의 가치가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인들에게도 하느님의 이름은 함부로 부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라고 말을 하지만 공자나 부처에게도 “님”자를 붙이는데 하물며 예수님께 “님”자를 붙이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리고 함부로 부르는 것은 “불경”입니다.


제 2계명에 비추어 성찰하면서

나는 하느님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였는가?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오히려 신자답지 못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는가?

타인들과 함께 있을 때 당당하게 신자임을 밝히고, 성호경을 긋고 있는가?

어려울 때만 기도하고, 편한하거나 아쉬운 것이 없을 때는 하느님을 외면하지는 않았는가?

하느님께 드린 약속을 잘 지키고 있는가?

하느님의 자녀로서 자녀답게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가?

비신자보다도 못하게 삶을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가?

제 3계명: 주일을 거룩히 지내라.

 모든 신자들은 주일을 기쁘게 지냅니다. 그런데 왜 주일을 지켜야 할까요? 왜 주일은 의무적으로 참례해야만 하는 것인가요? 그리고 고백성사는 주일 빠질 때만 보는 것일까요? 어떤 분은 주일을 지키시는 이유가 “빠지면” 고백성사를 봐야 하니까 주일을 지키신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생각은 틀린 생각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고 하셨습니다. 단순히 주일미사에만 참례한다고 해서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이 주님께로 가야하고, 몸이 주님께로 향해야 합니다.



아버지 생신날” 자녀들이 왔는데 큰 아이는 마지못해서 왔고, 며느리는 빨리 가려고 안달이 났습니다. 작은 아이는 전날 온 것도 아니고 아침 먹을 때 와서 “아버지 생신 축하드려요!”하고 돈 만원 주고, “제가 오늘 약속이 있어서 가야 해요.”라고 밥 먹자 마자 가 버리면 그 아버지는 어떨까요? 아버지의 생신에는 가족이 함께 모여 아버지의 생신을 축하드리고, 아버지의 은혜에 감사하며, 아버지께 사랑과 존경을 드리는 날입니다. 당연히 선물과 용돈도 드려야 합니다. 그런데 마지못해 와서, 오자마자 가려고 하고, 선물은 고사하고 돈 만원 놓고 간다면 그 아버지는 행복할까요? 또 막내는 전화를 해서 “아버지! 이번 생신 때는 바빠서 못가겠네요. 생신 축하드려요!”

 그럼에도 불구하고“그래, 역시 착한 아들이야! 네가 나를 그렇게 사랑하니 저 뒷산 과수원은 너에게 주마!” 그럴 아버지가 계실까요? 물론 사랑밖에 모르시는 부모님이신지라 그렇게 주고도 계산하지는 않으십니다.



 주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은 주님의 날입니다. 이날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이고, 부활을 희망하며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는 미리 기쁨을 맛보며 살아가는 날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것은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은 의무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자녀가 부모를 찾듯이, 주님을 사랑하는 자녀들이 주님께로 모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사에 참례할 때는 ①목욕재계하고, ②고운 옷으로 갈아입고, ③성경, 성가책, 기도서, 매일미사, 미사보를 가방에 잘 챙겨 넣고, ⑤ 정성스럽게 봉헌금을 준비합니다.④ 그리고 전날 깨끗하게 닦아놓은 신발 신고 ⑤ 웃으면서 성당으로 가는 것입니다.



 성당에 가서는 ① 반가운 사람들 만나고, ② 못 본 사람들에게 인사도 건네고, ③ 기타 볼일을 다 보고 경건하게 성당으로 들어갑니다. ④ 그렇게 준비를 하고 성당에 들어갔기에 발걸음 하나도 조심하게 되고, 그렇게 준비를 했기에 한 주간 동안 베풀어 주신 은혜에 감사를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축복”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부족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면 고백성사를 통해 다시 은총지위를 회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가 시작되고, 그렇게 주일미사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미사는 전날 신발을 닦아 놓는 것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일미사의 축복은 전날부터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전은 하느님의 집이면서 동시에 나의 기도의 집입니다. 그래서 미사에 참례해서는 하느님의 집이 어떻게 되었는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그리고 내가 기도하는 이 성당에서 내가 할일은 없는지를 고민하게 되고, 찾아서 하게 됩니다.



① 안식일 규정

 율법학자들은 안식일에 해서 안 될 일로서 39 조목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 금지 조항은 파종, 경작, 수확7), 밀단을 묶는 것, 밀을 타작하는 것, 한 마리의 짐승이라도 잡아 서는 안 될 것, 또 그것을 죽이는 것, 그 껍질을 벗기는 일, 소금에 저리는 일, 그 가죽을 보존하기 위해 약을 발라 두는 것 등등이었습니다.



