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프란치스꼬 영성의 근본정신
4.1 가난
가난이란 무엇인가란 질문에 성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이다”라고 대답한다. 그 말인즉 가난이란 성인이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에서 발견하고, 구체적이고 실질적 생활로써 복음에서 발견하신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 생활하신 가난을 말한다.1)
4.1.1 가난의 동기
프란치스꼬는 전통적 수도 생활에서 요구했던 수덕적 생활을 위한 길로써 또는 교회 쇄신을 위한 프로그램으로써 또는 성 도미니꼬처럼 개혁적 이단 운동에 대항하여 참된 그리스챤 생활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방법으로써 주어졌던 것이 아니다. 성인에게 있어 가난은 어떤 목적을 지향한 것이 아니라 가난한 삶을 살았던 그리스도께 대한 절실한 사랑의 결과로써 주어진 것이었다.2)
회개 초기에 기사 정신에 이끌린 성인은 이른바 ‘스플레또 환시’를 통하여 가난을 자기 생의 목적과 이상으로 삼아야 한다는 계시를 받게 되지만 가난한 자, 특히 나병환자와의 입맞춤을 통해서 그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복음에서 가난한 그리스도를 발견한 후, 항상 가난을 그리스도의 삶과 그 사랑에 직결된 것으로 여겼다. 성인이 그렇게도 열렬하게 ‘가난 부인’을 사랑한 것은 하느님의 높으신 아드님의 신부이며 여왕이면서도 신랑이 이 세상을 떠난 후에 버림을 받고 멸시를 당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3)
성인에게 있어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이 되셨다”는 신비는 성 프란치스꼬의 가난의 신학적 기초이고 우선적 동기였다. 성인은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을 그분의 탄생과 수난 그리고 성체성사의 신비안에서 발견한다. 4)
4.1.2 가난에 대한 성인의 이해
가난에는 마음의 가난과 물적 가난이 있음을 성인은 직시하고 계신다. 성인에게 있어 마음의 가난은 ‘모든 선의 근원이신 하느님’체험과 직결되어 있다. 선하신 하느님이 모든 것에 앞선 절대적 주권을 가지고 있다고 보며 자연안에서 이러한 하느님의 선하심을 볼 수 있는 것이 즉 모든 것의 주권을 그 분께 양도하는 것이 마음의 가난과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성인에게 있어 모든 악습은 하느님의 주권을 부인하는 소유욕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생각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성인에게 있어서 내적 가난이란 모든 그리스챤들에게 공통적으로 요구되는 보편적인 덕행이며, 겸손과 거의 동일시되면서도 내적 욕망까지도 포함하는 완전한 이탈을 의미한다.5)
성인에게 있어 물질적 가난은 복음적 가난이 요구하는 내적 마음자세를 갖추기 위한 필수조건이었다. 이는 그 당시 시대적 배경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써 돈 때문에 무수한 인간이 탐욕과 이기심에 빠져들고, 그리하여 수많은 불목과 전쟁을 초래하고 있음을 간파하였기 때문이다.6) 여기서 한가지 유의할 점은, 성인에게 있어서 물질적 가난은 타인에 대한 강요의 원리가 아니라 자신에 대한 실천 원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는 것은 이미 마음의 가난을 해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7)
성인은 이러한 가난이 하늘 나라를 획득케 해 준다고 제 2 회칙 6, 4에서 말하고 있다.
“가난이 하늘 나라의 상속자와 왕이 되게 하고… 가난에 완전히 매달려 우리 주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에 하늘 아래서는 결코 다른 어느 것도 가지기를 원치 마십시오”
그에 의하면 가난은 ‘왕다운 위엄’이었다. 왜냐하면 애긍이란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는 표시로써, 주 그리스도께서 얻어주신 가난한 자의 유산이며 권리이기 때문이다. 실상 후하게 주는 분이신 하느님으로부터 프란치스꼬가 받은 완전한 가난에 대한 사랑은 그를 정신적으로 부유하게 자라게 한 특별한 특권을 이루고 있다.8) 그에게 있어서 이 가난은, 보나벤뚜라가 말하는 대로, ‘복음의 진주’9)였다.
