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
“가난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프란치스꼬 성인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이다.”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생활에서 가난은 “모든 점에 있어서 우리와 똑같은 신분을 취하신” 야훼의 종의 비하 및 겸손하심과 일치한다. 그래서 성인은 이 두 요소를 함께 연결시켜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과 겸손”이라고 말한다.1)
3.4.1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 세상에서 스스로 가난한 사람이 되셨다.(제 2회칙 6,3)
프란치스꼬의 가난의 동기는 가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이다. 그러므로 가난이란 완전히 사랑하기 위한 방법이 아니라, 가난하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사랑의 결과이다.
프란치스꼬는 “신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가난의 의미를 분명히 밝힌다. “하늘에 계신 지존하신 아버지께서는 당신의 이 위대하고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말씀이 거룩하고 영화로운 동정녀 마리아의 태중에 임하시리라고… 연약한 우리 인간과 똑같이 육신을 취하셨습니다. 그분은 부요하셨지만 당신의 어머니이신 지극히 복되신 동정녀와 같이 이 세상에서 그 무엇보다 가난을 택하기를 원하셨습니다.”2)
그러므로 “주님이 우리를 위해서 이 세상에서 가난한 사람이 되셨다”는 이 신비는 성 프란치스꼬의 가난의 신학적 기초이고 첫째가는 동기이다. 성인은 주님의 생애 중 그분의 비하와 겸손을 드러내는 가난을 무엇보다도 “베들레헴”과 “갈바리아”의 신비에서 발견한다. 프란치스꼬는 “베들레헴”에서 가난한 동정녀의 궁핍한 모습과 말씀이 이 세상에 들어오시는 비참한 모습을 보았고, “갈바리아”에서는 가난이 구세주를 십자가상까지 동반하고 완전한 비하에 이르기까지 따르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가난과 겸손의 신비가 이 세상에서 성체성사 안에서 지속되고 있음을 확신한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보십시오! 그분은 어좌에서 동정녀의 태중으로 오신 때와 같이 매일 당신 자신을 낮추십니다. 매일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우리에게로 오십니다.”3)
3.4.2 소유 없는 생활
성 프란치스꼬는 모든 창조물을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에 속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하느님이 이 세상에서 아름답고 좋으며 쓸모 있는 것을 만드신 이유는 인간이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께 찬미와 사랑의 선물을 돌려 드릴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인간이 피조물을 남용하여 그것을 자기 것인 양 소유할 때 죄를 범하는 것이다. 죄란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을 죄를 범할 때 자기 안이나 밖에 있는 것을 자기 것인 양 생각하고 그것들을 소유하려고 한다. 그리하여 이러한 “소유” 의식은 하느님과의 친교의 길을 막는 동시에 다른 인간 공동체에 대하여도 나눔의 길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모든 좋은 것을 주 하느님께 돌려 드리는 종은 복됩니다. 실상 어떤 것이라도 자신을 위해 남겨두는 사람은 자기 주 하느님의 돈을 자기 안에 묻어두는 사람이 되며 가진 줄 알고 있는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 4)
그러므로 성인은 모든 불법적인 소유가 죄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심지어 다른 사람의 죄 때문에 흥분하는 일도 죄다. 왜냐하면 이것으로써 인간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범하기 때문이다.
“누가 어떤 죄를 지을 경우라도 하느님의 종은 이 죄를 보고 사랑이 아닌 다른 이유로 흥분하거나 분개하면 그 죄를 판단할 하느님의 권한을 자기 것으로 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 때문에도 분개하거나 훙분하지 않는 하느님의 종은 진정코 아무 소유도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돌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리면서 자기에게는 아무 것도 남겨두지 않는 사람은 복됩니다.”5)
따라서 “소유 없이”라는 표현은 오로지 물질적 재물에만 국한되지 않고, 영적인 선까지 포함한 완전한 이탈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은총인 영적 선물마저 올바르지 않게 소유하고 남용할 수 있다. 이 선물들을 자랑거리로 삼거나 영예와 인기를 얻기 위해서 사용하거나 가볍게 외부로 드러낼 때에는 남용하는 것이 된다. 또한 공동선을 위해 주어진 이 선물들을 자기 욕심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도 남용이다. 이렇게 할 때, 사람은 주님의 재화를 훔치는 죄를 범한다고 성인은 생각하였다.