②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

 복음에서 보면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예수님의 일을 보고서 늘 시비를 걸었습니다. 병자를 고쳐주시기만 하면 오만가지 트집을 잡아서 예수님을 죄인으로 몰았습니다. 안식일은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와 감사와 경배를 드리는 날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의 주인은 예수님이십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세상을 다스리시려 늘 일하고 계신 것처럼 예수님께서도 늘 일하십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해서든지 없애 버릴 대상으로밖에 보지 않았기에 예수님의 진면목을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사진을 붙들고서 사랑을 고백하지 말고, 눈앞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고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의 주인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돌아가신지 삼일 만에 부활하셨는데, 그 말이 바로 안식일 다음날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을 주일로 옮겨서 지내고 있습니다.



③ 대송

 주일날 아침, 미사에 참례하려고 하는데 아이가 갑자기 배가 아프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이에게 “미사 갔다 올 테니 잠시만 기다려라.”해야 합니까? 아니면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가야 합니까? 당연히 병원에 가야지요.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미사시간을 맞출 수 없을 때, 대송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일을 하기 위해서 대송을 바치는 것은 잘못된 것이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니, 아이가 아파도 미사에 참례한 다음에 병원에 가는 것도 잘못된 것입니다. 우선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상황에 맞게 우선적인 것을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어느 단체의 훈화 후에 문을 나서려고 하는데 한 형제가 “신부님! 평화방송으로 미사를 보면 주일 지키지 않아도 되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신부님은 “TV에서 요리 프로그램 보고서 밥 안 먹을 사람들은 그래도 돼요!”라고 하면서 문을 나섰습니다. 순간 그 신부님의 마음은 “오호! 내가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역시 성령께서는 당신 사제를 부끄럽게 만들지 않으시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④ 주일에 해야 하는 것들

– 자비를 베푸는 것.

 예수님께서는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정의보다도 자비를 더 소중히 여기십니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라는 호세아 예언자의 말씀(호세아 6,6)을 통해 예수님께서는 앞선 예언자들이 끈질기게 역설하던 올바른 가치 질서를 다시 한 번 주장하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정성이 담긴 마음을 원하시며 순종과 신뢰와 사랑과 참된 정의를 원하십니다. 믿음이 가득한 참된 마음이 하느님께로 간다면 순종과 신뢰와 참된 정의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것입니다. 그러한 후에야 비로소 인간의 제사는 하느님의 마음에 들게 될 것입니다.



– 사랑의 의무를 실천하는 것.

 예식적인 규정 사항을 애써 지키고 전례적 규정을 세세하게 이행한다 해도 사랑의 의무는 결코 면제될 수 없습니다. 마음 없는 미사, 마음에만 있고 행동 없는 미사. 어느 한 가지만을 하느님께 드린다면 우리는 결코 하느님의 뜻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한 것이 됩니다. 만일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 먹던 제자들을 본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이것을 알고 있었다면 이유 없이 죄 없는 제자들을 꾸짖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고생한다고 근사한 식당에 가서 맛있는 식사를 대접해 주지 않았을까요? 그런 마음이 신앙인들에게 필요합니다. 사랑의 의무를 실천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주일에 해야 할 일들입니다.



– 이웃을 사랑하는 것.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끝까지 돌봐 주고, 항상 그들 편이 되어 주는 사람. 그가 바로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나 편할 때만 함께 하고 나에게 불리하면 외면하고, 희생양을 만들어 버리는 사람. 그런 사람은 결코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처럼 함께 하는 사람들을 늘 사랑하고 돌봐주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런 면에서 바라본다면 주일 미사에 참례해서 가정에서 아이들이나 배우자를 얼마나 돌보고 이는지…, 혹시 귀찮아하고 있지는 않은지. 직장 동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성당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생각해본다면 더욱 거룩한 미사에 참례하고, 거룩한 주일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⑤ 형식적인 사람들

 신앙에 관심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자신들에게 주어진 상황이 더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신앙이라는 것이 구속력이 없습니다. 평상시에는 안 나오다가 행사 때만 나오는 사람에게 “뭐 하러 나왔어! 어서 집에 가!”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와 준 것만도 고맙게 생각하고 그와 함께 하려 합니다. 또 자신이 무슨 일을 맡았다 하더라도 하기 싫으면 그만입니다. 안 나오면 그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고, 하느님께서 모든 이들에게 기회를 주시는 것처럼, 우리 또한 그에게 기회를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기회만 줄 수는 없습니다.



형식적인 미사 참례

 준비가 없이 시간 맞춰서 성당에 왔다가 이런 저런 약속을 만들어 미사 끝나자마자 사라지거나 자기 일 하기 바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성당에 들어올 때도 마치 빚을 받으러 온 것처럼 그렇게 당당히 들어오고, 들어오면서 이사람, 저 사람에게 말을 걸고, 소리를 냅니다.



 이들에게 주일에는 늘 계획이 있고, 바쁜 일이 있습니다. 이들에게 주일은 고백성사를 보지 않기 위한 방편이기도 합니다. 또한 고백성사를 본다 할지라도 형식적으로 고백을 합니다. 또 특별한 전례가 있거나 강론이 길게 되면 불평을 하게 됩니다. “왜 이리 길어! 전 신부님은 몇 분이면 끝났는데…,” 또 일이 보인다 할지라도 “누가 하겠지!”라고 눈을 감아 버리게 됩니다.