성인은 “하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해 주는 가난의 탁월성을 깊이 인식하였기에, 가난을 자기의 신부로 맞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상 성 프란치스꼬의 가난 이해에 있어서 탁월함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가난을 통한 복음적 완덕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였다는 것이다. 가난은 하늘나라를 획득하기 위한 가장 손쉬운 길이다. 그래서 완덕에 이른 무수한 성인 성녀들이 비록 그 중심되는 방법은 각자 다를 지라도 가난이 기초되지 않았던 분들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프란치스꼬 성인이 여타의 성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 가난이 복음적 완덕의 핵심에 있다는 것이다.
4.2 겸손 – 가난의 자매
성인에게 있어서 겸손은 내적인 가난, 마음의 가난과 거의 동일시된다. 참된 겸손이란 억지로 자기 자신을 억제하고 낮추려고 하는 행동에 있지 않고 단순하게 진리앞에 서서, 하느님이 보시는 대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10)
또한 겸손은 ‘주님의 영’을 지니고 있는 가의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겸손은 자신을 낮추는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남을 존중하는 데 있다. 겸손은 주의 정신에 순명하는 사람이 그 영의 열매로 얻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겸손은 하느님께 자리를 비워 드리는 것이다.
ꡔ프란치스꼬의 잔 꽃송이ꡕ 전기 작가는 “성 프란치스꼬는 겸손 그 자체이며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찾아 일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성 프란치스꼬는 태도에서 겸손하였으며, 의견에서는 더욱 겸허하였고, 평판 앞에서는 가장 겸허하였다. 이 하느님의 왕자는 보잘 것 없는 사람중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었기에, 이 작음이라는 가장 반짝이는 보석 이외에는 윗사람 같아 보이는 것이 없었다. … 오만스런 말투가 그의 입에는 없었고, 과시하는 듯한 자세가 없었으며, 행동에 겉치레라곤 전혀 없었다.”11)
이러한 가난과 겸손을 포괄하는 단어가 있다면 그것은 ‘Minoritas\'(작음)이다. 프란치스꼬는 이 Minoritas와 Fraternitas(형제애)위에 ‘작은 형제회’를 설립코자 하였던 것이다. Minoritas의 구성요소가 ‘가난과 겸손’이며, Fraternitas의 구성요소가 ‘사랑과 순명’이다. 따라서 가난과 겸손은 자매인 동시에 형제회의 기초가 되는 덕성이다. “인내와 겸손이 있는 곳에 불안도 흥분도 없으며,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탐욕도 욕심도 없다”는 것이 성인의 지론이다.
4.3 단순성 – 가난한 자의 지혜
단순성이란 우매함과 무식함을 뜻하지 않는다. 단순성은 말하자면 하느님의 은총이다. 프란치스꼬는 천성이라기보다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단순성의 덕을 지녔다고 한다. 단순성은 사람들 앞에서도 하느님 앞에서와 같이 자기를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행동이다. 여기에 비해 겸손은 사람이 있는 그대로 자기를 과장하지 않는 생각이다. 따라서 단순성은 우매와 무지가 아니며 지혜의 자매로써 겸손과 같은 차원의 덕행이다. 또한 단순성은 이중성과 반대된다. 단순성은 하느님을 직관하는 길이다. 단순성은 지혜로운 자를 부끄럽게 하며, 자기의 흠을 개의치 않고 하느님의 무한한 아름다움에 쏠리게 하여 직접 하느님을 뵈옵도록 인도한다.
그렇기에 성인은 은총의 딸이요, 슬기의 자매이며, 정의의 어머니인 거룩한 단순성을 좋아하였다. … 단순성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자랑하고 악행을 할 줄 모르며 악한 말을 할 줄을 모른다. 단순성은 자신을 반성하기 때문에 아무도 단죄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권리를 탐하지 않으며 더 나은 사람에게 그것을 양보한다. … 성인은 배운 형제들이나 배우지 못한 형제들에게나 이 덕을 요구하였고 이것을 지혜와 반대되는 덕으로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지혜의 참다운 자매로 보았다. 그리고 그는 이 덕을 배우지 못한 사람들이 더 쉽게 얻고, 별 어려움 없이 사용하는 것으로 보았다.12)
그래서 성인은 자신을 Idiota, 즉 문맹자, 우둔한 자, 무식한 자로 표현한다. 이는 물론 세속에 대해 무식한 자라는 뜻이다. 프란치스꼬는 이렇게 자신을 idiota라고 함으로써 극도의 가난으로 하느님을 뵈온 후, 이제 생활양식으로 단순을 택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성인에게 있어서 단순성은 가난의 열매이며, 가난한 자의 지혜이다. 또 단순성은 겸손과 같은 차원의 덕행이며, 하느님을 직관토록 해 주는 덕행이다. 이 단순성은 가난한 자라면 누구나 손쉽게 얻을 수 있는 덕행이며, 단순하지 않는 자는 참으로 가난한 자라 할 수 없는 것이다.