학식을 갖는다는 것도 완전한 포기의 정신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 그래서 공부가 내적 가난에 해가 될까봐 성인은 배운 형제들에게 특별히 포기의 정신을 요구하고 “소유 없이” 살라고 경고하였다. 설교하는 형제들에게는 특별히 내적 가난이 요구되었다. 설교의 성과를 자랑하는 설교자는 설교직을 소유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이같은 내적 가난이 없는 곳에는 겸손도 없다 또한 봉사도 사랑도 없다. 특별히 장상들은 형제들에 대한 봉사와 공익을 위한 봉사자로서 자기들을 위하여 아무 것도 소유하지 말아야 한다. 성인은 장상직을 자기의 것으로 하거나 그 직책에서 면직된데 대하여 흥분하는 장상을 자기를 위하여 재산을 모은 사람과 비교한다.
“장상직에 대해 명예스럽게 생각하려거는 마치 형제들의 발을 씻어주는 직책을 위임받은 데 대해 명예스럽게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발을 씻어 주는 직책이 면직되는데 대해 흥분하는 이상으로, 장상직이 면직될 때 흥분한다면 자기 영혼의 파멸을 향해 유다처럼 자기 돈주머니를 챙기는 것이 됩니다.”6)
이렇게 볼 때, “형제들은 아무 것도 자기 소유로 하지 말것”이라는 성인의 외적 가난은, 먼저 정신적 가난에 그 근거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4.3 이 세상에서 순례자나 나그네 같이 (제 2회칙 6장)
가난에 대한 성 프란치스꼬의 가르침에 따르면 프란치스칸 생활양식이 가져오는 자연적 결과는 생계를 위하여 안전이 없는 생활이다.
그런데 13세기 사회는 시민들이 스스로 경제적, 사회적 주도권을 잡고 물질적 세상이 발전하는 반면에 종교적 관심을 잃어가는 속화되어 가는 사회였다. 이러한 사회 안에서 동냥을 하고 사도적이며 가난한 형제회의 생활은 주님의 산상설교 말씀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따라서 이러한 공동체는 물질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지적으로 안정되고 뿌리 박힌 생활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성인의 생각에 의하면, 가난은 개인으로나 공동으로 절대적이라야 하고, 무엇보다도 가난을 공동으로 지키는 것이 중요하였다.
프란치스꼬 성인은, 이제는 봉건주의적인 장원이 아니라, 산업과 공업을 위주로 하는 새로운 경제 사회 구조에서 발생하는 비복음적 요소를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회적 권력과 돈에 대한 애착심이었다.
“나는 모든 형제들에게 단호히 명합니다. 형제들은 직접 혹은 간접으로 금전이나 돈을 절대로 받지마십시오”7)
돈이라는 이 비복음적 요소 앞에서 성인은 돈없이 살 수 있는 공동체를 입증한 것이다.
이제 새로운 수도자들에게 있어서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권력을 누릴 위험은 대수도원 시대와 같이 부동산의 증가와 소작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유동자본 즉, 돈에 있었다. 그래서 프란치스꼬는 순례자나 나그네인 작은 형제들을 위한 생계 수단으로, 손수 하는 일과 사람들을 위한 봉사(애긍)을 택하였다. 이렇게 살아야만 형제들이 복음을 실행하고 선포할 자유를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3.4.4 가난하고 겸손하게 주님을 섬기는 작은 형제 (Minoritas)
가난 자체도 잘못하면 소유의 대상이 되어 오히려 교만으로 변한다. 프란치스꼬 성인도 한때 자기 수도회를 “작은 가난한 자의 회”라고 부르려 했지만 교만의 위험을 피하고 가난을 더 잘 보장하며 가난을 Fraternitas 와 Minoritas 의 기초 위헤 세우기 위해서 “작은 형제회”라고 하였다. “Minoritas”란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의 자세로서, 다른 사람들을 자기 자신보다 더 높은 사람으로 여기고 존경할만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자세이다.