⑦ 주일파공

 가톨릭은 주일과 대축일에는 거룩하게 지내기 위하여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일을 하려고 합니다. 기도모임, 성경묵상, 냉담자 방문, 환자 방문, 봉사 활동 등…, 어쩔 수 없이 일을 하게 될 경우에는 본당사제의 관면을 받았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주일을 거룩하게 지냅시다. 주일은 의무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형식적으로 주일을 지키지 말고,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일을 지킵시다. 그렇게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봅시다. 주님께서 나에게 원하시는 일입니다. 그렇게 힘을 얻어 한 주간을 활기차게 보내봅시다.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라는 제 3계명을 묵상하면서

나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고 있는가?

나는 내 자녀들이 주일을 지킬 수 있도록 하고 있는가? 바쁘다는 핑계로 자녀들과 함께 일하고,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만들고 있지는 않은가?

내 일이 바쁘다고 주일을 거르고 있지는 않은가?

또 늘 때만 되면, 바쁘다는 핑계로 성당을 멀리하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주일에 비신자들에게 주보를 전달하고,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나는 구역의 쉬는 형제자매들을 찾아보고, 아픈 형제자매들을 찾아 위로하고 있는가?

나는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기 위해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선행을 베풀고, 봉사를 하며,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있는가?

주일미사를 해치우기 식으로 참례하고 끝나자 마자 내 일을 하는라고 정신이 없지 않은가?





제 4계명: 부모에게 효도하여라.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입니다. 자신의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이며, 신앙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에 부모에게 더욱 잘 하는 것입니다.



1. 낳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 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2. 어려선 안고 업고 얼려주시고 자라선 문 기대어 기다리는 맘 앓을 사 그릇될 사 자식 생각에 고우시던 이마 위에 주름이 가득 하늘 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3. 사람의 마음속엔 온 가지 소원 어머님의 마음속엔 오직 한가지 아낌없이 일생을 자식 위하여 살과 뼈를 깎아서 바치는 마음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 없어라





한 형제가 부모님을 모시고 가족과 함께 여행을 떠났습니다.

“아버지! 우리 저기 올라가서 기념촬영해요!”

“난 차를 지키고 있으마!”

“누가 차 가지고 가는 것도 아닌데 같이 올라가요. 조금만 걸어가면 되요”

“다리가 아파서 그러니 너희들이나 다녀오렴.”

그는 그제서야 “아버지가 그렇게 나이가 들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서운함이 밀려왔습니다.

“조금만 걸으시면 같이 가족사진을 찍을 수 있는데…,”

그는 아버지에게 차츰 화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효도 하려고 아버지 모시고 여행을 떠났는데, 돌아보니 자신이 아버지에게 화를 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를 내 틀에 맞추는 것은 효도가 아닐 것입니다. 아버지의 틀에 들어가 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효도가 아닐까요?



① 코르반

 예수님 시대에 코르반의 서원이 바리사이들이나 율법학자들에게 유행했던 것 같습니다.

코르반 서원이라는 것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하느님께 드렸습니다. ”하고 서원하는 것으로서 그렇게 하느님께 바쳤기에 사람들을 위해 쓸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당연히 부모를 위해 쓸 수 있는 것도 없었습니다. 따라서 재산을 “코르반”한다는 것은 사실상 어버이에게 이 재산에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곧 어버이를 보호하지 않기 위해 인륜을 거스르고, 하느님을 거슬렀던 것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자기만 알게 하고 머리만 똑똑하게 키운 사람들은 그렇게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모두 부모의 가르침(?) 덕택이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서원은 누구나 할 수 있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부모에게 적대감정을 품은 자식, 혹은 탐욕스러운 이기주의에 빠진 자식들은 어버이가 자기에게 기대하고 있는 부양의 모든 것들을 하나의 봉헌물(코르반)로서 바치고 다시는 그것에 손댈 수 없다고 선언할 수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완고한 마음, 냉혈, 불손한 마음이 하느님께 대한 신심의 가면을 쓸 수 있었습니다. 물론 자신의 재산을 하느님께 봉헌할 강제적인 의무는 없었다고 합니다.8) 즉 자신의 재산을 보호하고, 위선을 떳떳하게 감출 수 있는 재산증식의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② 부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자녀들을 사랑합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도 아까워하지 않습니다. 계산하지도 않습니다. 어머니 은혜라는 노래에서처럼 부모는 바로 그런 존재입니다. 나 또한 그런 부모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기 위해서는 내 부모를 공경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여라는 4계명에 비추어 성찰하면서

나는 부모님을 참되게 공경하고 있는가?

부모님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며, 자녀교육이나 중요한 결정사항 등을 부모님과 상의하고 있는가?