4.4 기쁨 – 가난의 열매
“형제의 죄 때문에 당하는 비애와 슬픔은 … 당신과 하느님 사이의 일입니다. 주님의 신뢰심을 믿고 그분께 구원의 기쁨을 달라고 기도해 보시오. 내 앞에서는 물론 다른 사람들 앞에서도 항상 기쁨을 유지하도록 노력하십시오.”
여기서 성인은 하느님의 종의 근본 자세는 기쁨을 유지하는 것임을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구원받았다는 확신에서 오는 참 기쁨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그 기쁨을 하느님께 기도하여 얻으라고 충고하면서 주님은 영적인 기쁨을 허락하시는 분임을 명백히 하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적 가난을 사는 작은 형제들은 겉으로 슬퍼 보이거나 음울한 위선자들 같이 보이지 말고 오히려 주님과 함께 기뻐하고 명랑하며 분에 맞게 쾌활해 보이도록 성인은 권고한다. 또한 형제들은 나병환자들, 길가에서 구걸하는 사람들과 함께 지낼 때 기뻐해야 하며, 동냥을 청하는 일을 기뻐해야 한다. 왜냐하면 가난이 있는 곳에 기쁨이 있고,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탐욕도 욕심도 없기 때문이다.13) 결국 기쁨없는 가난이란 참된 의미에서의 복음적 가난이라 할 수 없다. 이렇게 성 프란치스꼬의 가난은 기쁨 속의 가난이다.
프란치스꼬의 기쁨 가운데의 복음적 가난은 부와 황금을 통해서 행복과 기쁨을 찾으려는 현대인들에게 참된 기쁨이 어디에 있는가를 제시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참된 기쁨은 자기와 가장 가까운 형제들로부터 버림받고 멸시받고 내어쫓기더라도 그것을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일 줄 아는 참으로 가난한 사람안에서만 획득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사람이 모든 일 안에서 하느님의 뜻에 매달릴 때, 그는 완전한 기쁨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결국 기쁨은 가난한 자에게 유보된 특권이며, 가난의 풍성한 열매라고 할 수 있겠다.
4.5 노동과 애긍 – 가난한 자의 생활 양식
대수도원 생활의 전통에서 노동의 가치는 오직 수덕적 이익에 있었다. 즉 한가함을 피하고 유혹을 이기기 위한 가치로서 노동을 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록 개인적이거나 혹은 사회적인 목적없이 행해진 노동도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었다. 성인은 이러한 수도원의 영성에 영향을 받았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는 회칙에서 “ ‘네가 노동에 몰두해 있는 것을 마귀가 보게 항상 옳은 노동에 종사하라’고 적혀 있듯이, 모든 형제들은 땀흘려 노동하도록 힘 쓸 것입니다. 또 다른 곳에는 ‘한가함은 영혼의 원수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종들은 기도나 어떤 올바른 노동에 항상 종사해야 합니다.”14)라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도 그는 동시대인들보다 더욱 복음적이고 더욱 현대적인 통찰을 가지고 있었다. 형제들의 노동은, 형제애와 작음이라는 덕성의 기능으로 제시되고 있다. 노동은 작은 형제들이 사람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정상적인 봉사이다. 그리고 손수 노동하는 것이 종들에게 더 적합한 것이기 때문에, 그는 남의 집에서 봉사하거나 노동할 때, 감독관이나 관리인이 되지 말고, 주 책임을 맡지 말라고 하면서, 오히려 작은 자가 되고 모든 이에게 복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렇게 성인은 노동을 가난 및 겸손과 연결시키고 있다. 어떤 노동을 하든 가난하고 겸손한 자답게 하라는 것이다.