Paupreitas-Minoritas는 무엇보다도 높으신 하느님앞에서 인간이 갖추어야 할 마땅한 자세이다. 성인은 인간의 노력과 자신감 위에 성덕의 길을 세우지 않는다. 성인은 형제회에 보낸 편지에서 자기 자신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나는 나의 큰 탓으로 많은 점에서 죄를 지었습니다… 이는 애가 게을러서도 그랬고 병약해서도 그랬고 무지하고 배루지 못해서도 그랬습니다.”8)
참된 겸손이란 억지로 자기 자신을 억제하고 낮추려고 하는 행동에 있지 않고, 단순하게 진리 앞에 서서 하느님이 우리를 보시는 대로,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겸손은 자기 자신을 낮추기 보다도 남을 존경하는데 있으며 하느님께 자리를 비워드리는 것이다.
3.4.5 가난과 노동
일에 관한 성 프란치스꼬의 가르침은 제 1회칙 7장, “봉사와 일하는 자세”에 나온다. 형제들의 일은 형제적 공동체와 작은 자의 정신과 관련되어 있다.
형제들은 일을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형제들의 일반적이고 주된 방법은 일이다. 그리고 회칙이 말하는 일은 육체적 일이기에 형제들은 부자들의 집에서 일을 할 때 책임을 맡거나 관리인이 되지 말고 노예들이 일을 하듯이 “작은 자”답게 모든 사람에게 예속된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제 7장에서 형제들이 기술적 일을 하는 것이 허락되어 있다. “아는 기술이 구령에 해가 되지 않고 그것을 올바르게 쓸 수 있다면 그 기술을 사용할 것입니다.” 그리고 형제들이 수도원에 들어올 때 “각자의 기술에 필요한 공구나 연장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제 8장에서는 해서는 안될 일을 열거한 후에 “형제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우리 생활에 반대되지 않는 봉사를 할 수 있습니다.”라고 덧붙인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대수도원들과는 달리 작은 형제들의 공동체는 자기 생계비를 위해서 수도원 내에서나 밖에서 생산 조직체를 설치하지 않았다.
그런데 일의 보수로서 받은 것만으로는 생활하기에 항상 충분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나병환자들을 위해서도 양식을 마련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보충방법으로 애긍을 해야 했다. 성인은 애긍을 하러 다니는 것도 일에 못지 않게 가치가 높은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동냥을 얻는데 수고하는 형제들은 큰 보상을 받을 것이다.”9)라고 성인은 언급하고 있다.
3.4.6 주님의 식탁
모든 재화의 소유권은 하느님께만 있고, 사람들이 지상 재화를 빌려서 쓰는 셈이다. 그래서 만약에 다른 사람이 극빈 중에 있으면 인간은 자기 재물을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권한이 없으며, 극빈자를 도와 주지 않을 때 하느님의 재물을 훔치는 죄를 범한다. 그래서 프란치스꼬 성인은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을 만날 때 그에게 애긍 시사하였다.
애긍이란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는 결과로서, 가난한 자의 권리이다. 생활을 보장해 주는 것을 포기한다는 것은 미친 사람의 짓이 아니다. 다만 이것은 하늘의 아버지의 무한하신 섭리와 사랑을 믿는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탁발”의 생활양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의 신비 안에서 그 완전한 뜻을 가지게 된다.