나는 내 며느리나 사위를 참된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가? 내 마음대로 판단하고 괴롭히고 있지는 않은가?

돌아가신 부모님들의 기일 등에 부모님을 위하여 미사를 봉헌하고 있는가?

자녀들에게 좋은 신앙의 모범을 보이고 있는가?

자녀들에게 상스러운 욕이나 폭력을 행사하여 마음에 상처를 주고 있지는 않은가?

나이 드신 부모님을 업신여기고 있지는 않은가?

부모님께 정기적으로 용돈과 생활비를 보내 드리고 있는가?

부모님께서 마음 아파하는 일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내 가정을 사랑으로 돌보고, 화합하고 일치하고, 함께 기도하고 있는가?

제 5계명: 사람을 죽이지 마라.

 사람이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정확하게 판단하실 수 있으신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 잣대로 사람을 판단하고, 더 나아가 사람의 생명을 빼앗아서도 안 됩니다.



 또한 비록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어의 폭력으로 상대방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육체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마음으로 상대방을 수천 만 번 죽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계명입니다. 하지만 이 계명이 있기에 나 또한 지금도 내 생명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당연한 것을 행한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대학생이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것이 무엇이 자랑스럽겠습니까? 당연한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연한 것을 넘어서 작은 의로움 까지도 실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9) 그러므로 신앙인들은 당연한 것을 넘어서 신앙인들은 사소한 것에도 마음을 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인은 말할 것도 없고 이웃에게 성내는 것도 살인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랍비들도 자기 이웃을 미워하는 것은 그들에게 피를 본 것과 똑같이 취급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미움은 상대방을 말없이 죽이는 행위입니다. 그래서“미워한다는 것은 피를 본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이웃에 대한 외부적인 범죄, 곧 살인, 약탈, 상해, 구타 등을 금지했을 뿐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분노 등에는 언급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 각자의 양심의 판결에 맡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양심은 점차로 마비되어 가고 실정법이 금지하지 않으면 범해도 상관없다는 생각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 이 율법은 예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그 뜻을 찾아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완성자이신 것입니다.



① 분도나 모욕이나 매도도 안 됩니다.

 분노 중에도 죄가 되지 않는 분노가 있습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도 분노하신 적이 있으십니다. 증오가 있는 악의, 마음이 부정한 노여움도 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재판은 이스라엘의 최고의회에서가 아니라, 사람을 지옥불로써 벌하실 수 있는 하느님의 대심판인 것입니다.



 사순절 첫 금요일에 요한은 유다에게 전화를 걸어 성당에 가서 미사도 참례하고 십자가의 길도 바치자고 했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말했습니다. “야! 네가 뭔데 성당 가자 말자 하냐? 내 마음이 움직여야 성당도 가는 것 아니겠어! 너나 잘해. 그리고 할 일 없으면 집에서 잠이나 자.”신앙을 권면하는 형제에게 화를 내는 유다는 결국 하느님께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결국 신앙생활에서부터 멀어지게 되니 상(賞)과는 거리가 멀어지게 됩니다.

 요한은 성당에 가서 미사에 참례하고 십자가의 길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성당에서 이루어진 금요 봉사자 교육에 참례해서 교육을 받고 늦게 들어왔습니다. 다음 날 요한은 유다에게 말했습니다. “어제 미사에 참례하고, 십자가의 길을 바치고, 봉사자 교육도 받았는데 몸은 피곤하지만 마음은 날아갈 것 같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에이~ 바보야! 집에서 따뜻한 아름 목에 누워서 TV를 보면 얼마나 좋니!”하면서 요한을 멸시했습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이의 삶을 멸시한다면 그 신앙인의 삶과는 거리가 멀게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진 그에게 준비된 것은 상(賞)은 결코 아닙니다.



 요한은 사순절 기간 동안 단식과 금육을 지키고, 또 절제의 생활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모았더니 100만원이 되었습니다. 요한은 그것을 기쁘게 감사헌금으로 봉헌했습니다. 그리고 유다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유다는 요한에게 “이 멍청아! 그 돈 있으면 멋진 술집에 가서 거하게 술 한 잔 할 수도 있고, 제주도로 3박 4일 골프여행을 다녀올 수도 있었을 텐데 어찌 그리 멍청한 짓을 했니!”라고 요한의 마음을 매도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를 매도했을 경우 그가 받게 되는 것은 영원한 벌 뿐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살인해서는 안 된다.”는 구약의 율법의 계명은 완성되었습니다. 이제 살인뿐 아니라 분노나 모욕, 매도 또한 근본적으로 금지되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5계명을 통하여 나 자신을 성찰하며

나는 말로서 상대방을 괴롭히거나 폭력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은가?

형제자매들을 칭찬하고, 봉사자들을 칭찬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여 그들이 더욱 생동감 있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의 열정을 짓밟고 있는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형제자매나, 나와 의견이 다른 형제자매들을 미워하거나 시기 질투하고 있지는 않는가?