성인은 노동의 필요성을 단순히 수덕적 의미로서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노동의 제 일차적인 목적으로 생계 유지 수단이다. 그렇지만 성인은 노동의 댓가로서 돈을 받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노동의 보수로서 받은 것만으로는 생활하기에 항상 충분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병환자들을 위해서도 양식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보충 방법으로 제시된 것이 ‘애긍’이다. 그러나 성인이 애긍을 택한 주요 동기는 극빈에 처해 있는 사람들과 같이 굴욕을 체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성인은 생계유지 수단으로 애긍을 택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으며, 노동을 하지 않는 거지 생활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그는 노동을 하지 않고 한가롭게 먹고 놀기만 하는 형제들을 힐책하며 ‘파리 형제’라고 부른다. 그래서 성인은 필요 이상으로 애긍을 청하는 것은 다른 가난한 사람들의 유산을 빼앗는 것이 되며, 또한 애긍으로 받은 것은 모든 가난한 사람들의 유산이기 때문에, 그들과 은혜로이 나눌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친다.15)
프란치스꼬에게 있어서 노동은 가난한 자의 생활 양식이며, 가난한 자들과 함께 가난한 자가 되기 위한 방법이다. 그리고 가난한 자의 자세로 노동을 하지 않을 때, 그 노동은 아무 의미도 없는 노동이 되고 만다. 그러나 노동의 종류나 노동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기도와 신심의 정신을 잃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해야 한다. 그러므로 지나친 노동 때문에 기도와 신심에 장애가 된다면 그 노동은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프란치스꼬의 생각이다. 왜냐하면 세속을 떠난 사람으로서 해야 할 최고의 노동은 오로지 주님의 뜻을 따르고 그분을 기쁘게 해 드리는 노동이다. 주님이 무엇보다도 요구하시는 일, 즉 주 하느님을 깨끗한 마음과 순수한 정신으로 섬기고 사랑하며 존경하고 흠숭하는 일이기 때문이다.16)
4.6 순명 – 내적 가난의 극치
오늘날 순명 개념은 예전에 비해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순명이 자기부정, 극기, 장상안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장상의 명령에 대한 절대적 복종, 맹종, 십자가 등을 의미한 반면, 오늘날에 와서는 상담, 대화, 보조, 횡적 관계로 변화되어, 책임과 자유를 기초로하는 봉사, 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장상, 한 사람 한 사람의 권리 등이 강조되고 있다.
성인에게 있어서 순명은 수도원의 규칙생활이 요구하거나 공동생활의 질서가 요구하는 조건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하는 회개생활이 요구하는 조건이다. 성령의 작용에 마음을 열어 성소에 충실히 응답하려는 사람은 필수적으로 순명생활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은 수도회에 입회하는 것과 수도회에 받아들인다는 말을 “순명생활로 받아 들인다”는 말로 표현한다. 하느님과 인간에게 순명하지 않고, 또 자기 자신에서의 이탈없이 참된 그리스도교적 공동체는 불가능 한 것이다. 모든 공동체, 특히 교회 내의 공동체에 있어서 가장 큰 적은 각 개인의 자애심이다. 그래서 성인은 “하느님과 이웃을 흡족케하는 순명이야 말로 사랑의 순명”이라고 가르친다. 순명하는 형제가 형제적 공동체를 더욱 굳게 뭉치게 하는 반면, 순명치 않는 형제는 형제적 공동체를 파괴시키고, 자기 자신도 그 자애심 때문에 공동체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17)
프란치스꼬에 의하면 순명치 않는 사람은 살인자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나쁜 표양으로 많은 영혼들을 죽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프란치스꼬의 순명 개념은 형제적 봉사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성인에 의하면, 순명과 사랑은 가난과 겸손과 함께 자매지간이다. 거룩한 사랑이 악마의 온갖 유혹과 온갖 육적인 유혹과 온갖 육적인 두려움을 부끄럽게 하는 덕행이라면, 거룩한 순명은 온갖 육신적이며 육적인 원의를 부끄럽게 하며, 육이 영에 순명하고 자기 형제에게 순명하도록 육신을 제어하는 덕행이다.