“모든 형제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과 가난을 따르도록 힘쓸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하면 동냥하러 다닐 것입니다. 부끄러워하지 말고, 오히려 전능하시고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또한 주님 뿐만 아니라 복되신 동정녀도 제자들도 가난하셨고 나그네 되셨으며 동냥으로 사셨다는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10)
그렇지만 성인은 생활하기 위해서 애긍을 주요 방법으로 택한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일을 하지 않는 거지 생활은 원치 않았다. 처음에는 형제들에게 애긍을 청하는 것이 시련의 방법이 되었지만, 그들이 잘 알려지고 존경을 받게 될 때 오히려 애긍의 방법은 편하게 살 수 있는 비복음적 증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애긍은 일의 보수로서 충분하지 않을 때 취하는 비상시의 방법이었다. 필요 이상으로 애긍을 청하는 것은 다른 가난한 사람들의 유산을 빼앗아 가는 것이 되며, 또한 애긍으로 받은 것은 모든 가난한 사람들의 유산이기 때문에 그들과 기꺼이 나눌 줄 알아야 한다고 성인은 가르쳤다.11)
3.4.7 하늘나라의 상속자와 왕이 되게 하는 가난의 탁월성
성인은 가난이 천상적 유산을 보장해 주는 “약속이며 보증”이라고 한다. 프란치스꼬는 이러한 말씀으로 천국에서 누리게 될 영광만을 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약속대로 마음으로 가난한 사람이 이미 이 지상에서 하느님의 나라에 속하게 하는 권리를 획득하고 있으며 왕적 지위를 지니고있음을 믿었다. 그래서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이… 나의 형제 여러분을 하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하는 지극히 높은 가난의 탁월성입니다”12)
성인은 주님께서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재물을 ‘임시로 맡기셨지만’ 당신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린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유산’을 마련하셨다고 말하곤 하였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주님의 식탁”과, 저승에서 “영원한 유산”을 누릴 수 있는 확신은 프란치스꼬에게 이 세상 걱정에서 해방, 마음의 자유와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3.5 단순성과 기쁨의 길
3.5.1 순수하고 거룩한 단순성
“단순성” 혹은 “순진함”이란 인간의 본성이나 성격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하나의 영신적 자세이다. 성인은 특별히 단순성과 지혜가 같이 있을 때 형제들의 공동생활에서 많은 문제가 해결되리라고 믿었다. 지혜와 소박함, 현명과 단순성이 형제들 가운데 꽃 필 때, 배운 사람과 배우지 못한 사람이 서로 사랑으로 뭉쳐 살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 이야기 할 때, 자기의 모든 것을 드러내지 않고, 또한 함부로 입을 가볍게 놀리지 않으면서, 오히려 말해야 할 것과 대답해야 할 것을 미리 생각하는 그런 종은 복됩니다.”13)
또한 단순함은 “솔직함”을 뜻한다. 성인은 언제나 거룩한 단순성에 유의하였다. 그래서 프란치스꼬는 남들에게 자기의 실생활과 약점에 대하여 아무 것도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단순성은 또한 일치를 뜻한다. 프란치스꼬는 성삼의 신비를 묵상할 때 그의 단순한 일치를 강조한다. 단순성은 하느님 자체, 신의 본성이다. 그래서 사람이 그 단순한 일치에 도달하려면 거룩한 복음의 완덕을 따라 순수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밖에 없음을 성인은 잘 인식하고 있었다.
성인은 자신을 중심으로 모여든 형제들과 함께 놀라운 단순한 생활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성공하였다. 형제들의 상호 유대에서의 단순성, 형제들이 서로 마음을 여는데에서의 단순성, 명령을 내릴 때나 빨리 순명할 때의 단순성, 서로 외적으로 사랑을 나타낼 때의 단순성, 모든 생활에 있어서 거짓이 없고 위선이 없는 단순성의 생활이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성 프란치스꼬를 중심으로 모여든 첫 형제들의 생활 양식은 책임과 질서가 있는 생활보다는 어린이들의 순진한 장난이나 놀이와 같았다.
3.5.2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
“기쁨과 더불어 가난이 있는 곳에 탐욕도 욕심도 없습니다.”14) 세상의 근심 걱정에서 해방된방된 사람은 삶의 기쁨을 누린다. 가난만을 주장하며 우울하고 비통한 이상(理想)을 제시한 당대의 개혁자들과는 달리, 성 프란치스꼬는 가난과 기쁨을 함께 연결시켰다.
흔히 사람들은 부유함을 행복에, 가난을 불행과 연결시키지만, 감각과 영적인 것이 하나가 될 때 기쁨이 솟아온다. 그래서 인간이 간절히 바라는 기쁨은 주님의 기쁨에 들어갈 때 이루어진다.