나의 이기심이나 교만, 폭력 때문에 내 주변 사람들이 불편해 하고 있지는 않는가?

다른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 적은 없는가?

죽이고 싶을 정도로 상대방을 미워해본 적은 없는가? 그리고 상대방이 잘못되기를 속으로 바라고 있지는 않았는가?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는가? 어린 태아를 원치 않는다고 살해하지는 않았는가?

내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지는 않았는가?

 제 육계명: 간음하지 마라.

죄의 유혹을 단호히 물리쳐라

42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그 꺼지지 않는 불에 들어가는 것보다, 불구자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버려라.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절름발이로 생명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 던져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외눈박이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마르9,42-48)



 율법에서는 간음을 금하고 있었으나 예수님께서는 나쁜 생각, 음란한 생각까지도 엄하게 금하십니다.

구약의 십계명은 남성중심(간음죄를 여자에게만 적용시킴)사상이 짙었습니다. 결혼한 여인이 독신자나 비유다인과 성적으로 관계를 맺으면 간음하는 것이지만, 결혼한 남자가 같은 일을 하면 간음을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근동 지방도 여자는 귀중한 재산목록에 속해 있었습니다. 십계명에도 이런 영향이 미쳐 재산, 아내를 탐하지 말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자 그대로 간음을 금하고 있던 모세의 율법은 단순한 간음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보충하십니다.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의 혼인법과 이혼법을 살펴보면 쿰란 종파만이 일부일처제를 주장하면서 이혼과 재혼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일부다처제를 묵인했을 뿐만 아니라 이혼과 재혼을 쉽사리 허락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이혼이란 언제나 남편이 아내를 소박하여 내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구약에서는 아내에게 수치스러운 일이 있어야 그렇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수치스러운 일일까요? 남성 중심적인 사회 안에서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리사이계 율법학자들은 여러 가지 해석을 내렸는데 간음, 풍기문란, 음식을 태우는 것, 계명을 어기는 것, 남편 눈에 거슬리는 모습 따위를 수치스러운 일로 보았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서 이런 일을 발견하고 버릴 마음이 있으면, 이혼장을 만들어 아내에게 건네주면 그 순간부터 아내는 소박맞고 쫓겨난 여자가 됩니다. 이혼장에 소박 사유를 쓸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아내가 무서워서 지붕위에 올라가서 아래에 있는 아내에게 이혼장10)을 던졌다고도 합니다.



 바리사이들의 이혼 관례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비판적 입장을 취하시어 이혼 불가를 선언 하셨습니다.11) 모세가 이혼을 허락한 이유는 마음이 너무도 완고하기 때문이었고, 이혼장이 있어야 만이 여자들이 다시 혼인할 수 있었기에 이혼장을 써 주라고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의 단일성과 불가해소성을 말씀하셨습니다. 남자와 여자가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묶어주셨으니 절대로 풀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혼인 한 사람들은 “어떻게 아내를 사랑해야 할까? 어떻게 남편을 사랑해야 할까?”를 고민해야 합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에 비추어서 나를 성찰하면서

내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지는 않은지

배우자에게 신의를 깨고 있지는 않은지

다른 이들의 가정을 깨고 있지는 않은지

마음으로 죄를 짓고 있지는 않은지

내 배우자를 마음을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있는지를 성찰해 봅시다.







제 7계명: 도둑질을 하지 마라.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말씀은 어느 세대나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계명이고, 반드시 지켜야 할 계명입니다. 내 것이 아니라면 관심을 기울이지 맙시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내 것에 만족하지 못한 상태에서 다른 것을 보게 되면 내 마음은 어느덧 그쪽으로 흘러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비교하게 되고, 불평하게 되고, 탐욕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행복은 멀어지는 것입니다. 내 것에 만족하면서 살아가고, 정당한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도록 힘쓰는 신앙인이 되어 봅시다.



 또한 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것 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장관들의 청문회에서 논문표절로 곤욕을 치루는 것을 자주 봅니다. 남의 물건을 훔치는 것뿐만 아니라 남의 생각을 자신의 것인 양 발표하는 것도 큰 도둑질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또한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것,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는 것도 도둑질임을 꼭 명심합시다.



도둑질을 하지 말라는 계명을 통하여 내 양심을 성찰해 봅시다.

나는 남의 것을 훔치지 않았는지

남에게 돈이나 물건을 빌리고 갚지 않거나 돌려주지 않은 적은 없는지

내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 것처럼 사용하지 않았는지

내가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내가 한 것처럼 자랑하지 않았는지

내가 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거부하지는 않았는지

공공기물이 방치됨에도 불구하고 내 것이 아니라고 외면하지는 않았는지





제 팔 계명: 거짓 증언을 하지마라.

