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십자가의 성요한의 생애1)
십자가의 성요한은 1542년 스페인의 아빌라 근처의 조그만 마을 폰티베로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가문 출신이었지만 가난한 어머니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집안에 권고에 따르지 않고, 현재의 안정되고 평안한 생활을 포기함에 따라 받게 되는 어려움을 무릅쓰고 충실과 희생의 영웅적인 사랑을 선택하였다. 어린 요한은 어머니로부터 어머니와의 결혼을 위해 물질적 부유와 가문의 사회적 명성 등을 모두 버렸던 아버지에 들으면서 성장했다. 이로써 요한은 모든 것 위에 사랑을 선택한 결과에 대해서 직접 알게 되었고 사랑의 우선적인 가치에 대해서도 배우게 되었다. 후에 그가 성장하여 하느님과의 사랑에 빠졌을 때 요한은 오직 사랑만이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랑만이 문제가 되어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그 길을 따라갔던 것이다. 직물업으로 어렵게 가계를 꾸려나가던 아버지가 건강을 해치고 병고에 시달리게된 아버지를 2년간 간호해 드린 경험이 요한에게 깊은 인상으로 남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어머니는 생활을 위해 무역도시인 메디나 델 캄포로 이사하였으나 가난은 계속되었다.일찍부터 고생을 하며 자라난 청년 요한은 이 도시의 ‘라 부바’라는 병원에서 간호원으로 일하게 되어 인격 형성기의 젊은 시절에 육체적․심리적․사회적으로 고통받는 많은 환자들로부터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다. 충실히 일하는 요한에게 병원장 알바레즈는 요한이 예수회 계통 학교에서 4년동안(1559-63) 문법․수사학․형이상학 등을 공부할 수 있도록 해 주어 당시 스콜라학문의 토미즘을 접할 수 있었다.
요한이 21살이 되자 그 동안 요한을 눈여겨보던 병원장은 요한이 병원의 원목으로 서품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요한은 병원 원목이 되어 가족들에게 경제적 도움을 줄 수 있는 그 모든 안정된 것을 포기한 뒤 메디나 델 캄포에 있는 ‘성녀 안나 수도원’이라는 가르멜 수도회에 입회하였다.입회 후 1년의 수련기간 중 요한은 공동체의 규율인 금육, 단식, 고행, 기도 등을 철저히 준수하며 수도생활에 정진하여 1564년 5월 21일에 수사로 서원을 발하였다. 서원 후 스페인 지적 학문의 중심지인 살라망카로 가게 된 요한은 그곳에서 철학, 신학 등 학문에 전념하였고, 당시 트리엔트 공의회에서 주요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포함된 신학적 학문의 토론장에서 교류하는 등 학문에 전념하며 하느님을 향한 생활에 열중하였다. 1567년 사제서품을 받고 첫미사를 위해 성녀 안나 수도원에 가서 개혁 수녀원을 새로이 창립하러 왔던 성녀 예수의 데레사와 만나게 된다. 요한은 데레사가 초창기의 원회규 정신으로 되돌아간 수도생활로 가르멜 수도회를 개혁하려고 하고 있으며 남자 수도회도 개혁할 것을 구상하고 있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카르투시안회로 옮길 뜻을 품고 있던 요한은 성녀 데레사의 이런 뜻에 따라 기다리기로 하고 11월에 다시 신학 공부를 위해 살라망카로 되돌아갔다. 1568년 여름, 발랴도리드에 또 하나의 개혁 수녀원을 세우기 위한 여정에 요한 수사도 동참하여 성녀 데레사가 정해준 침묵, 고독, 기도의 규칙에 따라 앞으로의 새 생활 양식을 논의하며 몇 주간의 단기 수련을 받았다. 1568년 11월 28일 마침내 초기규칙을 지키기로 선언하는 남자 개혁 수도원이 창립되었다. 이들은 매우 가난하고 검소한 생활 안에서 더욱 깊은 잠심과 단순성을 지니고 살았다. 1571년 10월 성녀 데레사는 아빌라의 강생 수녀원 원장으로 임명되자 수녀원 규율을 바로잡는 일부터 시작하였고, 요한 수사가 수녀원 고해신부로 오도록 하였다. 요한은 성녀가 원장으로 있던 2년동안 온화함과 깊은 체험적 지식으로 완덕을 향한 자기부정의 가르침을 펼치며 성녀를 도왔다. 성녀가 임기를 마치고 떠난 후에도 요한 수사는 몇 년간 더 수녀원 곁의 오두막집에 기거하면서 매일매일 강생수녀원의 수녀들을 지도하는 일로 성무를 수행해 나갔다. 그러나 요한을 개혁운동의 선구자로 여기고 있던 완화파에서는 1577년 12월 2일 수도회에 대해 반역과 불순종을 일삼으며 문제를 야기시킨다고 요한을 납치, 똘레도 수도원 골방에 감금하였다. 이 감옥과 같은 곳에서 극도의 모욕과 멸시를 받으며 생활하였다. 거기다가 하느님의 부재를 체험하면서 그의 영혼은 완전하고도 철저히 뜨거운 고뇌로 신음하며 하느님에 대한 전혀 다른 형태의 낯선 체험을 하게 된다. 이것을 ‘어두운 정화의 밤’이라고 칭할 수 있겠는데 영혼의 어둔밤을 거치면서 하느님을 만난 요한은 1578년 여름 성모몽소 승천대축일이 지난 며칠 밤에 완화파 똘레도 수도원 탈출에 성공한다. 이 후 안달루치아의 엘갈바리오 수도원 원장으로 임명되었고 ‘가르멜의 산길’과 ‘영혼의 노래’를 집필하게 된다. 그후 1579년 요한은 바에자의 신학원장으로 임명되어 그곳에서 2년간을 지냈는데 수도생활의 주요한 점은 변함없는 ‘청빈’ 그것이었다. 그는 맨발 가르멜 회원들이 생활의 중심으로 묵상기도를 해야 하고 전례가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했다. 1588년 요한은 총회에서 수석자문 및 세고비아 원장으로 임명되어 고향 까스틸리야 지방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1590년,1591년 6월 등의 총회에서 요한은 수도회 자문회에 수녀회가 예속되는 것과 총장이 수도 공동체에 대하여 지나친 법률적 조치를 취하는 점에 반대하였던 이유로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어 평수사로 돌아가게 된다. 1591년 9월초 요한 수사는 열병을 앓고 자신을 반대하는 이들의 모욕과 멸시 속에서 고통을 당하게 된다. 1591년 12월 14일 마침내 일생 동안 오해와 편견, 질시와 몰이해로 고통만 받으면서도 십자가의 예수님만을 충실히 따르며 사랑했던 예수의 열애자가 숨을 거둘게 된다.
그후 성인은 1675년 1월 15일 교황 클레멘스 10세에 의해 시복되고 1726년 12월 27일 교황 베네딕도 13세에 의해 시성, 1926년 8월 24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교회박사’로 추앙되었다.