성격상으로 명랑한 프란치스꼬는 무엇보다도 해방적 이탈로 인하여 기쁨을 누렸고, 기쁨의 원천의 비밀을 발견은 그는 자기 주변에 그 기쁨을 뿌렸다.
복음적 이상을 깊은 수준에서 살고 증거하기 위해서 순수한 기쁨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성 프란치스꼬는 제 1회칙에서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어디에 있든지 또 어느 곳에서 만나든지 형제들은… 겉으로 슬펴보이거나 음울한 위선자들 같이 보이지 말 것을 명심할 것이며 오히려 주님과 함께 기뻐하고 명랑하며 분에 맞게 쾌활해 보여야 할 것입니다.”15)
그래서 형제들이 가난하고 겸손하며 모든 사람들에게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내적으로 명랑해야 하고 세계에 기쁨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사도가 되기를 성인은 원하였다.
성 프란치스꼬는 우울함을 “바빌론적 악”이라고 부르고 이 병에 걸리는 형제는 마귀의 올가미에 빠져 유혹에 떨어지게 된다고 가르쳤다.
이렇게 성인이 제자들을 교육시키는 데 있어서, 기쁨은 뺄 수 없는 요소였다. 성인은 참된 기쁨과 거짓 기쁨을 구별하였다. 가장 완전하고 참된 기쁨은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과 충성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데 있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고통을 제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주 고통으로 정화되고 양육되는 것이다.
3.6 모든 피조물에게 열려 있는 마음
프란치스꼬 성인에게는 모든 피조물이 사랑스럽게 보였다. 성인은 시인이었고 모든 짐승과 다른 피조물과 쉽게 마음을 통했다. 성인은 동물만이 아니라, 식물이나 감각이 없는 다른 피조물에 대해서도 동정과 사랑을 느꼈다. 그래서 누가 이것들을 조심없이 다룰 때 크게 꾸짖었다. 이와같은 피조물에 대한 성인의 사랑은 그의 성격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도 그의 강한 신앙심에서 나온다. 성인에겐 모든 피조물이 하느님의 권능을 드러내고 있는 표징들이며, 사람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도록 만들어진 도구들이었다.
하느님 아버지 안에서 사람, 동물, 식물, 광물이 다 한가족을 이루고 있다. 성인이 자매 새들이나 자매 꽃들에게 혹은 자매 물, 자매 바람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주님을 찬양하도록 권할 때 이러한 말은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인은 피조물의 말을 빌려서 그리고 대신해서 창조주를 찬양하는 것이다. 또한 성인은 피조물 안에서 신앙의 눈으로 직감적으로 항상 창조물의 알파요 오메가이시며 육화되신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았다.
한편, 모든 피조물에 대한 성 프란치스꼬의 사랑을 언급할 때 「태양의 노래」를 뺄 수 없다. 그런데 이 노래는, 흔히 우리가 상상하듯이, 빛나는 아침, 자연의 미가 오관을 충만히 만족시키는 한 아침, 태양의 빛으로 모든 자연이 반짝이는 한 아침에 시인인 성인이 자연을 감상하면서 자연의 미에 사로잡혀 하느님을 찬양하는 마음에서 자연적으로 우러나, 성인의 몸과 마음이 즐거움에 가득찬 상태에서 불려진 것이 아니다.
성인이 오상(五傷)을 받고 죽을 날이 멀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을 때, 그는 많은 병과 고통에 신음하는 자기 육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있었다. 눈도 반쯤 멀어 성인은 형제인 태양의 빛을 못보고 있었다. 오히려 태양의 빛이 그의 눈에게 아픔을 주었고, 주위의 소리, 피조물의 소리는 그를 괴롭혔다. 프란치스꼬 성인 눈의 아픔 때문에 50일 동안 쉴 수도 없었고 어느날 하루 밤새도록 정신적, 육체적 고통 때문에 괴로움을 당했다. 바로 이 고통스런 밤을 지내고 나서 형제들을 불러모은 후에, 성인이 사랑과 기쁨의 무아경 속에서 「태양의 노래」를 부른 것이다.
즉, 성인은 괴로움과 고통을, 주님의 영광을 묵상함으로써 잊었던 것인데, 그 결과가 바로 「태양의 노래」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