 어릴 적에 친구들과 놀면서 자주 했던 말 가운데에서 “천주께 맹세”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즉, 내가 하는 말이 사실임을 강조하기 위해서 “천주께 맹세”라는 말을 자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맹세를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하늘을 두고도 맹세를 하지 말고 땅을 두고도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맹세를 하는 이유는 상대방이 믿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을 믿게 하기 위해서 하느님까지 끌어 들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맹세를 하지 말라고 하시며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하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신앙인은 “아니오”와 “예”를 정확하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전에 고백성사를 볼 때의 일입니다. 지금은 돌아가셨는데 성사를 보다가 “이래서 이렇게 했습니다.”라고 변명을 하면 그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 라고만 하면 된단다.” 그 말씀을 듣고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핑계를 대고, 그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했던 제 모습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내가 진실을 말하는데 상대방이 안 믿어주면 그만입니다. 또한 내가 거짓을 말하는데 상대방을 믿게 하려고 하느님까지 끌어들여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참으로 멋지십니다.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 옳은 말씀입니다. 좀더 정직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더 나아가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상대방이 믿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또한 거짓 증언을 통해 남을 해치면 안 됩니다. 남에게 손해를 끼치기 위해서 거짓 증언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책임은 고스란히 내가 짊어 져야 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내가 현세에서 다 갚지 못하면 내 자녀들까지도 그것을 갚아야 함을 반드시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와 거짓말하지 않을 상황을 만들지 않는 현명함이 필요합니다.



거짓증언을 하지 말라는 계명을 통해 나를 성찰해 봅시다.

나는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거짓말을 하지는 않습니까?

부주의한 말로 상대방의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았습니까?

옳은 말을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박과 모함을 받는 형제자매를 위해 당당하게 진실을 이야기 했습니까? 아니면 눈치를 보느라고 침묵하고 있었습니까?

나는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하고 있습니까?

나는 진실을 말하지 않아서 형제자매들에게 불편을 겪게 하고, 손해를 끼치지는 않았습니까?

나는 친분 관계 때문에 옳은 말을 하지 않은 적이 있습니까?

나는 두려움 때문에 진실을 외면한 적은 없습니까?

나는 형제자매들을 모함하거나 비밀을 퍼트리거나 침묵의 약속을 어기지는 않았습니까?





제 구 계명: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마라.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늘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배우자 앞에 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서로 무뎌져 갑니다. 무딘 마음은 배우자에 대한 사랑을 식게 만들고,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리고 늘 새로운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려 합니다. 내 배우자를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큰 선물로 주신 사람입니다. 내가 내 배우자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면 나는 결코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내 배우자는 하느님께서 눈에 넣어도 아파하지 않는 하느님의 자녀이고, 하느님께서는 내가 그에게 잘 해주기를 바라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배우자와의 관계를 새롭게 하기 위해 부부들을 위한 피정이나 교육 등을 정기적으로 받으며 더욱 사랑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랑을 키워 갈 때, 남의 아내를 탐내지 않고, 자신의 배우자만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가정만이 오로지 시선을 한 곳에만 둘 수 있습니다.



남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통하여 나를 성찰해 봅시다.

나는 남의 아내를 탐내거나 유혹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내 아내나 남편을 공경하고 사랑하였습니까?

나는 내 아내나 남편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거나 평가하여 마음 아프게 한 적은 없습니까?

나는 내 배우자의 약점을 이용하여 고통이나 모욕을 주지는 않았습니까?

나는 내 배우자를 무시하거나 배우자의 가정 문제를 비하하며 수치를 주지는 않았습니까?

제 십계명: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마라.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는 말이 있습니다. 내 것에 만족하다가도 상대방의 것을 보면 탐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즉 어떠한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을 소유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12) 하지만 내 것에 만족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남을 것을 보고 좋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것을 억지로 가지고 싶은 마음이나, 내 것을 버리고 그것을 취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또한 그런 마음이 생긴다 할지라도 절제할 줄 압니다.



 성 프란치스코가 다미아노 성당을 수리할 때 돌을 산 적이 있었는데, 그 돌을 판 사람은 실베스텔 신부였습니다. 그는 그때 돌을 헐값에 팔았습니다. 아마도 그 돌이 좋은 목적으로 쓰일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싸게 주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인 많은 돈을 마구 내주는 것을 보고 그는 욕심이 생겼습니다. 그는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다가와 말했습니다. “전에 나한테서 돌을 살 때 당신은 아주 싸게 샀잖아요.” 프란치스코는 이 사제의 욕심에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즉시 허리를 굽혀 베르나르도의 오추 주머니에서 돈을 세지도 않고 한줌 쥐어서 그 사제의 손에 쏟아 부으면서 물었습니다. “이만하면 됐습니까? 신부님?”그러자 실베스텔 신부는 냉정하게 고맙다고 하고는 떠나갔습니다.

 그런데 후에 이 사제는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 말씀은 그의 지금까지 살아온 삶에 대해 심판을 하는 것처럼 영혼 속에서 울리기 시작하였습니다. 후에 그는 프란치스코에게 와서 형제들 안에 받아주기를 간청하였다고 합니다.