프란치스꼬의 순명 개념의 핵심은 순명이 거룩한 자유라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을 자기의 뜻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을 위해 완전히 자유롭게 된다. 순명과 자유 – 이 두 요소는 사랑을 목적으로 할 때 참 크리스챤 차원에서 조화를 이루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순명은 가난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프란치스꼬에 의하면, 순명이란 내적인 가난의 불가피한 요소이며, 그 극치이다. 아니, 바로 가장 근본적이고 어려운 가난이다. 재산을 포기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장 깊은데서 도사리고 있는 자기 의지를 포기하는 것은 훨씬 더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과 일치하는데 가장 필요한 포기이다. 먼저 자신을 비워야 그 안에 하느님의 사랑이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완전한 순명으로 인하여 이루어진다.18)
4.7 가난과 사랑 – 하느님의 속성
성인에 의하면,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가 당하는 해를 마음 아파하지 않고, 오히려 그 형제의 영혼에 자리잡게 된 죄를 보고 하느님의 사랑 때문에 가슴 태우며, 행동으로써 그에게 사랑을 보여 주는 사람이다.19) 따라서 이렇게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가난한 사람만이 참으로 사랑할 수 있고,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만이 참으로 가난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가난은 조건없는 무사무욕의 사랑에 뿌리박고 있는 그리스도교적 형제애의 길이다. 또한 가난은 사랑과 반대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앓는 형제들에게 봉사하는 그 사랑안에서 가난의 풍요함이 드러난다. 그래서 성인은 “어머니가 자기 육신의 자녀를 기르고 사랑한다면 각자는 자기 영신의 형제들을 한층 더 사랑하고 길러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면서 “ 형제들 중에 누가 병이 나면 다른 형제들은 자기 자신을 돌보아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그에게 봉사해야 한다”20)고 가르친다. 이러한 맥락에서 성인은 그렇게도 가난에 철저하였으면서도, 특별히 앓는 형제들을 위해서는 사랑 때문에 엄격한 가난을 철회한다. 돈을 절대로 받지 말라고 하면서도 앓는 형제들을 위한 부득이한 경우라면 조심해서 받으라고 한다. 또 앓는 형제가 있으면 모든 일을 제쳐놓고 그를 잠시라도 떠나지 말고 돌보아 주라고 한다. 또 앓는 형제들에게는 단식재를 지켜야 할 의무가 면제된다. 성인이 이렇게 앓는 형제들에게 특혜를 베푸는 것은, 가난은 참된 사랑을 통해서 더욱 더 풍요로와지고 완성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사랑없이 가난은 불가능하며, 가난한 자가 아니면 참으로 사랑 할 수 없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가난은 하늘 나라를 획득케 해주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해 준다. 성인은 가난 체험에서 사랑이신 하느님을 체험했고, 바로 가난 안에 하느님이 현존하심을 체험했으며, 가난은 곧 하느님이라는 등식이 마음 안에 성립하였기에 그렇게도 가난을 철저히 살고 가난에 매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 친히 가난을 택하셨고, 그럼으로써 가난을 당신 속성으로 드러내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조금 비약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프란치스꼬에게 있어서 하느님은 바로 가난이시다.
4.8 가난 이해의 탁월함에 대한 결론
8프란치스꼬의 가난 이해의 탁월함은 가난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길을 제시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난 이상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성인처럼 무엇보다도 각자의 신앙체험, 하느님 체험을 강화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생생하고도 인격적인 하느님 체험을 통해서 하느님께서 나를 항상 이끌어 주시며, 나와 함께 역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굳게 확신할 수 있어야 하며, 그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자신을 전폭적으로 가난 이상에 던질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 가난은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전환하기가 쉽상이다. 가난의 관점에서 ‘해방신학’의 위험성이 있다면 그것은 막시즘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이러한 하느님 체험의 결여에 있지 않을까 한다.
프란치스꼬처럼 확고한 하느님 체험을 통해서만 가난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획득케 해 주는 구원의 가장 손쉬운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성인은 기쁨 가운데 가난을 삶으로써 “평화의 도구”가 되었으며 사회와 교회가 점진적으로 개혁될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성인이 이해하는 바대로 참된 가난을 살 때, 오늘날의 사회와 교회도 하느님 나라를 향해 보다 올바른 여정을 걸을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