① 물건에는 주인이 있더라.

 요한이 어느 신부님과 테니스를 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운동 준비를 전혀 하지 않고 있다가 갑자기 운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신부님은 라켓을 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운동을 하다보니 그 라켓이 정말 요한에게 잘 맞았습니다. 기분 좋게 운동을 끝내고 돌아서는데 그 신부님이 요한에게 말했습니다. “이 라켓이 주인이 따로 있는 것 같네. 열심히 운동해!”하면서 라켓을 주고 갔습니다.

가지고 있는 것이 욕심일 수 있습니다. 나에게는 필요 없지만 상대방에게는 필요한 것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단지 남의 재물을 탐내지 않는 것뿐만 아니라 나의 것도 나눠 주어야 한다는 계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것을 움켜잡는 다 하여 그것이 영원히 나의 것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 것을 내어 놓아 다른 이들이 귀하게 쓸 때, 그것이 바로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기증하여 세워 놓은 성당이나 성모상, 예수 성심상, 십자가, 또는 성가정 상 등이 얼마나 나에게는 귀한 것이 됩니까?



② 달라는 자에게는 주어라.

 예수님께서는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마태5,40)라고 말씀하십니다. 속옷을 빼앗은 사람에게 “그래 겉옷도 필요할 테니 이것마저 가지고 가거라.”라고 한다면 “얼씨구나”하면서 가지고 갈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이 말씀을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에서 따서 “주도적인 사람이 되어라”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속으로 “1818”욕을 하는 것 보다는 “그래! 원한다면 왼쪽도 대줄 수 있다. 자 때려 보거라. 네가 원한다면 겉옷까지 내주마! 자 가져가거라.”하는 것이 훨씬 더 주도적입니다. 그가 나를 때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대 주는 것이고, 그에게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주는 것입니다. 설사 그가 다시 한 대를 치더라도, 더 요구한다 하더라도 그에 맞서서 또 다른 불의를 낳느니보다는 그것을 참아 받는 것이 더 나은 일임을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이가 할 수 있는 것이 있는가 하면, 특별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이 있습니다. 가장 높은 수준의 권고는 의로움으로 가득 찬 신앙인들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덧셈을 못하는 아이에게 미분 적분을 하라고 말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는데 너는 왜 못하느냐?”라고 말하지 말고, 모든 행동은 사랑으로 지도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덕의 완성을 바란다면 신앙인들은 이 세상의 명예를 잃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③ 의로운 사람

 남의 재물을 탐내지 않는 사람은 부탁을 받으면 거절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한 분별을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사고방식과 자제력을 요구하십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나눌 줄도 알아야 하고, 베풀 줄도 알아야 합니다. 자선을 베푸는 사람, 그가 바로 의로운 사람입니다.



④ 재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

 내가 무엇에 관심을 두느냐에 따라 내 몸이 움직입니다. 이 말씀을 들으면서 생각나는 것이 있습니다. 텔레비전 광고에서 새 차를 산 사람이 계속 자기 차를 망원경으로 바라보고 흐뭇해하는 모습입니다. 다른 차가 다가오면 안절부절못하고, 비켜 가면 안도의 숨을 내쉬는 광고…, 재물이 있는 곳에 확실히 마음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아시고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재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먹거나 녹이 슬어 못쓰게 되며 도둑이 뚫고 들어 와 훔쳐 간다. 그러므로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라. 거기서는 좀먹거나 녹슬어 못쓰게 되는 일도 없고 도둑이 뚫고 들어 와 훔쳐 가지도 못한다(마태6,19-20).



 예수님 시대의 재산이라고 하면 직접적인 사용물, 예를 들면 밀, 포도주, 기름, 의복, 옷감, 주단, 보석, 장식품등을 말했습니다. 특히 큰 부자가 되면 금은 같은 귀중품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을 조심스럽게 창고에 쌓아 두었습니다. 그런데 제 아무리 조심스럽게 쌓아 둔다 하더라도 안으로는 좀먹거나 녹이 쓸어 못쓰게 될 것이며, 외부로부터는 도둑이 훔쳐갈 수도 있습니다. 당시의 팔레스티나인들의 집들은 대개 진흙이나 벽돌로 지었기 때문에 교활한 도둑들이 담이나 지붕에 구멍을 뚫고 침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었습니다.



 가장 확실한 금고는 어디일까요? 요즘은 은행에도 돈을 마음 놓고 넣어 둘 수가 없습니다. 집안 깊숙이 숨겨 둔다 하더라도 귀신같은 도둑들의 눈길을 피할 수도 없습니다. 몰래 훔쳐가는 것도 아니고 인명을 살상하면서까지 빼앗아 갑니다.



 예수님께서는 재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나만을 위해서 쓰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쓰라고, 도움이 필요로 한 단체들이 많이 있다고…, 이 계명을 지키면서 매월 얼마씩 도움이 필요로 하는 곳에 후원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⑤ 황금 항아리 이야기

 어느 날, 사탄이 먼 길을 떠나게 되어 “자신의 황금 항아리를 어떻게 할까?”하고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동네의 구두쇠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는 성당도 안다니고, 가족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탄은 구두쇠를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네가 참으로 착하게 살아서 이것을 너에게 주노니 잘 사용하도록 하라…,”

구두쇠는 너무 기뻤습니다. 그런데 보니까 항아리에는 황금이 반밖에 차지 않았습니다. 구두쇠는 더욱 열심히 모아서 항아리를 채워가기 시작했습니다.

“……,”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난 후 사탄이 돌아왔을 때, 구두쇠는 황금 항아리를 껴안고 죽어 있었습니다. 사탄이 항아리를 보니 반밖에 없던 황금이 항아리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사탄은 흐뭇해하면서 항아리를 들고 떠나갔습니다.



 참 불쌍하지요? 그런데 그렇게 움켜쥐고 죽어 가고 있는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한번쯤은 기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의 재물을 탐내지 말라는 계명을 통하여 나를 성찰해 봅시다.

나는 남의 재물을 탐낸적이 있습니까?

내가 가진 것을 남이 가진 것과 비교하면서 자신이 가진 것을 보잘것 없는 것으로 생각한 적은 없습니까?

내가 가진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내 안에서 탐욕이 일어나서 그것을 자제하느라 고생한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중에 새로운 계명을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요한13,34)



 그런데 이 사랑은 그냥 말로만 하는 그런 사랑이 아니라 먼저 보여주시고 행하라는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대로 하라는 계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하셨기에 당신백성을 돌보셨고, 당신 백성들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조건이 있는 사랑도 아니고, 대가를 바라는 사랑도 아닙니다. 그런 사랑을 하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고, 그 사랑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를 받아들이고, 서로를 이해해 줍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형제자매들이 하느님의 계명을 잘 지킬 수 있도록 도와 줍니다. 하느님을 공경하고, 형제자매들을 사랑하고, 아껴주는 사람. 그가 바로 사랑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고, 그가 바로 고백성사의 은총을 충만히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가 바로 열매를 맺는 신앙인입니다. 신앙인은 말이 아니라 삶으로 열매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의 계명을 주시면서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13,35) 고 말씀을 하십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그 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사랑은 말이 아니라 실천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형제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습 안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반드시 드러나야 합니다.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고, 부족한 모습을 바꿔 나가려고 하는 사람. 주님 마음에 드는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 성찰과 통회와 정개를 하고 고백성사를 보는 사람. 그가 바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하는 사람입니다. 가정에서, 일터에서, 친구들과 어떤 모습으로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는지 예수님의 눈으로 나를 돌아보는 것.13) 그것이 바로 성찰입니다.



이 성찰을 통하여 나의 잘못과 허물을 반성해 봅시다. 하느님을 기쁘게 해 드리고 있는 것은 더욱 성실하고 기쁘게 수행하고, 하느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들은 과감하게 접어 봅시다.

 신앙인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느님께 온전히 모든 것을 바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가지고 하느님을 섬긴다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마음을 다한다는 것, 목숨을 다한다는 것, 정신을 다 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을 다해서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기에, 목숨을 다하여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기에, 그리고 정신을 다하여 신앙생활을 하지 못하기에 중요한 것을 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나 살아가는 것입니다. 봉사를 하다가도 냉담하고, 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돌아서고, 나 좋은 대로만 생각하고, 나 중심으로 행동하는 것. 그 이유가 바로 신앙의 본질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다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목숨을 다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리고 정신을 다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이 첫 번째 자리에 계셔야 합니다. 그분을 첫 자리에 모시면 이렇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사랑합시다. 사실 나는 나 자신에게 참 관대합니다. 이해하려고 하고, 언제나 너그럽습니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형제자매들에게 돌린다면 참 좋은 관계를 형성할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은 남을 나처럼 만들려고 하다가 포기를 합니다. 남을 있는 그대로 보아주고, 다르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나와 다른 부분은 틀리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를 판단하게 되고, 결국에는 단죄하고 멀어지게 됩니다.

 나의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내 틀을 버려야 합니다. 내 틀을 버려야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 틀을 버리지 않으면 온전히 그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또한 남을 나 자신처럼 사랑하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가 나를 존중하고, 내가 하느님께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자존감이 높아집니다. 그 자존감이 낮아지면 결국 비교하게 되고, 남이 잘되면 배 아프게 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시기 질투를 하게 됩니다. 남을 사랑하기 위해서 나 또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명심합시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참된 뜻을 이루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복음을 기쁜 소식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모든 이들을 편히 쉬게 해 주시려고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계명을 통하여 참된 신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셔서 하느님의 뜻을 이루셨고, 당신의 몸을 바쳐서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 또한 하느님을 사랑하고 내 형제자매를 사랑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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